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다 함께 먹고 그는 우리를 뉴저지에 곧 개업할 자신의 평범한 소아과 클리닉을 보여주었다. 또 저녁을 먹었고 그리고는 근처 어디에 우리 모두를 묵게까지 했다.
부모님의 짧은 미국일정에 시간 낭비만 같고 무슨 대단한 의미가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볼 데 많고 갈 데 많은 화려한 뉴욕에 이리 이틀이나 시간을 버리다니 워싱톤에서 4시간이나 기차타고 온 나의 시간도 그러하나 한국서 오신 연로한 부모님 시간이 아깝고, 떨어졌던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자꾸만 줄어들어 아깝게만 느껴졌다.
더 할 얘기도 없었고 어떤 경우에나 말씀 잘 하시는 아버지마저도 대화가 끊어지곤 했다. 길고 지리한 시간이었다.
다음 날 낮이 되자 Columbia 대학원 다니는 동생 거처가 있는 학교 옆 Broadway에 우리를 내려주고는 아버지 손을 잡고 작별인사를 하던 빛 光자 석 三자 광삼씨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며 처음 보는 자신의 아버지 친구인 내 아버지의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작별조차 자꾸 시간을 끌어 초조해진 나는 - 아버지 그만 가요 - 하는 눈짓을 했다. 얼마 전 서울에서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에 대한 회한과 사무침에 우리와의 시간을 그리도 질질질 끌었다는 걸 즉각 알아차린 아버지는 "네가 이 사람 마음을 너무도 모르는구나 " 나의 서두르는 마음과 철없음을 대놓고 답답해 하였다.
아버지의 동정의 마음이 그를 향해 쏟아졌다.
그에게 깊은 연민의 마음을 드러내며 아버지가 이 딸내미의 철없음을 한없이 가엾어 하시던 데가 여기 어디쯤인데~ 어디였더라~
40년 후 10월 말 손이 시린데, 학교 옆 Broadway 거리에서 두리번거린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과 광삼씨의 마음은 바로 그 몇 해 후 아버지가 서울에서 갑자기 가시는 순간, 볼티모어Baltimore에서 가슴이 찢어질 듯 가슴깊이 깨닫게 된다.
세월이 흐를수록 두고두고 떠오르는 장면이요 모습이다.
서른 한살 차이나는 아버지와 나의 생각의 gap은 그렇게 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