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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 6월 10일, 우리나라 최초 항일 독립군 양성기관 신흥무관학교 전신 신흥강습소가 중국 지린성 유하현 삼원포에 세워졌다. 옥수수 창고에서 시작된 독립군 신화 신흥강습소는 이듬해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1920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할 때까지 무려 3500명에 이르는 독립투사를 배출한 일제강점기 최대 항일무장투쟁 기지로 평가받고 있다.
▲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맡았던 신팔균. 민족문제연구소가 소개한 신흥무관학교를 성장시킨 주요인물과 졸업생 54명 가운데 충북지역 인물로는 이광(청주) 전 충북도지사, 신팔균(진천) 대한통의부 사령장 겸 총사령관, 채찬(충주) 대한통의부 중대장 등이 있다. 이 세 명의 충북지역 신흥무관학교 관련 독립운동가 가운데 임시정부 외무부북경주재외무위원, 해방 후 체신부 장관 등을 역임한 이광 전 충북도지사를 제외한 신팔균, 채찬 독립운동가는 조명을 받지 못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훈격한 따르면 이들 셋 모두는 김구, 김규식 등이 받은 대한민국장에 이어 대통령장 다음으로 독립장에 똑같이 서훈되었다. 하지만 이광 전 충북도지사만 어느 정도 자료가 남아 기억되고 있을 뿐 신팔균, 채찬 등은 충북의 자랑스런 독립운동가 역사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충주시 "채찬 독립운동가, 처음 듣는 분"
<충청리뷰> 취재결과 각 지자체에서 생가 복원, 유족 관리 등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충주시의 경우는 채찬 독립운동가에 대해 공보담당, 문화체육과, 주민지원과 등이 서로 모른다며 책임 떠넘기기에 바빴다. 독립·국가유공자등을 총괄하는 주민지원과에서는 "처음 듣는 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훈련생들을 가르쳤던 신팔균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강계주재소와 조선총독 사이토를 습격한 채찬. 하나 밖에 없는 자신들의 목숨을 오직 대한 독립운동에 바쳤던 그들을 추모하고 기리는 것은 후대 우리에게 숙제로 남아있다. |
13. 신팔균
신팔균은 1902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로 강계진위대에서 활약하다가 같은 해 7월 군대가 해산되자 낙향하여 후진육성에 진력하는 한편 1909년 대동청년단에 가입, 안희제, 이원식, 윤세복, 서상일, 김동삼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 남북만주, 북경, 상해, 서백리아 등을 전전하며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8년에는 동삼성의 지도자로서 여준, 정안립, 박성태, 박찬익, 정신, 김동삼, 손일민, 김좌진, 서일 등 38인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오광선, 이범석, 윤경천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2년에는 의군부·광복단·광한단·흥업단 등 대소 8개 단체가 합류하여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에는 그 사령관에 취임하여 양세봉, 문학빈, 심용준, 박응백 등과 함께 무장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 300여명이 통의부사령부 소재지인 왕청문이도구를 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1924년 7월 부하들을 이도구 높은 산에 매복시킨 후 그들과 결전을 행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져 전사하였다. 그는 별호를 동천이라 하여 이청천, 김경천과 함께 독립군인제의 삼천(三天)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14. 채찬
백광운으로 불리기도 한 채찬은 1905년 이강년을 따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당하자 남만지역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졸업후에는 합니하 산골에서 백서농장을 만들고 둔전제로 군인을 양성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여 모험대를 조직하고 국내에 진입하여 적기관을 파괴하고 적의 밀정을 처단하는데 주력하였다. 1920년 본부가 길림방면으로 이동한 후에는 신용관, 김유하 등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여 제1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동년 5월에는 강계군 문옥면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동년 7월에는 이덕창을 시켜 친일파인 후창군수 권응규를 사살하게 하였다. 1921년에는 관전현에서 공격해오는 일경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전, 집안, 통화, 임강, 유하 등 각 현에 있는 친일기관인 일민단, 보민회, 강립단 수십개소를 습격하여 제거하였다. 또 의용단결사대 수백명을 조직하여 강계 어뢰면주재소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한편 1922년 김승학 등과 독립신문의 한문판을 발행하는 자금을 제공하였다. 또한 1922년에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제1중대장으로서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전덕원 등과 의견의 마찰로 통의부가 분열되자 남만의용군 대표로서 상해임시정부에 파견되어 교섭한 결과 김승학, 이유필, 이종혁, 차천리, 박응백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직할의 육군주만 참의부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참의장 겸 제1중대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4년 5월에는 이의준, 김창균에게 국경을 순시하던 제등실 총독을 저격하도록 지시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15. 이광
1907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11년 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건설운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경학사(耕學社)의 조직에 참여했고 일시 신흥학교의 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이른바 무오독립선언(대한독립선언) 때에는 39인의 대표 중 1인으로 참가하여 서명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었고, 1921년 12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위원으로 북경에 특파되어 교민 보호 활동을 하였다. 1932년 9월에는 남경에서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의 조직에 참가, 간부로 활동하였고, 1944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당원으로서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뒤에는 재중 동포의 보호를 위해 한교선무단(韓僑宣撫團)을 조직하여 임시정부가 환국한 뒤 중국 정부와의 연락업무 및 교포 송환 문제 등의 업무를 맡았다.
광복후 체신부장관, 충청북도지사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사리현동 93번지에 있다.
16. 한봉수(韓鳳洙)[1883~1972]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의병투쟁에 나선 한봉수는 1910년 5월 일제에 피체될 때까지 충청북도 일원은 물론 경상·강원지역 등 광범한 지역을 무대로 20여회에 걸쳐 격렬한 투쟁을 벌인 중부지방의 후기 의병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한봉수는 평민으로 구성된 소규모의 부대를 이끌고 민중적 기반에서 호응을 받으며 활동하였는데, 번개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의 명수였다. 그의 투쟁 유형은 일본인 자산가와 친일파 처단, 밀정과 변절자의 응징, 일본군과의 직접 교전, 군자금 모금, 우편행랑의 습격 등 다양하였다.
1910년 체포된 한봉수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합방대사령(合邦大赦令)으로 면소되어 출옥하였다. 이후 1919년 거족적인 독립운동인 3·1운동이 발발하자 4월 1일 고향인 세교리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이튿날에도 내수보통학교 학생들과 장꾼들을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다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학평리에 있다.
17. 곽재기 : 의열단 단원으로 의열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일찍이 상경하여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귀향하여 청주 청남학교(靑南學校) 교사로 재직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헌신하였고, 해외로 망명하였다가 광복 후 귀국, 사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1909년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의 당원이 되어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지하공작을 전개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1919년 7월 만주로 건너가, 동년 11월 9일 김원봉(金元鳳) 등과 일제의 관리·밀정·관공서 등을 주살·파괴함으로써 항일정신을 고취하고 무력으로써 독립을 쟁취하고자 강력한 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에 참여하였다.
그는 의열단 투쟁방침에 따라 폭탄을 구입, 비밀리에 국내로 보낸 후 서울에 잠입하여 계획을 실행하고자 기회를 엿보던 중 1920년 7월, 이 사실을 탐지한 경기도 경찰부에 동지와 함께 피체되어 징역 8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0년 다시 국외로 망명하여 만주·상해·노령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귀국하였다. 귀국 후 한국 에스페란토어 학회를 운영하는 한편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18. 김태희 :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방의 항일투쟁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일찍이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4년에 청주에 청남학교(淸南學校)를 설립하고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안희제(安熙濟)·김동삼(金東三)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적극 지원하여 1920년 9월 10일 연통제(聯通制)의 충청북도 독판부(督瓣府) 참사(參事)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문서의 배포 등의 활동에 진력하였다. 또한 국민회(國民會) 충청북도지회를 조직하여 그 책임자가 되었으며, 청주청년회(淸州靑年會)를 조직하여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21년 전국의 청년회들을 연합하려는 운동에 참가하여 동지 정규택(鄭圭澤)과 함께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 창립총회에 청주청년회 대표로 참석하는 등 항일투쟁을 주도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운암리 산 36번지에 있다.
19. 서광준
서광준은 강내면 출신의 항일투사 전병수(全炳壽)에게 사사(私師)를 받아 일생을 조국 광복 운동에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옥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청주농업학교(현, 청주농업고등학교)를 입학한 그는 3학년에 재학 중인 1929년 11월 광주학생 항일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항일 만세운동의 선봉이 되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초를 겪었다.
그의 독립운동 행적은 청주농업고등학교 교정에 있는 ‘청농학생독립운동기념탑(淸農學生獨立運動紀念塔)’에 기록되어 있으며, 독립기념관 제5관에도 광주학생항일운동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독립운동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한 그는 해외로의 망명을 꾀하였으나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해외 망명에 실패한 그는 국내에 남아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적 역량을 기르는 활동에 전념하였다. 야학(夜學)을 설치하여 미취학 농민자제들을 교육하는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제의 강제 공출에 항거하는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족 경제력 향상을 위해 자비(自費)를 들여 미호천(美湖川) 제방공사를 먼저 시작하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등에 찾아가 공사의 필요성을 적극 진정하여 결국 미호천(美湖川) 제방공사를 추진시켰다. 이로써 지금의 넓은 정봉평야가 형성되어 정봉, 신촌, 서촌 등 인근 지역 주민들의 생활터전이 마련되었다.
제방공사를 추진한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2년 정봉동 주민들이 ‘서광준지사송덕비(徐光俊志士頌德碑)’를 세웠다.
# 단재로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지북동과 석교육거리 사이에 있는 도로.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언론인이었던 신채호(申采浩)[1880~1936]를 기리기 위해서 그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다.
# 의암로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내덕칠거리에서 주성동의 시계사이에 있는 도로. 독립운동가인 의암 손병희(孫秉熙)[1861~1922]의 출신지인 청원군 북이면으로 연결되는 도로로 손병희의 독립 정신을 후세에 깊이 전승하기 위하여 아호를 따서 그 이름을 지었다.
20. 단재 신채호
[정의] 역사가·언론인·독립운동가·문인.
[가계]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이다.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大德郡) 산내면(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열혈생(熱血生), 한놈, 검심(劍心), 적심(赤心), 연시몽인(燕市夢人) 등이다. 조선시대 신숙주(申淑舟)의 18대 손이 된다. 고령신씨(高靈申氏)의 일부는 연산군 무렵에 낭성과 가덕 지방에 낙향하여 살았는데, 상당산성 동쪽에 산다고 하여 산동대가로 지칭되기도 했다.
[활동사항] 신채호(申采浩)[1880~1936]의 이름은 청년기까지 한자로 ‘寀浩’로 쓰다가 국외 망명을 전후하여 ‘采浩’로 바꾸었다.
신채호는 어려서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로부터 한학 교육을 받았으며, 아홉 살에 『통감(通鑑)』전질을 해독하고 열 살에 행시(行詩)를 지을 만큼 총명하였다. 열두세 살 때에 능히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을 독파하여 신동이라 불리었다.
열여덟 살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집에 드나들며 책을 두루 읽으며 그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열아홉 살 때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당시 이름 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 교수이던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김연성(金演性), 변영만(卞榮晩), 이장식(李章植), 유인식(柳寅植) 등과 교유하였다.
이 무렵에 신채호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독립협회 내무부 문서부에서 활동하였다. 스물두 살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申圭植)[1879~1922] 등과 개화와 자강의 교육사상을 펼쳤고, 스물다섯 살 때에는 신규식, 신백우(申伯雨)[1886~1959]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하여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스물여섯 살 되던 1905년 2월에 성균관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에 들어가 논설을 쓰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정간되어 퇴사하고 그 이듬해에 신채호는 양기탁(梁起鐸)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申報社)에 들어가, 그 뒤 주필이 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더불어 그는 1907년 9월에 그는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여 정치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어 무단통치가 이루어지자 독립운동 기지를 국외로 옮기자는 신민회의 결정에 따라 신채호도 1910년 4월에 망명길에 올라 그 해 여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다. 여기서 그는 윤세복(尹世復), 이동휘, 이갑 등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해조신문(海潮新聞)』의 후신 『대동공보(大東共報)』에도 관여한 듯하며, 이해 12월에 창설된 권업회(勸業會)에서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을 창간하자 주필로 활약하였다.
1913에 그는 북만주 밀산(密山)을 거쳐 상해(上海)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였고, 문일평(文一平), 박은식(朴殷植), 정인보(鄭寅普), 조소앙(趙素昻)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1914년에는 윤세용(尹世茸), 윤세복 형제의 초청을 받아 만주 봉천성 회인현(滿州 奉天城 懷仁縣)에 가서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朝鮮史)』를 집필 발간했다. 이 때 그는 백두산과 광개토대왕릉을 비롯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고적지를 돌아보며 부여·고구려·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가 한국사의 새로운 체계화를 구상하면서 1916년 3월에는 북경에서 애국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소설 「꿈하늘(夢天)」을 썼다.
1918년경부터 그는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우거하면서 국사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였고, 그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漢城政府)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해 7월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 겸 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晩)의 노선에 반대하여 이를 사임하였으며, 이어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에 대립되는 『신대한신문』을 창간, 주필이 되어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하였다.
1922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그 이듬해 초에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였는데, 이 선언에서 그는 폭력에 의한 민중직접혁명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해 1월초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創造派)의 맹장으로 활약하였으나, 개조파(改造派)와의 대립으로 5월 그 회의가 결렬되자 북경으로 돌아와 석등암(石燈庵)에 거주하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그는 아나키즘 사상에도 심취했다.
1927년에 그는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면서 국외에서나마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1928년 4월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대회에 참석하여 활동하는 등 그의 행동투쟁은 점점 거세어졌다. 그러다가 그는 그해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 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되었다.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되어 복역하던 중 1936년 2월 21일 쉰일곱 살에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신채호는 평소 "내 죽거든 시체가 왜놈의 발길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 재를 바다에 띄워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아무도 모르게 그의 유해를 들여와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상당산(上黨山)[419m] 기슭 옛 집터에 암장하였다. 이때 만해 한용운이 돌을 깎고, 오세창이 글씨를 새긴 비석을 신백우가 몰래 세웠다.
[학문과 사상]
독립운동가로서 신채호의 사상은 절대독립론, 무장투쟁론, 민족혁명론(민중직접혁명론) 등 세 가지 형태로 표현된다. 절대독립론은 3·1운동 후에 대두한 자치론, 내정독립론, 참정권론 등 일제와의 타협주의를 분쇄하는 데 큰 공헌을 하여, 비틀거리던 독립운동노선을 바로 잡아주었다.
무장투쟁론과 민족혁명론은 강도와 같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폭력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한 투쟁이 정당함을 가르쳐 주어 그 후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방법적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학자·언론인·문인으로서 신채호의 사관은 그가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의 초창기 사관은 소수의 영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영웅주의 사관이었으나, 그 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는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민족의 독립을 위한 것으로 귀결되므로 결론적으로 신채호의 사상은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저술]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朝鮮史)』를, 국사 연구에 노력하여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를, 한말의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면서 썼던 것으로는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이순신전(李舜臣傳)』,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등 많은 저서가 있다.
[작품]
중편소설 「꿈하늘(夢天)」을 집필하였는데, 이는 일종의 환상적인 사상소설로서 그의 애국적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것이다.
[의의와 평가]
첫째, 독립운동가로서 신채호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였다. 민족의 자강과 독립이라는 사상적 바탕 위에서 한 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의 사상과 행동은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노선을 정립하고, 이후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방법적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둘째, 역사학자로서 신채호는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의 조선사 연구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려 하였고, 조선혁명선언 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이 뚜렷이 나타냈으며,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 파악하는 한편, 역사연구에 있어서 실증(實證)을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역사학은 우리나라의 근대사학 및 민족주의사학의 출발로서 평가되기도 하나, 민족주의사상의 역사연구에의 지나친 투영이 그의 역사이론 및 한국고대사인식을 교조적(敎條的)·독단적으로 이끌어갔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셋째, 작가로서 신채호는 번안과 여러 장르의 창작 활동을 통해 한국민족문학사를 세우는 데 하나의 디딤돌이 되었다. 그는 우리 신문학 운동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신문학 형성에도 선구적 역할을 했다.
또한 그의 주체적 문학 및 문학론은 조선조와 근현대 문학을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서구화된 근대, 억압된 근대에 맞섰다. 이러한 면을 볼 때 그의 문학은 우리의 민족문학적 위치를 굳건히 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자리매김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