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싱 여행13 - 서시하 운하에서 라이브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고는 관제묘에 가다!
10월 25일 자싱난짠 嘉兴南站(가흥남참)에 도착해 98번 버스를 타고 가흥 버스터미널 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40분을 달려 우전 乌镇(오진) 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10여분을 걸어서... 오후 2시가 넘어 서책 남문 西柵 南門(서책남문) 으로 입장을 합니다.
西栅大街(서책대가) 를 걸어 大剧院(대극원) 과 희명호 를 거쳐서 운하들이 만나는
3거리에 이르러 오른쪽 望津河(망진하) 운하를 구경하고는 주랑을 건너
升莲广场(승련광장) 으로 넘어가 白蓮塔(백련탑) 에 올라 서책경구내 운하와
다리며 집들에다가 건너편 京杭大运河(경항대운하) 를 지나가는 배들 까지 조망합니다.
백련탑을 내려와 升莲广场(승련광장) 에서 민찬객잔이라는 여관을 지나 그토록
찾아 헤메던 맥주집 으로 들어가 맥주를 시키는데 인테리어는
아주 훌륭하건만 오후 4시 반으로 아직 시간이 이른 탓인지 손님은 없습니다.
혼자서 안주도 없이 맥주 한 병을 비우고는 나와 望津河(망진하) 운하를 따라 큰 길로
나가니 西市河(서시하) 라는 큰 운하와 합쳐지는 부분에 작은 광장에 다리가 있으니...
望津河(망진하) 운하에 걸린 다리는 通济桥(통제교) 이고 큰 운하인 西市河(서시하)
에 걸린 다리는 仁济桥 (인제교) 인데..... 여긴 인파가 넘쳐 흐릅니다.
通济桥(통제교) 를 지나서 우회전을 하니 오른쪽 白蓮街(백련가) 에는
"라이브 공연을 하는 카페(酒 Bar)" 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게는 위치가 엄청 중요하다더니... 조금 전에 들어간 모퉁이 저편
맥주집 과는 달리 여기 카페들의 안과 밖에는 엄청난 인파 로 붐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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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들어가 맥주 한잔을 하며 라이브 음악도 듣고 싶은데 마눌은 방금 전에 맥주를
마셔 놓고는 왠 술타령이냐? 라는 눈치라.... 슬프지만 참을 수밖에 없네요!
라이브 카페를 거쳐 文昌閣(문창각) 문을 지나니 오른쪽에 광장이 나오는데...... 바로
관우를 모시는 "關帝苗(관제묘)" 로 중국 각 지방에서 흔히 볼수 있는 유적입니다.
관제묘(關帝廟) 는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관우의 위패를 모신 사당 으로 중앙에 관우의
위패를 두고 그 좌우에 관평(관우의 아들)과 주창(관우의 심복장수) 의 위패를
두는데, 주창은 실존하는 인물은 아니고 삼국지연의 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관제묘(關帝廟) 는 17세기후 중국 대륙의 각지에 세워졌으니 중국인들의 관우
사랑 은 우리나라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데... 이것이 발전하여 한국, 대만, 홍콩, 일본 등지에도 관제묘가 세워졌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개성에 도교(道敎) 의 대청관 을 세웠는데 이후 한성으로 이전하니 삼청전
(三淸殿)에는 도교의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 3청(三淸) 의 초재 제사를
나라의 관청인 소격서(昭格署) 에서 맡았다는데 오늘날 서울 삼청동, 동 이름의 유래입니다.
임진왜란 전란으로 불타 없어진후 파병된 중국 장수들에 의해 조정의 도움으로 남대문과
동대문 바깥에 관제묘(關帝廟) 가 세워졌고 지방에도 여러 관제묘가 세워 졌으니...
이순신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싸운 진린 제독도 관제묘를 건립한 주체 중에 한사람 입니다.
다시말해 동묘(東廟) 는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에 있으니... 중국 명나라가 망해버린
나라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 “再造之恩(재조지은)” 크나큰 은혜를
갚기 위해 조선 선조 1601년에 지어진 건물로 보물 142호 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일본 고베 관제묘(神戶關帝廟) 는 일본 효고현(兵庫縣) 고베 시(神戶市) 중앙구
(中央區) 에 있고, 요코하마 관제묘(橫浜關帝廟) 는 막부 말기에
일본 가나가와 현(神奈川縣) 요코하마 시(橫浜市) 중구(中區) 에 세워졌습니다.
그 외에도 관제묘로는 보기 어려우나... 일본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시 숭복사(崇福寺)
경내에도 관우의 좌상을 모시고 있으며 일본 하코다테시 에도 소규모의
관제묘가 있어 홋카이도 유일의 관제묘로 일컬어지는데 중국만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명나라 병사들이 이여송의 지휘하에 평양성의 고니시 유키나가군을 공격할때 중국 남부지방
병사들로 구성된 화포 부대와 장창 부대가 큰 역할을 했으니 그 기원을 살펴보면...
척계광 이 중국 남부를 휩쓴 왜구에 대항해 1556년 부터 1567년까지 절강성과 복건성
및 광둥성에서 장창과, 낭선, 당파를 이용해 원앙진 을 펼친데서 유래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동아일보 임용한의 전쟁사에 “칼을 이긴 나무껍질” 이란 칼럼이 있는데..... “하이에나 떼는
암사자만 있는 무리에게는 겁 없이 덤벼든다. 하지만 대장 수사자 가 나타나면 도주
한다. 이 광경을 보면 군대는 양보다 질 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대장 수사자도
메뚜기 떼의 공격을 받으면 살아날 수 없다. 양과 질의 문제는 전쟁사에 영원한 고민이다.”
“저장성에 파견된 명나라의 장수 척계광 은 질에 대한 양의 무력감을 절감하고 있었다.
숫자만 많았지 오합지졸인 명나라 군대는 직업전사인 소수의 왜구 에게 무참하게
패하고 있었다. 명나라군은 훈련도도 낮았지만 군사비 문제도 심각했으니 대병력을
운용하려면 많은 무기와 장비를 생산해야 하니 비용도 높아지고, 생산시간도 오래 걸린다.”
“척계광은 미얀마 주민들이 죽창과 나무껍질로 만든 방호구 를 들고 명군에 저항했던
기억을 되살려 그들의 자연산 무기 에서 커다란 아이디어를 얻었다. 가지가
주렁주렁 달린 생대나무 는 의외로 칼과 창을 막는데 효과적이었다. 등나무 껍질 을
감아서 만든 방패 는 질기고 아무리 강력한 일격에도 절대로 한 번에 쪼개지지 않았다.”
“척계광 에 의해 낭패와 등패 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 무기는 일본도의 공격을 막는데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 무엇보다도 값이 싸서 빠르고 쉽게 대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었다. 척계광은 여기에 몇 가지 아이디어를 더해
원앙진 이란 새 전술을 창안했고, 이 전술로 왜구를 격퇴해 명나라의 영웅 이 됐다. ”
“양도 질이 받쳐줘야 하고 질도 양이 따라줘야 하니 적절한 균형 이 필요하다. 전쟁사를
보면 간혹 양이 안 되니 질로, 질이 안 되니 양으로라는 식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있다.
왜구에 대한 명군의 초기 대응이 물량공세 로 질을 이겨 보자는 식이었다. 어렵다고,
보기 싫다고 해서 하나를 배제하고 하나를 강화해서 이겨 보자는 식으로 싸우면 필패다.”
왜구 는 신라시대에도 수십차례나 침범해 신라 수도 서라벌이 3차례나 포위 되었는데 그중
3번째인 399년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내물왕은 고구려에 노객이 되겠다며 읍소하니
광개토대왕은 5만 대군을 보내 신라를 구원했는데 왜구는 3년후 황해도를 습격해 보복합니다.
신라를 통일한 문무왕 은 땅에서 편안하게 영면하지 못하고 저들 왜구의 침입을 막겠다며...
바닷속에 몸을 뉘였으니 수중왕릉 인데, 잠잠하던 왜구는 1223년 고려 고종때 김해를
약탈한걸 시작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극성을 부리니 해안가에는 사람이 살수 없었습니다.
이후 공민왕 (1352~1374) 때는 경상, 전라도는 물론이고 멀리 함경도와 평안도 에 까지
출몰하며 황해도에 상륙해 개경을 노리니 수도를 철원등 내륙으로 천도 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는 데... 20년간 무려 100회 가 넘는 침입으로 고려는 쑥대밭 이 됩니다.
우왕 (1375~1388) 때를 보면 14년간 왜구의 침략 횟수는 370회 나 달했으니 강화가 함락
되고 수도 개경이 왜구에게 위협 당했으며 고려 강산은 산산히 찢어져 피로 얼룩지니
해안 지방은 사람의 자취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무인지경으로 변해 황폐화 되니 조선
태종은 울릉도에 공도령(空島令) 을 내려 주민들이 먼 섬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울릉도는 고려시대 전기에는 함경도 에 천여년전 부터 거주하며 숙신- 읍루- 말갈 을 거쳐
"여진" 이라고 불리던 주민들이 해적 이 되어 강원도 동해안과 일본 서부해안에 심지어
규슈까지 해적질을 다니는 "도중에 들르는 섬" 이라 사람이 살수 없었는데, 고려시대
후기에는 왜구들의 침탈이 끊이지 않는지라 조선이 서고도 나라가 지켜줄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인의 울릉도 거주를 금하고 3년에 한번씩 순시선을 보냈는데 1407년 대마도주 종정무는
평도전을 보내 무릉도(울릉도)에 왜인들이 이주하기를 청원하므로 불허했고.... 광해군
때인 1614년 2차 청원도 거부했으며 1884년 순시선이 불법 거주 왜인 150명 을 적발하자
고종은 공도정책을 포기 하고는 조선인들을 울릉도에 이주 시키니 현재 주민들의 조상입니다.
첫댓글 동묘(東廟) 는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에 있습니다.저도 한번 가보앗습니다.
여기에도 관우상을 모시고 잇더군요.
중국에서 관우를 우상화하는게 참 신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