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장의 분문에는, 사도 바울이 자기의 동족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일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들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있을 것을 믿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2 내게는 내 동족을 위한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3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여 하나님과 멀어진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안타까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신 약속을 저버린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서 이삭을 선택하시고 이삭의 아들 중에서는 야곱을 선택하셨듯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선택받을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선택받지 못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기 어려워집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도, 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으신 결과라면 어떻게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물음에 대해 바울은 이런 논리로 답합니다. 21~23절을 보겠습니다.
21 토기장이에게는, 흙덩이 하나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귀한 데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한 데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22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보이시고 권능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멸망받게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에 대하여 꾸준히 참으시면서 너그럽게 대해 주시고,
23 영광을 받도록 미리 준비하신 자비의 그릇들에 대하여 자기의 풍성하신 영광을 알게 하시고자 하셨더라도, 어떻다는 말입니까?
토기장이가 흙으로 자기가 원하는 그릇을 만들 권리가 있답니다. 당연합니다. 토기장이가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문제라면 기꺼이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릇은 귀한 데 쓸 그릇도 필요하고 천한 데 쓸 그릇도 필요하니까요.
그러나 사람은 그릇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나는 인격체입니다. 그런데 인격체의 자유의지가 무시되고 하나님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면, 그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격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본문에 나타나는 사도 바울의 논리에는 허점이 많습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거의 억지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이 멸망 받게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에 대하여 꾸준히 참으시면서 너그럽게 대해 주셨다는 논리는 자기모순으로 보일 뿐입니다.
멸망의 길로 정해진 사람에게 참고 기회를 주셨다면 돌이켜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참거나 너그럽게 대해주는 것에 대한 정당성과 의미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결국은 멸망의 길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참고 기회를 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천 년 전이라지만 바울답지 않은 논리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의 이 논리에 동의한 신학자들이 역사적으로 매우 많습니다. 바울의 이런 논리는 훗날 개신교, 특히 장로교의 주요 교리인 예정론의 근거가 됩니다.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정해 놓으셨다는 교리입니다. 구원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예정된 자는 스스로의 어떤 노력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논리가 장로교의 시조인 장 칼뱅(영어식 발음으로는 존 칼빈)에 의해 장로교의 교리로 채택되었습니다.
이 교리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설 자리가 없다면서 보다 순화된 예정론을 주장하고 나선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목사이자 신학자인 아르미니우스입니다. 그는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든다며,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예정은 죄를 지을 자와 그렇지 않을 자를 미리 아셨기에, 구원받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예정하신 것이라는 예지예정론을 주창합니다.
칼빈의 예정론을 절대예정론 또는 이중예정론이라고 하는데, 절대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했다는 뜻에서, 그리고 이중예정론은 구원받을 자와 심판받을 자를 구분하여 이중으로 예정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칼빈의 절대예정론이 장로교의 교리로 채택되면서 아르미니우스는 장로교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칼빈보다 200년 후에 태어난 존 웨슬리에 의해 감리교의 주요 교리로 채택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변명을 해도 예정론은 운명론일 뿐이며, 성서무오설에 사로잡힌 수백 년 전의 신학자들의 한계일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서의 모순과 한계가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오늘날에까지 신주단지처럼 받들고 모셔야 할 교리가 아니며, 이제는 버려야 할 구시대의 유물입니다.
제가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로부터 자유롭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상식입니다. 오늘날 여자가 히잡을 써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이슬람의 전통 교리에 사로잡힌 이슬람 신학자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신학적 문제일 수 있겠지만, 이슬람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고 건전한 상식을 가진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분별할 수 있는 문제인 것과 같습니다. 그냥 개인에게 선택권을 주면 되는 문제니까요.
바울의 바울답지 않은 주장이 성서무오설이라는 교리의 등에 업혀 오래 동안 신학자들을 괴롭힌 결과가 칼빈의 절대예정론으로 귀착되었습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볼 때는 어리석고 말도 안 되는 논리지만 이천 년 전이나 수백 년 전에는 충분히 고민할만한 문제였습니다. 지구 전체를 화면으로 볼 수 있는 현대인이 지구는 평평하고 바다 끝으로 가면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므로 너무 멀리 항해하면 안 된다고 믿었던 수백 년 전 사람들을 향해 무식하다고 비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얘기가 길어졌습니다만 사도 바울을 변호하는 말씀을 조금 더 드리고 싶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던 중에 고린도에서 로마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라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도서관에 틀어박혀 오랜 기간 연구에 전념하며 석사학위 논문이나 박사학위 논문을 쓴 게 아닙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믿음의 동지가 된 로마의 교우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논문이 아니라 편지를 쓰다 보면 감정이 좀 격해질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평정심을 잠시 잃어버릴 수도 있겠습니다. 자기 한탄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얘기도 했다가 뒤늦게 후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다시 태어난다면, 적어도 로마서 9장에 대해서는 많이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로마서 뿐 아니라 바울의 서신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인류 전체의 고전이 될 성서를 쓰고 있는 게 아닙니다. 감히 성서를 쓴다는 그런 발칙한 생각은 추호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훗날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세우겠다는 그런 허무맹랑한 의도 따위는 더더욱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세계 종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저 로마에 사는 교우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믿음과 소망 가운데서 힘차게 살아가라고 격려해주고 싶어서 쓴 편지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의 소박한 글을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성서무오설에 가두어놓고 움직일 수 없는 배타교리의 원 자료로 삼은 교회의 어두운 역사가 가슴 아플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