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07 08:00 by 김삼웅
1170년 고려 의종 24년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정중부 등이 일으킨 무신쿠데타였다. 이들은 문신ㆍ환관들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뒤 의종을 폐위하고 그의 동생 호(皓)를 왕위에 앉혔다. 명종(明宗)이었다. 그리고 조정의 요직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100여 년 동안 이의방ㆍ경대승ㆍ이의민ㆍ최충헌ㆍ최우로 이어지는 무신시대가 열렸다.
고려의 무신정변은 문민우위의 조선 역사에서 지극히 돌출적인 변고였다. 무신 권력자들은 사설 도방(都房)과 교정도감(敎定都監) 등을 설치하여 권력을 오로지 하면서 전횡을 일삼았다. 문민지배의 전통을 깨뜨린 것이다.
1939년 만주행을 통해 군인으로 변신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 박정희 인터넷기념관
그로부터 800여 년이 지난 1961년 5월 16일 미명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장면의 문민 합헌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탈취했다. 주도자는 박정희 육군 소장이었다. 경북 선산 출신인 박정희는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지원하여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중위로 재임 중 해방을 맞았다.
국군창설에 참여하여 1945년 조선경비사관학교 단기과정을 마치고 육군소위로 임관, 1948년 대위로 진급했으며 1949년 여순사건 때 군내 남로당 프락치활동이 발각되어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재심에서 15년으로 감형되었다. 육군 참모총장의 형확정과정에서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예편되었다.
6.25전쟁으로 군에 복귀하여 제9사단 참모장, 제5사단장, 육군병참기지사령관, 1961년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재임 중에 쿠데타를 주도한 것이다. 박정희가 주도한 쿠데타는 18년 뒤 10·26사태로 그가 암살당하고, 이어서 전두환ㆍ노태우 등 신군부의 쿠데타로 전후 30년 동안 군사정권이 한국을 통치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5월 16일 새벽 해병대ㆍ공수단ㆍ제23사단에서 출동한 반란군은 박정희 소장의 지휘 아래 이날 새벽 3시경 한강어구에 다달았고, 약간의 총격전 끝에 예정보다 약 1시간 늦게 서울 입성에 성공했다. 이들 반란군은 중앙청 및 서울중앙방송국 등 목표 지점을 일거에 점령하고, 5시 첫 방송을 통해 거사의 명분을 밝히는 한편 6개 항의 혁명공약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이어 9시에는 군사혁명위원회 명의의 포고령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오후 7시를 기해 장면 정권을 인수한다고 밝혔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엔군사령관 매그루터 대장이 쿠데타 반대 성명을 발표하여 반란군의 진압을 밝혔으나, 장면 총리가 숨어버리고 윤보선 대통령이 “올 것이 왔다”고 쿠데타를 수용하면서 쿠데타는 기정사실화 되었다.
장면은 쿠데타정보를 듣고 밤중에 미국대사관으로 달려갔지만 수위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다시 미국 건너 편 CIA 한국지부의 문을 두드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그 길로 찾은 곳이 수녀원, 한국민주주의의 비극이었다.
혜화동 까멜 수녀원에 피신해 있던 장면 국무총리는 18일 오전 은신처에서 나와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내각 총사퇴와 군사혁명위원회에 정권 이양을 의결했으며, 윤보선 대통령은 국무회의 결정을 그대로 재가했다. 같은 날 미 국무성도 한국 군사혁명위원회의 지도자가 반공친미적임을 지적하면서 쿠데타를 사실상 승인함으로써 5ㆍ16쿠데타 세력은 권력의 실체로 자리잡게 되었다.
김대중에게 5ㆍ16은 날벼락이었다. 천신만고의 4전 3패 끝에 간신히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아직 ‘금뱃지’도 받기 전에 군사쿠데타를 당한 것이다. 쿠데타 세력이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여 국회의원의 존재는 ‘고급실업자’로 전락한 터였다.
이른 새벽, 민주당 인제 지구당의 한 당원이 그 전날 당선사례를 하러 다니느라 녹초가 된 나를 다급한 목소리로 흔들어 깨우며 “서울에서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알려주었다. 그것을 듣고 놀라기는 했지만 그날 나는 사태를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나는 곧바로 일어나서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나는 이전부터 상경할 예정이었는데 일정을 조금 앞당겨 16일에 상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울로 가는 도중에 육군부대가 연달아 서울을 향해 가는 것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서울 근처에 가까워졌을 즈음, 라디오 뉴스를 듣자 주한미국 대리대사 마셜 그린과 유엔군 매그루터 사령관(주한미군 제8군사령관 겸임)이 함께 공동성명을 내고 “미국은 장면 내각을 지지하고 있다. 이 쿠데타는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로 쿠데타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그것을 듣고 일단 안심했다. 반란군은 금방 진압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주석 1)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의장에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장도영을 앉히고 자신은 부의장으로 있으면서 실권을 행사하였다. 국회와 정당ㆍ지방자치단체를 모두 해산시키고, 포고령 제1호를 통해 △ 옥내외 집회금지 △ 국외여행 불허 △ 언론사전검열 실시 △ 야간 통행금지 연장 등을 발표했다.
쿠데타 세력은 5월 18일부터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면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공포하여 입법권과 사법권의 일부와 사법ㆍ행정에 대한 지시ㆍ통제권을 장악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법제사법ㆍ내무ㆍ외무ㆍ국방ㆍ재정경제ㆍ교통체신ㆍ문교사회ㆍ운영기획 등 분과위원회를 구성하고 직속기관으로 중앙정보부ㆍ재건국민운동본부ㆍ수도방위사령부 및 감사원을 신설하여 본격적인 군정에 돌입했다.
국가재건 비상조치법은 최고회의가 5ㆍ16 이전 또는 이후에 반국가적ㆍ반민족적 부정행위 또는 반혁명적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기 위해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고, 이러한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를 둘 수 있게 함으로써 군사정권의 통치기반을 다졌다.
이에 따라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기구로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를 설치하여 이른바 용공분자의 색출을 표방하며 혁신계 인사들의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또 4월혁명 이후 광범위하게 등장한 각종 민주적 정당과 사회단체ㆍ언론매체ㆍ노동조합을 강제해산시키는 등 민주세력에 대한 폭압적인 탄압과 무단정치를 시작했다.
주석 1) <김대중자서전(1)>,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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