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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S of MACEDON. Alexander III 'the Great'
KINGS of MACEDON. Alexander III 'the Great'. 336-323 BC. AR Drachm, Sardes mint. Struck under Menander 324/3 BC.
Obv: Head of Herakles right, wearing lion skin
Rev: ΑΛΕΞΑΝΔΡΟΥ (ALEXANDROU) - Zeus Aëtophoros seated left; bee in left field, monogram below throne.
Diameter: 16.0mm Weight: 4.24 g, 1h
Price 2564 var. (monogram); ADM I Series X var. (same). Lightly toned, some deposits.
2020.2.26 Classical Numismatics Group
*Sardes(Sardis): 소아시아 서부의 고대도시로 Lydia 왕국의 수도. Izmir의 동쪽에 있다
Menander(메난드로스): 박트리아의 왕(?)
알렉산드로스 3세
1. 개 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 영어 발음인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으로 더 유명하다. 아랍어권에서는 이를
페르시아 어형으로 음역하여 이스칸다르 라고 부르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고대 그리스 북부 마케돈 왕국의 아르게아다이 왕조 제26대 군주로 재위 기간은 기원전 336~323 이다.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와 오리엔트 지방에 대한 공격적 팽창으로 패권을 잡아 마케돈의 바실레우스(군왕), 코린토스 동맹의 헤게몬
(패자), 페르시아의 샤한샤(왕중왕), 이집트의 파라오를 겸임하고 스스로를 퀴리오스 티스 아시아스(아시아의 군주)라고 칭하였다.
기원전 356년 펠라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로스는 20세의 나이인 BC336년 아버지 필리포스 2세를 계승해 바실레우스가 되었다. 알렉산
드로스는 치세 기간 대부분을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미증유의 군사 정복 활동으로 보냈다. 30세가 되었을 때 그리스
를 시작으로 남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부에까지 확장되었다. 그 이전까지 고대 서양에 전례가 없던 대제국을 건설했
다. 그는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고,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유년기의 알렉산드로스는 16세가 될 때까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기원전 336년 부왕 필리포스가 암살된 뒤
왕위를 계승한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가 개척한 부강한 왕국과 숙련된 군대를 물려받았다. 아버지에 이어 코린토스 동맹의 패자로
추대된 알렉산드로스는 그 권위를 이용해 팽창 정책을 시작했다. 기원전 334년 그는 소아시아에서 군림하던 아케메네스 제국(페르시
아 제1제국)을 침공하며 10년에 걸친 원정을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수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 등 몇 차례의 결정적 전투에
서 페르시아군을 분쇄했고, 마침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페르시아 제1제국을 멸망시켰다. 이 시점에서 알렉
산드로스의 마케돈 제국의 강역은 아드리아 해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렀다.
"세계의 끝"을 보겠다는 열망으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6년 인도를 침공했으나 병사들의 반발로 회군하였다. 바빌론을 제국의 수
도로 삼기 위한 개발을 계속하던 와중이었던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는 계획했던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시작하지 못한 채 바빌론
에서 사망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그가 죽자마자 일련의 내전 으로 산산이 조각났고, 조각난 각각의 지역은 알렉산드로스의 부
하 장군들과 참모들이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를 자칭하면서 각각 왕을 칭하고 할거하였다.
2. 어린시절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56년 7월 20일경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
스가 태어나는 날 일뤼리아 인과의 전쟁에서 마케도니아가 승리하고 올림피아 제전에서 아버지 필리포스의 말이 우승하는 소식이 같
이 들어왔고 이를 두고 아버지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가 불패의 인물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그의 소년 시절의 유명한 일
화로 누구도 손대지 못한 거친 명마 부케팔로스를 단 한번에 길들였다는 일화도 있다.
더불어 이 시기에 아버지 필리포스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으로 붙여 주었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3년 동
안 각종 학문들을 전수 받음에 따라 알렉산드로스의 정신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 아버지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에게 고귀한 삶을 주었다"는 말을 자주할 정도였다 한다. 자신의 친아버지 필리포스 2세보다도 아리
스토텔레스를 더욱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으나, 훗날 그리스 우윌주의를 시종일관 고집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
과 알렉산드로스 본인의 왕권 강화 차원에서 알렉산드로스에게 사사건건 직언을 올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인 칼리스테네스를 처
형한 일들로 인해서 둘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류는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림)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는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드로스가 16세이던 시절 아버지 필리포스가 비잔티온(오늘날 이스탄불)으로 원정을 떠나자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의 섭
정을 맡았는데 그때 마이도이족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마이도이 족을 추방한 다음 다른 민족들을 데려와 이곳에 알렉산
드로폴리스를 건설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군사적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338년 카에로네이아에서 벌어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연합군
의 전투 에도 참여해 좌익의 부대를 이끌고 테베의 최정예 부대인 신성부대를 선두에서 격파하는 전공을 세운다. 이때부터 알렉산드
로스는 마케도니아 군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보면 그가 이런 왕자 시절의 업적들로 인해 당시 마케도니
아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의 왕이고 필리포스는 장군이다."' 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포스 2세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기뻐했다고 한다.
3. 즉위
비록 알렉산드로스의 전공은 높았지만 같은 시기 아버지 필리포스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아버지 필리포스가 휘하의 장군 아탈로스
의 여조카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와 결혼하면서 사이가 나빠졌다. 결혼식날 클레오파트라의 큰아버지 아탈로스가 클레오파트라가
마케도니아의 왕위를 이을 적법한 아들을 낳기를 기원한다는 실언을 했고,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발언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격
분해 아탈로스에게 술잔을 던졌다. 이 광경을 본 필리포스가 칼을 빼들고 분노하다가 취기 때문에 넘어지자 알렉산드로스가 이런 아
버지를 비꼬며 "이 분은 에우로페에서 아시아로 넘어갈 준비를 한다더니 이 의자에서 저 의자로 넘어가다가 넘어져 누워 있군요" 라고
조롱했고 이에 필리포스는 분노가 극에 달해 다음 날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를 에피이로스로 사실상 추방시켜 버렸
다. 이후 테마라토스라는 사람이 간신히 설득해서 수도 일리리콘으로 두 사람은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336년 이 소동이 있은 지 얼마 뒤에 카리아 지역의 페르시아 지방관 픽소다로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인 아르리다이오스
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아르리다이오스가 이 결혼을 통해 자신을 제치고 마케도니
아의 왕이 될 것을 두려워 했고 이를 막기 위해 역으로 자신이 픽소다로스와 사돈이 될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해 배우였던 텟살로스
를 카리아로 보내 사생아에 정신박약이던 이복형 아르리다이오스 대신 알렉산드로스 자신이 픽소다로스와 사돈 관계를 맺을 것을 제
안했고 픽소다로스는 이 제안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 필리포스는 이 결혼 소식을 알게 되었고 분노해서 알렉산드
로스를 찾아가 질책한뒤, 이 결혼 계획을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알렉산드로스의 친구들을 전부 추방시켜 버렸다.
그런데 얼마뒤 아버지 필리포스가 호위병인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후 주변인을 조사해본 결과 공식적인
암살 배후는 필리포스의 아내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백부 아탈로스로 밝혀졌지만, 암살 시기와 전후의 이해득실 관계가 너무 절묘해
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암살의 배후가 아니냐는 의혹이 당대에도 제기되긴 했다. 특히 올림피아스가 가장 많이
비난받았다. 필리포스 2세가 애첩에게서 낳은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위기감을 느낀 알렉산드
로스와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암살을 사주했을 거란 소문이 나돌았지만, 증거가 없는 관계로 알렉산드로스 3세가 BC 336년 20세의 나
이로 왕위에 즉위했다. 하지만 현대의 사학자들은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를 암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왕위에 오르자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이복 동생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필리포스 2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조용히 살고 있었던 사촌 형 아민타스 4세 등을 비롯한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했다. 특히 클레오파트라를 아버지에게 붙여준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던 장군 아탈로스는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가족 전체가 쑥대밭이 된다. 아탈로스는 처형당하고 그의 가족들도 모두
죽임을 당한다.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그리스 전체의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필리포스 2세에게 박살난 뒤 힘에 눌려 코린트 동
맹으로 묶여 있었는데, 필리포스 2세가 죽고 겨우 20세에 불과한 알렉산드로스가 왕위에 올랐으니 반란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
각한 것이다. 폴리스들의 반란 소식을 접한 알렉산드로스의 측근들은 모두 외교로 해결하라고 조언하였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자
신의 기병 3천 기만 이끌고 신속히 남하한다. 이러한 전격전으로 인해 마케도니아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폴리스인 테살리아가 가장
먼저 제압당했고 테살리아의 병력을 인수한 알렉산드로스가 남하하자 모든 그리스의 도시들이 사절을 보내 용서를 구하고 알렉산드
로스는 이들에게 모두 죄를 묻지 않는 선처를 베푼다.
일 년 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원정전 우선 북쪽 국경을 안전하게 해두고자 지금의 이스탄불 북서쪽에 위치한 트라키아인들을
공격하여 제압한다. 이후 도나우 강까지 올라가 그곳에 위치하고 있던 게타이(훗날의 다키아)부족을 격파한다. 그때 일리리아(그리스
의 서쪽, 이탈리아와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지역, 현재의 크로아티아, 알바니아)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지역에도 가서 반란을 일으킨 세력을 모두 진압한다.
그때 알렉산드로스가 전사했다는 근거없는 엉뚱한 소문이 그리스에서 퍼졌고 이를 들은 평소에도 마케도니아를 야만인이라면서 무시
하던 테베가 반 마케도니아 인사들을 복귀시키고 반대로 친 마케도니아 인사인 티몰라오와 아민타스를 살해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케
도니아 군대가 주둔하던 카드메이아 요새를 포위하여 본격적으로 반란을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편승해 아테네와 스파르타도
반란에 참여한다. 이를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3만 3천여 병력과 함께 신속히 남하한다. 그가 군대와 함께 테베에 도착하자 테베인들은
처음엔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왔다고 믿지 않았는데,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군대는 2주 전만 해도 무려 4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주둔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등장에 테베의 반란에 동참한 다른 폴리스들은 군사 행동을 멈춘다.
알렉산드로스는 테베 성문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군을 배치하고 반란의 주모자만 넘기고 항복하면 테베인 모두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
해주겠다는 조건을 내건다. 하지만 테베인들은 알렌산드로스를 젊기만한 애송이 취급하면서 상황파악을 못하고 오히려 알렉산드로스
의 군사령관 두 명을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큰소리친 뒤 완강히 거부한다. 3일간의 준비 후 알렉산드로스 군과 테베군은 교전을 개시
한다. 양측 군대는 성벽 사이에 두고 넓게 퍼져 사방에서 싸웠는데 이 와중 한 성문에 생긴 빈틈을 파악한 알렉산드로스가 예비대를
투입해 차지하게 한 뒤 군을 성내로 진입시킨다. 이것이 싸움의 승부를 결정지었다. 뒤이어 벌어진 시가전 끝에 테베는 점령당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테베의 반란에 가담한 폴리스들에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남자들은 모두 학살하고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노예로 팔
아버렸고, 테베는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워 버렸다. 이 패턴은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전쟁 과정에서 계속해서 재현되었다. 자신에
게 극렬하게 저항하는 모든 도시들을 상대로. 각설하고 이로써 아테네와 쌍벽을 이루었던 강력한 도시 국가인 테베는 완전히 파괴된
다. 다만 시인 핀다로스의 집은 부하들에게 절대로 파괴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후에 아테네가 진심으로 투항해오자 알렉산드로스는 아테네의 안전과 문화와 재산을 보장해주는 너그러운 조치를 배풀었다고 한
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사망 후 마케도니아의 패권을 주장한 카산드로스가 뿔뿔이 흩어진 테베인을 불러 테베를 재건케 한다. 이들은 파
괴된 테베의 성벽과 건물을 재건축하여 옛 모습을 갖추게 하였으나 한 번 크게 손실된 국력까지 회복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테베는
두 번 다시 이전과 같은 번영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4. 페르시아 원정
기원전 334년 바쁜 군사활동을 단 일년만에 마무리 지은 알렉산드로스는 다음해인 333년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를 건넌다.
사실 비잔티움 쪽으로 가는 게 더 나은 방법이긴 했으나 이 지역은 독립된 도시국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를 가
르는 좁은 해협,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가 대군을 이끌고 건넜던 바로 그곳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상륙하자 그 지방의 페르시아 사트라프(지방관)였던 스피트리다테스와 아르시테스가 방어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젤
레리아에서 집결한다. 이 자리에서 장수 멤논은 청야작전을 주장하지만 아르시테스 등 사트라프들이 반대해 무산되고 전면전을 준비
한다. 두 군대는 그라니쿠스강에서 조우하였다. 페르시아 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포진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진격을 저지하려 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부하장수들은 밤에 강의 상류 지역으로 올라가 건너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는 허를 찌르기 위해 자신
의 기병대로 즉각 도강하여 공격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렇게 대담하게 강을 건너 공격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페르시아군은 완전히
격파되고, 스피트리다테스의 도끼가 알렉산드로스의 투구를 쪼개는 아찔한 순간이 있었지만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사령관인 스피트리
다테스와 주요 지위층을 포로로 잡으며 페르시아의 첫 전투를 대승으로 마무리 짓는다.
이 싸움의 승리로 인해 페르시아인들이 죽거나 도망가면서 아나톨리아의 서부 지역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페
르시아보단 그리스와 친한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계 폴리스들을 회유하며 거침없이 남하한다. 당시 알렉산드로스는 아나톨리아 서
부 해안선을 따라 쭉 돌면서 항구도시들을 점령하며 내려왔는데 이는 항구도시들을 모두 장악함으로써 페르시아 해군을 고사시키기
위해서였다. 마케도니아군은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만이 페르시아 해군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페르시아 해군
은 그리스 출신의 멤논이라는 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마케도니아군의 보급선을 끊으려 했으나 거의 성공할 무렵 멤논이 갑자기 병으로
죽은 데다 항구도시들이 마케도니아군에게 점령되면서 해체되었다.
이렇게 점령하는 동안 '고르디우스의 매듭' 과 관련된 일화와 ' 디오게네스와의 대화' 들은 유명한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림) 그라니쿠스강 전투
(그림) 알렉산드로스의 원정길
5. 이수스 전투 (Battle of Issus)
아나톨리아 서부를 제압한 뒤 겨울을 나고 23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봄이 되자 시리아 쪽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시리아에 진
입하기 위한 관문인 이수스라는 곳에서 그는 다리우스 3세가 그동안 열심히 모아 두었던 페르시아의 대군과 조우한다. 다리우스 3세
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였고 총 병력은 11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4만여 병력이었기 때문에 병력상으론 알렉
산드로스가 불리하였다.
그러나 이수스는 의외로 좁은 평야였고 따라서 적은 병력을 가진 알렉산드로스에게 유리한 지형이었다. 다리우스가 굳이 이런 곳에서
싸우기로 한 이유는 불명확하다. 아마도 다리우스가 병력의 우세에 방심했을 수도 있고 다리우스가 터키 지역의 침략을 일 년간이나
방관한 것을 변명하기 위해 조급하게 싸움을 서둘렀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학자들에 따르면 페니키아 지역에 있는 도시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접근으로 인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고 하였는데 이는 즉 다리우스가 늑장을 부린 것 때문에 그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많이 잃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이수스 전투 초기에 다리우스 자신의 병력을 강 북쪽으로 포진시킨 뒤 알렉산드로스가 강을 건너면 공격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수
스에 포진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터키 지역과 그의 본대의 길목을 차단하였으므로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주문대로 강
건너 공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초기엔 다리우스가 유리한 입장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전투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는데 이는 알렉산드로스가 숫적으로나 전황으로나 불리한 상황이 되자, 다리우스를 직접 노리기로
하였고 이 전술이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다리우스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노리기 위해 보병의 우익에게 명
령하여 페르시아군을 최대한 밀어내게 하였다.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가 장창을 이용해 잘 밀어내자 페르시아 좌익과 중앙에 약간의
틈이 생겼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정예기병인 헤타이로이을 쐐기 대형으로 짠 뒤 자신이 그 꼭지점에 위치한 뒤 그대로 그 틈을
통과하여 다리우스를 향해 돌진하였다. 이에 다리우스는 혼비백산하여 달아났고 최고 사령관이 도주한 것을 본 페르시아군은 혼란에
빠져 격파당하고 만다.
(그림) 이수스 전투
(그림) 다리우스의 천막 - 알렉산드로스에게 사로잡힌 다리우스의 가족
알렉산드로스는 이 전투 후 다리우스의 활과, 전차를 전리품으로 빼앗았고, 다리우스의 어머니, 아내, 두 공주를 모두 사로잡았는데
그는 이들 가족을 매우 정중하게 대우하였다고 한다. 특히 다리우스의 아내는 역사서에 당대 최고의 미녀라는 기록이 남겨진 여인인
데 생포된 지 일 년 뒤 사산으로 목숨을 잃는다. 증거는 없으나 그 아이가 알렉산드로스의 아이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생
포된 다리우스의 두 딸 중 한 명은 그대로 알렉산드로스의 아내가 되고 다른 한 명은 알렉산드로스의 동성애 상대로 알려진 헤파이스
티온의 아내가 된다.
이수스의 패배 뒤 다리우스 3세는 강화를 제의하는데 내용은 자신의 가족의 몸값으로 1만 탈렌트를 지불하고 유프라테스 강부터 그
서쪽 지방을 알렉산드로스에게 양도, 거기다 자기 딸까지 얹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으로 치면 대략 3천억 원에 해당되는 거
금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거절하며 자신은 아시아의 왕이므로 영토 분할은 자신의 권한이라고 답한다. 덧붙여 "와서 항
복한다면 용서해 주겠지만 오지 않는다면 내가 그대를 벨 수밖에 없소"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마음속엔 이미 그가 페르시아의 왕이
된 것...이때 부하 장군인 파르메니온과의 대화도 유명한데 노장 파르메니온은 "제가 왕이라면 이 강화를 받아들이겠습니다."라
고 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파르메니온이면 그랬을거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6. 시리아와 이집트 정복
이수스의 패배로 인해 시리아는 완전히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알렉산드로스는 이 지역을 휩쓴다. 다음 해에 24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로 남하하였는데 이때 티레와 가자와 같은 도시들은 격렬하게 농성을 하였으나 모두 격파되고 이들 도시의 시민들은 모두 노예
로 팔리고 만다. 도시 티레의 공성전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데 알렉산드로스는 이 공성전을 직접 지휘하면서 그가 회전뿐만
아니라 공성전에서도 대단한 능력을 지닌 무결점 지휘관임을 입증하였다. 티레는 섬에 위치한 도시였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공략
하기 위해 인공 길을 바다 위에 만들고, 50미터에 해당되는 공성탑을 건설하고, 배에 공성충차를 실어 성벽을 타격하는 등 온갖 기발
한 아이디어를 내면서 이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분풀이로 항복한 티레 사령관을 전차에 매달고 죽을
때까지 자갈밭 위로 끌고 다니기도 했다. 이때 또 다른 대도시인 예루살렘은 성문을 열고 알렉산드로스에게 즉각 항복하였는데, 이는
페르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 때문에 그리하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알렉산드로스가 어릴 적 향로에 향을 잔뜩 쏟아붓다가 스승 레오니다스에게 "향료가 특산물인 나라의 지배자가 되시기 전에
는 향을 낭비하지 마십시오"라는 꾸중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이 전투에서 얻은 향료를 마케도니아에 보내며 스승에게
"향료를 많이 보내니 걱정 마시고 제사에 사용하십시오"라고 편지를 동봉해 보냈다고 한다.
이집트에 도착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인들에게 '해방자'라는 칭송을 듣는다. 또 그가 필리포스의 아들이 아닌 아문 신의 아들이라
는 신탁을 받는다. 그는 이 신탁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자신이 제우스 신의 아들(그리스 인들에게 제우스 신은 아문과 동
일 신으로 여겨졌다)이라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것을 기념하는 동전까지 발행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각은 마케도니아 장군들을 곤
혹스럽게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들 대부분이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에 의해 발탁된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기원전 331년, 마자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유프라테스 강 도하를 타프사코스에서 저지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주어진 병력이
너무 적어 다리를 놓는 마케도니아 군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유프라테스 강 도하에 성공하자, 마자이
오스는 퇴각하여 티그리스 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던 다리우스 3세의 본군에 합류했다.
7. 가우가멜라 전투 (Battle of Gaugamela)
다음 해에 25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서 나와 동쪽을 향해 진군한다. 다리우스 3세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짜내 모은 9만 여의
병력을 이끌고 가우가멜라라는 곳에서 알렉산드로스에 맞선다. 이 전투에서 다리우스는 이수스 때처럼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에게 돌
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부대의 정예기병으로 알렉산드로스의 헤타이로이를 견제하도록 한 뒤 자신의 우세한 병력으로 마케도니아
군을 격파하려는 전술을 짠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헤타이로이부대가 견제당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우익 끝까지 이동하여 페르시아의 별동대를 중앙에서 멀어지
게끔 유인한다. 중앙군을 남기고 우측이 떨어져 나가자 중앙군의 옆에 틈이 생겼고, 필연적으로 다리우스의 위치가 노출되었다. 이때
우익으로 유인된 헤타이로이를 견제하는 임무를 맡은 페르시아 기병은 우익 뒤편에 위치하고 있었던 마케도니아 보병의 공격에 붙들
리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헤타이로이 기병은 그 견제에서 벗어나 방해받지 않고 다리우스를 향해 돌진하였다.
이수스 때처럼 다리우스는 또 다시 공황에 빠져 달아났는데 이로 인해 승부가 또 결정되고 말았다.
(그림) 가우가멜라 전투
(그림) 가우가멜라 전투 - 다리우스 3세를 격파하는 알렉산더
이수스 때와 마찬가지로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도 다리우스가 도망치기 전까진 페르시아군이 꽤 우세하였는데, 특히 마케도니아의 좌
익은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따라서 다리우스가 죽음을 각오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돌진에 과감히 대항하였으면 그토록 어이없게 패배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겁이 많아졌는지 조금만 위협을 받으면 바로 도망쳤는데, 그로써 알렉산드로스에게 손
쉬운 승리를 선사한다.
이렇게 다리우스의 겁이 많은 성격은 전투 시 가장 선두에 서는 알렉산드로스와 대조된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예 한 술 더 떠 이수스나
가우가멜라 전투에선 헤타이로이 기병대를 쐐기 대형으로 짠 뒤 자신이 그 꼭지점의 끝에 자리잡고 적진을 항해 돌격하였다. 쐐기 대
형의 꼭지점 끝은 당연하게도 사망할 확률이 제일 높은 위험한 자리이다. 또다른 예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침공 첫 전투였던 그
라니쿠스 강 전투에서도 도강 직후 앞장서서 돌격해 들어가다 본대와 분리된 채로 포위당하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겪기도 했다. 휘하
의 장군 클레이투스가 제때 달려들어 도와주지 않았다면 페르시아 원정은 거기서 끝이 났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위험한 행동은 마케도니아 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는데 특히 직접 지휘받는 헤타이로이의 사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았다. 왕이 가장 선두 끝에서 돌격을 이끄는데 누가 용기를 얻지 않겠는가? 그 때문에 헤타이로이 기병은 전투시 대단히 용맹하였
고 그 때문에 그들이 잇수스, 가우가멜라 전투의 승부를 결정짓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우가멜라의 패배로 다리우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이제 페르시아는 재기불능이 된 것이었다. 가우가멜라에서 동원한 병력은 다리
우스가 동원할 수 있는 마지막 군대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꼭 사로잡고 싶었기 때문에 도망가는 다리우스를 맹추격한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달아나는 것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지 단숨에 자그로스 산맥을 돌파한 뒤 동쪽으로 자취를 감춘다. 다리우스를 놓
친 알렉산드로스는 대신 남하하여 바빌론에 입성한다
(그림) 바빌론에 입성하는 알렉산드로스
8. 다리우스를 추격
바빌론을 방문한 뒤에 알렉산드로스는 수사에 입성한 뒤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여 페르세폴리스에 진입한다. 페르세폴리스에서 알렉
산드로스는 크세르크세스의 거대한 석상을 때려부순다. 뒤이어 페르세폴리스에 큰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를 두고 방화를 했다는 기록
과 실수로 그랬다는 기록이 모두 있다.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한 후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추격하기 시작한다. 다리우스가 메디아 지역의 엑바타나라는 곳에 주둔하면서
스키타이와 카두시아로 부터 지원을 받아 청야작전과 반격을 벌일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알렉산드로스는 급히 군대를 몰아 12일 만
에 엑바타나에 도착했고 아직 지원군을 받지 못한 다리우스는 다시 피난길에 오른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가 대피했다는 카스피
해 관문(지금의 테헤란 부근)으로 추적을 시도했지만 추적중 라가이에서 다리우스가 카스피해 관문으로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알랙산드로스는 다리우스 추적을 포기하고 카스피해 관문에 주둔한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던 중 다리우스를 따르던 바기스타네스(바빌론의 귀족)와 안티벨루스(바빌론 총독 마자이오스의 아들)가 알렉산
드로스를 찾아왔는데 그들은 베수스를 중심으로 바르사엔테스(아라코시아&드랑기아나의 지방관), 나바르자네스(기병대 지휘관)가
반란을 일으켜 다리우스를 억류했다는 사실을 듣는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다시 출병시켜 반란군과 억류된 다리우스를 일주
일동안 쉬지않고 추적했고 반란군을 추적하는데 성공한다. 반란군은 가볍게 진압했지만 다리우스는 이미 반란군에게 살해당한 상황
이었고, 다리우스의 시신을 발견한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페르세폴리스로 보내 선왕들의 왕릉에 묻는다
일설에는 다리우스가 죽기 직전 얼마 후, 알렉산드로스의 군사 한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묶여있던 그를 발견하고 다리우스에게 물을
주자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가 나를 대신해 그대에게 상을 줄 것이다. 그에게 나의 감사 인사를 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뒤이어
알렉산드로스가 다리우스를 발견하였을 때 다리우스는 이미 죽은 상태였고 따라서 꼭 생포하고 싶었던 알렉산드로스는 대단히 실망
하였고 옷을 벗어 시신을 덮어주고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9. 페르시아제국의 동쪽 끝으로
이 때야말로 진정으로 페르시아 정복 전쟁을 했던 기간이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가우가멜라 전투를 한번 이긴 걸로
페르시아 땅 전부를 차지했다고 오해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베수스 반란군을 잡으려고 동쪽 히르카니아 지역을 시작으로 마드리아를 거쳐 아리아 지역으로 진군하며 반란군과
기타 반군들을 진압하고 나바르자네스의 항복을 받는다.. 그리고 아리아 지역의 수시아에서 반란군 수장 베수스가 박트리아(혹은 자
리아스파로 불렸다) 지역으로 도망친 뒤 왕중왕 을 자칭하며 이름까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로 개명한 뒤 자신의 박트리아 군대와
스키타이의 지원군까지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반란군 진압을 위해 군대를 모은 뒤 아리아 지역의 아르
타코아나로 진군해 먼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에게 회유된 아리아의 지방관 사티바르자네스를 축출했고, 다음으로 드랑기
아나(자랑기아)로 진군해 다리우스를 살해했던 지방관 바르사엔테스를 공격한다. 이때 바르사엔테스는 인더스강 서쪽까지 도망갔지
만 현지인들이 오히려 바르사엔테스를 잡아 알렉산드로스에게 압송해버렸고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살해죄를 물어 바르사엔테스
를 처형한다. 자랑기아에서 필로타스의 반란음모를 겪은 알렉산드로스는 잠시 지휘관을 바꾸고, 달아났던 사티바르자네스가 군대와
반란 세력을 이끌고 아리아 지역을 침공하자 진압하여 죽이는 등 군대와 지역을 재정비한 뒤 인도 캅카스(지금의 힌두쿠시 산맥)를
넘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가 다스리던 박트리아로 향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는 청야작전을 벌이며 진군을 방해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무시하고 박트리아 지역으로 진군했
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는 옥수스 강(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도주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가 없는 박트리아 지역의 도시들을 손쉽게 점령 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를 추적해서 옥수스 강을 건넌다. 이때 배는 아르타크
세르크세스 5세가 다 태워버리고 척박한 지역이라 땟목을 만들 나무도 부족했지만 가죽에 짚을 채운 배로 도하에 성공한다. 그렇게
추적하던 중 알렉산드로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의 부하인 스피타메네스와 다타페르네스가 베수스를 억류했고, 알렉산
드로스에게 넘겨주겠다는 전갈을 받고 이 제안을 따른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렇게 잡은 베수스를 발가벗긴뒤 목줄을 매어 끌고다니면
서 모욕한 뒤 다리우스 살해를 추궁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는 자신은 공모한 사람중 하나에 불과하고 다리우스를 살해
한 이유도 알렉산드로스에게 호의를 얻기 위해서라고 변호했지만 다리우스 살해후 도주한 시점부터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었다. 알렉
산드로스는 베수스를 채찍질 시킨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를 사로잡은 뒤 타나이스 강(또는 약사르테스 강, 지금의 시르
다리야 강) 지역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의 부하들과 동맹세력이던 지역부족들과 스키타이를 진압한다. 그렇게 가자를 시작으로
키로폴리스를 점령하고 스키타이군까지 패퇴시킨 뒤 스키타이 왕과 휴전을 맻는다. 그 직후 스피타메네스(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를
배반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준 사람)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해 격퇴시킨 뒤 자리아스파(박트리아)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르타크세
르크세스 5세를 끌고와 다리우스 처형을 질타한 뒤 코와 귀를 잘라버린 뒤 오체분시로 공개처형을 시켜버린다.(기원전 329년).
10. 부하들에 의한 암살 시도
이때 알렉산드로스에 대해 여러 차례 암살 시도가 일어났었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음모를 주도한 것은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
아 장교들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왕이 되었음을 선언한 뒤 페르시아 식의 궁중예법을 자신의 부하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 예법대로라면 알렉산드로스를 만나려면 시종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만나서는 우선 반지에 입맞춰
야 했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에게 있어 이러한 짓은 지나치게 비굴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는 관을 쓰고 페르시아 궁
중복을 입으며 비위를 잘 맞춰주는 페르시아인들을 가까이에 두었었다. 게다가 논공행상을 할 때도 많은 페르시아인들에게 높은 지위
를 주었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의 입장에서 많은 피정복민들이 그들과 동등한 직책을 맡은 것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11. 인도 정벌의 착수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원정을 희망하였고 우선 인더스 강 서쪽, 지금의 파키스탄 서쪽 지역에 있던 지방 영주들을 소
환하여 자신을 따르는 것을 보이라고 명령하였다. 많은 영주들이 이에 응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나아갔으나 몇몇 영주들은 반항하며 거
부하였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을 반역자로 간주해 군대로 공격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러는 동안 심한 부상을 입기도 하였으
나 그들을 모두 공략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그에게 반항하고 부상을 입힌 영주들은 일족까지 처형당했을 뿐만 아니라 영주들 휘하
의 도시 시민들도 모두 학살당했으며 건물 기초까지 부숴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그제서야 지방 영주들은 알렉산드로스를 두려워하여
알아서 항복해 왔다.
알렉산드로스는 파키스탄 지역을 공략한 뒤 인더스 강을 건너 인도 지역까지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동쪽 대륙의 끝
까지 정복한 뒤 그 대륙의 끝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남기고 오겠다는 다소 허황된 계획 때문이었다. 그는 인더스 강을
건넌 뒤 남쪽에 위치한 파우라바라는 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이에 파우라바의 왕 포루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와 히다스페스 강 전
투가 벌어진다. 알렉산드로스는 대략 4만여 병력이었고 포루스는 5만여 병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병력의 일부를 본 진영에 남겨 대군이 머무르는 것처럼 위장한 뒤 밤에 몰래 강의 상류로 올라가 강을 건넜다. 포루스
는 이에 주력을 이끌고 상류로 올라가 강을 건넌 알렉산드로스와 싸웠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우세한 기병(7천 대 4천)으로 포루스의 기
병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고 배후로 돌아가 포루스의 보병을 팔랑크스와 협공하는데 성공한다. 특히 포루스의 파우라바군은 전투코끼
리를 통제하는데 실패하여 마케도니아군의 공격에 폭주한 코끼리들이 되려 아군을 짓밟고 피해를 주었기에 공격하기가 더 쉬웠다. 그
래서 알렉산드로스는 파우라바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포루스는 용감하게 싸우다 결국 항복하였고 포루스의 용맹함을 높이 산 알
렉산드로스는 그를 왕위에 그대로 앉히고 그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선에서 그를 풀어준다.
포루스를 격파하여 인더스 강 남쪽에 교두보를 확보한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자신의 죽은 애마인 부케팔로스의 이름을 딴 부케발리아
라는 도시를 건설한 뒤 이번엔 갠지스 강을 건너 인도 본토에 침입할 계획을 세운다.
(그림) 히다스페스 강 전투
(그림) 알렉산드로스와 포루스의 조우
12. 병사들의 파업과 철군
이때 겐지스 강 남쪽엔 난다 왕조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왕조는 포루스의 파우라바와는 달리 인도 북부를 통째로 지배하고 있는 거
대 국가였다. 포루스의 부하들은 마케도니아인들에게 "난다 왕조는 갠지스 건너편에 20만 보병, 6만 기병, 8천 전차대, 6천 코끼리 부
대를 보유하고 있다" 라고 말하였고, 이런 사실을 들은 데다 너비가 6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강인 베아스 강을 건너야 한다는 점도
있어 병사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난다 왕조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였다. 이들은 파업을 벌였고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설
득시키기 위해 온갖 애를 써보았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 서쪽으로 철군 명령을 내렸으나, 이 회군 과정 또한 험난하여 바빌론에 도
착했을 때는 남은 병력이 인도에서 출발한 병력의 1/10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보급을 담당한 함대가 인도양의 몬순에 바다 멀리 밀려
가 버린 사고 때문이었는데, 그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대는 게드로시아(현대의 발루치스탄) 사막을 지나고 있었으며, 병사가 알렉
산드로스에게 떠다준 물을 "나만 마실 수 없다"고 쏟아버린 일화가 바로 이 사막 행군 중의 일이다. 아무튼 그가 끝까지 갈 수 있었다
면 어디까지 갔을지에 대한 건 역사에서 유명한 얘깃거리 중 하나이다.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죽기 전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거쳐 북아
프리카를 지나 이탈리아 반도에 이르는 원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알렉산드로스가 한 말을 보면 회군한 게 잘한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는 코딱지만 한 땅인데 지금 정복
안 하면 언제 정복하겠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도는 엄청나게 넓은 것은 물론이며, 지금까지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해온 중동
이나 페르시아 같은 땅은 넓어도 인구는 적었던 곳들과는 달리 예나 지금이나 인구밀도도 매우 높은 땅이다. 게다가 몹시 덥고, 습하
며, 정글 지형까지 있어서 저멀리서부터 몰려온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싸움이 아니더라도 전염병이나 풍토병에 병력뿐만 아니라 자신
도 걸릴 확률이 높아서 그만두었을 것이다. 애초에 알렉산드로스가 그렇게 단기간에 빠르게 정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페르
시아가 아케메네스조라는 하나의 통치체제하에서 통일된 지역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반면 정치체제도 문화도 서로 다른 각각의 독
립된 국가들이 통치하고 있고 지형상으로도 습지와 삼림이 널린 인도를 단기간에 통일한다는 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 그 누구라
도 불가능한 얘기다.
13. 원정의 끝과 사망
알렉산드로스는 수사로 돌아가 그를 따라 종군했던 마케도니아 군에게 보상으로 많은 급료를 주고 그들의 빚을 모두 대신 갚아 준 뒤
마케도니아로 귀국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한 이유는 마케도니아 군이 인도에서 파업을 벌였을 때 내세운 표면적 명분이 고향으로 돌
아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오해한 것으로, 사실 이들이 원한 것은 전쟁을 그만두고 싶은 것이었
지 마케도니아로 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들은 알렉산드로스 곁에 머물며 정복자로서의 혜택을 누리고 싶었지 얼마간의
퇴직금만 받고 마케도니아로 되돌아가 실업자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을 거부하며 오피우스
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에게 직접 나아가 이들을 꾸짖고 몇몇 주동자를 처형하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밤에
알렉산드로스가 있는 막사를 포위한 뒤 동틀 때까지 목놓아 울었는데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계획을 철회하고 이들을 모두 용서
한 뒤 이들 전원에게 자신의 '일족'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영예를 주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이들과 함께 주연을 즐긴다. 알렉산드
로스는 그 뒤 마케도니아인들의 반발이 자신의 친페르시아 행보 때문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마케도니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을 융화시
키기 위해 그 두 인종간의 집단 혼인식을 치르게 한다. 이때 페르시아 여자와 결혼한 마케도니아 남자의 수는 무려 1만 명에 이르렀다
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이수스 때 사로잡은 다리우스의 큰 딸과 결혼한다.
이렇게 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일평생을 함께 했던 오랜 친구이자 둘도 없는 심복이었던 헤파이스티온의 죽음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이로 인해 대단한 상실감과 좌절감에 빠졌으며, 그를 기리기 위한 거대한 기념물들을 짓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헤파이스티온의 갑작
스러운 급사 때 자리를 비운 해당 의원을 십자가에 못 박아죽이고, 이후 콧사이오이 부족을 정벌했을 때 그 부족의 청장년 장정들을
모조리 목베어 학살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알렉산드로스도 쓰러졌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고작 32세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쓰러지기 전까지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젊었기 때문에 아랍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진 것이었
다. 쓰러지기 직전 알렉산드로스는 해군 제독이었던 네아르코스와 파티를 한 뒤 아침이 될 때까지 술을 퍼마셨었다. 그 뒤 알렉산드로
스는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고열은 계속되었다.
일주일 후 알렉산드로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다음 날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알렉산드로스의 건강에 무엇인가 이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알렉산드로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 중 지위가 높은 몇 명만 만났는데 이때 알렉산드로스
는 이들을 반기기 위해 간신히 손을 들어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알렉산드로스는 BC 323년 바빌론에서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
상을 떠났다.
에우메네스가 기록한 왕의 일지(Royal Journals)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독살의 징후는 없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사람을 서서히 죽
어나가게 하는 독은 현대에도 드물기 때문이다. 비록 가설이기는 하나, 많은 학자들이 알렉산드로스의 말년의 증세가 말라리아의 감
염증세와 너무 흡사하다는 의견이 많다. 말라리아 자체가 안에 있는 적혈구를 감염시키고 혼수 상태와 구토와 심한 발열 증상을 나타
내어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기까지 하는데 당시 고대에는 말라리아에 대한 대처법이 아직 없는 상태라 알렉산드로스가 원정 도중에 감
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14. 사후 후계 및 분열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이 워낙 급작스럽고 또한 그가 젋은 나이였으므로 그는 후계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 록사
나는 임신 중인 상태였는데 그녀의 뱃속의 유복자가 알렉산드로스의 유일한 아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회의를
열어 이 아이가 사내아이로 태어날 경우 왕으로 삼자고 합의하였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보병들은 그들이 이 회의에서 배제되었다는
이유로 이 합의를 거부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배다른 동생으로 간질에다가 중증 지적장애를 가진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필리포스 3
세)를 왕으로 추대한다. 나중에 록사나가 결국 사내아이 알렉산드로스(알렉산드로스 4세)를 낳자 양측은 합의하여 이 아기와 아리다
이오스를 공동 왕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지적장애인과 갓난아기였던 이 둘은 허수아비로 아무런 실권이 없었으며, 결국 둘 다 비참
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족적과 사후 제국의 분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