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토, 휴가전쟁, 홍개미, 틈
휴가전쟁
휴가철이다. 7시부터 매표소 앞엔 승용차들이 줄을 섰고, 내원사계곡에는 벌써 좋은 자리를 잡아 그늘막과 텐트를 친 사람들로 북적였다. 도대체 저들은 언제 들어온 것일까? 휴가전쟁이다. 아이들 방학과 불과 열흘 남짓한 기간 안에 몰린 여름휴가이기 때문이다. 상점들도 아침 일찍부터 튜브와 수박을 내놓았다. 이렇게 발악을 하듯 몰리는 행락객들을 보니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한국이 열정적이고 다이나믹하다는 말도 알고 보면 속빈 강정이다. 노동 강도가 말할 수 없이 세고,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상황에서 일을 마치면 9시 10시인데 그때부터 술과 유흥을 즐기자니 자연 자정이 지나도 멈출 줄 모른다. 과로가 삶의 형식이다. 놀 땐 강도높게 놀아야 한다. 술도 그냥 마시기보다 폭탄주를 조제해 먹어야 한다. 때문에 24시간 영업하는 술집, 밥집들이 생기고, 주문만 하면 뭐든지 배달이 되는 극한의 노동착취와 여가착취로 이어진다. 한국인의 성의식 왜곡과 성범죄도 이러한 욕구불만과 억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계 없는 자본의 군림과 명령에 대한 복종이 어떤 부작용으로 이어지는 지 우리는 채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다만 맥락을 생략한 채 열정적이고 다이나믹한 한국인의 성격과 문화라고 뭉뚱그린다. 하지만 나는 열정과 다이나믹 대신 착취와 발악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한국 직업문화는 사람을 착취하고 발악하게 한다. 단 10일 안에 전 국민의 대부분이 휴가를 보내다보니 날도 날이지만 교통과 사람에 대한 짜증이 말할 수 없다. 휴가도 경쟁이다. 이것은 휴가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휴가를 해치우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독재 국가자본주의의 노동명령에 복종하며 살고 있다.
어제가 블루문이 뜨는 날이었다. 보름달이 두 번 뜨는 특별한 날이라 혹 정상에 야영객이라도 있지 않을까? 은수고개를 통해 올라가봤다. 다행히 야영객은 없었지만 산악자전거 동호회 사람들이 습지복원지역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그래 부지런히 따라가 운행을 삼가달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역시 화를 낸다. 오늘은 힘들게 올라왔으니 즐겁게 타고 내려가고 다음엔 삼가달라고 했지만 그럴 생각이 없어보였다. 이들에겐 습지복원지역이나 도립공원 같은 게 별 의미가 없다. 오직 산악자전거를 왜 막느냐는 것이다. 등산객 안전은 자신들도 조심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동호회 사람들을 내려 보내며 드는 생각이 역시 시민과 문화의 실종이다. 공통의식과 합의 부분이 참으로 취약하다. 동호회분들은 정부가 나서서 자전거길을 만들고 특별법까지 제정하면서 권장하는 마당에 레저스포츠길을 오히려 폐쇄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레저스포츠가 문화인가 질문하고 싶어진다. 문화라는 말을 곧바로 쓰기보다는 상품문화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아니 나는 한발 나아가 자본주의시대의 그저 문화상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본은 수익창출을 위해 쉼 없이 시장을 창출하고 상품을 발명해간다. 그리고 자본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그러한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삶을 살아간다. 연명과 여가가 모두 상품에 의해 가능해졌다. 관광문화가 아니라 관광상품이고, 레저문화가 아니라 레저상품이다. 자본과 상품 원리를 깊이 내면화한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자본과 상품의 번창에 기여하고 복종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이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도 없다. 사적 이익이 모든 영역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가 현대정치의 불가능성을 토로하는 부분이다.
누가 자전거를 자연친화적이라고 말하겠는가? 국가는 4대강공사를 강행하며 서울에서 부산까지 강길 따라 갈 수 있다고 홍보를 했다. 지자체들은 너도나도 산악자전거길을 내놓는다. 스포츠매장엔 각종 장비들이 진열된다. 이것이 자본의 방식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휴식과 놀이에 매달리는가? 노동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삶이 공허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뒤틀려버렸다.
요즘 산엔 산도라지, 마타리, 곰취, 참취꽃이 보이고 각종 잠자리들이 제철을 만났다.
홍개미
발가락이 따끔해서 내려 보니 홍개미 한 마리가 물고 있었다. 개미와 사냥꾼 우화같다. 나는 개미를 잡아 가까이 오지 못하게 던졌다. 그랬더니 문커튼에 착 달라붙어 다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부지런히 수직으로 내려오다가 다시 수직으로 올라가 벽으로 건너간다.
놀라워라 홍개미가 없다면 초소는 얼마나 적막할까? 쉼 없이 돌아다니며 들르지 않는 곳이 없는 것 같다. 저들의 부지런한 다리는 도무지 지침이 없다. 저들의 호기심 또한 막을 수 없다. 어느 사이엔가 내 다리와 옷 속으로 기어들어가기도 한다. 개미에게는 부지런과 호기심이 곧 삶의 방식이다. 도무지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 이단 달려들고 안 되면 멈췄다 반대방향으로 가면 된다. 그들은 과거를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 앞에는 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그 세계를 답파하고 탐색하며 먹을 것을 찾으면 된다. 어찌 보면 그 삶의 방식이 무모하기 이를 데 없다. 최대한 단순하고 최대한 무식하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개미의 성공 비결이다.
개미에게는 개미의 방식이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어떤 방식이 있는가?
틈
세계는 객관적인가? 아니다 세계는 주관적이고 간주관적이다. 내가 아이일 때 나의 세계는 고작 동네를 벗어나지 못했다. 창동 철뚝 동네에 살면서 반경 1~200미터를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엄마를 따라 처음 타본 버스를 타고 돈암동에 갔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나는 그때 돈암동이 어디인지도 몰랐지만 그 지루하고 긴 버스의 시간과 낯선 곳 낯선 사람이 인상적이었다. 초등학생 무렵에는 집과 학교 사이의 지역 정도가 전부였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시내와 산들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 여행을 1년 동안 하고 돌아왔지만 아직 이름도 모르는 나라가 수두룩하다. 더구나 나는 세상의 나라와 민족의 역사와 전통, 정치, 경제 등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별로 없다. 그저 우리가 공통세계를 살고 있다고 사정하고 있을 뿐이다. 세계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객관적이라고 간주관적이라고 가정할 뿐이다.
사람이 이러할진대, 동물과 식물들 그리고 저 깊은 바다 속과 땅 속, 그리고 우주 밖은 어떨까? 까마득하고 까마득할 뿐이다. 내 앎은 기껏해야 사람의 한계 그물을 확장할 뿐이지만 그것의 범위를 존재론적으로 살펴보면 극단적으로 상대적이다.
이슬람 목동의 세계와 남미 원주민의 세계와 유럽인의 세계가 같을 수 없고, 재벌의 세계와 빈민의 세계가 같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들의 세계는 어딘가에서 상호 중첩된다. 마치 개미와 황조롱이와 나의 세계가 화엄벌 위에서 중첩되듯이. 그러므로 우리는 무관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각자의 세계를 인정하며. 그러나 우리가 서로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자본가가 노동자의 세계성을 인정하지 않고, 부자가 빈자의 세계성을 인정하지 않고, 어른이 아이의 세계성을 인정하지 않고, 젊은이가 노인의 세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즉 세계란 실족이고 실존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질적인 세계를 인정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다원적이고 다차원적이고 상호적이다. 민주의 반대말은 독재일 것이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나 중심의 세계질서를 고집하고 강요하는 것이 바로 독재이고 패권이다. 군부독재, 전제독재, 과두독재 등 독재의 방식도 여러 가지고, 국사패권, 정치패권, 경제패권, 언어패권 등 패권의 방식도 여러 가지다.
우리는 세계가 답답하다고 한다. 꽉 막혔다고 한다. 틈이 없다고 한다. 그것은 세계가 민주적이지 않고 독재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인데, 즉 힘의 지배에 의해 나의 실존과 세계성이 쪼그라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틈을 만들고 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삶의 관심이라고 하겠다. 아이들이 노동자들이 노인들이 성소수자들이 난민들이 수감자들이 또한 세계와 실존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독재를 살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그것은 저기 바닥을 기어가는 개미에게도 해당하는 일이겠고, 상공을 배회하는 황조롱이에게도 해당하겠고, 숲을 지키는 멧돼지들에게도 해당하는 일이다.
하지만 답답한 세계를 벗어나 자기만의 숨 쉴 틈과 그 틈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세계성은 어떻게 마련될까? 초소 바닥을 부지런히 탈주하듯 기어가는 개미처럼 저들의 무모한 부지런과 호기심에 경의를 표한다. 버섯들에, 소나무에, 계곡물에, 구름에, 바위에. 자연물은 내게 각기 엄존하는 이질적 실존과 세계성을 알려준다. 인간도 벗어날 수 없다.
숲이라는 생태이자 사회 안에서 같은 나무도 각기 다른 세계를 지니고 산다. 참나무들도 나무마다 다른 실존과 세계를 가지고 산다. 공통되지만 고유하고 양립가능하지만 교체불능이다.
절망한 사람들은 산을 찾는다. 틈을 내기 위해. 절벽을 오리는 등반가들은 작은 틈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것이다. 작은 틈 작은 턱 하나가 손끝 발끝을 대고 끼울 수 있다면 삶을 일으키는 지렛대가 된다. 그러므로 지구를 들어 올리는 알키메데스의 질점은 세계 어디에도 없지만 세계 어디에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특이점을 중시한다. 일종의 돌연변이 이질성이다. 기존 질서는 반듯이 복종해야 할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독재로 있을 뿐이다. 나의 실존과 나의 세계는 내가 각성하고 응시하고 열어가야 할 길이다. 풍경을 가로지르는 외줄기 길처럼 그것은 나만이 걷는 유일의 길이다. 나는 나의 틈으로 나의 길로 나의 세계를 산다. 내가 틈이고 내가 길이고 내가 세계다.
부처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선언한 것이다. 노자나 장자가 왕도정치의 세계를 버리고 자연으로 간 것은 이 때문이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세계야말로 가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를 지나치게 주관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우리는 감각과 언어와 경험을 공유하며 간주간적 세계상을 만들고 간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란 간주간적으로 짜여 지는 그물로서 일종의 간주간적 홀로그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대화의 선이 우리를 망상과 몽상의 바다에서 또한 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