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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시린 달빛
정선교
(본문, 교정요망)
아무 말 없이 밥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말을 꺼내면 밥상이 무너질 것처럼 밥 먹는 데에만 열중했다. 고요한 밥 먹는 자리는 불량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의무적으로 밥을 숟가락에 떠서 입에 넣고 씹는 과정이 반복되는, 전체적으로 심심하고 매력이 없는 자리였다.
지루함을 달래려 밥을 먹으며 앞에 앉은 누나를 자세히 관찰했다. 길게 굽이치는 결을 만들어내는 머리카락과 자연스레 연결된 어깨는 세련된 라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어깨를 타고 올라와 자리 잡은 아름다운 얼굴에서 특히 까만 바둑돌 같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아기처럼 투명한 눈동자는 매혹적인 빛을 띠고 있었다.
밥을 오물거리는 입술은 적당히 두툼한 그녀는 젓가락으로 누르면 푹 꺼질 것 같았다. 콧날은 조금 야만적으로 솟아올라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강단 있는 성격으로 비추어지게 만들었다. 부정할 수 없이 보편적임을 뛰어넘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누나의 얼굴은 차가운 표정과 어울려 냉소적인 매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밥 먹는데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내 시선은 의식하지 못한 채 고개 숙이고 밥에만 열중하는 모습이 잘 조련된 동물 같았다.
밥을 다 먹고 간단하게 계획을 묻는 나의 질문에, 누나는 ‘나갈 거야' 하고 짧게 대답했다.
누나와 나는 정신적 교감은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가 고등학교로의 진학이 결정되었을 때, 그녀는 서울의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고 나타났다. 부모와 상의 끝에 누나는 서울에 집을 얻기로, 나는 기숙 대신 하숙을 하기로 결정했었다. 누나는 대학교에 가고 서울에 집을 얻은 뒤 더욱 시골을 찾는 것을 소홀히 했다. 물론 나 또한 시골을 잘 찾지 않게 되었다. 적당히 공부해가며 내 혼자만의 생활을 만끽하려 노력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요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누나만큼 모범적이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영리했고 뭐든지 금방 습득하곤 했다. 특히 학교 성적을 유지하는 것은 무척이나 쉬웠다. 그 당시에는 내신을 강조하며 선생들이 알게 모르게 시험 성적에 관한 힌트를 알려주었던 시절이었고, 나는 그것을 요령 있게 익혀 작은 노력으로도 만족할만한 점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보니 남들보다 적은 노력을 들여 좋은 성적을 거두고 남는 시간은 책을 보거나 여가생활을 하는데 쓸 수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 남매의 교류는 더욱 줄어들었다. 어쩌다 내가 시골에 가도 누나는 보이지 않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큰 명절이나 제사만이 누나와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들이 8년 동안 지속되다 보니 누나와 나 사이의 교감은 완전히 메말라 버렸다.
이제는 유전적으로 연결된 최소한의 고리와 어린 시절의 단편적인 추억만이 그녀와 나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접점이었다. 하지만 내가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이 결정되고 부모는 우리가 같이 살 것을 강요하면서 나는 누나와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녀와의 불편함을 겪고 싶지 않아 거부했지만 강하게 주장하는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거리상 나의 학교와 그녀의 학교 사이에 위치한 적당한 집을 구했다. 그러나 우리는 변하지 않았다. 한집에 같이 살기만 할 뿐 여전히 어색한 동창처럼 어떠한 정신적 교감이나 문화생활의 교류가 없이 지냈다. 철저하게 서로의 공간과 시간을 유지하며 물과 기름처럼, 달라붙지 않는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하루 종일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을 택했다. 오늘은 토요일이었고 학교에 출근할 일은 없었다. 밖은 눈으로 뒤덮여 있어 외출하기 적당하지 않다는 판단을 했다. 처음에는 눈 덮인 거리를 활보할까 생각했었지만 이미 사람들의 흔적으로 망가져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럴 기분이 싹 가셨다. 대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책을 택했다.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게 고역스러웠다. 유치한 문장으로 무장한 싱거운 연애소설이었다. 문체가 개성이 없고 조야한 문장이 가득했다. 책을 절반쯤 읽다가 집어 던지고 눈을 감았다. 차라리 꿈을 꾸는 게 훨씬 다이내믹할 것 같았다.
눈을 떴을 때 밖은 껌껌했다. 성난 어둠이 창문을 밀고 들어와 내 방안까지 침투해있었다.
스위치를 올리자 어둠이 금방 물러가고 쨍쨍한 형광불빛이 방안을 낱낱이 파헤쳤다.
시간을 확인했을 때는 벌써 밤 아홉 시가 지나고 있었다. 누나는 아직 들어오지 않은 듯 했다.
활동 없이 죽은 듯이 잠을 잤기 때문인지, 전혀 허기가 지지 않았다. 밥을 먹을지 말지 잠시 고민을 했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구름은 걷히고 밝은 달빛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마음이 동해 저녁을 먹는 대신 밖으로 나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두터운 외투를 집어 들었다.
코끝이 시린 공기가 순식간에 온몸으로 들이 닥쳤다. 생각한 것보다 더 사나운 밤공기에 놀랐다. 늦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겨울밤은 이미 깊어있었던 것이다.
낮이 야위어질수록 밤은 깊어만 갔다. 매서운 바람의 공격에 잠시 당황하다가 옷깃을 단단히 여미는 것으로 대항했다.
길 위의 눈은 차가운 물로 변한지 오래였다. 길게 흔적을 남기며 흐르고 있는 물은 눈이 불타고 남기는 잿더미와도 같았다.
높은 지붕과 나뭇가지 위에만 눈덩이들이 힘겹게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희미하게 빛나는 저 눈도 곧 잿더미로 변할 것이리라.
10분을 걸어 도착한 공원은 나의 주 산책로였다. 추운 날씨 탓인지 사람이 거의 찾지 않는 공원은 고즈넉한 느낌을 안겨주어 마음에 들었다. 어느 때처럼 입구에 들어서 들어가려는데 평소와는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어야 할 장소에 한 인영이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 것이다.
추운 겨울밤에 누군가 나 와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던 나는 놀랐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봤을 때도, 이곳에는 아무도 없어야 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이곳에서 마주친 것으로 보아 이웃일 확률이 높았다. 누군지 확인을 하기 위해 가까이 갔을 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그녀였다.
그녀는 어떠한 생각에 골똘히 빠진 듯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벤치 앞에 서서 하염없이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방금 막 달에서 추락한 요정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푸른빛을 받아 빛나는 머리카락이 잔잔한 물결을 만들어 냈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뒤에 놓인 벤치로 가 앉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벤치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듯 차가웠다. 너무 차가워 폴짝 뛰어오를 뻔 했으나 참아냈다. 곧 내 엉덩이와 허벅지가 벤치와 열을 교환하기 시작했고 차가운 의자는 서서히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듯 여전히 하늘 곳곳을 두 눈에 담고 있었다.
"영은?"
적당히 벤치가 따뜻해질 때쯤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는 체 할 생각은 없었는데 달빛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신비로워 보여 견딜 수가 없었다. 이대로 두면 갑자기 떠올라 하늘로 사라질 것 같았다.
이미 내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몸을 뒤로 돌린 그녀는 대답 대신 나를 응시했다.
“일주일 간 아무 소삭 없더니 왜?”
겨울방학이라 일주일간 그녀와 전화도 없었다. 그래야만했던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냥 널 기다렸어.”
“추운데, 왜?”
“보고 싶어서.”
“아참,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일주일 전 우리 영화보고 들어왔던 날, 누나와 같이 잤지?”
“아니, 그런데 왜?"
“그날 밤, 네가 누나하고 침대에서…….”
그녀는 잠시 대답이 없이 머뭇거렸다.
“지금 넌 날 동성애자로 보는 거야?”
확실히 오늘은 추운 날씨였다. 겨울 막바지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눈도 쌓여 있었다.
“됐어.”
내가 그녀에게 등을 보였다. 그리고 몇 걸을 놓았다.
“왜 그러는데?”
“아니야. 그날 밤에 누나 손이 둘이 아니라 셋이었거든. 다른 한손이 네 손이라서.”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이라는 건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 알았다. 그 반지는 내가 사준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니라는 데에 그녀가 싫어 나는 그녀를 두고 공원의 어둠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은 같은 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였다. 교무실 책상이 붙어 있어 정이 들면서 서로 사귀게 되었다. 약혼은 안 했지만 서로 결혼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의 반지는 일주일 전에 내가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그날도 토요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생일이라고 해서 만났다. 그녀와 영화관에 가서 영화 한편을 보고 나오니 오후였다. 금은보석 집에 가서 그녀에게 생일 선물로 반지를 사주고 술집에 들어갔다. 술을 마시고 그녀와 같이 집에 들어왔다.
거실에 편한 복장으로 누나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쇼파에 웅크리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무릎을 끌어올려 두 손으로 감싸고 앉아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종일 집에 있었어?"
"응."
"저녁은?"
"먹었어."
누나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전형적인 한국의 드라마가 TV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신파적이고 통속적인 멜로, 한국적인 틀에서 벗어날 시도조차 하지 않은 작품 안에서 두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영상의 아름다움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남녀 주인공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분위기를 만들어나갔다. 차라리 살인 추리극이 재밌을 것 같은데 누나는 열심히 몰입하고 있었다.
"누나, 영은이도 왔어."
누나는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이 없었다. 그냥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내키지 않는 불만이 들어 있는 표정이었다.
“그럼 우리 올라갈게.”
그래도 누나는 대답이 없었다. 나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으므로 기다리지 않고 그녀와 2층 내 방으로 향했다.
그때 누나가 일어나 영은의 팔을 잡고 올라가지 못하게 했다. 나는 영은을 누나와 놀라하고 혼자 내 방으로 들어왔다.
누나와는 항상 이런 관계였다. 혈연이라는 최소한의 유대를 남겨놓고 더 이상 관여하지 않으려 들었다. 나도 그랬고 누나도 그랬다. 이건 세 살 터울 섬 남매에게 부과되는 일종의 약속이었다.
강원도 평창 산골사람들은 모두 자식들을 서울은 물론 인근 원주나 강릉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보내고 싶어 한다. 산골에 고등학교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산골 사람들은 큰 도시의 환경에 비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의 자식들을 대도시에 보내 신식교육을 받도록 하려고 애를 썼다.
억척스러운 산사람들은 공부만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 믿었고, 자신들이 겪어야 했던 고생과 가난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면 도시에 있는 학교로 보내야 한다고 철썩 같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로 학교에서 성적이 괜찮은 아이들은 모두 도시의 고등학교로 보내졌고, 나와 누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나는 성적이 우수한 모범생이었다. 몸가짐이 단정했으며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던 그녀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 결과는 명문대학에 입학을 했다. 그 대학을 졸업을 해서 지금은 검찰청 사무관이었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그런데 영은은?'
정신없이 읽던 책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위가 조용해진 밤이었다.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밤이 새벽의 입구에 닿아있는 느낌이었다. 잠을 청하기 위해 불을 끄고 누웠다가 충동적인 기분이 들어 창문에 놓인 커튼을 젖혔다.
아주 밝은 밤이었다. 달빛이 사납게 쏟아져 내렸다.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던 달빛은 내 침대 위까지 침범했고 산산이 부서지더니 곳곳에 뿌려졌다.
달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영은 생각이 났다. 단정한 머리에 차분한 걸음을 가진 그녀. 달 위에 고향을 둔 요정 같은 소녀. 그녀는 누나에게 잡혀서 놀다가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있을까?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잠이 오질 않았다. 불을 꺼둔 채로 침대에 누워 생각에 몰입했다.
내일은 그녀를 만나서 어떤 얼굴로 만날까 하는 기대감에 마음만 벅찼다.
생각이 정리되었을 때는 어느덧 시간이 새벽 2시를 넘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더욱 잠이 오지 않아 당황을 했다. 밝은 달빛 때문인지 은영 생각 때문인지 쉽게 판단이 서질 않았다.
맥주라도 한 캔 마시면 괜찮아 질 것 같아 방문을 나섰다. 아래층 거실은 캄캄했다. 경험에 의존해 길을 더듬어가며 냉장고에 도착해 맥주를 꺼내 들었다.
그때 내 귀를 간지럽히는 소리가 약하게 들려왔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맥주를 들고 내 방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약하지만 분명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에 집중했다. 조용한 새벽이기에 작은 소리지만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곧 근원지를 알 수 있었다. 누나 방으로부터 나오는 소리였다. 그녀가 아직까지 자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았다. 주말이었고 일요일로 향하는 문턱에서 일부러 일찍 잠들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소리는 내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어떤 소리가 간헐적으로 흘러 나왔다.
이상하게 긴장이 되어 까치발을 들고 거실을 건넜다. 평소에는 대담하게 걷던 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방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귀신처럼 누나의 방문 앞에 도달해 문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소리는 더욱 확실하게 다가왔다. '으응'하는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며 얇은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방안의 불은 꺼져 있는 듯 했다. 그녀가 아픈 것인지 잠시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밤에 봤을 때 평소와 달라 보이지 않았고 아픈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잠시 더 생각을 하자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녀는 아픔과는 다른 이유에서 소리를 배출하고 있는 것이다. 내 추측이 맞는지 확인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성급한 행동이었지만 나 자신의 충동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조심스레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채 부드럽게 손잡이가 돌아가자 이제는 가슴까지 뜨거워졌다. 비밀의 문을 열듯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밀자 문은 조용히 열렸다. 흥분된 마음을 감춘 채 열려진 문틈 사이로 눈동자를 위치 시켰다.
방안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누나의 방은 밝았다. 넓게 개방된 창문 사이로 떨어지는 달빛에 창백하게 밝혀지고 있었다.
집을 고를 때, 누나는 특히 창문의 크기에 신경을 썼다. 햇빛이 잘 드는 게 좋다며 창문의 방향과 위치, 크기를 가늠해보고서는 가장 마음에 드는 집을 골랐다.
지금은 그 창문을 통해 달빛이 무수하게 쏟아지고 있었고, 그 달빛은 누나의 몸 위로 정직하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음울한 달빛이 방 안의 풍경을 더욱 조심스럽고 신비스럽게 만드는 듯 했다.
그녀는 이불 대신 달빛을 덮고 있었다. 이불은 침대 한쪽 구석에 돌돌 말린 채 내팽겨져 있었고 침대 시트는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누나는 그 침대의 중앙에 불안정하게 누워 있었다. 한 쪽 무릎을 끌어올려 접은 채였다.
아찔한 광경이었다. 누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 입고 지내는 편한 복장도 없이 반라가 되어 달빛을 받아 매혹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 머릿속이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침착하게 작동하던 머리는 그 순간만큼은 얼어버린 듯 정지했고 온통 누나의 곡선만이 차올랐다.
왜 저러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은 금새 수그러들었다. 제멋대로 풀어헤쳐진 머리카락, 세련된 어깨를 따라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와 툭 튀어나온 골반, 그 아래 두 갈래로 갈라진 부드러운 허벅지가 시선을 강하게 사로잡았다.
입이 바짝 말랐다. 허벅지를 따라 길게 뻗어있는 종아리 끝에는 발가락이 애처롭게 걸려있었다. 발톱이 달빛을 받아 반짝 빛나는 것이 보였다. 다시 고개를 올려 다리를 타고 올라가자 두 허벅지 사이에 가려진 성스러운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비밀스러운 그곳은 허벅지에 의해 마구 비벼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딘가 애처로운 몸짓이었다.
누나는 얼굴을 찡그린 채 무언가를 상상하듯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평소의 차가운 모습과는 다르게 역동적인 표정을 얼굴에 표현하고 있는 모습이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더욱이 그녀의 손의 행방을 알고 나서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올랐다. 어느새 숨이 가쁜 듯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의 융기를 손이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손은 시간이 지나자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손은 그 곳에서 떨어져 나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번쩍였다. 그건 손에 손가락에서 시린 달빛에 반사로 인해서 번쩍였던 것이다.
가만히 시트를 쥐고 있던 양손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조금은 거칠게 움켜지는 것이 보였다. 서서히 내려가던 손은 배꼽을 건너 가랑이 사이로 향했다. 멈칫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다시 돌진하기 시작했다.
손이 지나갈 때마다 달빛을 가려 검은 음영을 만들어냈다. 지나간 자리는 다시 밝아지며 환하게 들떴다. 이내 유리처럼 하얀 손이 비밀스런 계곡의 위에 자리 잡은 손은 그 상태로 잠시 멈추어 섰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손이 두 개가 아니었다. 분명 누나의 양 손은 시트를 잡고 있었고, 또 한 손은 누나의 몸을 애무하고 있었다. 그럼 다른 한 손은 무슨 손인가.
그 한 손은 영은의 손이라는 걸 알게 해준 것은 선물한 반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인지 아닌지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영은도 반라의 몸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들은 동성애자?
“아.”
누나의 완벽하게 회복된 눈동자는 내 몸에 걸려있던 저주를 산산이 부셨다.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나는 문을 닫고서는 뒤돌아보지 않고 내 방으로 향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뛰어 어지러웠다. 지구가 자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에야 처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뱅글뱅글 도는 어지러움 속에서 방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웠다. 한 층 멀미가 진정되는 것 같았다.
'틀림없이 누나는 나를 알아봤다. 마지막에는 놀란 듯이 탄성까지 내질렀다.'
진정되는 마음과는 다르게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져만 갔다. 되돌릴 수 없는 엄청난 죄를 지은 것만 같아 가슴이 답답해졌다.
누나와 영은의 비밀스러운 행위를 목격한 것이다. 그것도 음란하고 자극적인. 그 동안 멀어져 지내며 지켜오던 평화가 산산조각 나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옥죄어왔다.
이대로 있을 순 없었다. 대책을 마련해 두어야 했다.
여자친인 영은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여자는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그렇지만 누나는 달랐다. 남매로서, 누나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한 뒤 그에 따른 대응을 마련해두어야 했다.
새벽을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며 보냈다. 누나의 모든 반응과 그에 따른 대책을 수립하려 애썼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냉정해진 머리로 좀 더 객관적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자 생각보다 심각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리 큰 죄도 아니었다. 한 집에 사는 이상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이었고, 주의를 소홀이 한 누나의 책임도 무시할 수는 없는 거였다.
7대3 정도의 쌍방과실로 여길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이건 서로의 잘못이다. 이번을 계기로 누나도 나도 더욱 조심하게 될 것이고 오히려 내 평화는 더 견고하게 간직될지 모른다.'
하지만 매끄러운 결말을 위해 대책도 마련해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봤다.
‘누나가 평소처럼 모른 체 대한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평소처럼 행동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의 일을 들먹이며 무시무시하게 화를 낼 수도 있다. 나의 훔쳐봄을 가지고 나무란다면 내가 불리한 입장이 된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집에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도 나도 다 큰 성인이고 특히 드러내기 싫은 일을 집안에 알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나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있다. 이전보다 더 쌀쌀하게. 이 경우는 괜찮다. 어차피 나도 바라던 바였고 더욱 서로의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다. 혹시 수치심에 울거나 비탄할 경우가 가장 심각하다. 민감하게 반응할 경우 정신적인 문제이므로 수습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그녀의 심리 상태였다. 화를 낸다면 괜찮지만 수치심을 느끼면 일이 복잡해질 것이다. 하지만 누나의 성격상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한 달 동안 같이 지내면서 그녀는 노출이 심한 복장도 자주 내 앞에서 했었고 욕실을 나설 때는 항상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가운만을 입었다. 그것은 나를 크게 의식했다면 절대 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누나가 나를 동생으로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랬던 누나가 갑작스레 엄청난 수치심을 느끼며 자책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가족이 다 같이 모인 4년 전 명절이었다. 명절에 나도 오랜만에 누나를 볼 수 있었다. 누나는 서울에서 지낸 지 1년이 다 되가는 대학생 시점이었고, 나는 혈기 왕성한 고등학생이었다. 가족은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친구들을 만나고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 중 한 녀석이 문제였다. 그 놈은 중학교 동창 중 날라리로 유명했는데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자꾸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여자 동창들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늘어놓는 음담패설에 몇몇은 지쳐서 사라지고 몇몇은 귀를 쫑긋 세우며 듣는 풍경이 벌어졌다. 나는 적당히 걸러 듣다가 도저히 자리가 끝날 것 같지 않아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서 침대에 눕자 마음이 풀려 몸이 부드러워 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그 날라리 녀석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어떤 여자는 한 번 시작했더니 자기가 더 좋아 죽는다면서 마구 소리를 지르더라, 한 번은 처녀를 딴 적이 있었는데 그 기분이 죽이더라. 바닷가에 놀러가서 만난 대학생 누나들은 역시 흔드는 기술이 다르더라. 자꾸 머릿속에서 상상이 되자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는 혈기가 성성한 고등학생이었고 자위의 쾌감을 충분히 알고 있을 때였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커다랗게 변해버린 물건을 만지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 녀석의 말을 떠올리며 마구 흔들었다.
대학생 누나, 처녀, 신음소리가 죽이는 색녀. 그리고 한 참 일에 몰두할 때쯤, 문제가 터졌다.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며 누나가 들어온 것이다. 급하게 처리하려다가 화장실 문 잠그는 것을 깜빡 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누나는 나의 표정과 아래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문을 닫고서는 되돌아갔다. 나는 창피함에 물건이 금방 쪼그라들었다.
이 후, 누나를 어떻게 대할지 걱정을 했지만 누나는 다음날 나를 아무렇지 않은 척 대했고, 이틀 후 다시 각각의 길로 헤어진 후로 다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일주일 전에 벌어졌던 일도 그 때의 해프닝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었을 뿐이다.
아무도 걷지 않은 공원은 비경이었다. 내린 눈으로 세상은 하얗게 덧칠이 되어 있었다. 얼룩과 욕심이 지워진 공원에는 아무런 발자국이 없었고 소리조차 눈으로 뒤덮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가 모든 것을 씻겨준다면 눈은 모든 것을 덮어준다. 짧은 시간 안에 온 세상이 하얀색 도화지처럼 깨끗해진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집으로 향해야 했다. 어둠 속에서 입김이 밝게 피어올랐다. 달빛이 내려앉은 어슴푸레한 어둠과 오렌지 색 가로등이 조화롭게 어울려 어느 때보다 밤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그건 감상적이 될 만큼 만족스러움을 안고 걸었다.
저만치에서 한 실루엣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아까 영은과 만났던 자리였다. 그렇다면 영은 가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가가 보았다. 영은은 몸이 언 상태로 서 있었다.
“얼어 죽으려고 환장했고만.”
“오해는 풀어야 하게 아니야.”
“오해? 너 웃긴다.”
“좋아. 그날 밤 나인지 증명할 수 있어?”
“확실히 알고 있지. 네 손가락에 반지.”
“아. 하지만 언니와 나 동성애자는 절대 아니야.”
그녀는 말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럼 여자끼리는 뭐야?”
“그날 밤, 언니는 나갔다 온다면서 집에 나갔어. 침대 위에 언니가 아니라 나였어. 문을 왜 안 잠갔냐고? 언니가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야. 하필 그때 네가 몰래 들어왔던 거야.”
“내가 묻고자 하는 건, 손이 세 개라는 거야.”
“내 손 두 개. 하나는 가짜 손. 그러니까 진동 딜도손이란 말이야. 딜도손가락에 반지 끼운 것은, 널 생각하면서였어.”
거참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더 이상 묻고 싶지 않았다. 아니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누나는 그런 것을 사와서 사용했을 것이고, 영은은 호기심에 사용했을 것이다.
집에 들어와 방 창문을 열자, 소름끼치게 차가운 밤공기가 방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추위에 떨던 바람이 따뜻한 곳을 찾아 밀어닥쳤다. 조금은 몸이 진정되는 듯 했다. 나는 그 상태로 한참을 기다리다가 물건이 완전히 죽었을 때 창문을 닫았다. 시린 달빛 부셔지는 것을 보고 잠이 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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