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에서 자동차도 운전면허가 있어 필기와 실기시험을 거쳐야만 면허를 취득할 수 있듯이 해상(海上)을 떠다니는 선박에 승무하는 해기사(海技士)에게도 그런 자격이 있어야 하며, 국가(해양수산부)의 정식 면허를 취득해야만 한다.
지금은 어선(漁船) ‧ 상선(商船)의 구별이 없이 1~4급으로 통일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선박면허제도는 일본의 형식을 그대로 이어받아 수십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었다.
분야별로 크게 ‘항해(航海)’ ‘기관(機關)’ 두 부분으로 정하고, 항해와 기관, 또 어선(漁船)과 상선(商船 : 화물선)으로 구별하고, 각각 갑종(甲種)과 을종(乙種)으로 구분, 그것이 다시 ‘선장, 1등항해사, 2등항해사, 3등항해사’, 4종류로 나뉘어져 있었다.(기관부도 마찬가지) 종류도 많았고, 절차도 복잡했다. 또 면허에 따라 승선할 수 있는 선박의 종류. 톤수 즉 크기 등을 제한하고 있었다. 또 각급의 자격증 시험 응시를 위해서는 필요한 요건을 각각 정해두고 그 요건을 갖춘 자들만이 응시할 수 있었다.
내가 맨처음으로 취득한 자격은「어선 갑종(漁船甲種) 2등항해사」였다. 이 면허이면 어선은 왠만큼 큰 선박이라도 선장으로 승선할 수 있었지만, 일반화물선[商船]은 대소를 막론하고 해당이 되지 않았다. 즉, 어선 면허장을 소지한 자는 상선은 승무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어선(漁船)에서 시작했었다.
업무의 성질상 가장 크게 구별되는 부분이 어로(漁撈)와 화물의 적하(積荷) ‧ 양하(揚荷)였다. 기술적인 면으로 봐서는 상선 쪽이 감항성(堪航性)과 적하(積荷) 등을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계산하는 부분이 많은 반면, 어선 쪽은 포획 어획물에 따라 각각 다른 어구(漁具)의 설계와 제작. 어군(魚群) 탐지와 어획의 기술인데 이 역시 계산에 의한 것이었지만 복잡성이나 수준이 약간 떨어진다. 그러나 해상에서 선박의 항해, 운항이나 조선(操船)은 같았다. 그리고 선박의 규모나 성격상 상선에 비해 어선이 작을 수밖에 없는 것도 큰 차이점이었다. 상선은 수 십만톤이나 되는 유조선 등이 있었으나, 어선에서는 가장 큰 공모선(工母船 : 수산물 가공공장시설을 갖춘 선박)이라도 1만 톤이면 충분했다. 현재 상선은 대형 컨테이너선들이 대부분의 국제간 화물을 전담하고 있다.
상술하면 나는 처음 어선에 승선한 기간 이외에 승선했던 선박은 우리나라 국적이 아닌, 일본(Japan) 또는 파나마(Panama) 등 외국 선적(船籍)이었다. 선박은 기국주의(旗國主義)를 따르므로 해상의 어디에 있어도 그 나라의 움직이는 영토의 일부로 보았다. 자국적(自國籍)의 국기(國旗)는 선미(船尾)에, 입항하는 나라의 국기는 선수(船首)에 게양하고 출입항을 해야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항만청에서는 해기사나 선원이 어떤 국적의 선박이든 승선하는 기간과 직위 등을 경력(經歷)으로 인정을 해 주었다.
처음 이등항해사 시절 취득한 파나마 면허증
선박은 편의치적선(Flag on Convenience Vessels : 선박의 국적만 빌림) 제도에 따라 파나마(Panama), 라이베리라(Liberia) 같은 국가는 선박의 국적뿐만 아니라 해기사 면허도 국제적으로 개방했기에 취득할 수 있었다. 짐작컨대 이들 나라는 일찍이 미국의 식민지였기에 그 영향을 받아 쉽게 국가의 수익을 늘이는 방식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시험이나 경력에 관계없이 현직에 있으면 발급해 주었다. 처음엔 파나마의 2등항해사 자격을 얻은 다음 선장이 되었을 때 선장 자격으로 갱신했다. 이 문제 때문에 수년간 고민도 애로도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면허제도가 1980년대 초반인가 해기사 면허가 국제화되면서 구별 없이 「국제 1~4급」의 4종류로 바뀌었다. 따라서 시험 자체도 엄청 어렵게 되었다. 국제규정에 맞추기 위해 특히 1급은 우선 영어가 수준 높게 변했고, IT화된 전자계기(電子計器)의 발달에 따른 새로운 전파 혹은 위성(衛星) 항법(航法) 부분도 그랬다.
정규 해양대학이나 수산대학을 나오면 2등 항해사(기관사) 면허를 취득하는데, 이런 사람들도 상위면허인 1급 면허를 취득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랄 정도로 어렸워졌다. 업계에서는 고등고시보다 어렵다고들 소문이 나 있었다. ‘토익(TOEIC)’도 포함되었다. 그만큼 당시 우리의 수준이 세계적으로 떨어져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응시(應試)할 수 있는 자격조건(승선경력)이 갖추어졌지만, 시간적 여유를 얻지 못하다가 기회가 맞아 80년도 후반에 국제 1급 면허시험에 도전했다.
이를 위해 평소 승선 중에도 준비차원에서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실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육상에서는 ‘해기사(海技士) 전문학원’이 생겨나기까지 했었는데, 순전히 선내(船內)에서 책만 익히고 덤빈다는 것은 ‘풍차(風車) 보고 달려든 돈키호테’처럼 무모한 일 같기도 했다.
선박 면허에는 실기(實技)시험은 실시할 수가 없었기에 필기와 면접시험으로 하고, 실기는 ‘승선경력증명서’로 대신했다. 승선한 선박의 크기(톤수)와 기간으로 인정해 준 것이다. 승선한 선박의 톤수가 크고 승선기간이 길수록 경력이 높게 평가되었다. 이는 어느 선박이든 승(乘) · 하선(下船)할 때는 각자의 선원수첩(여권)에 하나하나 기록되고 항만청이 인증을 해 주었다.
최초로 얻은 선원수첩
아무튼 용케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승선 중 영어 때문에 엄청 신경질을 부렸지만 그래도 꾸준히 책을 마주한 덕분임을 절실히 느끼고 스스로 대견스럽게 여겼다.
60년대 처음 해기사 시험 때는 객관식이 아닌 주관식 방식이었다. 시커먼 A4 용지를 몇 장 나누어 주고, 문제는 칠판에 분필로 ‘①…을 논하라’, ‘②…을 설명하라’는 식으로 5~6문항을 적어 주었다. 감독관도 크게 중요해 보이지도 않았다. 컨닝을 할 수도 없었다. 맞는 답을 골라 (●)를 치는 사지선다형은 한참 뒤의 일이다. 교직경력이 그렇게 요긴하게 쓰일 수 없었다.
영어의 토익(TOEIC)은 참말로 까다롭고 어려웠다. 토익은 국제실용영어능력시험(Test of English for International Communication)의 약자로서, 영어가 모국어(母國語)가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일상생활 및 비즈니스 현장에서 요구되는 실용적인 영어 구사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평가할 목적으로 개발된 시험이다. 그런데 실제로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도 이 시험을 풀어보라고 하면 무척 어려워했다.
특히 of, for, to, with 같은 전치사 용법이 까다로웠다. 어떤 단어를 가려 써야 하는지, 원어민들도 어려워 하는데, 겨우 사범교육 밖에 받지 않은 내가 어떻게 알꼬?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제를 보고 눈에 익은 것을 찍었다. 그게 정답이었다. 문제는 토익책을 보기는 했지만, 그 보다는 평소에 그것과 관계없는 영어 신문이나 소설, 잡지 등을 뜻도 모르면서 읽기는 제법 많이 읽은 탓이라 짐작한다. 일본어를 공부할 때 얻은 경험에 따라, 영어도 그야말로 초급자들이 읽는 동화나 소설 같은 것을 그냥 눈으로 읽기만 했다. 그 잔재들이 지금도 서재에 남아 있어 가끔은 펴 보곤 한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읽으면서 큰소리를 내며 읽었더라면 회화도 도사(?)가 됐을 거라는 짐작만 남아 있다.
지금도 가끔씩 펴보는 초급 영어소설책들
기억에 남는 것은 필기(筆記)시험 합격 후 면접시험 때였다. 세 명의 면접관(面接官) 앞에 네 명의 수험생이 마주 앉았다. 면접관들은 모두가 정규 해양대학 출신으로 현직 도선사(Pilot)이거나 해양대학 교수, 관계 당국의 고위 공무원들 가운데서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내 왼쪽은 소형선 출신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인데 처음부터 대답이 ‘살려주세요’ 하는 타입이고, 오른쪽의 젊은 두 사람은 정규 해양대학 출신들이었다. 대학 졸업 때 취득한 것이 ‘갑종 2등’ 면허인데 새 상급 면허로 바꾸어야 더 큰 선박에, 더 높은 직위로 갈 수 있었다.
선배인 시험관의 질문에 더듬거리다 사정없이 “이 자슥들이 공부도 안 하고…” 욕심만 낸다면서 꾸중을 듣는 반면, 나는 면접의 요령을 일찍부터 터득한 지라 시험관들과 같이 놀았다(?).
모르는 것은 머뭇거리지 않고 솔직히 시인하고, 자신을 한껏 낮추고는 “시험을 떠나서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경우를 당해 죽을 뻔 했는데…” 하는 식으로 되레 물으며 그들의 위신을 올려 줌으로 면접시험을 떠나 대화를 이어 나갔다. 책에도 없는 얘기들을 상세히 일러 주어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결국 4명 중 나 혼자만이 1급의 합격을 따냈다. 마지막 한 달 동안 다녔던 ‘대한해기사학원’의 이(李) 원장님이 고맙다는 의미에서 저녁을 샀다. 내가 사야 하는데 거꾸로 된 것이다.
원장님의 말에 따르면 시험 제도가 바뀐 이후 면허시험의 격이 너무 높아져 어려워진 데다 국제화에 따라 영어가 특히 문제가 됐는데, 내가 합격한 것도 영어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기 때문이며, 드물게 1급에 합격함으로 학원의 명예를 높여 줘서 감사하다고 했으니 당시 상황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요즘 고교(高校) 입시학원 광고에 보면 ‘S대학 ◯명, K대학 ◯명 합격’이라고 자랑하듯이 ‘1급 ◯명, 2급 ◯명 합격’이라고 광고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 그 자격증을 써먹지 못하고 말았다. 선원생활을 그만두게 되어 자격증을 찾지도 않았다. 아마도 지금 항만청 어느 구석에 기록은 남아 있을 것이다. 새로 취득한 1급 자격증으로 몇 해 더 당당히 우람한 우리 국적 선박들에 승선했어야 했는데… . 당시로선 그 면허증이면 10만톤 유조선에도 선장으로 승선할 수 있었다. 격세지감이 있다
첫댓글 특이한 라이선스에 필력도 Great!
잘 읽었습니다.
아리송. 아리송.
그래도 두뇌 특출, 노력파. 넉살 좋은 건 감지함. ㅎ
상선이 아니고 어선을 택했으니 부~~우자는 따놓은
당상.^^
미국인교? 아님 무사 귀국한건교? 건재하신걸 보니 안심. 고맙슴다. 건강하소. 부산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