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예화( 연엘리사벳님의 글중에서)
-꼬리표 붙은 사람들-
그들에게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그것은 그리 자랑스럽지 못한 꼬리표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창피스러울 것까지는 없는 꼬리표였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굳이 이 꼬리표를 붙이려고 하는 저의였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뭔가 궁색해질 판이면 뒤틀린 마음에서 그들을 그렇게 불러댔다.
'갈릴래아 사람들'
이것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달아준 꼬리표였다.
특히 수도 예루살렘 출신의 율법학자들, 바리사이인들,
그리고 원로들이 사도들을 바라보는 눈초리는 곱지 못했다.
예수의 제자랍시고 나대는 꼴들이 영 보기 사나웠다.
도대체 배우지도 못한 것들, 고기나 잡아 연명하던 형편없는 출신들,
고작 잘되어 봐야 로마정부 앞잡이나 하던 잡것들이
'기쁜 소식'입네, '하느님 나라'입네 하며 떠들고 다니는 꼴불견들을 참아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율법의 전문가요 권위자인 자신들에게 감히 '율법'이 이러합네,
'십계명'이 저러합네 하며 가르치려 할때는 속이 뒤틀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갈릴래아 사람들'이라고 불러댔다.
그러고 나면 막혔던 체증이 좀 내려가는 듯 했다.
갈릴래아가 어떤 곳이었던가! 예로부터 사람들이 일컫기를 '외국인들의 지역',
'이방인들의 지역' 이라고 했던, 변방의 멸시받던 곳 (이사9,1)이 아니었던가.
이스라엘의 최북단 국경지대에 위치하고 있기에 외침이 있을때 마다 가장 먼저 침공당해야 했건 곳,
이방 나라와 번번한 접촉으로 늘 혼혈의 문제가 끊이지 않던곳,
우상 숭배의 유혹이 들끓던 곳,
그리고 근래에는 헬레니즘 문화가 밀려들면서 혼합주의 신앙이
골칫거리로 대두되던 곳이 아니었던가!
오죽했으면 자고로 그 지역 사람들을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요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이사9,2)이라고 불렀을까.
그러하건대, 저 촌뜨기들이 어느 안전이라고 예루살렘 터줏대감들을 몰라보고 설쳐댄단 말인가!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 저 상것들의 처신이 사람들의 눈에는 이리 거슬리고 저리 거슬리는 것이었다.
사실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린 것은 제자들보다도 예수라는 인물 자체였다.
그 자신이 '갈릴래아 사람'이었고 그것도 별 볼이 없는 목수의 아들이었던 예수가,
난데없이 예루살렘에 나타나 가르치려 든다는 것이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들어보니 또 들을 만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의 언동을 기이하게 여기며 수군덕댔다.
"저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렇듯 아는 것이 많을까?" (요헌 7,15)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요한 7,46)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이 줏대 없이 흔들려 가자 예루살렘 지도층은 노발대발하였다.
"너희마저 속아 넘어갔느냐? 우리 지도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에 단 한사람이라도
그를 믿는 사람을 보았느냐?
도대체 율법도 모르는 이따위 무리는 저주받을 족속이다." (요한7,49)
이에 자기들 편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니고 데모라는 율법 교사가 예수를 두둔하고 나서자,
이번에는 니고데모에게 가시 돋친 말을 대신 퍼부었다.
"당신도 갈릴래아 사람이란 말이오? 성서를 샅샅이 뒤져 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 (요한7,52)
늘 이런 식이었다. 사람들이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을 일컫기 위해 붙여 준
'갈릴래아 사람'이라는 꼬리표에는 확실히 부정할수 없는 억하심정이 담겨 있었다.
<<< 지금 걷고 있는 그들...........>>>
그 슬프던 날, 홍연리 떠나시는 스승의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그순간,
' 흰 옷 입은 사람 둘'이 나타나 일러준 말을 듣노라니 그들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 옴을 느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사도1,11)
갈릴래아 사람들! 정직하게 말해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들을 부를 때는
뭔가 무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던 ' 콤플렉스'가 꿈틀거렸던 것이 사실인데,
오늘 새삼 천사들이 이렇게 불러주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이번에는 되레 '추억'이 꿈틀거렸기 때문이었다. 아니, 꿈틀거렸던 것은 추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재 눈앞에서 전개되는 사건이었다. 과거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한 현실의 장면이었다.
그랬다. 갈릴래아 호수는 그들이 알고 있던 세상이었고 우주였다.
그것이 그들의 전부였다.
지중해면보다 약 200미터 낮고, 남북 200킬로미터, 동서 12킬로미터,
수심 최대 228미터, 면적 약 166평방킬로미터의 이 호수,
서쪽으로는 경사가 가파르지 않은 평원이 펼쳐져있고,
동쪽으로는 벼랑이 임해 있는 이 갈릴래아 호수는 그들의 생활 본거지였다.
풍광이 빼어나고, 계절의 변화에 따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이곳에서
그들 대부분은 고기잡이를 하며 풍족하지는 않아도 운명으로 여기고 살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그이가 나타났다.
온화환 얼굴의 그이가 평온하던 갈릴래아에 엄청난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그이는 엄청난 흡인력으로 그들을 빨아 들였다.
열두 명의 제자 중 '가리옷' 사람 유다만 빼고 모두가 갈릴래아 출신이었으니 말이다.
"나를 따르라."는 말 한마디에 홀린 듯이 그물을 버리고 따라다닌 지어언3년!
세월은 주마등같이 흘러갔다.
아아, 햇빝 눈부시게 비추던 날,
그이가 학처럼 배위에 오르시어 '여덟 가지 행복'을 선언하셨을 때에,
잔디에 앉아 말씀을 듣던 그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이는 아주 마음이 따뜻했다. 아니 여렸다.
저마다 문제를 안고 찾아온 사람들을그이는 빈손으로 보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복음서에 언급된 33번의 기적 중 24번을 이 갈릴래아에서 행하셨던 것은
갈릴래라 사람들의 딱한 사정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이의 전적인 배려에서 였다.
그들이 그이의 몰아적 사랑을 엿보았던 것은 그이가 동족 유다인의 비난을 무릅쓰고
로마 백인대장 하인의 병을 고쳐주실 때 (마태 8,13)였다.
그이가 5병2어의 기적을 행하셨던 날(마태14,13)이었다.
그들은 굶주린 배를 움켜잡기 전에 먼저 아파하시고,
사람들이 고통속에서 신음하기 전에 그 아픔을 먼저 헤아리시는,
그이의 고감도 사랑에 감동받았었지........
때로는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 한적한 곳을 찾아(마르6,45:마태 14,23)
홀로 기도하기를 즐기셨던 그이,
예기치 못했던 광풍이 몰아쳤을 때(마태 14,24) 두려움과 풍랑을 동시에 잠재우셨던 그이,
그이가 오늘 갈릴래아 호숫가를 걷고 있다.
이방인의 땅, 아무도 마음 주지 않던 버려진 촌구석, 어둠 속을 헤메던 백성들,
그 후미진 구석구석을 그이가 걷고 있다.
사랑과 평롸와 위로가득한 가슴으로, 연민 그득한 눈으로 암하아렛츠(땅의백성)를 바라보고 있다.
사람들의 등을 두드려 주고 있다. 과거가 아니라 지금이다. 지금 그이가 갈릴래아 호수가를 걷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홀린듯이 그이의 뒤를 따라 걷고 있다.
평생 가야할 길을 지금 걷고 있다.
첫댓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