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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명인물 스크랩 김동삼 - 독립운동계의 거성이자 통합운동의 화신
박유승(박노동) 추천 0 조회 142 10.08.17 10: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

- 독립운동계의 거성이자 통합운동의 화신 -

(1878. 6. 23 ~ 1937. 4. 13)


                                          김희곤(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안동대 교수)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던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 선생의 마지막 말씀 중에서.


1. 안동 내앞마을(천전)에서 태어나다

 

김동삼은 1878년 6월 23일 경북 안동시 임하면(臨河面) 천전동(川前洞) 278번지에서 김계락(金繼洛)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긍식(肯植)이고, 종식(宗植)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자는 한경(漢卿)이며, 호는 일송(一松)이다. 김동삼이라는 이름은 그가 만주로 망명한 뒤에 사용한 것이다.

 

안동에 많은 명문거족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의성 김씨 문중은 퇴계의 정맥을 계승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이후로 명성을 드날렸다. 천전(川前), 즉 내앞마을은 김성일의 부친 청계(淸溪) 김진(金璡)이 들어와 정착한 이래 5백년을 이어오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곳이고, 특히 일제 침략기에 독립운동사에 걸출한 인재를 쏟아낸 마을이다. 한 마을에서 20명이 넘는 인물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었고, 1910년대 만주 망명자가 150명을 넘을 정도이다.

 

김동삼은 안동의병의 최고지도자였던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다. 김흥락은 김성일의 종손이자 퇴계학맥을 중심축을 계승한 인물인데, 1895년 12월 을미의병 당시 안동의병을 일으키는 논의를 주도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된 뒤,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사실상 전기의병에서 영남지역 최고인물을 스승으로 삼았으니, 김동삼도 청소년 시기에 이미 민족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했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다가 20대 중반 나이가 된 1905년을 전후하여 서울을 드나들며 신교육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1907년에 안동에서 신식학교를 수립하고 교사로 나선 점이 그런 추정을 가능하게 만든다.


2. 협동학교를 세우다

 

그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발을 내디딘 것은 만 29세가 되던 1907년이었다. 일찍이 어린 나이에 의병항쟁을 목격했던 그는 1900년대에 들어 서울의 변화를 눈여겨보다가, 동산(東山) 유인식(柳寅植)이 안동에 혁신의 바람을 끌어오자, 거기에 적극 동참하고 나섰다. 고향마을 내앞에 중등과정인 3년제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고 참가한 것이 바로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었다.

 

전통 질서가 강하게 자리 잡은 안동에 혁신의 물길을 끌어들이는 작업은 다른 지역에 비해 힘들었다. 서울에서는 그 보다 10년 전에 이미 신식학교가 들어섰지만, 안동을 비롯한 영남지역에서는 성리학적 질서가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럴 즈음 상경하여 새로운 문물을 접한 유인식이 1904년에 계몽운동을 시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7년 3월에 다시 시도하여 성공한 것이 협동학교 설립이었다. 여기에는 유인식을 비롯하여 김후병(金厚秉)ㆍ하중환(河中煥)이 앞장섰다. 처음에 내앞마을 의성김씨 종손 김병식(金秉植)이 교장을, 그리고 김동삼이 교사를 거쳐 교감을 맡았다. 이를 감안한다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김동삼이 전통교육만이 아니라 신식교육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협동학교는 영남사회가 변하는 교두보이자, 새로운 깃발이었다. 그래서 당시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은 협동학교 설립과 발전상을 보도하면서 그 역할에 대하여 격려하고 기대감을 표시하였다. 유림들의 압력과 예천의병의 공격으로 교사들이 폭살당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협동학교는 신지식인, 젊은 지성을 육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양성된 인물들이 경북지역 곳곳으로 계몽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런 학교였으므로 어려움을 겪을 때 서울 신문에서 격려하는 글을 게재하였고, 신민회(新民會)에서는 교사들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김동삼은 협동학교를 경영하는 일선에 나서는 한편, 비밀결사인 신민회와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신민회와 동지적 결속관계를 가지며 협동학교를 운영하는 한편, 서상일과 안희제 등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서 조직된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경북과 경남 전체 계몽운동가를 묶어 나갔다. 이 사실은 당시 그가 서울과 대구, 그리고 안동을 잇는 큰 틀에서 활약하였고, 계몽운동 노선 가운데서도 진취적이고 강성을 지닌 비밀결사체에 가담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겉으로는 협동학교라는 공개된 공간에서 민족문제를 해결해 나갈 새로운 지성을 키워내고, 속으로는 독립군 양성으로 방향을 가늠하고 있었던 것이다.


3. 만주 독립군기지 건설에 나서다

 

1910년 8월에 나라가 망하자, 김동삼은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더 이상 국내에서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키운 뒤에 국내진공을 감행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고 아무런 준비 없이 갈 수는 없었다. 가족들을 포함하여 대규모로 망명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1910년 후반에 집안 동생 김만식을 만주로 파견하여 독립군기지 건설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조사시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본래 김대락은 계몽운동으로 전환한 김동삼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1908년까지 그는 협동학교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손아래 처남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 의병항쟁에 전심하다가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출범시키자, 그도 계몽운동으로 전환하였다. 무장항쟁 노선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계몽운동에 접목시켜 나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집을 협동학교에 내놓았고, 당시 신문에는 그를 높이 평가한 기사가 게재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김동삼과 김대락, 그리고 이상룡은 족질 관계나 사돈 관계를 넘어 동지가 된 것이다.

 

김동삼은 같은 마을 출신이자 족숙(族叔)인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에게 논의를 구하였다. 그래서 만주 망명 계획이 수립되고, 결국 1910년 12월 말에서 이듬해 1월 사이에 대거 안동을 출발한 것이다. 안동에서 추풍령까지 걸어가고, 거기에서 기차를 이용하였다. 신의주에서는 걸어서 압록강을 건너고, 만주에서는 수레로 이동하는 멀고 험한 망명길이었다. 그런 길을 김동삼은 가문을 이끌고 갔던 것이다.

 

이들의 망명은 대단위로 이루어졌다. 내앞마을 의성김씨 문중과 역시 안동에 자리 잡은 이상룡의 고성 이씨 문중에서 각각 150명 정도가 만주로 향했다. 또 이들과 혼맥(婚脈)을 가진 영덕의 무안 박씨, 울진의 평해 황씨, 안동의 흥해 배씨, 그리고 영양 주실마을의 한양 조씨 문중 등이 대규모로 참가하였다. 즉 한 두 사람의 망명이 아니라 문중 단위, 그것도 혼맥으로 얽힌 큰 단위가 움직인 것이다.

 

김동삼은 1911년 1월에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했다. 그는 우선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고 경학사(耕學社) 결성에 참가하였다. 초대 사장 이상룡(李相龍)을 도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안동출신 인사들과 이회영 일가를 비롯한 신민회가 힘을 합쳐 벌인 사업이었다.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포들을 이주시켜야 하는데, 그러자면 우선 경작지가 필요했고, 농사가 펼쳐져야 했다. 그 사업을 주도해 나갈 조직이 바로 경학사였고, 거기에서 인력을 양성한 기관이 신흥강습소와 그를 이은 신흥학교ㆍ신흥무관학교였다. 신흥강습소나 그를 이은 신흥학교가 국내 안동에서 경영하던 협동학교의 연장선상에 있던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그러던 1913년 3월부터 이름을 중국 동삼성(東三省)의 호칭을 따서 동삼(東三), 동생은 동만(東滿, 1920년 순국)으로 이름 지었다.

 

김동삼은 1914년에 백서농장(白西農庄)을 건립하고, 그 장주(庄主)가 되었다. 신흥학교 1-4회 졸업생들과 그 분교의 노동야학 졸업생 등 385명을 인솔하고, 통화현(通化縣) 팔리초(八里哨) 깊은 산 속에 들어가 군대를 창설한 것이다. 백두산 서쪽 깊은 산 속에 자리 잡았다고 ‘백서’라는 이름을 붙이고, 군대조직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농장’이라고 위장했지만, 사실상 이것은 군사병영이었다. 그러니 백서농장은 망명 이후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군대를 조직하는 데 힘을 쏟은 첫 결실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919년 2월에 길림(吉林)에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가 발표되었는데, 김동삼은 이상룡과 더불어 민족대표 39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이 선언 일자가 2월이라 적혀 있어 실제로 양력인지, 음력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일단 3ㆍ1운동을 전후하여 선언된 것임에 틀림없다. 당시 독립운동 최고지도자들이 서명했고, 주로 만주지역 활동가들이 주역을 맡았다. ‘대한’으로 망한 나라를 다시 살려 ‘대한’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당시 서간도에는 세 가지 조직이 결성되어 독립운동 전선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하나는 종래의 부민단을 한족회(韓族會)로, 다른 하나는 백서농장 군영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또 다른 하나는 고산자에 있는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각각 개편한 것이다. 먼저 한족회는 부민단의 유하ㆍ통화ㆍ흥경현 대표들이 1919년 4월 삼원포에 모여 결성되었다. 한족회는 곧 백서농장을 철수시키고 서로군정서로 발전시켰다. 이에 따라 한족회는 민정(民政)과 군정(軍政) 이원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 백서농장을 해체하고 삼원포로 귀환한 김동삼은 한족회에서 서무사장(庶務司長)을 맡았다. 바로 이어서 그가 서로군정서 참모장에 취임하였고, 한족회 서무사장 자리를 같은 마을 출신이자 집안 조카인 김성로(金聲魯)에게 인계했다. 또 학무사장은 김대락의 아들이자 집안 동생인 김형식(金衡植)이 맡았다. 백서농장 장주를 거치면서 김동삼은 독립운동계의 거성으로 자리 잡아 갔던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서로군정서는 당초 정부조직으로 추진되었다. 이미 「대한독립선언서를 통해 ‘대한 독립’을 선언했으니, 그렇다면 당연히 독립된 국가 수립이 뒤따라야했다. 그래서 정부조직에 나섰지만, 4월 11일에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보고서, 정부 외곽 조직으로 위상을 정리하고, 이상룡이 최고책임자인 독판을 맡았다. 한족회가 민정기관이라면, 서로군정서는 군정기관인 셈이다.

 

김동삼은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맡아 독립군 조직을 움직여 나갔다. 1920년 여름부터 일본군 침략이 간헐적으로 자행될 때, 그는 사령관 이청천(李靑天)과 함께 300여 명의 서로군정서 독립군을 지휘하여 북간도로 이동시켰다. 7월 29일에는 부대를 안도현(安圖縣) 삼인방(三仁坊)에 주둔시키는 한편, 8월에 왕청현 서대파(西大坡)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방문하여 작전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 후 서로군정서군이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를 치른 후 북상하여, 밀산(密山)에서 북로군정서군을 비롯한 10여 개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러시아로 넘어갈 때, 김동삼은 서간도에 남아 독립전선을 재정비하였다. 북상한 부대와 달리 서간도에서도 다시 군사력을 기르고, 조직을 정비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일본군의 보복공세로 말미암아 서간도나 북간도지역 한인사회는 모두 참변을 겪었다. 1920년에 벌어진 경신참변(庚申慘變)은 김동삼 가족에게도 그대로 밀어 닥쳤다. 일본군이 삼원포 삼광학교(三光學校) 교장으로 활약하던 동생 김동만을 살해한 것이다. 그에 앞서 청산리대첩 와중에 같은 마을 출신이자 집안 조카인 김성로(金成魯, 金圭植의 아들)가 전사하는 비극도 맞았다. 김동삼은 김형식과 논의하여 집안 인사들을 급히 북만주 영안현 주가둔(周家屯:현재 연안현 강남 조선족ㆍ만주족 공동 자치향)으로 옮겼다. 이리하여 내앞마을 사람들이 서간도 시절을 마무리하고 북만주 시대를 열게 되었다. 한편 김동삼은 김정식ㆍ김창로ㆍ김성로에게 군자금 모집을 명하여 국내로 파견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은 유하현과 흥경현(지금의 신빈현) 일대로 옮겨 활동했다.

 

<내앞 의성김씨 김동삼 가계도 -포상자와 망명자를 중심으로->

 

 

 

 

 

 

 

 

 

 

 

 

 

 

 

 

 

 

 

 

 

 

 

 

 

 

 

 

 

 

 

 

 

 

 

 

 

 

 

 

 

 

 

 

 

 

 

 

 

 

 

 

 

 

 

 

 

포상자

 

 

 

 

 

 

 

 

 

 

 

 

 

 

 

 

 

 

 

 

 

 

 

 

 

 

 

 

 

 

 

 

 

 

 

 

 

 

 

 

 

 

 

 

 

 

 

 

 

망명자

 

 

 

 

 

 

 

 

 

 

 

 

 

 

 

 

 

 

 

 

 

 

 

 

 

 

 

 

 

 

 

 

 

 

 

 

 

金守一

 

 

 

 

 

 

 

 

 

 

 

 

 

 

 

 

 

 

 

 

 

 

 

 

 

 

 

 

 

 

 

 

 

 

 

 

 

 

 

 

 

 

 

 

 

 

 

 

 

 

 

 

 

 

 

 

金 薰

 

 

 

 

 

 

 

 

 

 

 

 

 

 

 

 

金 熙

 

 

 

 

 

 

 

 

 

 

 

 

 

 

 

 

 

 

 

 

 

 

 

 

 

 

 

 

 

 

 

 

 

 

 

 

 

 

 

 

 

 

 

 

 

 

 

 

 

 

 

 

 

 

 

 

 

 

 

 

 

 

 

 

 

 

 

 

 

 

 

 

 

金徠運

 

 

 

 

 

 

 

 

 

 

 

 

 

 

 

 

 

 

 

 

 

 

 

 

 

 

 

 

 

 

 

 

 

 

 

 

 

 

 

 

 

 

 

 

 

 

 

 

 

 

 

 

 

 

 

 

 

 

金鎭昊

 

 

 

 

 

 

金鎭炎

 

 

 

 

 

金鎭義

 

 

 

 

 

 

 

 

 

 

 

 

 

 

 

 

 

 

 

 

 

 

 

 

 

 

 

 

 

 

 

 

 

 

 

 

 

 

 

 

 

 

 

 

 

 

 

 

 

 

 

 

 

 

 

金大洛

 

金瑢洛

 

 

 

金潮洛

 

金繼洛

 

 

 

 

 

金繼洛

 

 

 

 

 

 

 

 

 

 

 

 

 

 

 

 

 

 

 

 

 

 

 

 

 

 

 

 

 

 

 

 

 

 

 

 

 

 

 

 

 

 

 

 

 

 

 

 

 

 

 

 

 

 

 

 

 

金衡植

 

金奉植

 

金南植

 

金章植

 

 

金東滿

 

 

 

金東三

 

李源一

 

 

 

 

 

 

 

 

 

 

 

 

 

 

 

 

 

 

 

 

 

 

 

 

 

 

 

 

 

 

 

 

 

 

 

 

 

 

 

 

 

 

 

 

 

 

 

 

 

 

 

金相魯

 

 

 

金容黙

 

 

金敬黙

 

金容黙

 

金定黙

 

李海東

 

 

 

 

 

 

 

 

 

 

 

 

 

 

 

 

 

 

 

 

 

 

 

 

 

 

 

 

 

 

 

 

 

 

 

 

 

 


김동삼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는 경신참변으로 붕괴된 한인동포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과 작게 분산된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22년 6월에 한인사회와 독립군 통합을 도모하기 위해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주도하여 합의를 도출했으니, 그 결실이 바로 통군부(統軍府)였다. 이후 8월 30일 전만한족통일회(全滿韓族統一會)가 결성되고, 이 무렵 통군부는 통의부(統義府)로 확대 개편되었다. 여기에서 통군부 교육부장이던 김동삼이 통의부 총장을 맡게 되었다. 청산리대첩 이후에 경신참변과 자유시사건을 거친 뒤, 만주지역 군사세력을 통합하려던 그의 노력이 진척을 보였고, 그 선두에 김동삼이 있던 사실을 말해준다.


4. 국민대표회의 의장이 되다

 

1921년 이후로 여러 차례 준비되던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부터 5월 15일 사이에 중국본토 상해(上海)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많은 대표가 집결하고,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또 민주적으로 진행된 독립운동 대표자 총회였다. 국내와 국외지역 전체에서 지역대표와 단체대표 400명 정도가 상해에 집결했고, 그 가운데 의결권을 가진 대표가 130명을 넘을 만큼 규모가 컸다. 1921년 이후 침체 현상을 보이던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임시정부 쇄신 방안을 찾던 이 회의에서 김동삼은 서로군정서와 남만주 대표로서 참석하였다. 나아가 그 의장에 선출되었다. 안창호(安昌浩)와 윤해(尹海)가 부의장이었고, 김동삼이 의장에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독립운동계에서 갖는 그의 위상을 확인시켜 주고도 남는다.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5월 말부터 크게 두 가지 세력으로 나뉘었다. 임시정부를 적절하게 개조하자는 개조파, 그리고 이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로 나뉜 것이다. 김동삼은 김형식과 함께 개조파에 손을 들어 주었다. 정식 정부 수립은 뒤로 미루고, 일단 임시정부를 독립운동 통할체계에 맞게 개조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주장이 맞선 상태에서 5월 15일에 만주에서 대표를 소환함에 따라 의장을 맡던 김동삼도 만주로 가야 했다. 6월에 들어 회의에서 이탈한 창조파가 가을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다는 목표를 갖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바람에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5. 남만주 독립운동계 통합을 주도하다

 

만주로 돌아온 1923년 가을, 그에게 주어진 일은 만주지역 독립운동계를 통합하는 작업이었다. 독립군 단체들이 지리멸렬하여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던 처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경군사통일회의나 국민대표회의가 뚜렷한 결실을 이루지 못하자, 이상룡과 양기탁(梁起鐸)이 다시 군사력 통합을 추진하고 있었다. 상해에서 돌아온 김동삼은 이들의 역할을 인수하여 1924년 7월 10일과 10월 18일에 10개 단체대표를 모아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를 열었다. 거기에서 김동삼은 의장에 선임되어, 동년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키는 데 주역을 맡았다. 참의부ㆍ신민부와 함께 만주지역 3대 조직의 하나가 된 정의부를 산출한 것이고, 유하현 삼원포에 본부를 두었다. 그리하여 1925년에는 만주지역 한인사회는 민정과 군정기능을 갖춘 3부가 정립하고, 독립군 양성과 무장력 향상, 투쟁 강도 강화 등을 도모해 나갔다. 김동삼은 정의부에서 중앙행정위원 겸 외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안동에서 함께 망명해 온 이상룡이 1926년에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임되었다. 이상룡이 김동삼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고, 이상룡은 국무령에 취임하자마자 김동삼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김동삼은 이상룡의 권유를 듣지 않고 만주에 남았다.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해야 했고, 그 터전을 버려두고 상해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27년 이후 김동삼은 국내외에 걸쳐 전개된 유일당운동(唯一黨運動)에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독립군 단체 위에 하나의 지도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고, 정부를 정당중심으로 운영하자는 것이기도 했다. 그럴 경우 이념상 분화된 좌우세력을 통합하는 운동이란 의미를 가졌다. 1926년 10월에 안창호와 원세훈이 북경에서 대독립당촉성회를 조직한 뒤에 상해와 남경, 그리고 무한과 광주로 확산되어 갔고, 국내에서는 신간회가 조직되는 분위기에서 만주지역도 유일당운동이 진행되었다. 그 동안 끊임없이 독립운동계의 통합과 통일을 추진하던 김동삼이 이에 앞장 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김동삼이 1927년 4월 1일 정의부 간부 30여 명과 함께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여 농민들의 상호부조 속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굳게 만드는 등 농민조합운동의 단서를 열었던 것도 그러한 차원에서 펼쳐진 것이다. 이어서 4월 15일 길림 남쪽 영길현(永吉縣) 신안둔(新安屯)에서 유일당촉성회의가 열리자, 김동삼은 정의부 중앙위원 자격으로 여기에 참석하였다.

 

이어서 김동삼은 1928년 5월 정의부를 대표하여 삼부통합회의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분열된 독립운동세력의 대통합을 모색했으나 실패하였다. 조직 결성 방법을 둘러싸고 이견이 표출되자, 그는 새로운 통합방법을 찾아 나섰다. 그는 1928년 7월 삼부통일회의가 결렬되기 바로 앞서 일단 정의부를 이탈하였다. 그리고 그를 비롯한 이탈세력을 규합하여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다. 1929년 좌우 합작을 도모하기 위해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가 조직되었고, 김동삼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민족유일당 결성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9년 4월 같은 지역에 국민부(國民府)가 출범됨으로써 민족유일당 계획은 무산되고, 1929년 5월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도 해체되었다. 이어서 1930년 7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조직되자 김동삼은 고문을 맡았다. 이러한 복잡한 흐름에서 김동삼을 주목해 보면, 통합운동의 핵심에 그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 순국

 

그는 1931년 일본군의 만주침공 직후에 일제 경찰에 의해 피체되었다. 사돈인 이원일(李源一), 경북 영양 출신인 남자현(南慈賢, 여성)과 항일 공작을 추진하기 위해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일경에 피검된 것이다. 그 공작이 일본의 만주침공을 맞받아치는 투쟁이었으리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다행히 일경의 촉수를 피한 남자현이 1932년 9월 국제연맹 조사단이 만주를 방문할 때 무명지를 잘라 독립을 호소하고, 1933년 2월에는 만주국 주재 일본대사 부토(武藤信義)를 처단하고자 나선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에 피체된 그는 모진 고문을 받으면 고생하다가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는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의 중형을 받았다. 처음에 평양감옥에서 고생하다가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진 그는 만 59세가 되던 1937년 4월 13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장례는 평소에 그를 존경하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주선하여 치러졌다. 한용운은 자신이 머물던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장례를 치른 뒤, 김동삼의 유언대로 화장하여 유해를 한강에 뿌렸다. 만해가 일생에 눈물을 흘린 적이 이 때 한번뿐이라는 일화는 김동삼의 됨됨이를 말해주기도 한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던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1907년 만 29세에 협동학교 설립으로 민족운동에 나선 그는 30년 동안 오직 민족의 독립에만 매달렸다. 그는 협동학교를 세워 경북 북부지역 퇴계학맥 중심부를 혁신으로 이끌고, 민족운동의 거점으로 만들어 갔다. 이곳에서 4년 동안 힘을 쏟은 문중 인사들과, 학맥과 혼맥으로 얽힌 집안들이 1911년 1월 무렵에 만주지역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대거 망명하였다. 경학사와 신흥학교를 세우고 백서농장이라 이름 지은 병영을 운영하고, 또 이를 서로군정서로 성장시키면서 김동삼은 독립운동계의 거성으로 성장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것은 그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이 40대를 넘어선 1920년대에는 만주지역 독립운동계에서 그는 통합의 화신(化身)이었다. 작은 단위의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고, 이념과 방략에 따라 나뉜 독립운동단체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데 전념하였고, 그가 나서는 곳에는 통합과 통일이 뒤따랐다.

 

독립군 단체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수습회의에 의장을 독점하다시피 선출된 사람이 바로 김동삼이었다. 일찍이 만주에서 활약했던 이강훈은 만주 한인사회에서 이념이나 지역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난받지 않은 지도자가 드문데, 김동삼은 어느 쪽으로부터도 비난받지 않는 큰 인물이었다고 증언하였다. 김동삼이 지닌 지도자적 풍모를 전해주는 말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연구(硏究)

- 국내(國內)와 망명(亡命) 초기(初期)의 활동(活動)을 중심(中心)으로 -

  

                                                  이 동 언(李東彦) *

  

1. 머리말


2. 출생(出生)과 성장(成長)


3. 국내(國內)에서의 활동(活動)

   (1) 협동학교(協東學校)의 설립(設立)

   (2)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安東支會)의 설립

   (3)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의 결성(結成)

  

 4. 중국(中國) 망명(亡命)과 서간도(西間島)

   독립군기지(獨立軍基地) 개척(開拓)

   (1) 경학사(耕學社)의 설립(設立)

   (2) 백서농장(白西農庄)의 경영(經營)

   (3)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창설(創設)


5. 맺음말


 

  

1.머 리 말

  

  일송 김동삼은 서간도 독립군기지개척의 선구자로서, 그리고 만주독립군의 통합에 힘쓰며 독립전쟁을 주도해 갔던 무장투쟁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뿐만아니라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여 구국 사상과 방략을 다양하게 변천 또는 전환시켜 갔던 그의 활동과 사상은 독립운동의 발전적 현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로서 주목되는 것이다.

 

  김동삼은 경북 안동의 전통 유림의 집안에서 태어나 영남지방에서는 가장 선구적인 중등 교육기관인 협동학교를 설립하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1911년 신민회의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에 따라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1931년 하얼삔에서 체포될 때까지 줄곧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에 전념하였다. 1910 · 20년대 만주에서 김동삼의 활동은 경학사(耕學社)(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 부민단(扶民團) · 백서농장(白西農庄) · 한족회(韓族會)(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 통의부(統義府) · 정의부(正義府) ·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 ) 등 서간도 또는 남만주 일대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주도한 것으로 요약된다. 그럼에도 학계에서 김동삼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점은 무엇보다 김동삼이 남긴 기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서간도 지역 독립군기지개척과 독립운동단체 등 일련의 연구에 부분적으로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1) 김동삼에 대한 독립적인 연구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그의 독립운동사적 위치는 계몽운동에서 독립군으로 전환해 갔던 것과 또 민족유일당운 동으로 이어갔던 그의 행적을 통해 살펴질 수 있을 것이다. 김동삼이 재만 독립운동지도자 및 단체의 대립과 모순을 제거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강력한 통합 또는 일원화에 초지일관 했던 점은 당시 만주 독립군의 발전 현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독립운동사상에서 볼때 전통 보수성이 강했던 안동 유림들이 구한말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이나 중국으로 집단 망명하여 해외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연구성과2)가 나와 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런데 안동유림 중에서도 김동삼의 경우(전통유림 - 계몽주의 - 해외독립운동기지개척 - 독립군) 보다 구체적인 모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자료의 부족함을 무릅쓰고, 협동학교를 통한 김동삼의 계몽주의적 전환과 사상을 살펴 보는데 주안점을 두었고, 다음에는 중국 망명이후 독립군기지 개척과정에서의 김동삼의 활약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출생(出生)과 성장(成長)

 

  김동삼은 1878년 6월 23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하면 천전동 278번지에서 한학자 김계락(金繼洛)과 영해신씨(申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字)는 성지(省之), 호(號)는 일송(一松),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본명은 긍식(肯植)3)인데, 만주로 가서 동삼성(東三省)(길림성(吉林省), 봉천성(奉天省), 흑룡강성(黑龍江省))의 독립운동단체와 독립운동지도자들을 대동단결 시키기 위해 이름까지 동삼(東三)으로 개명하였다.

 

<김동삼 가계도>


   김동삼의 가계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방계로 전형적인 남인계통의 집안이었다.5) 경북 안동은 원래 영남 유림의 본향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적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었다. 김동삼 역시 성장 과정에서 이러한 지역적 분위기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김동삼의 스승은 김주병(金周秉)이었다. 김주병이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6)의 문하(門下) 였던 점으로 미루어, 김동삼은 안동(安東)의 거유(巨儒) 김흥락의 학통을 이어 받은 것으로 보인다. 김동삼의 총명함과 명석함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경사유방(景泗流芳)》에 의하면 "김동삼은 어릴때부터 기골이 준수하고 두뇌가 명석하였으며 기량이 관흥하여 여러 사람을 통솔할 지도력을 가졌다."7)고 하여 세인(世人)의 주목을 받았으며, 한학 수업에 정진 하여 소년기에 이미 사자육경(四字六經) 뿐만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도 섭렵하였다.8)

 

 이러한 김동삼이 계몽주의로 전환하는 것은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하여 김동삼은 1905년 일제가 을사5조약을 강제 체결하자 비분강개하여 보수 유림의 완고한 풍습을 혁신하고 자주 독립 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신서적도 많이 읽고, 계몽주의 인사들과도 접촉하였다.9) 전통적 유학자로의 길을 걷고 있던 김동삼이 계몽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안동지방의 유림중에서 계몽적 개화와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진 이상룡(李相龍)과 유인식(柳寅植)10)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1)

 

  유인식은 을미의병 안동의진의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의 문인으로 을미사변과 개혁에 항거하여 청량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바 있는 위정척사 계열의 유학자였다. 그런 유인식이 일변하여 안동 유림 중에서 제일 먼저 계몽운동에 투신하게 되는데, 그의 사상 전환은 1903년 상경하여 신채호(申采浩)와 교유하고, 신서적을 읽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유인식은 당시 러일전쟁을 직접 보면서 국권회복의 방략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고, 1906년 삭발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이상룡 · 김동삼 등과 함께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12) 구한말 유생층의 외세침략에 대한 대응은 그 행동양식이 다양하게 나타났는데,l3) 우선 척사적 유림의 의병항전14)과 자정론적(自靖論的) 태도15)가 있고, 전통적 유림에서 근대적 신사조에 따른 계몽주의로 전환해간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김동삼의 계몽주의적 전환은 후자에 해당된다.

 

 

  3. 국내(國內)에서의 활동(活動)

 

  (1) 협동학교(協東學校)의 설립(設立)


  협동학교는 1907년 3월 경북 안동군 임하면 천전동에서 설립되었다. 협동학교는 설립배경 이나 설립과정을 볼때 계몽운동에서 주목되는 학교이다. 왜냐하면 그간의 연구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안동지방의 특수성과 관련하여 볼때 보수 유림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보수유림을 개화하여 안동지방 계몽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l6) 그런데 여기서 협동학교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협동학교 설립 취지문17)을 살펴보기로 하자.


  (전략) 아! 거연히 몇백년을 지나온 오늘, 머리를 들고 현시국을 돌이켜 살펴보자. 이 무슨세계, 이 무슨 기운인가! 높은 산을 넘고 험한 바다를 건너온 낯이 선 흑백 각색 인종이 분주히 몰려와 상업과 공업의 이권을 두고 싸움이 벌어지고, 꿈에도 생각해 낼 수 없는 기화광전(氣化光電)의 학(學)이 지구상에서 경쟁의 장으로 나타났다.

  일본과 청, 일본과 러시아의 두차례의 전쟁은 동양전역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일본과 영국, 일본과 프랑스 등 열방(列邦) 사이의 각종 협약으로 인하여 세계의 미래는 큰 풍운을 일게하는 원인을 만들고 있다. (중략)

  아! 우리 안동의 인사이시여! 우리 안동은 옛날부터 학문을 쌓은 훌륭한 선비가 많이 배출된 곳이고, 학문의 운기가 일찌기 열리어 나라의 예우가 있었고, 온 국민이 많이 배출된 곳이고, 학문의 운기가 일찌기 열리어 나라의 예우가 있었고, 온 국민이 기대하던 희망이 가장 두터운 고을이었다. 그러한 즉 우리 안동인사는 국가에 대한 책임이 가장 무겁지 아니 한가, 우리 안동인사가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하여, 다른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다투어가며 개화를 소리치고 있는데, 우리는 홀로 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겠는가!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앞서 나와 이끌고 있다. 우리 안동인사가 홀로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지 말라 .

  지금 한 개의 학교 창립도 오히려 못이루고 우리 안동인사가 무슨 얼굴로 다른 곳의 사람을 대하려 하는가! 오늘 비록 늦기는 하였으나 뜻을 모아 여러 동지들이 발기하여 이 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후략)


  협동학교 설립 취지문을 통해보면, 당시 국제정세의 인식과 아울러 서양의 근대적 학문과 기술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안동 유림의 분위기가 일신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울러 전통적 유림의 본고장인 안동지방이 그 폐쇄성으로 인하여 타지역에 비해 낙후한 점을 맹박하고, 1905년 을사5조약 강제 체결 이후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보호국화 되어 가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구국을 위한 방략으로 협동학교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으로의 전환을 강조하고 있다.

 

  협동학교 명칭의 동(東)은 "나라 지향(志向)은 동국(東國)이요, 향토(鄕土) 지향(志向)은 안동(安東)이오, 면(面)의 지향(志向)은 임동(臨東)이므로"이고,18) 협(協)은 안동군의 동쪽에 소재한 7개면이 힘을 합쳐 설립하였으므로l9) '협동(協東)'이라 한 것이다.

 

  협동학교 발기인은 이 지역의 각 문중을 대표하는 인사로, 이상룡 · 김동삼 · 김후병(金厚秉) · 유인식 · 하중환(河中煥)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하였는데20) 개교당시의 교사(校舍)는 김대락(金大洛)의 집 사랑채를 임시교사로 사용하다가 후에 가산서당(可山書堂)(현재 천전국민학교 자리)을 개수하여 사용하였다.21) 교장에는 김병식(金秉植), 교감에는 김동삼,22) 교사로는 외지인사인 김기수(金箕壽) · 이관직(李觀稙)23)등이 활약하였다.24) 교사로 취임한 김기수는 보성전문학교 법률학전문과 제1회 졸업생으로25) 광신상업학교 교사를 역임하였다. 협동학교 교사 김기수와 이관직은 상동청년학원 계열 인사로 보인다.26) 또한 협동학교가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시켜 구국을 위한 기초로 삼기 위해 설립되었음이 협동학교 권면문27)에 잘 나타나 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모든 것이 때에 따라 변한다」했고, "성인(聖人)의 도(道)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이것은 경도(經道)와 권도(權道)가 다르다는 것을 말한 것이 예나 오늘에 있어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기수(氣數)가 변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 오늘날 세계 육주(六洲)대륙에 있어 선진하여 개화를 이룩한 나라는 기차와 기선을 타고 어느 곳에나 쉽게 갈 수 있고, 더욱 놀랍게 하는 전기불이 번쩍이는 세계 풍조로 변화하는 모습은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게 발전한다. 기술에 있어서는 정말하고 기묘하며, 기능도 재주를 다하여 모두 사회 변혁에 이바지하는 그 나라 그 사회는 괄목하게 발전을 거듭하니, 이와같은 사회상은 개벽후 처음으로 맞는 좋은 행운인 것이다.(중략)

  다행한 일이다. 뜻있는 선비가 시국을 통찰하고, 공립 사립학교를 열심히 세워 나아가고, 또 발전과 희망이 엿보이는 듯하니, 곧 우리나라 개화의 길과 구국의 한가닥 밝은 빛이 되는 듯 하다.

  그러나 우리는 옛 습관과 옛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탓으로 신구에 대한 논란을 피할 수 없다. 오늘 학교를 반대하는 논리는 신학(新學)은 외도(外道)이니 선비는 배울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이는 정말 올바른 견해를 하지 못하는 탓이다.

  개화 이후에는 학술의 길이 고루 열리기가 어렵고, 또 향하는 바가 다 같을 수 없으니, 나의 도(道)를 도(道)로 알고, 저 사람의 기술도 기술로 알 수 있다면, 어찌 불가능한 것이 있을까 하는 말이다.(중략)

  아! 어이하여 문을 닫고 먼지 쌓인 책상머리에서 경전이나 읽고, 문밖에 나타나는 세계의 양상을 알려하지 않는가. 이러한 사람이 입신하여 조정에 들어가 정사(政事)에 임한다 해도 임금을 옳게 보필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뜻을 같이한 동지들이 약속을 하고 설교(設校)할 것을 발기하니, 이름을 협동학교(協東學校)라 하고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시켜 나라의 기초를 삼으려고, 이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중략)

  지금 비록 늦었다고 그만 둘 수 없는 일이다. 훗날 깨닫고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일을 시작할 즈음에 심장과 허파가 쪼개어지는 듯한 아픈 가슴으로 동포에 알리노니 따라오라. 그렇지 않으면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 되리라.


  협동학교 권면문에서는 서구의 선진문명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서 이러한 서구의 문명과 기술을 받아들여 개화하는 길만이 구국의 길임을 강조하고 그 실천방안으로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실시하여 나라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시대변혁에 따라 우리도 하루빨리 깨달아 세계의 양상에 발맞추어야 한다고 하여 협동학교 설립자들이 계몽운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이러한 계몽운동에의 참여를 절규하고 있다.

 

  그런데 협동학교는 보수 유림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1909년 협동학교 교직원과 학생 30여명의 단발 단행은 보수 유림들의 심한 비난을 받았으며,28) 1910년 7월 18일에는 이 지역 의병들이 독립운동 방략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협동학교를 공격하여 교감 김기수, 교사 안상덕(安商德)과 회계 이종화(李鐘華)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29) 이사건을 당시의 중앙 언론지인 황성신문(皇城新聞)에서는 <조협동학교(弔協東學校)>라는 논설로30) 보도하면서, "협동학교의 볼행한 변"이라 하며 안상덕 · 김기수 두 청년교사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그리고 보성전문학교 교원중에서 2명이 두교사의 죽음을 원통히 여겨 안동으로 달려 갔으며,3l) 대구군 대한협회지회에서는 특별회를 개최하여 안동 유림의 완고함을 성토하는 성토문을 발표하면서 협동학교를 지지하였다.32) 또한 협동학교 학생일동이 교감 김기수의 어머니 김씨에게 보낸 다음의 애도의 글33)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신교육을 전개한 협동학교의 교육방침에 보수 유림이나 의병이 크게 반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략) 일반학생(一般學生)에게 항시(恒時) 훈시(訓示) 권고(勸告)하시기를 국민정신(國民精神) 사자(四字)를 각기(各其) 뇌리(腦裡)에 인치(印置)하라 하셨으며 매일(每日) 상오(上午) 오시(五時)에 목욕재계(沐浴齋戒)하시고 육시(六時)에 일반직원(一般職員)과 생도(生徒)와 집합장(集合場)에 취립(聚立)하야 상견례(相見禮)를 행(行)하고 애국가(愛國歌)를 창(唱)한 후(後) 일반학생(一般學生)에게 정신적(精神的)으로 훈시(訓示)하되 활발(活潑)한 기상 (氣像)을 양성(養成)하고 부인적(婦人的) 행동(行動)을 물위(勿爲)하라 하시며 교과(敎科)는 분장(分掌)한 자(者)가 다(多)하나 그중 수신과목(修身科目)을 독담(獨擔)하야 구술(口述)로 교수(敎授)하시는데 교감야(校監爺)나 수교(受敎)하는 생도(生徒)가 차시간(此時間)으로 정신(精神)을 수양(修養)하였고 국가(國家)의 국가(國家)됨과 국어(國語)가 국민(國民)에게 관계(關係)됨을 자세(仔細)히 설유(說鍮)하며 학생(學生)의 뇌수(腦髓)가 명랑(明朗)치 못함을 일상(日常) 개탄(慨歎)하시고 우모험적(又冒險的) 행동(行動)을 행(行)하라 하시며 우(又)는 자언(自言)하기를 아(我)는 감념(感念)이 다(多)한 인(人)이라 만일 문명국(文明國) 국민(國民)이 되얏스면 철학가(哲學家)가 될지나 불행(不幸)히 아한(我韓)의 국민(國民)이 되야 국민(國民)의 의무(義務)를 포기(抛棄)키 난(難)하고 국가(國家)의 현상(現狀)을 애석(愛惜)하야 지기(志氣)를 견확(堅確)케 하고 사상(思想)을 분려(奮勵)케 하야 국가(國家)에 헌신(獻身)하기로 아(我)의 목적(目的)을 정(定)하노라.(후략)


  김기수 · 안성덕 피살사건은 안동지역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전통보수세력과 개화혁신세력간의 갈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다음의 《황성신문(皇城新聞)》 기사는 안동의 보수 유림이 얼마나 완고하였는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안동완고(安東頑固) 김소락씨(金紹洛氏)는 기자(其子)가 단발(斷髮) 입학(入學)할까 염려(念慮)하여 단지혈서(斷指血書)로 금계(禁戒)를 작(作)하였다지 현세(現世) 소위(所謂) 완고배(頑固輩)가 단발(斷髮)을 배척(排斥)하여 언필칭(言必稱)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불감훼상(不敢毁傷)이라하니 발자(髮者)는 불과시혈지여(不過是血之餘)오 수지(手指)는 일신(一身)의 대부분(大部分)이라 혈여(血餘)를 애석(愛惜)하다가 단지유혈(斷指流血)함은 부모(父母)의 유체(遺體)를 전이귀지(全而歸之)한다. 칭(稱)할까 여하(如何)하였던지 인발단지(因髮斷指)하였슨즉 진개시두발(眞個是頭髮)에는 효자(孝子)러군"34)


  초대 교장에 취임한 유인식은 부친으로부터 부자절연까지 당하고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협동학교에 잔류하여 교육에 전념하고 대외적으로는 김병식을 교장으로 하였다. 이러한 시련과 좌절을 겪으면서 협동학교는 폐교위기에 이르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후 김동삼을 중심으로 한 김하정(金夏鼎) · 김철훈(金轍勳) 등의 청년교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협동학교는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부활하게 된다.35) 그리하여 1911년 3월 30일 협동학교는 23명의 1회 졸업생을 배출한다.36)

 

  협동학교는 3년제 중등학교로 예과와 본과를 두었다.37) 교과목은 수신 · 국어 · 역사 · 지지 · 외지 · 한문 · 작문 · 미술 · 대수 · 물리 · 화학 · 생리 · 동물 · 식물 · 박물 · 창가 · 체조등 17과목인데,38) 교과과정을 볼때 협동학교가 중등학교였음을 알 수 있다. 김동삼은 협동학교 1 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중국으로 망명한다.39) 그후 1911년 여름 유인식도 협동학교를 유동태(柳東泰)에게 맡기고 중국으로 망명한 후 가산을 정리하기 위하여 그해 겨울에 귀국하였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후 석방되어 중국 망명을 포기하고 안동에 남아서 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40) 1913년 협동학교는 임동면 수곡동 한들로 이전하여 교장은 유연갑(柳淵甲)이 맡아 1915년 4월 17일 2회 졸업생을 배출한다.41) 1918년에는 3회로 6명이 졸업하였다.42) 협동학교 출신 독립운동가로는 김성로(金聲魯) · 김광재(金光哉) · 유림(柳林) · 이광민(李光民) · 정현모(鄭顯模) 등이 있다. 43)

 

  협동학교는 1907년에 설립하여 1911년에야 23명의 졸업생을 배출한후 졸업생이 점점 줄어 드는데 그 이유로는 다음의 몇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다. 첫째 재정 문제를 들수 있겠고, 둘째 1909년 교직원과 학생 단발 단행후에 일어난 교사 김기수 · 안상덕 피살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보수 유림들의 반대와 비난, 셋째 1906년의 보통학교령 · 고등학교령 등과 1911년의 조선교육령 그리고 1915년 사립학교령 등 제반 교육령을 퉁한 일제의 식민지교육 정책 시행과 이에 따른 민족 교육 탄압 등을 들 수 있겠다. 1907년 3월 김동삼 · 유인식 · 김후병 · 하중환의 발의로 개교한 사립협동학교는 경북북부지역 최초의 3년제 중등학교로 안동지방의 계몽운동을 확산시키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1919년 3 · 1운동 당시에는 안동군 의거의 중심이 바로 협동학교였다.44) 그후 협동학교는 휴교 상태가 되었다가 1919년 설립한지 12년만에 폐교되고 말았다. 협동학교의 남은 재원은 1920년에 개교한 임하공립보통학교와 임동공립보통학교의 설립기금으로 사용되었다.


  (2)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安東支會)의 설립(設立)


  김동삼의 계몽운동 가운데 협동학교의 설립 이외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대한협회 안동지회의 설립이다. 대한협회 안동지회가 설립되는 것은 1909년 3월경이다. 역시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의 중심인물은 앞에서 살펴본 협동학교를 설립한 이상룡 · 유인식 · 김동삼 등이었다. 1905년 을사5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한국이 일제의 반식민지화(半植民地化)되자, 개화자강계열의 계몽운동은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계몽운동을 주도한 전국 규모의 대표적인 계몽단체로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한협회 그리고 신민회(新民會)가 있었다.45)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1907년 11월 10일 창립되었다.46) 대한협회는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생명 재산의 보호, 행정제도의 개선, 관민 폐습의 교정, 근면 저축의 실행, 권리 · 의무 · 책임 · 복종의 사상을 고취 등 7개항의 강령47)을 내걸고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협회는 중앙의 본부조직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지회(支會)(군(郡)단위 조직) · 분지회(分支會)를 설립하여 조직을 확대하여 나가던 중 이상룡에게 참여를 요청하였다. 이상룡은 의병 항전을 통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권 회복을 위한 방략을 일제와의 직접적인 항전이 아니라 신교육을 실시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민권을 신장하여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여 대한협회 본회와 서신연락48)을 한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발기할 것을 호소하였으나 회원모집이 잘 되지 않았고, 보수 유림의 반대와 냉소로 좌절되었다.49) 그러나 그후 1909년 김동삼은 유인식 · 김형식 등과 같이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하고 이상룡을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대한협회 안동지회의 정확한 설립일자는 알 수 없으나, 대한협회회보 11호 회중역사(會中歷史)에 "1909년 2월 6일 평의회에서 지도(智島) · 영천(永川) · 순창(淳昌) · 이원(利原) · 안동(安東) 5개군 지회 청원에 대하여 지도 · 순창 양군(兩郡)에는 김광제(金光濟)씨로 이원군에는 단천군지회(端川郡支會) 부회장 최병진(崔秉珍)씨로 영천 · 안동 양군(兩郡)에는 윤효정(尹孝定)씨로 시찰원(視察員)을 선정하다"50)라고 되어있고, 회장으로 피선된 이상룡이 1909년초에 의병과의 연락 혐의로 일제에 구금되었다가 같은해 3월에 석방된 점으로 보아 1909년 3월 이후에 설립된 것 같다. 또한 이상룡의 구금은 일제의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 방해 책동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상룡이 구금되어 있던 중에 대한협회 회원들로 생각되는 민중이 몰려와 이상룡의 구금에 대해 항의를 하였고, 이상룡이 석방되자 바로 안동지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어 활동을 전개하였기 매문이다.51) 그들은 협회 설립 이유를 다음 과 같이 밝히고 있다.52)


  오늘날은 바야흐로 경쟁의 시대이다. 그러나 국세는 위태롭고 민심은 흩어져 이지경에 다다르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마땅히 잘 다스릴 것을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나라는 쇠하고,  백성은 병들어 백가지로 할 일이 많은데, 만약 지금에라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후일 우리들은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가 이를 위하여 협회를 만드는 것이다.


  또한 대한협회 안동지회 회장 이상룡은 설립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53)


  대한협회는 대한(大韓) 국민의 정당이여, 무릇 국가란 것은 백성과 함께 있는 것이며,  백성은 나라의 주인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국가를 군주(君主)의 사유(私有)인양 생각하여 관(官)이 혼자 일을 처리하더니, 이에 합방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어찌하랴, 비록 인명과 재산에 손실이 있더라도 정의로써 용감히 싸우면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면 시국은 어지럽고 백성은 양풍(洋風)에 정신이 끌려 스스로 외국의 노예가 되려하니 이것은 국민의 의무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되며, 그리하면 나라는 영원히 망하고 말 것이다.

  나라가 백성이 모여서 된 것과 같이 백성들이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단체를 만들고 시무(時務)를 강습하고 그 업(業)을 충실히 하면 날로 백성의 지혜가 열리고 국력이 일어나서 능히 외세와 맞설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제국도 이러한 방법으로 일어났으니 우리도 이를 본받아 열심으로 배우고 익히며 정신을 합하여 자주권을 회복하자.


  그리하여 2천여명의 회원을 모집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매월 2회씩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여 법률 · 민권 · 사회 · 단체 · 교육 등에 대하여 광범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그중에서도 청년들의 신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하여 각 서원의 재산을 모으는 등 다방면으로 자금을 조달하여 협동학교를 지원하고 군내 각 처에 초중등학교 설립을 지원하였다.54) 또한 근대 교육을 받지 못한 나이 많은 사람과 가난으로 학교에 취학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별반학규(別般學規)(특별과정)를 설치하여 야간이나 휴일에 교육하는 등 대중교육도 실시하였다.55) 또한 대한협회 안동지회는 1909년 사립학교가 공립학교로 흡수되어 교과가 폐지되고 학생이 줄어드는 등 사립학교 탄압에 대하여 안동군수 송헌면(宋憲冕)에게 항의서한56)을 보내어 일제의 식민교육화정책에 항쟁하였다.

 

 대한협회는 1907년 창립 당시에는 애국적이고 항일투쟁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부 인사들이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친일화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일진회와 연합제휴설이57) 나돌더니 1908년 임원진이 개편되어 김가진(金嘉鎭)이 회장이 되면서부터 일진회에 휘말려 노골적으로 친일화되어58) 의병을 폭도로 규정하고 의병진압책을 건의하였을 뿐만아니라 의병 진압에 필요한 여러가지 정보를 탐지하여 일제군경에 제공한 실례가 허다하였다.59) 그러나 안동지회는 본회의 변질을 규탄하고 협회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였으나 차츰 쇠퇴하여 1910년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대한협회 안동지회도 해산당하고 말았다.60)


  (3)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의 결성(結成)


  그리고 이시기 김동삼의 계몽운동과 관련하여 언급되어야 할 것이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의 결성이다. 대동청년단은 1909년 10월 김동삼 · 남형우(南亨祐) · 안희제(安熙濟) · 서상일(徐相日) 등의 영남지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결사 단체였다. 대동청년단이 결성된 때는 이미 일제의 한국병합이 기정 사실화된 시기로 1909년 7월 일제는 '한국병합 실행에 관한 방침'을 성안하여 각의에서 통과시키고 그 시기와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의사의 이등박문 저격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한국병합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1907년에 결성된 비밀 결사 단체인 신민회는 그 조직이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중부지방 이북에 치우쳐 있는 반면에 대동청년단은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대동청년단은 17세부터 30세 미만의 청년으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김동삼은 신민회에도 영남인사로 참여하였고61) 대동청년단 단원으로 영남일대의 단원가입과 교양 선전을 위해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단의 단규(團規)62)와 단원 명단63)을 살펴보면, 단장에는 남형우, 부단장에는 안희제(2대 단장), 그외 단원으로는 김동삼, 서상일, 이극로(李克魯), 윤세복(尹世復), 신팔균(申八均), 신채호 등이 눈에 띈다. 그리고 단원의 대부분은 영남 일원의 청년지사들이며, 일부 신민회 잔존세력이 참여하고 있는데 대동청년단 단원중에서 신민회 참여 인사로는 김동삼외에 남형우 · 김홍량(金鴻亮) · 박중화(朴重華) · 신백우(申伯雨) · 신채호 등이 있다.64) 대동청년단원 중에는 신민회 · 교남교육회 · 달성친목회 · 조선국권회복단 · 백산상회 등에 관련된 인사가 많은데, 이들은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자들로 계몽운동에 참여하여 계몽운동의 지방확산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 속에서 상경하여 신교육을 받고 신서적을 접하게 되는 많은 청년들이 증가하게 되고 이들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계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65) 김동삼이 대동청년단 단원으로 활동하게 되는 계기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대동청년단이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조직된 점을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겠고, 1907년 협동학교 설립 · 대한협회 안동지회의 설립 등 계몽운동에 투신한 그가 대동청년단 인사들과 자연스럽게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대동청년단에 관계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대동청년단에 관한 근래의 연구가 있으나, 조직이나 구체적인 활동이 분명치 않는 등 몇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필자의 의견으로는 신민회 조직이 영남지역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 점을 감안하여 신민회계열의 뜻있는 영남지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적으로 민족의식 결집을 공고히 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상룡, 김동삼, 유인식 등이 보수 유림의 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계몽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사상 전환은 협동학교 설립 취지문, 협동학교 권면문, 그리고 대한협회 설립 취지문 등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지역이 타지역에 비해 개화의 영향을 늦게 받았으나, 1905년 을사 5조약 강제 체결로 인한 망국적 위기에 처하게 되자 구국을 위한 계몽운동 참여에 분발할 것을 안동의 인사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그리하여 김동삼은 협동학교 · 대한협회 안동지회 · 대동청년단 등을 통해 계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다가, 1910년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마침 신민회의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이 전해지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4. 중국(中國)으로의 망명(亡命)과 서간도(西間島) 독립군기지(獨立軍基地) 개척(開拓)

 

  (1) 경학사(耕學社)의 설립(設立)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한국강점을 전후하여 신민회의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에 따라 전국적인 한인 대이주 계획이 비밀리에 추진되었는데, 서간도 독립운동기지로 선정한 곳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였다.66) 이후 서간도 이주계획은 급진전되어 양기탁(梁起鐸) · 임치정(林蚩正) · 이동녕(李東寧) · 김도희(金道熙) · 이회영(李會榮) · 주진수(朱鎭洙) 등이 중심이 되어 극비리에 전국 각지의 이주민을 모집하였다.67) 대한협회 안동지회와 협동학교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참여하던 안동지방의 개화 유림들도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이 어렵게 되자, 신민회의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에 따라 대거 서간도로 망명하게 된다. 신민회의 계획이 안동지방에 전달된 것은 신민회 모금 담당 강원도 책임자인 주진수에 의해서 1910년 12월 하순에 이상룡을 통해서였다.68) 주진수는 강원도 평해 지방의 황만영(黃萬英)의 동의를 얻어 함께 안동의 이상룡을 만나 신민회의 계획을 알렸다. 이상룡은 주진수 · 황만영의 제의에 동의하고 중국으로의 망명 문제를 김대락(金大洛)(이상룡의 처남)과 상의하여 1911년 1월 5일 가산을 정리하고 의성김씨 문중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김대락 부자, 김성로(金聲魯) · 김병대(金秉大) 등 30여명이 집단으로 서간도로 망명하게 된다.69) 앞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김동삼은 1911년 3월 협동학교 제1회 졸업식에 참석한 후 서간도로 망명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상룡 · 김동삼 등의 안동지방 인사들이 망명할 당시는 1911년 1월 소위 안악사건과 양기탁 등의 보안법위반사건으로 양기탁 · 임치정 · 김도희 · 김구(金九) · 안명근(安明根) 등이 구속되는 등 신민회 관계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으로 어수선할 때였다.70) 1910년 12월 말 부터 1911년 1월 초에 걸쳐 이동녕과 이회영 형제가 제일 먼저 유하현 삼원보에 도착하였고, 뒤를 이어 이상룡 · 김동삼 · 유인식71) 등이 위험을 무릅쓰고 망명하였다. 이상룡이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자, 그의 동지이자 인척인 김형식(金衡植) · 황만영 · 이명세(李明世) · 정생(鄭生) 등은 이상룡보다 먼저 서간도로 떠났다.72) 한 일제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경상북도의 경우 이상룡(안동출신)과 주진수(울진출신)가 망명한 이후 그 일대에서는 이들의 권유와 설득으로 후속이주가 활발하여73) 조선총독부에서는 경상북도에서의 서간도 이주통계와 이주로 및 이주지역도를 작성하여 이주를 막기 위한 대책을 세우기도 하였다.74) 당시의 망명 상황은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이은숙(李恩淑))와 「만주생활(滿洲生活) 77년 (年)」(이해동(李海東))75)등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험난한 여정 끝에 요녕성(遼寧省) 유하현(柳河縣)(현재 길림성(吉林省)) 삼원보(三源堡)에 도착한 김동삼은 이회영 · 이시영(李始榮)등 형제와 이동녕 · 이상룡 · 김창환(金昌煥) · 주진수 · 윤기섭(尹琦燮) 등과 같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전념하였다. 이들의 망명 목적은 신민회 사건 판결문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서간도에 단체적 이주를 기도하고 조선 본토에서 상당 재력 있는 다수의 인민을 동지(同地)에 이주시켜 토지를 구매하고 촌락을 만들어 새로운 영토로 삼고 다수의 교육 있는 청년을 모집하여 동지(同地)에 보내어 민단(民團)을 일으키고 학교 및 교회를 설(設)하고 진(進)하여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을 시(施)하여 기회를 타서 독립전쟁(獨立戰爭)을 일으켜서 구한국의 국권을 회복코자 한다.'76) 한편,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보 대고산중(大孤山中)에서 노천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耕學社)라는 자치단체를 창설하고, 초대사장에는 이상룡을 추대하고 내무부장에 이회영, 농무부 장에 장유순(張裕淳), 재무부장에 이동녕, 교무부장에 유인식 등이 선출되었고,77) 김동삼은 경학사의 조직과 선전을 맡았다.78) 아울러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경학사 취지서79) 이다. 경학사 취지서에 나타나 있는 바와같이 이들 민족운동가들은 일면 민생 일면 교육이라는 두가지 목표 아래 이주 동포들의 정착과 농지 개척과 이주민 안정책을 도모하기 위하여 서간도에서 최초의 국권회복을 위한 자치단체인 경학사를 창설하게 되었다.80) 그리고 경학사의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국내에서 모여드는 애국청년들을 훈련하였다.81) 이회영 · 이동녕은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를 답사하고 이곳을 독립군 양성의 기지로 정하고 토지를 구입하였다. 1912년 3월 이회영은 합니하에 집을 짓고 학생들을 수용하였다. 그후 유하현 고산자(孤山子)에 넓은 토지를 구입하여 교사를 신축하여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산자로 학교를 옮긴 후 고산자에는 본교를 두고 합니하에는 분교를 두어 김창환이 교관으로 남아 있었다. 서간도 독립운동의 요람이 된 신흥무관학교82)의 전신인 신흥강습소 초대 교장에는 이동녕이 취임하고 교감에는 김달(金達), 학감에 윤기섭, 교관에 김창환, 교사에 이갑수(李甲洙) · 이규룡(李圭龍) 등이 취임하였다.83) 신흥(新興)이라는 학교명은 신민회(新民會)의 신(新)자와 다시 일어나는 독립전쟁이라는 의미를 뜻하는 흥(興)자를 합하여 붙였다.84)

 

  1911년의 대흉년으로 이주 동포들은 심한 생활고를 겪게 되었고, 학교 운영도 재정난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11년 1년 동안은 이회영 형제의 자금으로 경학사 경비를 충당하였으나, 신민회의 경비 지원도 105인 사건으로 어렵게 되자, 같은 해 가을 경학사를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이동녕은 노령으로, 이시영온 봉천으로 떠나고 김창환 · 윤기섭이 남아 신흥강습소를 지켰다.85) 그러던중 1912년 농사가 잘 되어 여준(呂準) · 이탁(李鐸) 등이 중심이 되어 신흥학교유지회(新興學校維持會)를 조직하였다.86)  1912년 가을에는 이상룡 · 허혁(許赫) · 김동삼 등이 중심이 되어 경학사의 후신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고 허혁87) 이 초대 단장에 선출되었다. 부민단은 경학사를 재정비하여 발전시킨 자치단체로 중앙부에 서무(庶務) · 법무(法務) · 검무(檢務) · 학무(學務) · 재무(財務) 등의 부서를 두었는데88) 김동삼은 서무를 맡았다.89) 중앙부를 추가가에서 통하현 합니하로 옮겼으며, 신흥강습소도 이전하였다.90)


  (2) 백서농장(白西農庄)의 경영(經營)


  김동삼은 경학사의 설립에 참여하고, 경학사의 부속기관으로 설립한 신흥강습소에서 후진 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중어학원(中語學院)을 설립하여 중국어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경학사가 제창한 변장운동(變裝運動)9l)의 일환으로 생각된다.92) 1913년 3월 교장 여준, 교감 윤기섭과 신흥강습소 제1회 졸업생 김석(金石) · 강일수(姜一秀) · 이근호(李根澔) 등의 발기로 신흥학우단을 조직하였다. 신흥학우단은 신흥강습소의 교직원과 졸업생이 정단원이 되고 재학생은 준단원이 되는 일종의 동창회 성격을 띤 단체로서 처음에는 명칭을 '다물단(多勿團)'이라 하였다가 부르기 쉽게 '학우단'이라고 개칭하였다. 학우단은 본부를 유하현 삼원보 대화사(大花斜)에 두었고, 《신흥학우보(新興學友報)》도 간행하였다.93) 부민단과 신흥학우단은 1914년 이후에는 신흥학교나 각 분지교에 설치한 노동강습소 등에서 양성한 독립군 385명을 근간으로 하여 백서농장(白西農庄)을 건설하고 서간도 독립군의 편성과 훈련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94) 백서농장은 봉천성 통화현 제8구 관할 팔리초(八里哨)(빨리소) 구(區) 소관하의 소북(小北)(쏘베차)란 백두산 서쪽편 산기슭 사방 200리의 무인지경의 고원평야에 건설한 독립군영의 이름인데 다만 내외의 이목을 고려하여 일반이 쉽게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백서농장이라 하였다.95) 백서농장에 관한 자료로는 원병상(元秉常) 수기(手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8항에 소북차(小北차)분교인 백서농장이라 하여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작자미상의 <제9항(第九項) 백서농장사(白西農庄史)>(필사본)가 있는데 원병상의 수기보다 비교적 자세하게 창설 배경을 기록하고 있는데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96)


  백서농장은 단기 4247년(1914) 갑인에 (중략) 혈전 준비에 급급하던 우리(신흥학우단)수뇌부와 부민회 간부들은 다시 방법을 달리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연복년(年復年) 배출되는 필업생과 각처 분지교 및 각처 노동강습소를 거쳐 나오는 군인들의 기운을 소화, 조절하기 위하여 이미 물색 결정된 곳으로 군관구(軍管區) 기지를 정하고 혈전 태세를 갖추기로 하니 이곳 봉천성(奉天省) 동변도(東邊道)에 속한 통화현(通化縣) 제8구(第8區) 관할 팔리초(八里哨) 구(區) 소관하(小管下)에 있는 소북(小北)란 백두산 서맥(西脈) 고원 평야이다. 백두산 서면이란 뜻을 가져 백서농장(혹은 서장(西庄))이라고(우리군영이라 하지 않았음을 남의 땅인 때문에 국제적 체면을 생각하여 백서농장이라 했다)하고, 내용에서만 우리 군영이라고 불리었다.


  백서농장 창설일에 대해서는 원병상의 수기 <신흥무관학교>에는 1917년 봄이라 하였는데, 1914년이 정확한 것 같다. 왜냐하면 백서농장의 설립 배경을 살펴보면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중 · 일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이 기회를 틈타 독립전쟁을 전개하려다가 실패하자 다시 혈전의 태세를 갖추기 위해 김동삼을 비롯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과 부민단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백서농장을 창설하여 대일무장투쟁에 대비하였다.97) 서간도지역의 독립군영인 백서농장의 중요 부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98)


장주(庄主)  김동삼(金東三)  훈독(訓督)  양규열(梁圭烈)(양재훈(梁在薰))

총무(總務)  김정제(金定濟)  의감(醫監)  김 환(金煥) 

경리(經理)  김자순(金子淳)  수품(需品)  곽 문(郭文) 

외무(外務)  정선백(鄭善伯)  농감(農監)  채 찬(蔡燦)(백광운(白狂雲)) 

교관(敎官)  허식(許湜)(영백(英伯))     김영윤(金永胤) 

   김동식(金東植)     강보형(康保衡) 

교도대장(敎導隊長)  이근호(李根浩)  1중대장(1中隊長)  안상목(安相睦) (부관(副官) 이종옥(李鍾玉)) 

2중대장(2中隊長)    박상훈(朴相勳)    3중대장(3中隊長)    김경달(金敬達)(부관(副官):차용육(車用陸) 이수철(李壽喆),김동진(金東振)) 

규율대장(規律隊長)  신용관(辛容寬)     김일화(金日化) 

   김진화(金進華)       


  이밖에 허덕규(許德奎), 하재하(河在夏) 등 각 소대 부서가 배치되었다.99) 그러나 백서농장은 교통의 불편, 수토의 부적 등의 이유로 1919년 3 · 1운동 이후 한족회 총회의 지시로 폐지되고 말았다. 앞에서 인용한 <제9항(第九項) 백서농장사(白西農庄史)>에,


  이러기로 수년을 지나고 나니 이따금 노루나 곰 산돼지 같은 것이 잡히기 전에는 고기구경을 못한다. 농사는 풍작이나 사람들의 칼로리 없는 식생활에서 모두 병에 걸려 의무실 치료로는 감당할 수 없어 외출이 허가되어 산외치료를 떠난다. 그런중에 허덕규와 하재하의 아들이 죽었다. 신정쇠약 ·불면증 · 열병 ·수토불복 ·위병 ·심장병 ·천식 ·폐병 등이 족출한다. 대부분 방향도 정처도 없이 치료를 목표하고 동포들이 집으로 무작정하고 떠나가는 것을 자유로 맡기고 나니 병사는 비고 불과 30여명이 성한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새로 들어오는 군인은 볼과 몇 사람이 됨으로 유지키 곤란한 해산설이 나돌았다. (중략) 을미년 초였다. 만 4년간이나 겨레의 성열과 군대육성의 정열이 부족한바 아니지만 재2군구 완성을 보지 못한채 3 ·1운동이 일어난 뒷 가둠이 바뻐지자 수절사수하려던 백서농장온 교통불편 ·수토가 부적 ·일체운수 왕래의 부적하다는 결론으로 한족총회의 지시로 폐지하기로 되었다.100)


고 하였는데, 위의 내용중에 을미년 초는 기미년의 오기인 것 같다. 본문중에 '3 · 1운동이 일어난 뒷 가둠이 바뻐지자 수절사수하려던 백서농장은'의 내용으로 보아도 알 수 있고, 백서농장이 한족총회의 지시로 폐지되었다고 하였는데 한족회는 1919년에 창설되었다.


  (3)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창설(創設)


  1919년 초에 백서농장이 폐지된 후 김동삼은 1919년 2월 중국 길림성 길림시에서 김좌진(金佐鎭) · 서일(徐一) · 유동열(柳東說) 등 39명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같이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101)를 발표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 · 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와의 강력한 항전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적 성격의 항일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군단의 정비 또는 새로운 결성이 활발해졌다.102) 부민단은 서간도 전역에서 한인의 자치제를 신장시키는 한편, 신흥학교와 신흥학우단 및 백서농장을 통하여 항전을 위한 준비를 추진하여 왔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에는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여 독립전쟁을 위한 임전 태세를 갖추는데 필요한 방략을 세우고자 부민단내에 시사연구회를 설치하였다.103) 이 연구회는 부민단에서 김동삼과 이탁(李) 등이, 신흥학교에서 김창환과 성준용(成駿用) 등이, 그리고 신흥학우단에서 허식 · 김석 등이 참가하여 이탁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국내외 각지의 정보를 효과적으로 수집 검토하기 위하여 지역 담당과 책임자를 선임하였는데 담당지역과 책임자는 다음과 같다.104)


지역        성명     지역        성명     지역        성명    

서울 · 경기        김창환(金昌煥)    충청 · 전라        이장녕(李章寧)    경상 · 강원        김동삼(金東三)   

황해 · 평안        김정제(金定濟)    함경        이진산(李震山)    남만주        김   석(金   石)   

북만주        이진호(李振浩)    동만주        성준용(成駿用)    일본        최명수(崔明洙)   

중국령        이동녕(李東寧)    미주        허   식(許   湜)    아령        김용규(金容圭)   


  그리하여 시사연구회에서 연구, 토의된 각종 정보와 항일 방략은 그대로 부민단 운용에 반영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종전 전후에 안으로는 국내로부터의 새로운 이주자가 늘어나 한인 거주지역의 확장과 개편이 불가피하게 되고 밖으로는 국제 정세가 조국독립운동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점 등으로 1919년 4월 김동삼은 이상룡 · 이탁(李) 등 남만 각지의 지도자 들과 상의하여 유하현 삼현보에서 부미단의 범위와 사업을 확대하여 한족회로 개편하였다.105) 한족회의 중앙에는 중앙총장을 두고 총장 밑에 총무 · 재무 · 학부 · 외무 · 사판(司判) · 검무(檢務) · 검독(檢督) 등의 여러 부서를 두어 실무에 각기 분담케 했으며 이와는 별도로 중앙위원회를 설치해 의결 기능을 갖게 하였다. 또한 지방조직을 확장하면서 각지의 천가장(千家長)을 총관으로, 백가장(百家長)을 구정(區正)으로 고치고 그 밖에는 부민단의 조직체계를 따랐으며, 특히 한인 사회의 자치 행정과 사법의 준칙인 민 · 형사에 관한 사판장정(査判長程)은 종래의 것을 보완해서 사용하였다. 그리고 군제에 관한 것은 신흥학교에서의 무관 양성과 백서농장의 군대 훈련, 그리고 각지방 분지교 및 노동강습소 출신의 독립군을 모두 합하여 언제든지 독립전쟁을 결행할 수 있도록 임전 체제로 정비하였다. 아울러 중앙총장과 각부 사장(司長)들이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의무금과 공납금의 헌납을 촉구하여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이때 조직된 한족회의 부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106)


중앙총장  이   탁(李   )  서무부장  김동삼(金東三) 

법무부장  이진산(李震山)  학무부장  윤기섭(尹琦燮) 

재무부장  안동원(安東源)     


  아울러 한족회는 기관지로 《한족신보(漢族新報)107)를 간행하였다. 한족회는 발족과 더불어 목표를 국내외의 모든 독립운동을 통제 · 지도하는 중앙정부의 건립에 두고, 일제와 대결하여 조국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독립군을 편성, 훈련시켜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정부를 건립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한족회는 소요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서로군정서의 전신이 된 군정부 건립에 착수하였다. 3 · 1운동 이후 국내에서 몰려오는 청소년들과 그곳 장정들을 모아 신흥학교 등에서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한편 군정부의 중요기구인 독판부와 정무청 및 의회를 구성했고, 그 하부조직인 내무사 · 법무사 · 재무사 · 학무사 · 군무사 · 참모부 · 사령부 · 참모처 · 군정부서 등을 조직하였다. 한편 군사기관으로는 처음 임시군사정부가 설치되고, 군사령관으로는 당시 신흥학교 교장으로 있던 이세영(李世永)이 선임되어 군정부규칙 제정을 서둘렀으며, 임시 군정부의 설립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해 4월에 이르러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대내 · 대외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므로 군정부의 명칭이 문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한족회와 군정부에서는 대표로 윤기섭을 상해로 파견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사항을 협의하여 결정하였다.108)

  1. 국내외 모든 독립운동을 통제, 지도할 임시정부의 위치는 국제 외교상 상해가 적합하므로 그곳에 임시정부를 두도록 하되,

  2. 무장 독립군의 국내 진입 활동은 만주가 적합하므로 독립군을 지휘할 군정부는 만주에 건립하는 것을 허할 것.

  이 타협안의 원칙은 그해 11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통과되었다. 그리하여 한족회가 건립한 군정부는 상해 임시정부 관할하의 서간도 지구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로 개편 되었는데, 이때 서로군정서의 중요부서는 다음과 같았다.109)


독판부(督辦府)  독판  이상용(李相龍) 

   부독판  여준(呂準) 

정무청(政務廳)  청장  이탁(李) 

군정청(軍政聽)  청장  양규열(梁圭烈)(일명:양재훈(梁在薰)) 

참모부(參謨府)  참모장  김동삼(金東三) 


  그밖에 내무사장에 곽문(郭文), 법부사장에 김형식(金衡植), 사령관에는 지청천(池靑天)이 취임하였다. 그리하여 서로군정서는 국내진입작전을 벌여 일제 군경에 대한 기습 공격, 친일파 숙청 등의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전과를 올렸다.110)

 

 

  5. 맺 음 말

 

  일송 김동삼은 경북 안동의 전통 유림의 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자로 성장하다가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개신 유학자로 전환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그의 사상 전환은 석주 이상룡과 동산 유인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1905년 일제가 을사5조약을 강제 체결하자 김동삼은 비분강개하여 안동지방의 보수유림의 완고한 풍습을 혁신하고 자주 독립 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개화사상에 대한 신서적도 많이 읽고, 여러 개화 사상가들과도 접촉하였다. 그리하여 29세 되던 해인 1907년에는 이상룡 · 유인식 · 김후병 · 하중환 등과 같이 사립협동학교를 설립하고 교감으로 취임하여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의 설립에도 참여하였고, 대동청년단 단원으로 활약하는 등 안동지방의 계몽운동을 확산시키는데 선구적인 역활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에 한계를 느끼게 되어 1911년 협동학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신민회의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에 동참하여 서간도로 망명하게 된다.

 

 서간도 망명한후 김동삼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정열을 쏟아 유하현 삼원보에서 설립된 한인 자치단체인 경학사에서 조직과 선전을 맡았으며, 특히 경학사가 제창한 중국인과의 친교 운동인 변장운동에 전념하여 중어학원(中語學院)을 설립하여 이주한인들에게 중국어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후 경학사를 확대하여 발전시킨 부민단에서는 서무를 맡아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처리해 나갔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 · 일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이 기회를 틈타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려다가 실패하자 재차 혈전의 태세를 갖추기 위해 김동삼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과 부민단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 한 백서농장 장주로 대일 무장투쟁을 대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6년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여 독립전쟁을 위한 방략을 세우고자 부민단내에 시사연구회를 설치하였는데 김동삼은 경상 · 강원지역 책임자로 참여하였다. 1919년 백서농장이 폐지된후 김동삼은 1919년 2월 길림성 길림시에서 김좌진 · 서일 · 유동열 등 39명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같이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 · 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와의 강력한 항전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적 성격의 항일 독립운동단체와 독립군단의 정비 또는 새로운 결성이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김동삼은 이상룡 · 이탁(李) 등 남만 각지의 지도자들과 같이 유하현 삼원보에서 부민단을 한족회로 확대 · 개편하여 서무부장을 맡았으며, 한족회가 건립한 군정부가 상해 임시정부 관할하의 서간도지구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로 되면서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김동삼은 전통 유학자에서 개신 유학자로 전향하여, 일제의 침략에 항거한 국권회복을 위한 방략으로 협동학교 · 대한협회 안동지회 · 대동청년단 등을 통한 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0년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신민회의 해외독립운동 기지 건설계획에 동참하여 서간도로 망명한후 김동삼은 줄곧 한인들의 정착과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기초를 닦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이는 김동삼이 경학사 조직과 선전, 부민단 서무, 한족회 서무부장 등을 맡은 바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서농장 장주, 서로군정서 참모장 등을 맡아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의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김동삼은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전통 유학자에서 개신 유학자로 전향한후 철저한 계몽운동가로의 사상 변화를 가져왔으며, 서간도로의 망명이후에는 무장투쟁론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후 김동삼은 통의부 총장(1922), 상해 국민대표회 의장(1923), 전만통일의회 의장(1924), 정의부 외교위원장(1925)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26년에는 2월과 10월 두차례나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에 임명되었으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1928년에는 길림에서 정의부 대표로 김좌진 · 지정천 등과 두 차례나 삼부통합회의를 진행하였고, 같은해 12월에는 혁신의회 의장을 맡았으며,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하여 유일당 적성에 주력하였다.111) 그러던중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여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북만으로 가다가 하얼삔에서 정인호(鄭寅浩)의 집에 투숙하던중 동지 이원일(李源一)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이감되어 10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4월 13일 순국하였다.112)

  

 

 

  

* 주 석 *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1) 이에 관한 연구로는

  박영석(朴永錫), < 일제하(日帝下) 재만한인사회(在滿韓人社會)의 형성(形成) -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활동(活動)을 중심(中心)으로 - >, 《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韓民族獨立運動史硏究)》, (일조각(一潮閣), 1982).

  윤병석(尹炳奭) · 김창순공저(金昌順共著),《재발굴(再發掘) 한국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1》, 한국일보사(社), 1987)

  조동걸(趙東杰), <안동유림(安東儒林)의 도만경위(渡滿經緯)와 독립운동상(獨立運動上)의 성향(性向)>, 《한국민족주의(韓國民族主義)의 성립(成立)과 독립운동사연구(獨立運動史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환, <만주지역(滿洲地域)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사학연구(史學硏究)》40호, (한국사학회(韓國史學會), 1989).

  박진태(朴珍泰), <개신유학계열(改新儒學系列)의 외세대응양식(外勢對應樣式) -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사상(思想)과 행동(行動)을 중심으로 - >, 《국사관논총(國史館論叢)》 제15집(第15輯),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1990)

  윤병석(尹炳奭), <서간도(西間島) 백서농장(白西農庄)과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한국학연구》3, (인하대(仁荷大) 한국학연구소(韓國學硏究所), 1991).

  권대웅(權大雄),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 연구(硏究)>,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1992).

  최덕수(崔德壽),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연구(硏究) - 1910년(年) 전후(前後)의 활동(活動)을 중심(中心)으로> 《사총(史叢)》19, (고대사학회, 1975).

  강재언, <한국독립운동의 근거지문제>, 《근대한국사상사연구》, (미래사, 1983) 등이 있다.

2) 조동걸, 앞의 논문.

3) 이외에도 김동삼은 완산(完山), 교일(敎一), 인식(麟植), 신병곤(申炳坤) 등의 별명(別名)이 있다.(《국외(國外)ニ어(於)ヶル용의조선인명부(容疑朝鮮人名簿)》,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1934, p.68)

4) 가계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중조부 김형수(金亨壽)의 슬하 3남 중에서 장남 진희(鎭羲)가 후사(後嗣)가 없어 2남 진염(鎭炎)의 장남 계락(繼洛)(김동삼의 부친)을 양자로 삼아 대(代)를 이었다.

5) 경사회(景泗會), 《경사유방(景泗流芳)》, (1974)

6)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1827∼1899)은 퇴계(退溪)의 제자였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 一)의 11대손이고,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학통을 이어 퇴계학파의 정통을 계승한 유학자이다.

7) 경사회(景泗會), 《경사유방(景泗流芳)》 pp.193-194.

8) 위와 같음.

9) 위와 같음.

10) 동산(東山) 유인직(柳寅植)(1865~1928)은 서파(西坡) 유필영(柳必永)의 자(子)로, 정재(定齎) 유치명(柳致明)의 문인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에게 수학(修學)하였다. 을미년에는 기암(起岩) 이중업(李中業), 석주 이상룡 등과 의병을 일으켰고 서구 근대사상을 수용한 후 계몽운동에 투신, 협동학교 설립 ·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여 안동 보수유림의 개화에 앞장섰다. 1907년에는 자기집 노비를 해방시키고 적서차별을 타파하였으며, 형평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다 1911년 여름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중국 동북지방으로 망명하였다가 가산을 정리하기 위해 그해 겨울에 귀국하였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중국으로의 망명을 포기하고 안동에 남아 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그 후 조선노동공제회(1920) · 조선교육회(1923) · 조선민립대학기성회(1923)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여 회장에 선출되었다. (동산선생기념사업회, 《동산전집(東山全集)》, 1978 ; 박진태, 앞의 논문, p.60).

11) 석주 이상룡은 1858년생, 동산 유인식은 1965년생으로 이들과의 연령 차이로 보아도 짐작이 가능하다. (조동걸, 앞의 논문, pp.238∼241.).

12) 조동걸, 앞의 논문, pp.238∼240.

13) 박진태, 앞의 논문, pp.55∼56.

14)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계열(系列)의 척사상소운동과 최익현(崔益絃) · 민종식(閔宗植) · 신돌석(申乭石) 의병진 등의 반일(反日) 의병항쟁(義兵抗爭).

15) 간재(艮齋) 전우계열(田愚系列)의 자정론자(自靖論者). 이에 대해서는 성대경(成大慶), <보수유생(保守儒生)의 자정론(自靖論)'과 외세대응양식(外勢對應樣式) -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사상(思想)과 행동(行動)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國史館論叢)》 제(第)15집(輯),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1990) 참조.

16) 조동걸, 앞의 논문, PP.243∼247.

17) 《황성신문(皇城新聞)》, 1908년 9월 27자.

18) 위와 같음

19) 《황성신문(皇城新聞)》, 1908년 9월 24일자 논설 <교남(嶠南)의 일뢰(一雷)>.

20) 문헌에 따라 협동학교의 설립자가 김동삼 · 유인식 · 이상룡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협동학교가 이지역 각 문중 대표들의 합의에 의해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경사유방(景泗流芳)》에는 김동삼, 《동산전집(東山全集)》에는 유인식, 《석주유고(石洲遺稿)》에는 이상룡으로 되어 있다.

21) 《경사유방(景泗流芳)》, p.194.

22) 주(註)) 21과 같음.

23) 1908년 여름 이회형(李會滎)이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이상설(李相卨)을 만나 조국 광복 성취를 위해 (1) 국민교육을 장려할 것. (2) 만주에서 광복군을 양성할 것. (3) 비밀 결사를 조직할 것. (4) 운동 자금을 준비할 것 등의 4가지 방략을 결정하고 귀국 후 기호학회 · 서북학회 · 교남학회 · 호남학회 · 관동학회의 인사들과 국민 교육 장려를 위해 협의하였다. 특히 이동녕(李東寧) · 안창호(安昌浩) · 이승훈(李昇熏) · 박승봉(朴勝鳳) 등과 모여 협의한 다음, 이관직은 안동 협동학교에, 김사설(金思說)은 평양 대성학교에(사고로 부임하지 못함), 이강연(李康演)은 정주 오산학교에, 여준(呂準)은 상동청년학원에 교사로 추천하여 파견하였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약전(略傳)> (이정규(李丁奎)).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실기(實記)> (이관직(李觀稙)), 《우당이회영약전(友堂李會榮略傳)》, 을유문화사, 1985).

24) 조동걸, 앞의 논문, p.244∼245.

25)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70년지(年誌)》, (고려대학교출판부, 1975) p.37.

26) 이정규(李丁奎),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약전(略傳)>과 이관직(李觀稙),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실기(實記)>, 《우당이회영약전(友堂李會榮略傳)》, (을유문화사(乙酉文化史), 1985. 을유문고263) pp.38∼39와 pp.136∼137.

27) 《황성신문(皇城新聞)》, 1908년 10월 7일자.

28) 《황성신문(皇城新聞)》, 1909년 11월 28일, <협동진보(協東進步)>, 1907년 협동학교 교직원 사진을 보면 7명이 모두 단발을 하였고, 김동삼은 양복을 입고 있다.

29) 《황성신문(皇城新聞)》, <협동학생애함(協東學生哀函)>, 1910년 7월 29일자.

30) 《황성신문(皇城新聞)》, 1910년 7월 23일자.

31) 《황성신문(皇城新聞)》, 1910년 8월 2일자.

32) 《황성신문(皇城新聞)》, <성토안동완고(聲討安東頑固)>, 1910년 7월 27일자.

33) 《황성신문(皇城新聞)》, <협동학생애함(協東學生哀函)>, 1910년 7월 29일 · 30일 · 31일자.

34) 《황성신문(皇城新聞)》, 1910년 8월 7일자.

35) 《황성신문(皇城新聞)》, 1910년 8월 2일자 논설 <경하(慶賀) 협동학교(協東學校) 부활(復活)>. 협동학교 부활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한 두 청년교사 중에서 김하정(金夏鼎)은 평양숭실중학교 졸업생이고, 김철훈(金轍勳)은 서북협성학교 1회 졸업생이다.

36) 협동학교 졸업생 김병대(金秉大)의 졸업증서(독립기념관 소장) 및 협동학교 제1회 졸업 기념사진. 김병대의 졸업증서를 보면, 졸업날짜가 명치 44년(1911년) 3월 30일로 명시되어 있고, 교장 김병식, 교감 박태훈(朴泰薰), 교사 이관직 · 박준서(朴濬緖) · 김진황(金振璜)으로 되어 있다.

37) 협동학교 졸업생 유규원(柳圭元)의 학적부.(독립기념관 소장) 유규원의 학적부를 보면, 생도난에는 유규원이 1894년에 출생하여 1912년 11월 25일 협동학교에 입학한다. 입학당시의 나이를 환산해 보면 19세이다. 출생지와 거주지 주소는 임동면 수곡동(水谷洞)으로 되어 있고 종전교육은 한문사숙으로 기재되어 있다. 본관은 전주이고, 학비는 50전이다. 감독자난을 보면 가장(家長)은 부친으로 유태희(柳泰熙)(39세), 직업은 농업이다. 보증인은 유병호(柳秉鎬)(55세)로 직업은 면장으로 학생과의 관계는 친족으로 기재되어 있다. 졸업년도는 1915년 4월 17일 2회로 되어 있다.

38) 협동학교 졸업생 유규원(柳圭元)의 학업성적표.(독립기념관 소장)

39) 1911년 3월 30일 협동학교 제1회 졸업기념 사진에 김동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으로의 망명 결정을 한후에도 바로 떠나지 못하고, 1회 졸업식을 보고 떠난 것으로 생각된다.

40) 조동걸, 앞의 논문. p.252.

41) 註(주))37과 같음.

42) 조동걸, 앞의 논문, p.245.

43) 김대원(金大源), <협동학교소론(協東學校小論)>, 《안동지(安東誌)》, pp.342∼343.

44) 1919년 3 · 1운동 당시 임동면 편항시장 의거는 안동군내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중의 하나였는데, 의거의 중심이 협동학교였다. 임동면 편항시장 의거는 유동기(柳東耆)가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가져오고, 협동학교의 유동태 · 이균호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켰다. 안동지역 3 · 1운동의 주동인물이 대다수 협동학교 관계자 및 졸업생이었다는 것은 협동학교를 통한 국권회복의 의지가 그대로 3 · 1운동으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3권》 3 · 1운동사(하), pp.405∼410).

45) 신용하(愼鏞廈), <한말(韓末) 애국계몽사상(愛國啓蒙思想)과 운동(運動)>, 《한국근대사회사상사연구(韓國近代社會思想史硏究)》, (일지사(一志社), 1987) pp.163∼167.

46) 대한협회에 대해서는 이현종(李鉉淙), <대한협회(大韓協會)에 관(關)한 연구(硏究)>, 《아세아연구》 13, (고대아세아문제연구소, 1970) 참조.

47)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 제1호 p.2 본회강령(本會綱領),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1976).

48) <답대한협회(答大韓協會)>, 《석주유고(石洲遺稿)》, (고려대학교출판부, 1973) pp.71∼72.

49) <행장(行狀)>, 《석주유고(石洲遺稿)》 p.334 ; <대한협회안동지회여본향사우(大韓協會安東支會與本鄕士友)>, 《석주유고(石洲遺稿)》 p.72 ; 박영석, 앞의 논문, p.95 ; 조동걸, 앞의 논문, p.246. ; 박진태, 앞의 논문, p.70.

50)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 제11호, pp.43∼44.

51) <행장(行狀)>, 《석주유고(石洲遺稿)》, p.334 ; 조동걸, 앞의 논문, pp.245∼246.

52) <서게대한협회회관(書揭大韓協會會館)>, 《석주유고(石洲遺稿)》, pp.201∼202 ; 최덕수, 앞의 논문, p.103.

53) <대한협회안동지회취지서(大韓協會安東支會趣旨書)>, 《석주유고(石洲遺稿)》, pp.207∼208 ; 최덕수, 앞의 논문, p.103.

54) 박영석, 앞의 논문, pp.95∼97 ; 박진태, 앞의 논문, 71.

55) <서게대한협회회관(書揭大韓協會會館)>, 《석주유고(石洲遺稿)》 p.205 ; 박진태, 앞의 논문, p.71.

56) <여안동군수송헌면(與安東郡守宋憲冕)>, 《석주유고(石洲遺稿)》 p.96 ; 조동걸, 앞의 논 문, p.246.

57) 이현종, 앞의 논문, pp.39∼50.

58) 최덕수, 앞의 논문, p.104.

59)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1, pp.399∼400.

60) 주(註)) 58과 같음.

61) 신용하(愼鏞廈), <신민회(新民會)의 창건(創建)과 그 국권회복운동(國權恢復運動)>,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韓國民族獨立運動史硏究)》, (을유문화사(乙酉文化社), 1985) pp.45∼46. 신민회의 주요 주도회원 명단.

62)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 단규(團規)

  1. 단원은 반드시 피로 맹세할 것.

  2. 새단원이나 단에 관한 사항은 문자로 표시하지 말 것.

  3. 단명이나 단에 관한 사항은 문자로 표시하지 말 것.

  4. 경찰 기타 기관에 체포될 경우 그 사건은 본인에만 한하고 다른 단원에게 연루시키지 말 것.

  (김양우(金洋佑), <부산(釜山)의 선각자(先覺者)> (항일(抗日)독립투사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부산일보(釜山日報)》 1981년 10월 22일. ; 권대웅, 앞의 논문, p.234.)

63) 위와 같음.

64) 주(註)) 61과 같음

65) 권대웅, 앞의 논문, pp.235∼237.

66)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 해외독립운동기지건설 착수경위에 대해서는 채근식(蔡根植), 《무장독립운동비사(武裝獨立運動秘史)》, (대한민국공보처, 1949) pp.47∼48.

67) 신용하, 앞의 논문, pp.109∼112.

68) 조동걸, 앞의 논문, p.250.

69) <행장(行狀)>, 《석주유고(石洲遺稿)》, p.335 ; 조동걸, 앞의 논문, pp.247∼252 ; 박영석(朴永錫),《독립운동가열전(獨立運動家列傳)》, (한국일보사, 1989) p.3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제5권, 독립군전투사(상), pp.165∼166.

70) 조동걸, <1910년대 독립운동의 변천과 특성>, 《한민족독립운동사》3, (국사편찬위원회, 1988) p.39.

71)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인식은 1911년 여름에 협동학교를 유동태에게 맡기고 중국 동북지방으로 망명한 후 가산을 정리하기 위하여 귀국하였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중국망명을 포기하고 국내에서 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주(註)) 39와 같음.

72) 박영석(朴永錫), <일제하(日帝下) 재만한인(在滿韓人)의 독립운동(獨立運動)과 민족의식(民族意識) - 경학사(耕學社)의 설립경위(設立經緯)와 그 취지(趣旨)를 중심(中心)으로>,《 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韓民族獨立運動史硏究)》, (일조각(一潮閣), 1982) p.187.

73) 1911년 주진수의 권유로 영양 · 봉화 · 예안 · 안동 · 영해군에서 87명이 김천역과 대구역을 통하여 서간도로 이주하였으며, 이상룡 망명이후 경북 각군에서 이주열이 더욱 고조되어 1912년 1월부터 9월말까지 9개월 동안에 이주한 수가 1,092명에 이르렀으며, 이주 범위도 울진군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영해 · 영덕 · 청하 · 홍해 · 경주 · 영천 · 하양 · 대구 · 현풍 · 고령 등지에서 확대되었고, 그 중 경주에서만 1912년 1월부터 9월까지 사이에 983명이 서간도로 이주한 것으로 조사되었다.(유병석 · 김창순 공저, 앞의 책, pp.76∼47).

74) 윤병석, <1910년대 국외에서의 한국독립운동>, 《한민족독립운동사》3, (국사편찬위원회, 1988) pp.85∼86.

75) 《만주생활(滿洲生活) 칠십칠년(七十七年)》 (일송(一松)선생 맏며느리 이해동(李海東) 여사 수기(手記)『난중록(亂中錄)』), (명지출판사(明志出版社), 1990.).

7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제5권, p166.

77)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실기(實記)>, 앞의 책, pp.155∼156.

78) 《경사유방(景泗流芳)》, p.195.

79) <경학사취지서(耕學社趣旨書)>, 《석주유고(石洲遺稿)》, pp.208∼209.

80) 경학사취지서 내용에 대해서는 박영석(朴永錫), <일제하(日帝下) 재만한인(在滿韓人)의 독립운동(獨立運動)과 민족의식(民族意識) - 경학사(耕學社)의 설립경위(設立經緯)와 그 취지(趣旨)를 중심(中心)으로 ->, 앞의 책, pp.190∼197. 참조

81) 채근식, 앞의 책, p.48.

82) 신흥무관학교에 대하여 자세한 것은 박환, 앞의 논문 참조.

83) 원병상(元秉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독립군전투사자료집》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p.12.

84) 위와 같음.

85) 채근식, 앞의 책, p.49 ; 김승학(金承學),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p.352.

8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제5권, p.172.

87) 부민단 단장에는 기록에 따라 허혁 · 이상룡 · 김동삼 등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동삼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준엽(金俊燁 · 김창순(金昌順)공저(共著),《한국공산주의운동사(韓國共産主義運動史)》 제4권, (고대아세아문제연구소, 1974) pp.48∼49).

88) 채근식, 앞의 책, pp.49∼50.

89) 주(註)) 78과 같음.

9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제5권, p.173.

91) 경학사가 제창한 중국인과의 친교운동인데, 당시 서간도의 중국인들은 급격하게 이주는 많은 한인들을 일제의 앞잡이 또는 중국인들을 해치려는 집단으로 보고 한인들을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한인 동포들의 생활 안착을 위해 중국인 복장을 하고 중국어를 배워 사용하였다.(원병상, <신흥무관학교>, 앞의 책, pp.11∼35 ; 윤병석, <1910년대 국외에서의 한국독립운동>, 앞의 책, p.87 ; 이해동, 앞의 책, p.35.

92) 박영석, <대한독립선언서>, 《한민족독립운동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88), p.122.

93) 원병상(元秉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p.16.

94) 작자미상, <제9항(第九項) 백서농장사(白西農庄史> ; 윤병석(尹炳奭), <서간도(西間島) 백서농장(白西農庄)과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한국학연구》 3,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1), p.107∼108.

95) 위와 같음.

96) 위와 같음.

97) 박환, 앞의 논문, pp.384∼385.

98) 주(註)) 94와 같음.

99) 위와 같음.

100) <제9항(第九項) 백서농장사(白西農庄史> ; 박환, 앞의 논문, p.387.

101) 대한독립선언서는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 · 중광단선언(重光團宣言) · 대한독립의군부독립선언서(大韓獨立義軍府獨立宣言書) · 길림독립선언서(吉林獨立宣言書) 등 여러가지 명칭이 있다. 대한독립선언서 발표시기에 대해서는 '1918년설'(조항래(趙恒來),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발표시기(發表時期)의 경위(經緯)>,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1992. pp.513∼536. 참조.)과 '1919년설'(송우혜(宋友惠), <대한독립선언서 세칭 「무오독립선언서」의 실체 : 발표시기의 규명과 내용분석>, 《역사비평》, (역사문제연구소, 1988년 여름호 참조).

102) 3 · 1운동 이후 서간도 지역의 독립군단의 조직과 활동에 대해서는 채영국(蔡永國), < 3 · 1운동 이후 서간도(西間島) 지역 독립운동(獨立運動) 연구(硏究) -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 ·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을 중심으로 ->, 《윤병석교수화갑기념론총(尹炳錫敎授華甲紀念論叢)》, (1991) 참조.

103) 윤병석, · 김창순공저, 앞의 책, pp.158∼159.

104) 위와 같음.

105) 위와 같음.

10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제5권, p.291∼292.

107) 주필은 이시열(李時悅)이고 후에 《새벽달》로 개제(改題)하였다.

10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제5권, p.292.; 윤병석 · 김창순공저, 앞의 책, pp.158∼161.

10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제5권, pp.291∼293

1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제5권 ; 윤병석 · 김창순공저, 앞의 책.

111) 조동걸(趙東杰), <안동유림(安東儒林)의 도만경위(渡滿經緯)와 독립운동상(獨立運動上)의 성향(性向)>, 앞의 책, pp.252∼258.

112) 《조선일보(朝鮮日報)》 1937년 4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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