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회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
만산홍엽의 비봉을 넘다
북한산 승가사·비봉·진관사를 찾아서
글/심산(한국산서회)
사진/서영우(한국산서회)
2018년 11월 3일(토) 아침, 구기탐방지원센터에 모인 참가자들은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열 명을 조금 넘어섰을 뿐이다. 다들 막바지에 이른 가을 단풍을 만끽하려 전국각지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모양이다. 어쩌면 북한산이 너무 대중적인 산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는 승가사를 거쳐서 비봉에 오른 다음 진관사 쪽으로 하산할 예정이다. 북한산에 다녀간 사람들이라면 빼놓았을 리가 없는 사찰들이요 봉우리다. 이 익숙한 산행대상지에서 우리는 또 무엇을 찾으려고 이 가을날 아침에 여기에 모였는가.
신라의 수태가 조성했다는 승가굴과 승가대사좌상
승가사로 오르는 산행길에 만산홍엽이 가득하다. 추울 것에 대비하여 잔뜩 껴입고 출발한 일행들은 십 여분도 오르지 않아 웃옷들을 벗어 배낭에 쑤셔 넣기 시작한다. 아마도 오늘이 늦가을의 양광(陽光)을 만끽할 수 있는 올해의 마지막 산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약 700미터를 오르니 대남문 방향과 승가사 방향으로 길이 갈리는 구기삼거리다. 우리는 당연히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승가사에서 기원하는 작고 맑은 계곡을 거슬러 올라간다.
승가사의 연원은 길고도 깊다. 이 절집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시대 이예(李預, 생몰연대 미상)가 인용한 최치원 문집에서 처음 확인된다. “신라 때 삼각산에 있었던 낭적사(狼迹寺)의 승려 수태(秀台)가 승가대사의 행적을 듣고는 삼각산(三角山) 남쪽에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승가대사의 모습을 조각했는데, 국가에 물난리나 가뭄 등의 천재지변이 있을 때 기도하면 그 자리에서 응답이 있어 봄·가을로 3일씩 재를 지내고 연말에는 임금이 옷을 바치는 것을 상례로 했다.”
대부분의 절집들이 그러하듯 승가사의 모태 역시 굴(僧伽窟)이었다. 실제로 고려시대까지는 승가굴이라는 명칭이 대부분이다. 승가굴이 승가사로 개칭하게 된 것은 조선 건국 직전으로 추정된다. 승가대사는 누구인가? 당나라 고종 때 장안의 천복사에서 대중을 교화하면서 생불(生佛)로 추앙받았던 인도의 고승이다. 신라 당시 이 승가대사에 대한 대중의 신앙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는 불교의 영역을 넘어 민간신앙의 차원으로까지 확대되고 격상된다. 참고로 승가란 범어(梵語)인 상가(Samgha)의 음역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승려 혹은 중을 승(僧)이라 표기하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승가사의 핵심은 승가굴에 있다. 승가굴이 현재의 약사전이다. 지난 해 겨울에 들렀을 때는 약사전의 참배가 통제되고 있었다. 종로구청에서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보존처리공사(2016년 10월 5일-2017년 2월 1일)를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이번 인문산행에서는 다행히 굴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승가대사좌상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보존처리’라는 것이 과했던 것일까. 이것이 무려 신라시대에 수태라는 승려가 조각했다는 바로 그 작품이라는 것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영천과 가양심신 그리고 마애석가여래좌상
승가대사좌상과 그 뒤에 세워져 있는 광배는 서로 다른 시기에 조성되었다. 다행히 광배의 뒷면에는 그 조성시기가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고려 현종 15년, 즉 1024년이다. 위에 언급한 이예의 또 다른 저술 [삼각산중수승가굴기]에 따르면 “고려의 역대 왕들이 직접 승가굴에 와서 예를 올렸다”고 한다. 현재의 서울이 고려시대의 남경이었으므로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다. 승가대사좌상이 앉아 있는 이 승가굴의 뒤편에서 영험하다는 석간수가 배어나오고 있다. 이름 하여 영천(靈泉)이다. 이 샘물은 조선 초기에 왕실의 약수(藥水) 노릇을 톡톡히 했다.
승가굴(현재의 약사전)의 지붕 역할을 하는 커다란 바위 위에 영천(靈泉)이라는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승가굴 앞의 계단 부근에는 옆으로 누운 길다란 바위 위에 가양심신(可養心神)이라는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바위글씨의 끝에 그것을 썼거나 새긴 사람의 서명이 남아있다. 바로 금사(錦史)다. 우리는 이 금사가 누구인지를 놓고 오랜 세월 동안 골머리를 싸맸다. 민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이것들이 추사의 글씨라 했다. 추사가 승가사를 자주 찾았고 그와 관련된 시문들도 여럿 남겼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도 내심 이것이 추사의 글씨이기를 바랬다.
추사 김정희는 거의 200개에 달하는 호를 사용했다. 그야말로 “자고 나면 호를 하나씩 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추사가 사용했던 모든 호들을 다 뒤져봐도 ‘금사’는 찾을 수 없었다. 최근 추사의 진품을 망라했다고 자부하는 최완수의 [추사명품](현암사, 2017)에도 이 글씨에 대한 언급은 없다. 우리는 과천의 추사박물관에도 고증을 의뢰했다. 돌아온 답변은 “추사의 필적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현재의 결론은 누가 쓴 글씨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 내용이 “마음과 정신을 바르게 키울 수 있다”는 뜻이니, 누군가 요양 삼아 이곳에 머물 때, 맞은 편 영천의 약수를 아침저녁으로 음복(飮福)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바위글씨를 남겼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내게 있어 승가사의 백미는 마애석가여래좌상이다. 나는 예전에 어떤 글에서 “미스터 북한산은 승가사 마애석가여래좌상이고, 미스 북한산은 삼천사 마애여래입상이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이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일행들 모두 배낭을 벗어 내팽개치고 마애불로 오르는 가파른 돌계단을 훠이훠이 오른다. 새파란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다소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애불의 모습이 장엄하고 아름답다. 맞은편으로 장쾌하게 펼쳐진 보현봉과 그 아래의 사자능선 또한 오늘의 산행을 잊지 못할 가을의 추억으로 만든다.
“옛것이 좋아 때때로 부서진 비석을 찾고”
승가사에서 비봉 혹은 그것을 포함한 비봉능선으로 올라서는 길은 많다. 추사와 함께 비봉에 올라 순수비를 비정한 조인영의 [승가사방비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승가사 뒤의 기슭을 경유하여 돌 비탈길 수 백 걸음을 돌고 돌아가니 석벽에 새겨진 불상이 있었는데 아주 크고 좁다란 상이었다. 오른쪽으로 고개 등성이를 따라 벼랑을 붙잡고 올라갔다.” 즉 추사 시대의 사람들은 마애불 오른쪽의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갔다는 것이다. 마애불 왼편으로도 길이 있었다. 지금은 승가사에서 철책을 둘러 통행을 금지시켜버린 길이다. 우리는 잠시 ‘추사 시대의 옛길’을 따라 비봉능선에 오르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으나 이내 깨끗이 포기하였다. 공연히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직원들과 만나 얼굴을 붉히기 싫었던 것이다.
추사가 비봉에 서 있었던 비석이 진흥왕순수비였음을 고증해나간 과정을 밝힌 [예당금석과안록]을 뒤적이다 보면 찬탄을 금할 수 없다. 그 집요한 고증과 냉철한 추론이 혀를 내두르게 하는 것이다. 그가 비봉에 처음 오른 것은 고증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1805년 김노경은 아들인 추사 및 벗들을 대동하고 진관사에 왔다가 비봉에 올랐는데, 당시의 기행을 [추사부자삼각산기행시첩]에 남겼다. 당시 추사가 스무 살 때의 일이다. 추사가 당시까지 도선비(道詵碑)니 무학비(無學碑)니 하는 따위의 잘못된 이름으로 알려져 있던 비봉 위의 비석에 ‘금석학적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 여년 후인 1816년의 일이다. 학자들은 이것이 그에게 금석학의 스승격이었던 청나라의 옹수곤이 사망한 연도(1815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 고증과 추론의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기에는 본고에 주어진 지면이 너무도 작다. 어찌되었건 추사는 이것이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냈다. 승가사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몇 번이고 비봉에 오르내리고, 탁본을 뜨고 사서(史書)를 뒤지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밝혀낸 경천동지할 쾌거였다. 실로 조선의 금석학이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적 사건이다. 추사가 조선반도를 넘어 청나라에까지 그 문명(文名) 내지 학명(學名)을 크게 떨치게 된 결정적 사건이기도 하다.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학문적 사건이었는지를 뒤늦게나마 밝힌 것은 1972년에 발표된 최완수의 논문 [김추사의 금석학]이었다.
문화재청은 2018년 4월 추사의 대련 2점을 보물로 지정하였다. 대팽고회(大烹高會)와 차호호공(且呼好共)이다. 이 두 대련의 보물 지정에 대하여 불만은 없다. 매우 고고하고 아름다운 글씨다. 하지만 호고연경(好古硏經)이 제외된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이 글씨와 그 내용이 추사의 대련들 중 최고의 경지에 속한다고 믿고 있다. 우리가 흔히 추사학이라고 할 때 그 내용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금석학이다. 그리고 추사가 금석학에 미쳐 있던 시절에 쓴 가장 아름다운 대련이 바로 이것이다.
好古有時搜斷碣 호고유시수단갈 옛것이 좋아 때때로 부서진 비석을 찾고
硏經屢日罷吟詩 연경누일파음시 경전 연구로 여러 날 시를 읊지 못하네
주말이라 비봉에 오르는 바윗길에 자못 사람들이 붐빈다. 예전에는 비봉에 오르는 길이 제법 위험하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애매한 발디딤이 생기는 곳에 닥터링(바위를 깎아냄)을 해놓아서 그다지 어렵지 않다. 청춘남녀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비봉에 올라 연신 소리를 질러대는 것을 보니 격세지감이 크다. 내친 김에 비봉 정상에까지 기어오른다. 북한산의 이쪽과 저쪽 모두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노적봉·만경대·백운대·인수봉은 바위산이라 아름답고, 성냥갑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아파트들로 가득 찬 서울시내는 또 도시라서 아름답다.
진흥왕순수비와 추사에 대한 갑론을박
오늘 산행의 최고점(560m)이었던 비봉에서 내려와 진관사로 떨어지는 계곡길로 접어든다. 제법 가팔랐던 길인데 이제는 철책이며 데크 따위를 설치해 놓아 안전성은 높아진 대신 재미는 떨어진다. 그뿐인가? 계곡의 상류로 내려가는 길은 아예 펜스로 가로막고 과태료 운운하는 협박성 경고문을 걸어놓아 기분을 더럽게 만든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관리를 하래니까 그냥 ‘통제’만을 일삼고 있다.” 참가자 한분의 볼멘소리에 일행들은 쓴웃음을 짓는다.
하행길의 너럭바위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모처럼 편안한 휴식시간이 길게 주어지자 참가자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내가 말문을 연다. 추사가 19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이자 뛰어난 예술가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보급 문화재(실제로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훗날 국보3호로 지정되었다)에 “내가 이것을 고증했다”며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나는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더구나 그와 함께 이름을 새겨 넣은 조인영은 저 악명 높은 19세기 세도정치의 본가 풍양조씨의 일원이다. 나는 이것이 ‘타고난 금수저’였던 추사의 오만방자함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본다.
왜 하필이면 저 봉우리(비봉)에 순수비를 세웠을까? 이것은 [바위로 배우는 우리 역사](무한, 1999)를 쓴 노승대의 질문이다. 진흥왕이 자신의 영토임을 내세우고 싶었다면, 왜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도 아니고, 이 근처에서 제일 눈에 잘 띄는 보현봉이나 문수봉도 아니고, 저 비봉에 비를 세웠느냐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노승대는 “이 봉우리가 오래 전부터 민간신앙의 기도터였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나는 그의 답변에 대체로 수긍하는 편이다. 하지만 인문산행팀의 조장빈 이사는 반론을 제기한다. 비봉의 거북바위(오늘날 코뿔소바위라고 부르는)에 민간신앙의 흔적(알터)이 남겨진 시기(조선 후기로 추정)는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졌던 시기(신라)와 너무 큰 차이가 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역시 경청할만한 견해였다.
인문산행의 단골 참가자인 한복헌 선생이 돌연 앞으로 나선다. 비봉에 있던 진흥왕순수비가 그 균열 및 훼손가능성을 빌미로 삼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것은 1972년의 일이다(현재 비봉에 세워져 있는 비석은 복제품이다). 그런데 한선생이 당시 [조선일보]의 문화부 기자 자격으로 그 원본이 비봉에서 분리되어 옮겨지던 바로 그날 현장에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대박(!)이 아닐 수 없다. 한선생의 생생한 구술(口述)로 전해들은 그날의 이전 현장은 필설로 형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가관(!)이었다. 그 적나라한 무지와 몽매의 현장을 이 글 안에 옹골차게 다 담을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유서 깊은 진관사는 현대적 대찰로 거듭 나고
응봉(매봉)능선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흘러내리는 진관사 계곡과 삼천사 계곡은 북한산에서 그나마 제일 오염이 덜한 청정계곡이었다. 1990년대에 이곳에 와서 뜨거운 여름 한철을 시원하게 보냈던 기억들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이상향의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옛 추억을 곱씹으며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어느 새 진관사가 눈앞에 펼쳐진다.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아니 진관사가 언제부터 이런 대찰이었던가”하는 것이다.
물론 아주 오래 전의 진관사는 대찰이었다. 예로부터 한양도성 바깥의 동서남북에 4대 사찰이 있으니 “동은 불암산 불암사, 서는 북한산 진관사, 남은 삼성산 삼막사, 북은 북한산 승가사”라는 말이 전해져 왔다. 진관사의 연혁을 따지고 들면 고려시대의 신혈사에서부터 시작되니 이 또한 논문 여러 편 분량이 될 터이다. 하지만 수년 전까지 내가 직접 와서 듣고 보고 체험한 진관사는 아담하고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던 소박한 비구니절이었을 뿐이다. 그때는 고작해야 대웅전을 중심으로 서너 개의 건물들만이 들어서 있는 소박한 절집이었다.
그런데 이번 인문산행에서 마주 친 진관사는 어마무지한 대찰이었다. 그것도 절 입구에 매우 많은 차량을 동시에 주차시킬 수 있는 거대한 주차장까지 갖추고, 최근 유행이 되다시피 한 ‘외국인을 위한 템플스테이’를 전문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시대적 요구에 잘 대응하고 있는 현대적 대찰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길만한 것은 매우 넓은 부지에 빼곡히 들어서 있는 건축물들이 제법 품위 있는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전에 둘러본 승가사는 너무 ‘돈 냄새’가 났는데 여기 진관사는 그래도 ‘절집 향기’가 나네.” 참가자 한분의 말씀에 모두들 동의하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다.
뒷풀이는 연신내역 부근의 노포(老鋪) 목로집에서 이루어졌다. 내가 거의 30년 가까이 찾는 단골집인데, 파(Spring Onion)향(香)이 밴 돼지고기가 일품인 서민적 술집이다. 오늘의 강사였던 조장빈이 진관사에서 못 다한 ‘추사의 대웅전 편액 글씨’에 대하여 일장연설을 펼친다. 소줏잔을 부딪히던 참가자 한분이 우스개 소리를 한다. “승가사 바위글씨 가양심신은 추사 글씨가 아닌지도 몰라, 비봉의 원본 진흥왕순수비는 딴 데로 이전됐어, 진관사 대웅전 추사글씨는 현재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몰라, 그럼 우리 오늘 하루 종일 추사의 허깨비만 쫓아다닌 거네?” 이럴 때는 대꾸하거나 변명할 말들을 주워섬기기가 버겁다. 그저 속없이 껄껄 웃으며 들고 있던 소줏잔들이나 함께 힘차게 맞부딪힐 밖에는.
월간 [사람과 산] 2018년 12월호
--------------------------------------------------------------------------------
12월 인문산행 공지
과지초당의 추사와 청계산을 찾아서
모임일시> 2018년 12월 1일(토) 오전 10시
모임장소> 선바위역(4호선) 3번 출구 앞
산행코스> 추사박물관-청계산-청계산 입구
참가준비> 회비 1만원, 중식과 음료
예약신청> (사)한국산서회 다음카페
첫댓글 원고 쓰느라 허덕이다가 오늘(이제는 어제) 산서회 월례모임에도 못 갔습니다 ㅠㅠ
이번 원고는 더욱 쓰기가 힘들군요
장빈아, 다음에는 이런 코스 일정에 넣지 마라....ㅎㅎㅎ
사진들은 다양하게 쓰였습니다
공식찍사 서영우의 작품, 제가 발로 찍은 똑딱이카메라 사진, 류백현님이 찍은 사진 등등
특히 류백현 님께서 마음대로 쓰라면서 사진 200장 정도를 보내주신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최종적인 사진 선정은 월간 [사람과 산]에 일임하였습니다
류백현 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조장빈 이사가 "유희경이 참여했던 승가사시회를 꼭 써달라"고 부탁했지만
도저히 지면을 배분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이사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장빈아, 어차피 지면이 너무 작아!
우리끼리 크고 넓은 지면을 얻어서
그때 맘껏 쓰자구....ㅎㅎㅎㅎ
후기 감사드립니다.
너무나 가고 싶은 이번 산행이었는데 복이 없어 못 갔어요.
수고들 많으셨고 내년에 다시 이 코스를 꼭 안내해 주시길 부탁합니다.
* 원고 쓰느라 고생 했네...
추사 김정희를 '금수저'라고 표현한 부분이 이채롭고 흥미롭습니다..
똑같은 코스로 오르내리고, 마지막에 30년단골이라고 하는 노포 목로집에 들러보고 싶어집니다...~
아... 목로집...저도 30년 넘게 단골이니 우연히 만났을지도...ㅎㅎ
얼마전 김규태 선배 글에 동명이인 김규태 선생 진흥왕 순수비에 대한 것이 있던데...
그러게요. 온조가 굽어봤다는 봉우리 나두고 비봉에... ㅎㅎ
심우경교수님/이 코스 사실 별로에요....ㅎㅎㅎ
김진덕/영조 사위 집안의 아들인데...금수저 맞지!ㅎ
홍하일/저번에 같이 갔던 류백현님도 오래된 단골이라고 하던데...
그럼 어느 날 우리 셋이 각기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술마시고 있었을지도....ㅎ
전 무학대사가 왜 이 비석을 "무학오심도차"로 읽었을까 상상해보았는데요, 비봉에서 보면 비봉 남동능선과 인왕산이 산줄기로 이어진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그 앞을 홍제천이 가로막죠. 인왕산으로 가는 산줄기는 보현봉-형제봉-응봉-북악산-자하문-인왕산이거든요.
결국 다시 그 험한 바위능선을 다시 올라온 무학대사가 진흥왕순수비에 덮힌 이끼를 대충 걷어내고 보았을 때 "무학이 산줄기를 잘못짚어 여기 온다"고 도선대사가 예언한 글로 오해를 했다고 생각해보았습니다.
ㅎㅎㅎ sns상의 우이령사람들의 남준기 기자의 댓글이네요~~
남준기 기자의 상상이 매우 재미있네요 ㅎㅎㅎ
그 지역의 산세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황초령순수비나 마운령순수비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 순수비라는 것은 애당초 영역 내 어떤 산(혹은 봉우리)의 정상에 세우기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고개(령) 위에 세우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비봉도 하나의 고개(?)로 인식했든지
아니면 노승대의 견해처럼 민간신앙터로 인식했든지
어찌되었건 사람들이 많이 오르내리고 즐겨찾는 곳에 세운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비봉을 하나의 고개(령, PASS)로 인식한다...
이것도 재미있는 관점인 것 같습니다
위에서 두번째 사진 속의 승가대사좌상과 광배를 보세요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기는 합니다만
저 승가대사좌상이 거의 검은색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예전 사진을 찾아봤는데...찾을 수가 없네요 ㅠㅠ)
현재 사진을 보면 광배만해도 약간 검은 빛을 띄는데
그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승가대사좌상은 지나치게 밝고 깨끗하지요?
아마도 그 '보존처리'라는 것이 일종의 '미백수술'이었던 모양입니다
승가굴 밖의 돌계단 위에 있는 마애석가여래좌상도 어딘가 달라진 모습입니다
참가자들 중의 한분은 "보톡스 맞은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ㅎㅎㅎ
보톡스와 미백수술...그렇게 치장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잘 모르겠습니다
열일 제치고 인문산행은
꼭 참석하리라 맘먹는데도
늘 일이 생기네요
후기 잘 읽었습니다
꾸벅^^
후기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