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전쟁기념관 박경석 시비 '서시''조국'
-2016년 1월 2일 탐방-
2016년 1월 2일. 아내와 함께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찾았다. 이곳은 내가 현역 시절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직으로 근무하던 육군본부 자리이기에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장소였다. 특히 12.12군란으로 정치군인과 함께 할 수 없어 피눈물을 흘리며 군복을 벗어야 했던 한 맺힌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육군본부가 계룡산 자락에 옮긴 후 새롭게 들어선 잰쟁기념관은 나에게 유서 깊은 장소로 다가왔다.
바로 내 시비 '서시' '조국'이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정치군인에게 짓눌렸던 내 명예가 비로소 다시 일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을 떠나 대전으로 귀향한지 3년 6개월만에 전쟁기념관에 들어섰다.
전쟁기념관 서쪽 회랑 중앙에 건립된 박경석 시비 '조국' 이다. 시비 뒤 배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고층 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이 시비 건립에는 많은 사연이 있었다.
내 작품 '조국' 에 대한 심의,검토과정 중 정치군인 일각에서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대안을 시도해 많은 원로 시인의 시를 검토했으나 너무 추상적인 내용이라 선별에서 제외돼 다시 내 시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한국전쟁과 월남전쟁, 두 전역 전투 지휘관 경력의 무공(을지무공훈장,충무무공훈장,화랑무공훈장 수훈)이 높이 평가되어 최종 확정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아내 김혜린 화가와 함께 자랑스러운 시비 '조국' 앞에 섰다.
이 시비의 시 '조국' 은 한국의 명시로 선정되어 대학교 시문학 교재에 게재됐다. 그러나 시보다 글씨가 더 유명하다. 글씨를 쓴 원곡(原谷) 김기승 서예가는 당대 최고의 필체로 독특한 예술성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더구나 이 시의 글씨가 김기승 서예가의 마지막 작품이다. 김기승 서예가의 이 시비의 글씨체가 '원곡체(原谷體)' 로 명명되어 문화재급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글씨를 쓴 후, 2년만인 2000년 8월. 9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김기승 서예가는 은관문화훈장을 국가로부터 받았다. 김기승 서예가는 김구 선생과 함께 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즉 이 시비 '조국'의 참여 예술가는 경력에 흠집이 없어야 심사 대상이었다.
전쟁기념관 본관 앞에서의 나.
아내와 함께.
전쟁기념관의 역사적 의미와 향후 세대에 교훈을 남기기 위한 전쟁기념관 '서시'. 박경석 시비. 한때 이 시비에는 시 제목 '서시'와 '지은이 박경석' 글씨가 빠져 있었다. 정치군인 일각에서 박경석의 이름을 두 곳에 새길 수 없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각계의 반론이 제기되자 2004년 김석원 전쟁기념관장이 이사회를 소집, 토의를 거쳐 건립 훨씬 뒷날인 10여 년 후, 제목'서시'와 '지은이 박경석' 이름이 새겨졌다.
6.25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상징탑
대전으로 귀향 후 3년 6개월만에 다시 찾은 전쟁기념에 뜻밖의 조형물을 보고 놀랐다.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미국을 위시한 한국전쟁 참전국을 기리기 위한 국가별 조형물이 새로 건립된 것이다. 각 국가별로 참전 개요가 간략하게 조각돼 있다. 그 조형물 뒤에는 해당 국가의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첫 사진 참조). 누구의 발상인지 참으로 탁월한 결정의 결과물로 평가하고 싶다. 왜 진작 이런 착상을 못했을까....., 뒤늦은 감은 있었으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참전 해당국 관광객이 자기 국가의 조형물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을 보고 관광 명소로 더 각광 받을 것으로 전망했다.
시비 '조국'이 있는 전쟁기념관 서쪽 회랑에서.
시비 '조국' 에 이어 줄지여 양쪽이 있는 비석에는 한국전쟁에서의 전사자 명단이 빼곡히 조각돼 있다.
전쟁기념관 동쪽 광장에 한국전쟁에 사용되었던 각종 무기를 비롯해 일부 현대 무기까지 정연하게 배치돼 있다. 3년 6개월 전보다 더 발전된 모습이었다. 청소년들에게 조국의 의미와 함께 군대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게 하는 좋은 교육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근래 외국인 관광객에 대한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전쟁기념관이 경복궁을 제치고 관광 명소 1위 자리로 올라섰다고 한다. 무료로 입장할 수 있고 볼거리가 많아진 탓으로 분석 할 수 있겠다.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건설되고 완공 무렵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없앨려고 했던 전쟁기념관인데 지금에 와서 관광 효자노릇을 하니 결국 노태우의 결정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김영삼 대통령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면서 거기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을 완공 직전의 전쟁기념관 건물로 옮기려 했다. 나는 그 놀라운 결정에 앞장서서 반대했다. 당시 나는 군사평론가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영향력이 미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무렵 청와대에는 좌파성향의 비서관이 있었는데 그가 앞장섰다는 말을 듣고 직접 만나 단판을 벌였다. 예편 이후 가장 치열한 투쟁이었다.
첫댓글 여기서 정치군인이라함은 전두환의 하나회 핵심 세력을 말한다.
하나회는 대통령의 권력을 배경으로 전두환의 사리사욕을 위해 조직된 비밀 사조직이었다.
전두환은 나를 사사건건 견제했다. 그와 나는 육군대학 65정규과정 동기였다.
다만 하나회 핵심 조직원인 노태우는 나에게 협조적이었다.
그 인연은 월남전 파병시 초대 맹호 在求大隊長인 나를 의식한 탓으로 보고 있다.
노태우 중령은 내 다음다음 후임인 3대 在求大隊長으로 참전했다.
대통령 시절에도 명절 때가 되면사람(보안사 요원)을 보내어 '금일봉' 을 전하며 나를 위로했다. 그러나 나는 그 돈을 사용으로 쓰지 않고 공익단체에 보냈다. 한편 어떠한 제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쟁기념관 시비 '조국' '서시' 는 노태우 정부 말기 심사 통과되었다. 만일 대통령이 노태우가 아니라 전두환이었다면 박경석의 시 두 편이 아무리 명작이라 해도 예선에서 탈락시켰을 것이다.
내가 전두환으로부터 미움 받은 이유는 다만 박경석의 경력이 톱클라스였고 무공훈장이 많다는 것이라고 그의 측근으로부터 들었다.'날강도' 심보가 아닌가.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2.26 16:53
현명한 착상입니다. 동감입니다.
나 또한 준장으로 중도 하차했기에 오늘의 박경석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끔 홀로 읊조리는 넋두리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