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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문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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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이야기 스크랩 서울 무악동 선바위
들꽃* 묘연 추천 0 조회 18 09.08.21 15:26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서울 무악동 선바위

 

본지는 2008년 무자년 새해부터 전국에 산재해 있는 불교설화를 발굴해 매주 수요일자 발행신문에 싣는다. 사찰 창건설화에서부터 지역 명승지, 마을에 얽힌 불교관련 설화를 현장취재 채록, 그리고 문헌을 토대로 재구성해 잊혀질 우려가 있는 귀중한 불교설화를 기록으로 남긴다.

 

 

바위를 도성에 넣을 것인가 제외할 것인가

조선도읍 한양성축조 과정에서

무학왕사와 정도전 첨예한 대립 

 

종로구 무악동 산 3번지에 위치한 선바위의 뒷모습. 스님들이 장삼을 입고 가사를 두르고 있는 모습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바위에는 척불숭유의 슬픈 조선개국 역사가 들어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시인 수도 서울. 그 중에서도 청와대가 위치한 백악산은 명당 중의 명당으로 손꼽힌다. 청와대를 배경으로 한 산은 백악산(해발 342m)이고, 바로 우측에 인왕산이 있다. 인왕산은 해발 338m밖에 되지 않지만 예로부터 호랑이가 출몰하였다는 이야기가 빈번할 정도로 산세가 험하기로 소문이 나기도 했다.

인왕산 중턱을 오르다 보면 커다랗게 생긴 바위가 있는데 범상치 않다. 어떤 이는 이 바위 모양이 장삼을 입고 가사를 두른 스님을 닮았다고 하여 ‘선(禪)바위’라고 부른다. 이 바위는 조선 태조와 무학왕사의 상이라는 전설과 태조부부의 상이라는 전설이 있다. 선바위에 얽힌 설화를 추적해 보자.

태조 이성계는 송도, 지금의 개성에 새 나라를 개국하고 이듬해부터 새 왕도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민심을 담을 도읍지를 정하기로 하고 무학왕사에게 명을 내렸다. 무학왕사는 어명을 받들어 전국을 수소문한 끝에 새 왕자리를 물색하다가 한양과 계룡산, 두 곳을 후보지로 간택하게 된다.

“어디가 좋을까.” 무척 고민에 싸인 무학왕사는 우선 계룡산을 선택, 수만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성을 쌓기 시작했다. 또 궁궐터를 닦고, 새 왕도건설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날 밤에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계룡산 주산인 연천봉(連天峰)에 이상한 몸차림을 한 노인이 나타나 무학왕사에게 큰 소리로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이 곳은 훗날 정씨가 도읍지로 할 땅이니 포기하시오. 이 씨가 도읍지로 해야 할 땅은 한양이니, 지체하지 말고 한양에 가서 왕도를 정해야 할 것이외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에 성을 쌓던 백성들과 무학왕사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었으니 곧 소문은 빠른 속도로 태조에게 전해졌다. 물론 전국의 백성들조차 이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동요되고 있었다.

“계룡산에는 도읍지로 적당하지가 않다네 그려.”

“그렇다네, 아니 무슨 회괴한 일이 있는가. 계룡산 산신이 틀림없을 것이네. 하루바삐 노인이 일러준대로 한양에 도읍지를 정해야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여지네. 그렇지 아니한가.”

소문이 사실로 백성들에게 받아들여지자 태조는 명을 내려 계룡산에 벌이던 도읍지 터닦기 공사를 중지하고, 한양에 와서 도읍을 정하기로 했다. 그 이듬해 9월 태조는 한양에 ‘신도 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거대한 역사를 시작했다.

무학왕사가 태조를 도와 동야(東野, 지금의 왕십리) 근방에서 지세를 살피고 있었다. 그때 한 노인이 밭을 갈면서 소를 꾸짖기를 “미련하기 마치 무학 같은 소, 바른 곳을 버리고 굽은 길을 찾는구나.” 하므로, 무학왕사는 그 말을 듣고 놀라 물었다.

“지금 소더러 무학같이 미련하다고 하시었는데 내가 무학이요. 내 생각에는 이곳이 도읍지로 좋다고 생각하는데 어디 좋은 곳이 있습니까.”

하고 가르쳐 주기를 청했다. 그 노인이 채찍으로 가리키면서 “여기서 십리만 더 들어가 보시오.”라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왕십리(往十里)라는 지명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무학왕사가 그 곳에 처음 왕심(枉尋-몸을 굽혀 찾아나섰다는 뜻)하였던 곳이므로 뒷날 왕심리(枉尋里)라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무학왕사는 조선의 종묘사직을 담당할 궁궐터를 한양에 정하고 고민한 끝에 인왕산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현재의 청와대가 있는 산인 백악산을 좌청룡(左靑龍)으로 삼고, 남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아 동쪽을 향하는 대궐을 짓고자 했다. 그러나 이 때 유학자 정도전이 반대하고 나섰다.

“예로부터 제왕은 남면이치(南面而治)하였고, 동향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나이다.”

태조 앞에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정도전의 발언에 무학왕사는 난감했다. “분명 정도전의 말을 들었다가는 조정의 우환이 생길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소승의 말을 듣고 왕조의 백년대계를 세우셔야 합니다.”

태조는 마음이 흔들렸다. 무학왕사의 말이 백번 지당한 듯 하나 고려시대 때부터 큰 권력화 되어있는 불교를 등에 업고 있는 것이 내심 부담이 되었다. 그렇다고 정도전의 말대로 하기에도 부담이 되었다. 무학왕사의 자신에 찬 예지력 때문이었다.

 유학자 의견 수용해 성에서 제외

‘불교 쇠락’‘유교 흥성’하는 계기 돼

“만일 소승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는 국가에 큰 환란이 있을 것입니다.”

마을 주민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무학왕사가 도읍지를 정할 때 인왕산을 진산으로 삼고 좌측의 남산을 좌청룡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측의 안산을 우백호로 삼아 정남향인 관악산을 향하는 궁궐터를 짓고자 했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맑은날 인왕산 중턱에서 앞을 바라보면 관악산이 정면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학왕사의 의견은 “궁궐터가 들어설 자리가 좁다”는 반대에 부닥쳤다. 그래서 대안으로 공덕동이나 신촌(연희동)을 대안으로 제시했다고 한다. 무학왕사는 “한강과 예성강, 임진강이 합수되는 곳이 보이는 곳에 궁궐을 지어 왕조가 500년 넘게 지속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이 주장 역시 정도전이나 하륜 등 유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 뜻이 관철되지 못했다고 한다.

무학왕사와 정도전의 대립은 여기에서도 끝나지 않았다. 정도전의 말대로 백악(북악)을 진산으로 하여 도성을 쌓을 때 현재 종로구 무악동 산에 위치한 ‘선(禪)바위’를 도성안에 넣느냐와 마느냐를 두고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만일 선바위를 도성 안에 넣으면 불교가 크게 흥성할 것이요, 정도전의 말대로 선바위를 도성 밖으로 내치면 유교가 크게 흥성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태조는 결정을 미루고 돌아와 잠을 청하였는데 꿈에 4월인데도 눈이 쌓이는 선몽을 꾸게 되었다. 이에 밖을 내다보니 낮에 회의하던 곳이 보이고 안쪽으로 들여 쌓은 쪽의 눈이 녹아 버렸다. 태조는 이것이 하늘의 계시임을 알고 정도전의 주장대로 선바위를 성 밖에 두게 했다. 무학왕사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제 중들은 선비의 책 보따리나 짊어지고 시중하며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결국 태조는 무학왕사의 뜻을 버리고 정도전의 말을 받아들인 것. 그래서 현재와 같이 백악산을 진산으로 하고 낙산(駱山)을 좌청룡으로 인왕산을 우백호로 하여 남향 대궐을 지었다고 한다. 결국 무학왕사의 말을 듣지 아니한 과보로 조선은 200년 후에 임진왜란을 맞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이 선바위가 위치한 행정구역은 현재 서울 종로구 무악동 산 3번지다. 이곳은 지난 1946년부터 1974년까지 서울 서대문구 현저3동으로 편입돼 있었으나 행정구역조정으로 1975년부터는 종로구 무악동으로 편재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바위는 서울특별시 시민속자료 제4호로 지정돼있다. 이 지역 인근에는 인왕사를 비롯해 20여 곳의 암자가 산재해 있다. 또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인 국사당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와 호신신장(護身神將)을 모시는 사당으로 1925년까지는 남산 팔각정에 있었으나 그해 7월 현재 인왕산 중턱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때부터 선바위 일대에는 무속인들이 붐비기 시작하여 현재도 각종 무속이 행해지는 곳이 되고 있다.

현재 ‘무악재고개’라고 불리는 명칭도 원래는 무학왕사와 유교의 일파가 서로 논쟁했다는 이야기에서 나와 ‘무학재고개’라고 불렸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언제부턴가 ‘무악재고개’로 부르고 있다. 종로구 무악동 사람들은 현재의 지명에 대해서도 “무학왕사의 이름을 딴 무학동으로 하든지 인왕동으로 해야 옳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 찾아가는 길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독립문 역에 내려 무악동 사무소 방향으로 찾아가다 보면 ‘선바위’라는 문화재 이정표가 보인다. 과거 이 지역은 밀집된 주거지역이었으나 요즘은 무악동 일대가 재개발 바람을 타고 높은 아파트가 한창 건립되고 있다. 아파트가 끝나는 곳에 인왕사 일주문이 있고, 그 안에는 8개종파 20여곳의 사찰이 있다. 많은 사찰의 중심공간에 선바위가 위치하고 있다.

참고문헌 및 도움주신 분:

<불교영험설화>(한정섭), <한국민간전설집>(한상수), 종로구 한근수 무악동장, 인왕산 인왕사 사찰 관계자들.

[불교신문 2391호/ 1월9일자]

2008-01-05 오전 10:14:42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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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9.08.21 16:05

    첫댓글 불교설화를 읽다 보면 지명도에 얽힌 이야기도 알게 됩니다. 아~불자 가수 김흥국의 노래중에'59년 왕십리'의 왕십리도 여기서 십리만 더 들어가라는 말에서 往十里라는 지명이 ^*^

  • 09.08.27 23:42

    인왕산,무악재.. 학창시절 등하교할때 버스를타고 항상 지나던 길이었는데, 그런 설화를 가진 선바위를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고향가는 기분으로 가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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