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만에 꺼낸 통한의 세월…“연좌제 원망도 했지만 그리움 사무쳐”
기자명 원소정 기자 입력 2023.03.31 18:23
사단법인 제주4.3연구소, 31일 4.3 증언본풀이 진행
사단법인 제주4.3연구소(소장 허영선)는 31일 오후 4.3평화기념관 1층 대강당에서 스물 두 번째 증언본풀이 마당 '4.3, 재심과 연좌제-창창한 꿈마저 빼앗겨수다'를 열었다.ⓒ제주의소리
사단법인 제주4.3연구소(소장 허영선)는 31일 오후 4.3평화기념관 1층 대강당에서 스물 두 번째 증언본풀이 마당 '4.3, 재심과 연좌제-창창한 꿈마저 빼앗겨수다'를 열었다.ⓒ제주의소리
4.3으로 인한 연좌제는 살아남은 유족들에겐 또 한 번의 길고 긴 트라우마와 창창한 미래마저 앗아간 사슬이었다.
연좌제는 가족들만 아니라 먼 친족들까지 고리를 뻗치며 섬을 떠난 사람들이 생기기도 했다.
유족들에게 연좌제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끝내 아픔을 딛고 일어서며 자신들의 삶을 살아냈다.
사단법인 제주4.3연구소(소장 허영선)는 31일 오후 4.3평화기념관 1층 대강당에서 스물 두 번째 증언본풀이 마당 <4.3, 재심과 연좌제-창창한 꿈마저 빼앗겨수다>를 열었다.
올해는 연좌제 피해와 재심 무죄 판결을 받은 유족 5인이 나서 자신들의 아픈 사연을 풀어놓았다.
대담 진행은 제주4.3연구소 허호준 이사와 이동현 연구원이 맡았다.
첫 번째 증언본풀이에 나선 양성홍 어르신. ⓒ제주의소리
첫 번째 증언본풀이에 나선 양성홍 어르신. ⓒ제주의소리
“한때는 원망했던 아버지가 지금은 그립습니다”
첫 번째 증언본풀이에 나선 양성홍 어르신은 1947년생으로 제주시 연동 출신이다. 1949년 군사재판 수형인 양두량씨(당시 27세)의 아들이다.
아버지 양두량씨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피 생활을 했다. 어머니 김열씨(당시 29세)는 남편이 어디 숨었는지 대라는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집까지 기어서 올 지경에 이르렀다.
1949년 4월 경찰에 잡힌 아버지는 주정공장에 수용됐다. 어머니는 남편에게 아들을 보여주기 위해 3살된 양성홍 어르신을 데리고 면회를 다녔다.
하지만 아버지는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뒤 행방불명됐다.
양 어르신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형무소에서 보내온 엽서도 태워버리고 4.3에 관한 이야기를 일절 꺼내지 않았다.
악몽으로 기억된 그날에 대해 물어보면 ‘좀좀하라’(조용하라)할 뿐이었다.
양 어르신은 고등학교에 올라가던 해에 동네 형으로부터 연좌제에 대해 처음 듣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근무하던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연좌제로 인해 일을 그만둬야 했다.
연좌제의 설움을 겪은 양성홍 어르신은 한 때 아버지를 원망하며 방황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던 중 1999년 이도영 박사가 미국 비밀 문서 보관소에서 꺼낸 기밀문서에서 아버지 이름을 보게 됐다. 그렇게 운명처럼 아버지를 조우하게 된 양 어르신은 동네 사람들을 모아 매년 대전을 찾았다.
그리고 2013년 제주4.3유족회 대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할 때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한 대전위원회 유족 72명을 모집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때부터 4.3 유족회가 활성화 됐다. 유족들은 ‘우리도 할 수 있구나’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해 8월 30일 4.3 재심으로 아버지의 무죄 판결을 받던 날. 양 어르신은 치미는 감정에 차마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처자를 놔두고 형무소로 끌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고통을 겪은 아버지를 생각하니 목이 멘 것이다.
양 어르신은 “한때는 아버지 원망도 많이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버지 그때 나이가 고작 27살이었다. 그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처자식을 두고 그 길을 떠나면서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생각해보니까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울먹였다.
또 “법정에서 아버지의 무죄를 선고받고 발언 기회를 얻었을 때 목이 너무 메어서 말을 잘 못했다. 그래도 아버지의 판결문을 지난 제사 때 우리 아이들한테 낭독하라 했다. 판사님도 좋은 분으로 만나서 이렇게 아버지 무죄도 받고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른다”고 말했다.
두 번째 증언에 나선 강상옥 어르신은 1949년 6월 주정공장에서 태어났다. ⓒ제주의소리
두 번째 증언에 나선 강상옥 어르신은 1949년 6월 주정공장에서 태어났다. ⓒ제주의소리
“경찰만 보면 피해 살던 우리 아버지…”
두 번째 증언에 나선 강상옥 어르신은 1949년 6월 주정공장에서 태어났다.
한라산으로 피신했던 아버지 강학반씨(당시 24세)가 만삭이었던 어머니와 함께 귀순한 뒤 주정공장에 수용됐기 때문이다. 얼마 뒤 아버지는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마포형무소는 북한군에 의해 문이 열렸다.
아버지는 북한군에게 끌려다니다 지리산까지 들어가게 됐다. 지리산에서 1년 정도를 지낸 뒤 전라남도 담양경찰서로 귀순했다.
강상옥 어르신의 아버지는 담양에서 잠시 생활하다 육군으로 입대했고, 1960년대에 제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 돌아가셨다.
강상옥 어르신은 30세 되던 해 취업을 하려다 신원조회에 걸려 탈락했다.
이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정을 제대로 알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경찰로 근무하던 친구의 도움으로 아버지 기록에 문제가 없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경찰의 의견서를 첨부하면서 연좌제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 강학반씨는 2021년 3월 16일 4.3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강 어르신은 “이제야 정말로 신원조회라는 걸 걱정하지 않게 됐다”며 “39세까지 객지 생활을 하며 고생하시다가 이제는 괜찮겠지 하고 제주에 내려온 아버지는 2년 만에 눈을 감으셨다. 이번 재심을 통해 아버지의 무죄를 선고받았는데, 아버지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렇게 전할 수 있어 여한이 없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계숙 어르신(사진 오른쪽)이 증언본풀이 중 눈물을 훔치고 있다. ⓒ제주의소리
오계숙 어르신(사진 오른쪽)이 증언본풀이 중 눈물을 훔치고 있다. ⓒ제주의소리
연좌제의 칼끝은 아내와 자식, 사위에게까지 향했다
세 번째로 증언에 나선 오희숙, 오계숙, 오기숙 세 자매는 각각 1937년생, 1944년생, 1946년생으로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출신이다.
세 자매의 아버지 오화국씨는 일제강점기 제주농업학교에서 일어났던 항일운동에 연루돼 형을 살았다. 해방 뒤에는 1947년 3.1절 집회로 체포돼 목포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오화국씨는 8개월여의 형을 살고 가석방돼 고향으로 돌아와 하룻밤을 잔 뒤 주변 사람들이 잡혀간다는 말에 곧바로 부산으로 피난갔다. 그 날이 1948년 4월 2일이었다.
아버지가 징역을 사는 동안 누구는 잡아갔다, 누구는 소식을 모르겠다하는 소문이 나돌았다. 오 자매는 이번에 잡히면 우리 식구 모두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제주를 떠나게 됐다.
장녀인 오희숙 어르신은 열 두 살 때 4.3을 겪었다. 남동생은 9살, 여동생 오계숙 어르신은 6살, 오기숙 어르신은 3살 때 일이었다.
오희숙 어르신은 “친구네 집에 찾아가면 ‘빨갱이 자식’이라며 얼씬도 못하게 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남은 가족들은 “아들을 찾아내라”, “남편을 찾아내라”는 경찰에 시달렸다.
오 자매의 할아버지는 “느네 아방 어디가시냐 물으면 모르켄 허라 이. 모르켄 허라 이(너희 아버지 어디갔냐고 물어보면 모르겠다고 하라)”하고 말했다.
오 자매는 “어느 날 저녁에는 집에오니까 순경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우리 집 밖거리 옆에 세워놓고 아들 찾아내라며 죽여버리겠다고 헛총을 쐈다. 우리는 죄인이었다. 죄인이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고 울분을 토했다.
어머니는 지서에 잡혀가 거꾸로 매달린 채 물 고문을 받는가 하면 모진 전기고문을 당했다.
오희숙 어르신의 남편도 어머니와 함께 간첩사건에 연루됐다며 경찰에 잡혀갔다.
세 번째로 증언에 나선 오기숙, 오계숙, 오희숙 세 자매(사진 왼쪽부터). ⓒ제주의소리
세 번째로 증언에 나선 오기숙, 오계숙, 오희숙 세 자매(사진 왼쪽부터). ⓒ제주의소리
오희숙 어르신은 “남편이 일주일 동안 하도 고문을 받아서 지금도 많이 아프다. 결혼하지 않았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테니 항상 미안한 마음이다. 남편은 장인어른에 의한 연좌제로 직장에 들어가지 못해 할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고 말했다.
이어 “무슨 말을 해야 속이 시원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다보니 그 세월을 살아왔다. 연좌제로 피해 본 남편한테도 큰 소리 한번 못하고 살았다. 눈물날 일도 꾹 참고 살았다”고 통한의 세월을 이야기했다.
둘째 오계숙 어르신은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아팠다. 속솜허난 살았주. 오늘은 울어야겠다”며 목 놓아 울었다. 관객석에서도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한편 제주4.3연구소는 지난 2002년부터 매해 4.3을 경험한 사람들의 직접적인 기억을 풀어내는 ‘4.3증언본풀이마당’을 열고 있다. 본풀이마당은 자기를 치유하는 트라우마 치유의 과정이며, 4.3의 진실을 미체험 세대에게 알리는 장이다.
좋아요
7
훈훈해요
0
슬퍼요
3
화나요
0
원소정 기자 so@jejusori.net
다른기사 보기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주 맛, 멋, 삶
3개의 댓글
회원로그인
작성자
작성자
비밀번호
비밀번호
댓글 내용입력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 대상을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법률에 의해 제재될 수 있습니다. 또한 동일하거나 유사한 내용을 반복 등록하는 댓글도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회원 로그인을 하시면 댓글 작성이 간편합니다.
0 / 400등록
댓글 정렬최신순 추천순 답글순
제주사람 (비회원) 2023-04-01 14:38:39 IP (211.185.X.X)
수정 삭제
참똑똑허네,그나이에그당시일을말하다니,부모죽인게폭돈지정부군이지도모르겠구나
답글 작성 3 0
도민 (비회원) 2023-04-01 11:52:32 IP (223.39.X.X)
수정 삭제
법원의.무죄라 함은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범죄에.대한 검사의 구형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덧이다. 저런 625시절 대부분의 경우가 실제 범죄혐의가 없는것이 아니라 불법구금, 고문등의 불법적인 심문방법으로 인해 발생하는것이다
답글 작성 2 0
적폐수구청산 (비회원) 2023-04-01 01:37:14 IP (118.235.X.X)
수정 삭제
제주4·3사건 희생자로 결정되어 위패봉안실에 진설된 위패 중에는 부적격자가 많이 있다. 4·3을 주동한 남로당제주도당 및 제주읍특별위원회 간부, 인민해방군 및 구국투쟁위원회와 혁명투쟁위원회 간부, 2연대 앨범에 수록된 자, 2연대와 9연대 탈영 입산 군인, 군·경 프락치, 『4·3은 말한다』 및 『미군점령기의 제주도인민들의 반제투쟁』과 『4·3장정』이나 『이제사 말햄수다』, 미군정보고서, 기타 경찰기록 등에 수록된 핵심들, 북한 인민군, 남파간첩 등은 희생자에서 제외시켜야 하지만 화해·상생이란 거창한 구호 아래 미동도 없다. 이들은 엄연한 4·3가해자이지 4·3희생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명예회복을 뛰어넘어 전부 희생자로 둔갑해 9천만 원이나 되는 거액의 보상금과 각종 혜택을 받게 되었다. 이게 정의인가?
답글 작성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