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없는 날
귀신도 쉬는 날, 짐 부리는 사내, 빈 그릇 위에 빈 그릇, 의자 위에 의자, 쌓고 쌓는다, 귀신이 쉬는 날, 사내의 짐값은 높지만, 꼭대기 올라가는 사다리차만큼, 덜컹, 덜컹, 내려앉은 사내의 등, 사내는 손 없는 날의 손, 집을 옮기며 짐을 부린다, 동서남북을 옮긴다, 기억을 옮긴다, 귀신도 부리지 못할 짐,
벽 같은 짐들 앞, 짐의 주인이 말한다, 나뭇잎 그려진 상자 못 봤어요? 기억 안 나요? 안 나요, 기억하는 자만 잃을 수 있다,
오늘 사내는 손이 없다, 힘이 없다, 불탄 낙엽 더미처럼, 빈방 그늘에 누웠다, 귀신은 뭐 하나, 나 같은 거 안 잡아가고, 손 없는 날, 귀신도 쉬는 날, 사내는 짐이 아닌 어리광을 부릴 힘도, 없다,
기억난다, 벽 같은 짐들, 그 짐의 주인, 기억나지 않는다, 손 없는 날, 기억난다, 기억하는 자만 잃을 수 있다.
《김경후 시인》
1998년『현대문학』등단. 시집으로『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열두 겹의 자정』『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어느 새벽, 나는 리어왕이었지』가 있다. 현대문학상, 김현문학패를 수상했다.
몇 번인가의 이사를 하였지만, 나는 한 번도「손 없는 날」날짜를 받아서 이사한 적이 없다. 건설사에서 정해놓은 입주기한과 매수인과 나의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이사를 하였을 뿐이다.
손 없는 날의 이사는 이사비용도 더 많이 든다고 들었다. 모두 새집에서 무탈하게 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일일 것이다. 이사를 한다는 것은 시인이 말했듯, “동서남북을 옮”기는 일이고, “기억을 옮”기는 일이며, “귀신도 부리지 못할 짐”을 부리는 일이다. 이 짐은 살아있는 동안 짐의 주인도, 짐을 부리는 사내도 영원히 짊어지고 가야할 짐이다. 가난한 자의 짐은 꿈이 아니어서, “손 없는 날, 귀신도 쉬는 날,”이건만 “사내는 짐이 아닌 어리광을 부릴 힘도, 없다,”
“짐의 주인”이 묻는 질문(“나뭇잎 그려진 상자 못 봤어요?”)에 애써 “기억 안” 난다고 말하는, 이삿짐을 부리는 사내가 잊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나뭇잎 그려진 상자”는 가파른 현실을 돌파할 수 있게 해준 한 줄기 바람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것은 사랑일 수도 윤택했던 과거일 수도 있다. 사내는 한때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음으로써, 애써 삭제함으로써, 현실을 감내하고 견디며 살아가려한다.
무릎을 치게 하는 한 문장이 있다면, 단연 “기억하는 자만 잃을 수 있다.”는 문장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를 불행으로 내모는 무수한 조건들 중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이 있다면, 두고두고 자신을 괴롭히는 지울 수 없는 기억일 것이다.(그것이 좋았던 기억이건 그렇지 못한 기억이건 간에) 내가 과거에 잃은 것이 있다면, 그 기억을 기억하지 않으면 나는 잃은 것이 없는 삶을 산 것이 된다. 내가 과거에 무척 행복하였다면, 그 행복했었던 기억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면, 나는 현실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렇다. 이삿짐을 부리는 사내여! 매분 매초 이삿짐을 부리며 살아가는 나여! “기억하는 자만 잃을 수 있다.” 기억하지 않는다면, 기억나지 않는다면, 나는 매일 백지다. 나는 매일 신생이다. 비로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매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홀로 외롭게 짐을 부리고, 짐을 지고 먼 길 떠나는 이 땅의 고통스런 모든 낙타들에게 부디 축복 있어라.
< 김경후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