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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으로 뽑은 말은 한시(漢詩)의 구절이 아닌 중국어 문장으로
‘교사는 침을 튀기(며 수업을 하)는데, 학생은 침을 흘리(면서 잠잔)다.’는 뜻이다.
수업시간에 교실 책상 위에 엎드려 자는 학생들과 보건실 침대 위에서 잠자던 학생,
그리고 본인은 안자면서 자신의 영혼을 한동안 잠재웠던 학생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Ⅰ. 잠자는 아이들
사람은 꿈의 크기만큼 성장한다고 한다. 원대한 꿈을 품으라는 얘기다.
세상은 꿈꾸는 자들의 것이라고 한다. 꿈은 상상에서 오고 상상은 현실이 된다.
A군의 장래 희망은 연기자가 되는 것이란다. 청춘의 꿈은 꿈 자체로도 아름답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면서 그 짧은 시간에 칭찬 거리를 찾아서 용기를 준다.
“그래, 너는 목소리가 저음으로 안정되어 있구나. 어떤 배역도 잘 소화할 수 있겠다.
연기자에게는 체격조건과 얼굴뿐만 아니라 목소리 또한 대단히 중요하단다.
너도 알고 있지? 여배우 000 남편 000, 그 친구는 체격도 좋고 남자답게 생겼는데
목소리가 가늘어서 배역과 안 어울리는 경우가 많아, 그런데 너는 목소리를 타고났구나.”
A군은 이런 칭찬을 듣고는 기분이 좋았는지 20분 정도 수업에 참여하다가
졸린 눈을 어쩌지 못하고 바로 책상에 엎드려 자면서 연기자의 꿈을 꾸고 있었다.
졸리면 천하장사도 들어 올리지 못하는 것이 눈꺼풀로 세상에서 제일 무겁단다.
A군은 오전 내내 자느라고 점심 식사를 거르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단다.
서너 달 지나서 어느 날은 A군을 모질게 깨웠다. 단잠을 깨우는 내가 얼마나 미울까 마는,
이쯤에서는 나도 한마디 해야겠기에, 한창 꿈을 꾸고 있을 A군을 세차게 흔들었다.
“중국의 경극 배우는 일평생 한 가지 배역만 한단다. A군아! 여기는 한국이다.
너는 경극 배우가 아니잖니, 이제 잠자는 연기는 그만하고 수업 받는 착한 연기도 해보자.”
B군은 동전을 삼키고 앰뷸런스를 타서 유명한데 나와는 3년째 알고 지내는 학생이다.
복도에서 만나면 매번 허그(hug)는 물론 교무실로 데리고 와서 간식거리를 챙겨주곤 한다.
3학년 신학기 첫 수업에서 나를 보더니 무척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아는 체를 한다.
내 자리에 와서 과자를 받아 가면서도 내가 무슨 과목을 가르치는지 몰랐던 모양이다.
공부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2주차 수업부터 잠을 청하기 시작하였다.
정확히 15분이 지나면 책상에 엎드리는데 피곤한 날은 채 5분을 못 넘기고 쓰러진다.
나도 초임 시절에는 열정으로 충만하여 학생들의 잠을 허락하지 않고 깨웠는데,
10여 년 지나서는 다음 시간이라도 자지 않기를 바란다는 핑계로 슬며시 묵인하기도 했다.
B군은 반년이 지나도록 일관되게 30분 수면은 절대량인지 꼭 확보하려고 한다.
사실은 깨어있어도 수업 참여도가 낮아서 잠자는 것이나 별반 차이는 없다.
해석이 필요한 농담에는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려서 빵 터는 속도가 좀 늦고,
뭘 물어도 “모르겠어요.”라는 대답이 절반 이상이다. 사랑이 필요한 학생이다.
나는 B군의 한계가 궁금했다. 과연 깨어있는 상태로 수업을 완주할 수 있을까?
어제 8시간 정도 잤고, 전 시간에도 30분 정도 잔 것을 확인하고는 실행하기로 했다.
“자, 우리는 오늘 B군이 수업을 마칠 때까지 잠을 자지 않는 위대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듣자마자 나를 바라보며 도전하겠다는 표정인지 아리송한 미소로 화답했다.
5분, 3분 단위로 B군의 상태를 점검하면서 공개적으로 칭찬하기도 했다.
15분 후 첫 고비가 왔다. “B군은 지금 초능력을 발휘하여 인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2분 정도는 잠을 떨치고 버티지만, 눈은 다시 서서히 감기고 만다.
“이제 전반전을 무사히 끝냈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데리고 화장실도 다녀왔다.
움직이면 잠이 달아나는데, B군은 복도를 걸으면서도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못한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안마도 해주고 그래도 고개가 떨궈지면 같이 스트레칭도 했다.
10분이나 남았는데,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으며, 5분이 남았을 때는 한계가 아닌가 싶었다.
“선생님, 토 나올 것 같아요!” “그래? 참자! 4분 남았다. 오늘은 기필코 완주하자.”
3분 남았다, 2분 남았다, 말을 걸고 물을 마시게 했으니 이쯤이면 학대에 가깝다.
B군은 해 보내겠다는 의지가 전혀 없다.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쓰러지기 직전이다. “역사적인 순간이 눈앞에 있다. 이제 1분 남았다.”
종이 울리자마자 B군은 책상에 까무러치듯 엎어졌다. 해냈다는 표정은 없었다.
C군은 깨어있는 모습을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학생이다.
담임선생님은 2교시 전에 등교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교실에 들어가서 C군과 소통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정도다.
묻는 말에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하니 아예 접근이 불가능하다.
2교시 전까지는 학교에 오지만 등교 시간도 C군이 스스로 결정한다.
C군의 깨어있는 시간은 등교, 점심식사, 하교 등 이동 시간이 전부이다.
팔이 저리면 고개를 돌려 자는데 책상 위에 침을 흘려서 휴지를 건네준 적도 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책상을 닦고 나서 더 주무세요.”
마음으로 다가가도 학생이 잠을 핑계로 대화의 문을 닫으면 참 씁쓸하다.
어디 A, B, C군뿐이겠는가. 이보다 더하거나 이에 버금가는 수면 보살이 수두룩하다.
그 비율이 해마다 높아져서 지금은 대략 30% 정도가 잠자기 위해서 등교한다.
체육 시간도 귀찮아하며 머리 눕힐 공간을 찾으니 학습활동은 제로에 수렴된다.
Ⅱ. 깨어난 아이들
노무현 정부 시절에 정치권에서 ‘코드’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똑같은 방식과 똑같은 말로 다가가도 학생에 따라서 반응은 전혀 다르다.
누구는 꼰대 잔소리로 치부하고, 누구는 마치 복음(福音)처럼 받아들이니 말이다.
그래도 금년에는 두 학생과 코드가 맞았으니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D군은 2학년 때까지 교실에 있는 시간보다 보건실에서 자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학생의 반항심이 고조에 달해 있어서 담임선생님은 좀 눅어지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말을 걸었는지는 어렴풋한데, D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응했던 기억은 뚜렷하다.
“너는 눈빛이 살아있어! 뭔가 해낼 것 같은데, 무의미한 시간만 보내는 것도 죄악”이라고 했다.
그 한마디에 D군은 변하기 시작했고 교과 선생님마다 칭찬하는 모범사례가 되었다.
그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니 아주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말로 배우가 되는 것이란다.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직업이 ‘연기자’인데, 그런 즉흥적인 꿈은 아닌 듯했다.
동행하면서 배우의 길을 안내해줘도 되겠다 싶어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먼저 아내에게 양해를 구했다. 관람을 자주 하는데, 난데없이 학생이 끼어드니 말이다.
4장을 예약하고 엄마와 같이 보자고 하니 엄마는 건강회복 중이라며 아빠가 오셨다.
나는 인터넷으로 검색도 해보고 관람하면서 메모까지 해두고는 전문가인양 말했다.
대사 전달이 약했던 부분이나 발음이 꼬인 부분까지도 잡아낸 것처럼 말이다.
“주인공의 연기는 내공이 있어 보였다. 그만큼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 드라마에 반짝 출연하다가 그만둘 것이라면 적당히 연기만 배우면 된다,
하지만 대배우가 되려면 독서를 통한 간접경험을 충분히 해야 한다, 그래야 연기가 찰지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을 기린으로 연기하면 되겠니?.”라는 식으로 D를 자극했다.
대학로 공연에 두 번 더 데리고 갔다. 이후로 D군은 학교생활에 신이 났다.
영어 수행평가 만점을 받았다고 자랑하러 오면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건넸다.
선생님들에게 인정을 받아서 당당하다. 도피처였던 보건실에도 갈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게 새 사람(?)으로 적응해 가던 어느 날, 연기 동영상을 보내왔는데 제법 그럴듯했다.
E군은 자신의 영혼을 한동안 잠재웠던 학생으로 출석 수업과 줌(Zoom)수업 6회 만남이 전부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처럼 매일 아빠와 함께 등교하여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을 뵙고는
바로 조퇴 허가를 받아 하교하니 주인을 기다리는 교실의 책상 위에는 먼지가 뽀얗다.
자폐나 우울증으로 보였다. 정신의학과를 공부하는 딸에게 자문을 구했다.
학생의 말을 경청하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며 외로울 것이니 감싸고 품는 것이 최고란다.
휴게실로 데리고 가서 안아주면 심장 박동이 매우 빠르다. 얼마나 두렵고 힘들까?
“E군아, 심장을 마주 대자. 너를 사랑하고 아끼는 샘의 마음을 느끼겠니?”
“....네” 좀 늦게 그것도 아주 작은 소리로, 하지만 나에 대한 신뢰가 느껴지는 대답이다.
그에게 조심스럽게 정신과 치료를 권했지만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상태가 안정적일 때 나는 재차 병원치료를 권했고 드디어 그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얼굴 표정이 점점 밝아지는 것이 눈에 띌 정도로 호전되어 가고 있었다.
어느 날은 아빠를 버리고 혼자서 등교하여 담임선생님과 제대로 된 대화를 주고받는다.
E군을 휴게실로 데리고 가니 내 가슴에 포근히 안기면서 11월부터는 수업을 받겠단다.
“잘 생각했다. 장하다.” 의사선생님께는 마음의 문을 70% 정도 열었다고 했다.
“30% 마저도 활짝 열고 네가 아파했던 것들을 속 시원하게 다 보여드려라.”
3월 둘째 주부터 망가졌던 E군의 학교생활이 제대로 돌아오기까지는 8개월이나 걸렸다.
Ⅲ. 관심으로 사랑으로
4교시를 마치면서 오전 내내 자는 A, B, C군 등을 점심 먹으라고 깨운다.
학생들의 등교목적 첫 번째는 ‘잠자기’요, 두 번째는 ‘점심 식사’란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등교의 중요한 두 가지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이지만,
훈육(訓育)해야 할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사육(飼育)한다는 느낌에 자괴감에 휩싸인다.
나는 단지 일주일에 한두 번 D군과 E군을 토닥여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뿐이다.
다행히 서로 코드가 맞아서 그들은 나에게 마음을 열었고, 나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들이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게 된 데는 담임샘과 주변사람들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다.
조선일보에 [Love is....]라는 코너가 있었다. 나에게 채우라면 주저 없이 ‘관심’이라고 쓰겠다.
나는 학생들과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지 늘 속을 태운다.
그들이 즐겨듣는 음악이나 좋아하는 연예인 신상을 외워서 대화에 나서면 어떨까,
또 요즘 애들이 즐기는 게임을 배워서 한 판 붙어 통쾌하게 져주는 것은 어떨까.
학생들과 정서적 교감을 위해 고민한다. 소통과 공감이 있어야 다가갈 수 있기에.
관심 하나로 D군과 E군처럼 다시 일어나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년이 가까울수록 학생들에게서는 멀어지는 느낌이고 스스로도 역부족을 실감하지만,
방황하는 온라인과 컴퓨터 세대들에게 연필과 종이 방식이나마 내 경험이 필요하다면
나는 기꺼이 길잡이로 나서겠다. 노마지지(老馬之智-늙은 말의 지혜)라 하지 않았던가.
사랑이 관심이고, 관심이 곧 사랑이다.
은둔형 외톨이에게는 지속적으로 말 걸기를 하며
돌파구를 못 찾는 친구에게는 불쏘시개나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
‘아이 하나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