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장 1절
1 태초(太初)에 하나님이 천지(天地)를 창조(創造)하시니라
“1. 만나주석
창세기 서론
(1) 제목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성경의 첫 글자를 따서 창세기를 ‘בְּרֵאשִׁית 브레쉬트’(태초에)라고 부른다. “창세기”(創世記, Genesis)라는 이름은 70인역에서 번역한 것으로, 헬라어 게네시스(genesis)는 “기원” 또는 “근원”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 명칭은 히브리어 성경의 원본에 처음부터 붙어 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세기가 지난 뒤에 덧붙여진 것이다.
(2) 저자
본서의 저자는 모세이다. 특히 본서는 신구약 성경 자체와 모든 고대 문헌 및 전승, 그리고 교회 교부들이 모세의 책으로 인정하는 오경 중 첫째 책이다.
(3) 기록 연대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한 시점인 B.C. 1446년 이후와 모세가 느보 산상에서 임종을 맞이한 B.C. 1406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본다. 엘렌 지 화잇은 히브리인들이 아직도 애굽의 속박하에 있을 때, 미디안 광야에서 기록하였다고 언급하였다(부조와 선지자, 251).
(4) 주제
구속 계시의 막을 여는 책으로써 그 내용에 있어서도 기원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즉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비롯하여 사람, 안식일, 결혼과 가정, 죄와 죽음, 문명과 문화, 그리고 희생과 구속 등 모든 존재의 기원이 명쾌히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본서는 각 부분마다 계보 기록의 서두를 이끄는 가운데 출생, 선택, 족보, 역사 등의 구속적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태초에. [בְּרֵאשִׁית 브레쉬트] 히브리어 ‘רֵאשִׁית 레쉬트’는 ‘첫째, 처음, 최초, 시작, 최상의 것’을 의미한다. 70인역(LXX)은 이 말을 요 1:1과 같이 ‘시작, 처음, 영원’이란 뜻을 지닌 ‘εν αρχη 엔 아르케’로 번역하였다. 이 말은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시작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킨다. 즉 창세기는 영원 전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주 및 인류가 탄생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를 다루고 있다.
첫 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1) 이어지는 1장 내용의 요약 또는 제목.
(2) 7일 창조주일이 있기 수백만 년 혹은 수십억 년 전에 이뤄진 이 지구와 그 안에 있는 생명체의 창조.
(3) 7일 창조주일이 있기 6,000 ~ 10,000 년 전에 이뤄진, 원시 상태의 지구를 포함한 우주의 창조.
(4) 7일 창조주일의 첫째 날에 이뤄진 우주의 창조.
(5) 우주의 창조가 있은지 오랜 후 7일 창조주일 첫째 날의 첫 일부 시간.
처음 세 가지 견해는 지구가 7일 창조주간 이전에는 혼돈된 상태로 존재했다는 전제가 요구된다.
창조 기사(記事)에 관한 여러 추측들과 이론들이 존재하지만, 인간 지식의 유한함을 인정한다면, 분명하게 계시된 것 외에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시인해야 한다.
하나님. [אֱלֹהִים 엘로힘] ‘엘로힘’의 어원에 대하여 학자들은 ‘אֵל 엘’(하나님, 신, 강한 자)의 추정 어근인 ‘울’(강하다)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אֱלוֹהַּ 엘로아흐’(하나님, 신)의 추정 어근인 ‘אָלָה 알라’(두려워하다)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엘’과 ‘엘로힘’은 모두 ‘엘로아흐’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יְהוָה 여호와’란 명칭이 ‘언약을 지키시는 자’, ‘택한 백성을 구속한 자’란 의미로 쓰였다면(출 6:3), 이 ‘엘로힘’이란 명칭은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쓰였다(출 20:1, 신 6:4, 삼하 22:32).
히브리어 명사 ‘엘로힘’은 복수형이다. 단수형은 ‘엘’과 ‘엘로아흐’이다. 일부 학자는 ‘엘로힘’이 복수형인 점을 들어 이를 다신론적(多神論的) 사상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사에서는 이 복수형이 구약 성경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 이 용어는 이교 신들을 지칭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므로 문맥을 고려해서 이해해야만 한다.
▷ 복수 ‘엘로힘’: 창 1:1의 복수형이 복수의 신들(다신교)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그것은 삼인칭 단수 동사(바라, ‘he created’)의 주어이기 때문이다. 즉 복수 주어에 단수 동사를 사용한 문법적으로 이례적인 형태이다(‘In the beginning the Gods (he) created’). 기독교 시각에서 복수 ‘하나님들’은 신학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 현상에 대해 각기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 구절의 히브리 본문이 왜 그렇게 기술됐는지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왜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서 삼위일체에 대한 관련성을 찾았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있는 그대로, 본문은 분명하게 많은 신이 아니라 한 하나님을 말한다(‘He Created’). 복수형 엘로힘은 신성의 세 인격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문맥상 복수형은 하나이신(단수) 신 안에 내재한 복수적 특성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게 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다.
▷ 복수 하나님과 복수 동사 그리고 대명사: 1:26에는 “하나님[엘로힘]이 이르시되[그가 말하되] 우리의[누 : 일인칭 복수대명사] 형상을 따라 우리의[누 : 일인칭 복수 대명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나아세 : 일인칭 복수형 동사].” 설명하는 글에서는 복수 엘로힘이 단수형 동사를 취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목에서는 주어, 동사, 대명사가 모두 복수 형태이다. 그런 다음 마무리 설명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하나님[엘로힘]이 자기[오 : 일인칭 단수 대명사] 형상 곧 하나님[엘로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바라 : 동사, 삼인칭 단수]”(27절). 다시 본 절의 형태로 돌아간다. 학자들은 26절의 복수 동사와 복수 대명사를 설명하지만 일치된 제안은 거의 없다. 가장 무난한 설명이 있다면 자신의 내적 존재가 복수형인 한 하나님이 성경의 주요한 캐릭터라는 사실을 본문이 입증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 복수성을 그 자체로 심사숙고할 때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가 한 하나님 안에 복수의 인격이 존재한다고 제안할 수 있다.
▷ 복수의 인격체: 본문은 직접 복수의 인격체를 옹호한다. 우리는 창조하시는 하나님뿐 아니라 창조에 직접 참여하는 하나님의 영[루아흐 엘로힘]을 발견한다. 성경의 증거는 독자들에게 유일한 한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성령은 하나님이어야만 한다. 창조에는 한 가지 요소, 즉 말씀이 존재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말씀은 하나님과 창조물 사이에서 직접 중재한다(하나님→말씀/성령→창조). 시편 기자는 이것을 분명하게 기술한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루아흐]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하나님, 말씀, 성령, 창조가 등장한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대부분은 창세기에서 신령한 존재 내에 복수의 인격체를 지닌 한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것과 더 깊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그 한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규명된다는 것이다.
천지. 문자적으로는 ‘하늘과 땅’을 뜻한다. 여기의 하늘과 땅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1) 수십억 년 전에 창조되었다고 여겨지는 우주를 가리킨다.
(2) 태양계를 가리킨다.
(3) 지구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권 하늘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위의 해석 중 어떤 해석이 좀더 합리적일까? 윌리엄 셰이(William H. Shea)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런 용례들[창조 기사에 사용된 ‘천지’ 또는 ‘하늘과 땅’]을 조사해 보면, ‘하늘’이라는 단어는 우주가 아니라 오히려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권 하늘을 가리킨다는 것이 나타난다. 따라서 창 1:1에 나오는 ‘천지’라는 구절의 초점이 우주 또는 별들이 있는 하늘이 아니라 이 지구에 맞춰져 있다” (William H. Shea, “Creation”, Handbook of Seventh-day Adventist Theology, ed., Raoul Dederen(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2000), 420).
레갈라도(Regalado)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창세기 1장, 특히 ‘태초에’나 ‘천지’ 같은 단어를 면밀하게 연구해보면, 문맥에 비춰보든지 언어학적으로 보든지 창조 기사는 우리의 세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같은 우주 전체의 창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F. O. Regalado, “The Creation Account in Genesis 1: Our World Only or the Universe?” Journal of the Adventist Theological Society 13/2 [2002]: 120).
하젤(Hazel)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갈은 어순으로, 때론 뒤바뀐 어순으로 41번 쓰였는데, 이 명사구는 우리가 사는 지구와 그것을 감싸고 있는 천체를 가리킨다”(G. F. Hazel, 은혜로 맺은 새언약(시조사, 2018), 13).
사 65:17에서 하나님은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노니”라고 말씀하시며, 또 계 21:1에서 요한은 죄로 얼룩진 옛 ‘하늘과 땅’을 대체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본다. 여기에서 대체되는 하늘과 땅은 우주 전체가 아니라 죄로 얼룩진 지구와 대기권 하늘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본 절의 ‘천지’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대기권 하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창조하시니라. [בָּרָא 바라] 구약에는 ‘창조하다’란 뜻의 단어가 세 종류 나온다.
첫째, 여기서 사용된 ‘바라’는 주로 무(無)에서 유(有)에로의 완전한 신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롬 4:17, 히 11:3 참조).
둘째, ‘עָשָׂה 아사’는 이미 창조된 물질을 재료로 더 나은 물체를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16, 25, 26절).
셋째, ‘יָצַר 야차르’는 ‘아사’와 비슷하나 특별한 목적에 따라 기존 사물을 새로 완벽히 조성하는 것을 가리킨다(2:7, 9).
한편 천지창조를 주제로 하는 본 장에서 ‘바라’, ‘아사’, ‘야차르’ 등 이 세 단어는 정확한 뜻에 따라 해당 구절에서 사용되었음 알 수 있다. 그 예로 ‘바라’는 (1) 무에서 유에로의 존재 창조를 가리키는 1절 (2) 생물에게 생명의 근원을 주시는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21절 (3) 그 전까지 전혀 없었던 영적 존재의 창조를 가리키는 27절에서만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존재하게 하실 때 물질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이론은 근거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세상을 조성하시면서 이미 존재하는 물질에 의존하지 않으셨다”(Ellen. G. White, 교회증언 8권, 258).
지구가 창조주일 이전에 이미 혼돈된 상태로 존재했는가? 이에 대하여 재림교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재림교인들은 언제나 무로부터의 창조 곧 하나님이 지구를 존재케 하실 때 이미 존재하고 있던 어떤 물질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신조를 견지해 왔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이 지구를 형성하고 있던 물질을 만드신 것은 창조주일의 첫째 날이었고, 그 즉시 엿새 동안의 창조사역을 계속하셨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하지만, 거의 초창기부터 어떤 재림교인들은 창세기의 기사가 문자적인 엿새 동안의 창조사건 이전에 먼저 지구라는 물체를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음을 뜻한다는 이해를 인정해 왔다” (“Creation” in The Seventh-day Adventist Encyclopedia, ed. Don F. Neufeld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1976), 357).
” (창 1:1, 만나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