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응창(安應昌)
1派18世-참판공파
순원군(順原君) 漢城府右尹 善山都護府使 義城縣令 백암문집(柏巖文集)著
1593(선조26)∼1673(현종 14).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우졸재(愚拙齋)흥숙(興叔), 호는 백암(柏巖)
아버지는 진무공신(振武功臣)인 순양군(順陽君) 안몽윤(安夢尹)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문인이다.
음보(蔭補)로 부사(府使)를 하였고 천거로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되었으며 순원군(順原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저서로 《추원록(追遠錄)》, 《청교묵담(靑郊墨談)》이 있다.
1603(선조 36)∼1680(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흥숙(興叔), 호는 백암(柏巖).
안향(安珦)의 14세손으로 아버지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증우의정(贈右議政) 안몽윤(安夢尹)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덕순(德淳)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제수(際授)되어 청나라 심양(瀋陽)에서 불모로 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을 1640∼1643년까지 3년 동안 모시다가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 일행과 같이 환국하였다.
그 뒤 인평대군(麟平大君)의 부(傅)가 되었고, 와서별제(瓦署別提)·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
1644년 김화현감(金化縣監)·1655년(효종 6) 의성현령(義城縣令)에 각각 임명되었다.
그 뒤 낙향(落鄕)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저서로는 ≪백암문집≫ 5권이 있다.
[안응창(安應昌)의 정치 업적] 안공(安公)의 자는 흥숙(興叔)이고 호는 우졸재(愚拙齋)이며 만력 계사년(1593, 선조 26)에 태어났다.
인조(仁祖) 때의 진무공신(振武功臣)인 순양군(順陽君) 안몽윤(安夢尹)의 아들이다.
여헌(旅軒) 장선생(張先生)에게 글을 배웠으며, 천거로 대군(大君)의 사부(師傳)에 제수되었으며,
여러 군읍(郡邑)을 맡아 다스렸다. 내가 공이 지은 《청교묵담(靑郊墨談)》을 보았는데, 말하기를,
“나의 성품이 소루하고 오활하여 그간 장리(長吏)를 지냈으나 다스리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고 또 명예를 바라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백성을 이롭게 하고 안정시키는 도리에만 힘썼다. 낭천(狼川)과 김화(金化)를 다스릴 때는 얻은 미포(米布)를 모아 민역(民役)에 보태어 썼으며, 의성(義城)을 다스릴 때는 크게 보민청(保民廳)을 설치하고 단 얼마라도 소득이 있으면 여기에 저축하여 1천 5백 석의 곡식을 사들이고 또 40동(同)의 면포(綿布)를 마련해서, 매년의 쇄마(刷馬) 및 대동청(大同廳)에 응역(應役)하는 대소(大小) 인리(人吏)의 지공(支供)과 잡역(雜役)에 썼다. 예천(醴泉)을 맡아 다스릴 때는 또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밑천으로 삼았으며, 또 익하고(益下庫)를 설치하여 공사(公私)간의 수응(酬應)에 드는 경비를 민간에 부담시키지 않았다. 이리하여 관(官)에 있을 때는 비록 찬양하는 소리가 없었지만, 떠나온 뒤에 더러 사실보다 과장된 기림이 많았다.
그리고 고을에 나가 있을 때에 반드시 먼저 충효(忠孝)와 정렬(貞烈)과 유선(儒先)의 묘에 제사하였으며, 가난하여 혼인이나 장사를 치르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도와서 이루어 주었고, 의탁할 곳이 없는 노인에게 식물(食物)을 지급했으며, 향약(鄕約)의 법을 세우고 매년 기로연(耆老宴)을 열어서 즐겁게 해 주었다…….”
하였다.
-순암선생문집 제13권-잡저(雜著)-상헌수필 하(橡軒隨筆下)-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안응창(安應昌)
1603(선조 36)∼1680(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흥숙(興叔), 호는 백암(柏巖).
안향(安珦)의 14세손으로 아버지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증우의정(贈右議政) 안몽윤(安夢尹)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덕순(德淳)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제수(際授)되어 청나라 심양(瀋陽)에서 불모로 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을 1640∼1643년까지 3년 동안 모시다가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 일행과 같이 환국하였다.
그 뒤 인평대군(麟平大君)의 부(傅)가 되었고, 와서별제(瓦署別提)·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
1644년 김화현감(金化縣監)·1655년(효종 6) 의성현령(義城縣令)에 각각 임명되었다.
그 뒤 낙향(落鄕)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저서로는 ≪백암문집≫ 5권이 있다.
≪참고문헌≫ 柏巖文集(安應昌)
안세복(安世復)은 좌찬성(左贊成)으로 순계부원군(順溪府院君). 그의 손(孫) 안몽윤(安夢尹)은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순양부원군(順陽府院君)이며, 증손(曾孫) 안응창(安應昌)은 효종(孝宗)의 사부 순원부원군(順原府院君)으로 3대 봉군(封君)을 받았다.
自庵集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김구(金絿:1488~1534)의 시문집.
2권 1책. 목판본. 시문이 전란(戰亂)으로 많이 없어진 채, 외증손인 안몽윤이 남아 있는 시문을 모아 가지고 있던 것을
1659년(효종 10)에 외현손 안응창(安應昌)이 간행했다.
책머리에 정두경의 서문과 자암기년론(自菴紀年錄), 책 끝에 안응창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시, 권2는 부(賦)·표(表)·송(頌)·책(策)·의(疑)·옥중상소·망운산 기우문·묘갈음기(墓碣陰記)·〈왜구수토록 倭寇搜討錄〉·서(書)·별곡(別曲)·단가(短歌),
부록에는 〈기묘명현록 己卯名賢錄〉 유찬조(流竄條)의 관련기사, 윤근수가 쓴 〈제자암시첩 題自庵詩帖〉, 김세겸이 지은 묘비명, 안흥창이 지은 묘지가 실려 있다.
시 가운데 〈석류〉는 6세 때 지은 것으로 천부적인 자질을 보였다고 하며, 〈오작교〉는 8세 때에 지은 것이다.
책은 술을 경계한 글로서 술은 오륜(五倫)을 해치고 모든 일을 그르칠 수 있으므로 삼가해야 한다고 했다.
〈옥중상소〉는 기유년에 올린 글로서 감정의 글이라고도 한다.
〈왜구수토록〉은 1522년(중종 17) 7월의 기록으로 남해안에 자주 나타나 인명을 살상하고,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을 대대적으로 소탕한 내용이다.
〈화전별곡 花田別曲〉은 기묘사화에 관련되어 해남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지은 작품이다.
고난에 처한 상황이었지만 산수를 즐기는 풍류가 나타나 있다.
어디서나 찾아볼수 있는 즐거움을 노래하면서 서울의 번화함과 풍족함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조선 전기 경기체가의 변화 양상을 파악하는 데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규장각,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백암수묘록발(柏菴修墓錄跋)
무릇 효도란 온갖 행실의 근원이요 모든 미행(美行)이 말미암아 일어나는 바이다.
선유(先儒)가 효도에 대해 풀이하기를,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이 효도이니, 살아계실 때의
섬김과 돌아가신 후의 장례와 제사를 예절대로 하는 것이 바로 잘 섬기는 조목이다.” 하였다.
옛날의 효자는 부모를 잘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모의 마음을 미루어 부모의 근본이 되는 바까지 미쳤었다.
이 때문에 조부, 증조, 고조를 잊지 못했던 것이며, 또 조부, 증조, 고조의 마음을 미루어 멀리 10대, 100대에 이르기까지 잊지 못하였던 것이다.
나무는 반드시 뿌리가 있고 물은 반드시 근원이 있는 것이니, 뿌리가 없고 근원이 없으면 그 즉시 넘어지고 말라 버리게 된다.
사람에게 조상이 있는 것은 나무의 뿌리와 물의 근원과 같은 것으로, 이 조상이 없다면 이 몸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그 몸은 아끼면서 자신을 낳게 해준 조상은 도리어 소홀히 여기니, 그 어리석음이 심하다.
내가 백암(柏菴) 안공(安公)의 선영봉식록(先塋封植錄)을 읽어본 뒤에 이 의리가 지극하다는 것을 더욱 깨달아 효제(孝悌)의 마음이 은연중 생겼다.
이로써 보면 본연적인 성품은 참으로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공이 항시 말하기를,
“묘제(廟制)는 제한이 있으므로 참람하게 넘을 수가 없지만, 선조의 묘는 체백(體魄)이 모셔진 곳으로서 비록 천백 년이 지날지라도 우리 선조의 체백이 여기에 모셔져 있다. 그러니 어찌 거친 들녘 묵은 풀 속의 옛 무덤처럼 등한시하고 돌보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평생토록 묘를 손질하고 묘표를 세우는 일을 급무로 삼아 내외의 선산을 막론하고 가까운 데부터 먼 데까지 묘역이 무너진 것은 개축하여 잔디를 덮고 비석이 없는 곳은 글을 지어 표시하였다.
또 선조의 유허(遺墟) 및 장구(杖屨)가 이르렀던 곳에는 반드시 비석을 세워 기록하고, 무릇 선세의 묘나 선세의 사적에 관계된 일이라면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효성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공의 효성이 이렇게 독실하기 때문에 순덕(順德)의 발함이 도리에 맞지 않은 바가 없었다.
일찍이 심양(瀋陽)의 관(舘)으로 효묘(孝廟)를 따라가서는 충성과 근신이 두루 지극하였고, 누차 주군(州郡)을 맡아서는 정령과 교화가 행하여지게 하였으며, 종족에게 인후하고 동료와 벗에게 신의가 있어 향당이 칭송하였다.
지키는 바는 간약하면서도 미친 바의 넓음은 이러하였던 것이다.
공의 이름은 응창(應昌)이요 자는 흥숙(興叔)이니 문성공(文成公안향(安珦))의 후손이다.
일찍이 한강(寒岡 정구(鄭逑))과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두 선생의 문하에 종유하여 군자의 도에 대하여 들어 효제가 집에서 행해지고 명예가 밖에서 드러났다.
인조(仁祖) 초기에 천거되어 대군 사부(大君師傅)에 제수된 뒤로 내외의 관직을 두루 거쳐 당상관의 품계에 오르고 대질(大耋 80세 이상)의 수(壽)를 누렸다.
《시경》에 말하기를, “백성에게 잘하고 사람에게 잘한지라 하늘의 복록을 받았거늘, 보유하고 명하시고 이를 다시 하늘로부터 거듭하였다” 하였으니, 모두가 공이 스스로 이룬 것이다. 아, 아름답도다.
공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이 전토(田土)나 노비(奴婢)의 일로는 해마다 행차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천릿길을 멀다하지 않으면서 오직 자기의 선산에는 여러 해 동안 성묘하지 않기도 하고 종신토록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도 하여 간혹 묘소를 잃고 증거를 못 찾는 수가 있다.
이는 내 몸을 낳아준 조상의 은혜를 전토나 노비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것으로서 경중의 의리를 모르는 행동이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하였다.
아, 공의 이 기록을 보고 공의 이 말을 외우면서 이마에 땀이 나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
공의 후손 사기(師沂)씨가 이리 저리 흩어진 글들을 수습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다음 농와(聾窩) 박장(朴丈)에게 서문을 받고 나에게 발문을 청하였다.
내가 일찍이 공의 행의(行義)에 감복했었는데, 또 훌륭한 후손이 있어서 유문(遺文)을 천양(闡揚)하니 매우 훌륭한 일이다.
어찌 감히 글을 못한다고 사양을 하겠는가. 삼가 기록하여 보낸다.
-순암선생문집 제18권-발(跋)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柏菴修墓錄跋 辛丑
夫孝者百行之源。而衆美之所由起也。先儒訓孝曰善事父母。生事死葬祭之以禮。卽善事之目也。古之孝子知父母之善事也。故推父母之心。以及乎父母之所自出。祖曾高考妣。不可忘也。又推祖曾高考妣之心。推而遠之。至于十代百代而不可忘也。木必有根。水必有源。無根無源。蹶而涸。可立待也。人之有祖也。猶木之根而水之源。無是祖則無是身矣。人莫不愛其身。而反忽於生我身之祖先。其不知甚矣。余讀柏菴安公先塋封植錄而後。尤覺此義之至重。而孝悌之心。油然而生。信乎秉彛之性。有不可昧也。公常以爲廟制有限。不可僭越。而至若先墓。是體魄所藏。雖經千百載。而吾先之體魄在是。則其可等視。如荒原衰草中一古塚而莫之恤乎。平生以修墓建表爲急務。無論內外墳山。自近而及遠。塋域之圮陊者。改築而覆莎。誌碣之不存者。搆文而標識。又於先祖遺墟及杖屨所及。必立碑而記之。凡係于先墓先蹟。靡不用心。非誠孝之卓絶。能如是乎。公之篤於孝也如是。故順德之發。無不中理。常隨孝廟於瀋舘而忠謹備至。屢典州郡而政化流行。仁於宗族。信於僚友。鄕黨稱述。所操者約。而所及者廣。如是夫。公諱應昌。字興叔。文成公之後也。早遊寒岡,旅軒二先生之門。得聞君子之道。孝悌行於家。名譽著于外。仁祖朝。薦授大君師傅。歷踐中外。爵列緋玉。壽登大耋。詩曰。宜民宜人。受祿于天。保佑命之。自天申之。皆公之自致而然也。猗歟休哉。公之言曰。世人於土田臧獲。不憚歲行。不遠千里。而獨於自己之先山。或曠年而不省。或終身而不知墓所。間有失所而無徵者。其視所生之恩。反不及於土田臧獲。昧於輕重之義。誠可哀也。噫。觀公此錄。誦公此言。其不泚顙者幾希矣。公之後孫師沂氏收拾於斷爛之餘。改以今名。受序於聾窩朴丈。徵跋于余。余嘗服公之行義。又有賢孫闡揚遺文。甚盛意也。其敢以不文辭。謹識而歸之。
-順菴先生文集卷之十八-跋 順菴 安鼎福
≪참고문헌≫ 柏巖文集(安應昌)
柏巖安公文集序 ( 柏巖安公文集序 )
國朝中葉、文明啓運、賢人輩出時、則吾先子倡道於南方、及門諸賢動計屢百、而其有造詣之精深、薰炙之最久有十哲之目、蓋猶孔門之有四科。而通政大夫贈嘉善順原君柏巖先生安公其一也。公承晦軒、家學之正、而早登名門聞天人之妙、分憂百里字牧、稱其職負靮荒沙夷險一其節、天王尊師生之禮、士林推山斗之望、至若厚宗族敦風敎褒忠烈興儒學敬老尊賢一出於至誠惻怛、是誠王朝之藎臣、儒門之師表也。第其後承不振、三百年間遺文散佚、其僅存者亦在巾衍尙不得公諸世矣。今將收拾而付之棗、屬余以梳洗之、且請以弁文之役。噫。余以先君之思不可辭於公之役也、謹正其脫誤、而第次之旣又廢書而嘆息曰、南城之辱、吾東土百世之恥也。吾先子東蹈永陽、盡尊周之義。公勞苦瀋河、爲臣而盡其職。所遇之不同、而其迹雖殊其義則一。若公可謂公明宣之善學也。是爲序以寓高山之仰。
회당선생문집 (晦堂先生文集) 장석영(張錫英)
贈嘉善大夫漢城右尹順原君行通政大夫善山都護府使安公墓碣銘 竝序
公諱應昌字興叔姓安氏振武功臣順陽府院君贈右議政夢尹之子豊儲倉直長贈議政府左贊成士復之孫忠淸道觀察使贈吏曹判書宗道之曾孫晦軒先生文成公裕十四世孫也昭敬王三十六年癸卯九月公生自幼性寬厚篤志力學旣長以親命從學旅軒先生文康公永陽山中聲譽藹蔚傾一時時稱旅門十賢公與焉憲文王十八年庚辰公年三十八先時丁丑昭顯世子與弟鳳林大君幷質于淸上以大君雖居外不可以無學選遣朝臣中材德可任保傅者一人而難其人於是以公素有重名授以大君師傅公拜命負羈靮從大君瀋中備嘗艱險大君敬折節禮下之及還降手札四度又賜文房諸具及豹裘銅鍋之屬嘗陪賀箋如淸京孝廟命引對呼之以卿下大夫而稱卿古所罕有也公在官首尾數十年以內則瓦署別提司憲府監察通禮院引儀漢城參軍軍資判官僉知中樞外補凡九邑金化義城醴泉善山其五則忘之矣其爲金化也時國中新去亂學校頹廢殿享位板多失次公亟上聞改
釐之褒忠節存耆舊興儒學爲政務在與民休息民以大治有鄰郵誣以非義欲陷公於罪仁廟察其冤反罪其人人聞者多快之在義城則以士馬器械精銳上特命進階通政晩而築小齋木覓山西扁之曰愚拙齋與東溟鄭斗卿諸公結五老社觴詠優遊飄然有出塵之想元孝王六年己未公年七十七上語筵臣曰安某以孝廟潛邸舊臣從燕有勞予不敢忘其令官給食物蓋異數也明年庚申八月公卒于家十月葬龍仁彌助峴先兆之次是歲朝廷錄保社功故事舊勳嫡長皆加一資公以順陽之嫡亦在所加者而恩命未下公先已物故上悼憐之命贈公嘉善大夫漢城右尹封順原君公莊嚴而有禮言簡而行篤好讀書對案終日衣帶肅然遭順陽君喪居廬守制哀毁動人與弟參奉應望同處朝夕友愛隆
至先世丘墓階隧之塌而夷者封築之碑碣之泐而不可讀者鑱而新之以至旁親孼族外先無有不盡其力焉亦爲具石置祭田配韓山李氏郡守慶滉女與公先妣皆祖牧隱李文靖公生一男琢通德郞女爲郡守李夢錫妻後配星山李氏學生腆女星山府院君稷之後生一男(王+奭)琢男春國生員壻李鳳徵副提學蘇瑄進士李謙徵姜錫三韓宗運佐郞夢錫男善英敏英文科都事挺英進士啓英生員德英進士女金構右議政(王+奭)男鼎國生員源國公所著有追遠錄拾遺錄四禮集說喪祭禮解柏巖稿柏巖公之自號也後孫承路以李侍郞鳳徵所爲誌而來請銘銘曰
安有代序曰籍順興文成倡道孔道以明功到于今卓哉誰京源遠祥發累孤累卿尙書風裁論劾元衡順陽勦适太常有銘揭揭維公
不顯其承永陽飮河儕流盡傾瀋陽負羈寒暑再更王曰念爾甘盤舊情手札備物引對見誠九郡陽春五老耆英風流篤厚天與遐齡寶誥煌煌沒猶顯榮彌助之原賢配同塋刻辭于石來者是程
회봉선생유서(晦峯先生遺書) > 晦峯先生遺書卷之四十二 > 墓碣銘 河謙鎭(하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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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암문집 [自菴文集]
挽安公應昌子
皎皎爭稱氷雪姿。踏槐還躓折蓮詩。遺珠在澤能成媚。逸翮沖霄庶未遲。
豈料讀書蘿寺日。忽驚催記玉樓時。蒼黃盡室爭奔哭。和淚空題薤露詞。
竹南堂稿卷之四 下 七言律詩 下 오준(吳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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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구총(義拘塚)
충성스런 개(犬)의 무덤
종목 : 시도민속자료 105호
분류 : 민속자료기타
수량 : 1기609㎡
소재지 : >경북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산148
일선리 마을에 자리잡고 있던 개의 무덤이다. 주인을 구하려 목숨을 바친 개의 충직함을 기리고 있는데, 충성스런 개(충견)의 행적을 그린 의구도(義狗圖) 4폭이 함께 보존되어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해평면 산양리에 사는 김성발이라는 사람이 기르는 개가 있었는데, 매우 영리하여 늘 주인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루는 주인이 이웃마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해 그만 길가에서 잠이 들었다. 마침 들에 불이나 주인이 위험하게 되자 개는 놀라 멀리 떨어져 있는 낙동강으로 뛰어가 온몸에 물을 적셔 불을 끄기를 여러 번 하다가 지치고 탈진해서 그만 죽고 말았다. 술이 깬 주인이 모든 상황을 짐작하고 감동하여 그 시체를 거두어 묻어 주었다. 의구도는 각 폭이 가로 6.4m, 세로 6.6m, 폭 0.24m의 크기이다. 무덤은 사람의 묘와 비슷해 보이는데 지름 2m, 높이 1.10m이다. 조선 현종 6년(1665년) 선산부사인 안응창(安應昌)이 의열도에 의로운 개의 이야기(의구전義狗傳)를 쓰고, 비(碑)를 해평면 일선리에 세웠으며, 숙종 11년(1685년) 화공이 의구도 4폭을 남겼다고 한다. 1952년 도로공사로 일부 파손된 것을 1993년 해평면 낙산리(칠창) 마을입구에 부지387평을 마련하여 주변조경사업으로 말끔히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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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향려비명 병서(祔鄕閭碑銘 幷序)
옛 순흥 북방 백운동(白雲洞)에 문성사(文成祠)가 있으니 소위 소수서원(紹修書院)이 또 읍터 남방에 안씨 옛집의 터가 남아 있으니 사당(祠堂)과 7리 거리요, 곁에 작은 못이 있으니 이르되 세연지(세연지)라 하는 고적으로 사람들이 지금까지 가리켜 공경하는바 전해 오기를 문성공의 아버님 태사(太師) 휘 부(孚)와 태사의 할아버님 신호위(神號衛) 상호군(上護軍) 휘 자미(子美)의 두분이 사신 구거지(舊居地)라 한다.
안씨의 성대함은 실로 상호군께서 덕을 심음으로부터 시작하여 후세에 시조로 봉사(奉祀)함으로 발전되는 것이다. 이제 여기에 사단(祠壇)을 쌓고 제전(祭田)을 두어 19월 초하루에 태사(太師)까지 배향(配享)하여 보은(報恩)의 제사를 올리고 또 동쪽 1리에 안씨 사현정이 있으니 가정(가정:1522∼1566)년중에 주세붕(周世鵬) 태사(太師)가 그 사실을 적어 비(碑)를 세웠다.
보첩(譜牒)을 상고컨대 삼한(三韓)에서 지체가 썩 높은 집안으로 성(姓)이 귀대(貴大)한 성씨(姓氏)가 하나뿐이 아니로되 대현(大賢)의 족(族)으로 명인(名人)과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많기는 안씨가 옛부터 홀로 특히 성하다 하겠다.
문성공께서 계신 때는 고려 고종(高宗)과 원종(元宗), 충렬(忠烈), 충선(忠宣)에 해당하니 그 사실이 기록에 적혀 있고 또 장단(長湍) 신도비(神道碑)에 볼 수 있다.
효종(孝宗) 7년(1656) 봄에 안씨 자손이 옛터에 고향 마을임을 나타내는 비를 세우니 비단 모든 안씨 자손들이 서로 말할 바를 표시할 뿐 아니라 백대(百代) 후까지라도 이곳을 지나는 자 마땅히 대현(大賢)의 남기신 가르침을 잊지 않고 공경할 바를 알게 되리로다. 명(銘 )에 가로되
향려(鄕閭)를 기록한 비의 우뚝함이여 거룩한 분 공경함이 존엄(尊嚴)하도다. 사단(祠壇)의 경건한 의식이여 옮기고 숙임이 정성(精誠)있는 제사로다.
대사성(大司成) 만랑(漫浪) 황호(黃호) 짓고 좌참찬(左參贊) 김광욱(金光煜)이 전자(篆字)를 스고 김계(金棨)가 쓰다.
대명(大明) 숭정 병자(丙子)후 20년(효종대왕 7년 1656 병신) 3월 일
문성공 14대손 의성현령(義城縣令) 응창(應唱) 비문을 세우다.
[안응창(安應昌)의 정치 업적]
안공(安公)의 자는 흥숙(興叔)이고 호는 우졸재(愚拙齋)이며 만력 계사년(1593, 선조 26)에 태어났다.
인조(仁祖) 때의 진무공신(振武功臣)인 순양군(順陽君) 안몽윤(安夢尹)의 아들이다.
여헌(旅軒) 장 선생(張先生)에게 글을 배웠으며, 천거로 대군(大君)의 사부(師傳)에 제수되었으며,
여러 군읍(郡邑)을 맡아 다스렸다. 내가 공이 지은 《청교묵담(靑郊墨談)》을 보았는데, 말하기를,
“나의 성품이 소루하고 오활하여 그간 장리(長吏)를 지냈으나 다스리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고 또 명예를 바라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백성을 이롭게 하고 안정시키는 도리에만 힘썼다. 낭천(狼川)과 김화(金化)를 다스릴 때는 얻은 미포(米布)를 모아 민역(民役)에 보태어 썼으며, 의성(義城)을 다스릴 때는 크게 보민청(保民廳)을 설치하고 단 얼마라도 소득이 있으면 여기에 저축하여 1천 5백 석의 곡식을 사들이고 또 40동(同)의 면포(綿布)를 마련해서, 매년의 쇄마(刷馬) 및 대동청(大同廳)에 응역(應役)하는 대소(大小) 인리(人吏)의 지공(支供)과 잡역(雜役)에 썼다. 예천(醴泉)을 맡아 다스릴 때는 또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밑천으로 삼았으며, 또 익하고(益下庫)를 설치하여 공사(公私)간의 수응(酬應)에 드는 경비를 민간에 부담시키지 않았다. 이리하여 관(官)에 있을 때는 비록 찬양하는 소리가 없었지만, 떠나온 뒤에 더러 사실보다 과장된 기림이 많았다.
그리고 고을에 나가 있을 때에 반드시 먼저 충효(忠孝)와 정렬(貞烈)과 유선(儒先)의 묘에 제사하였으며, 가난하여 혼인이나 장사를 치르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도와서 이루어 주었고, 의탁할 곳이 없는 노인에게 식물(食物)을 지급했으며, 향약(鄕約)의 법을 세우고 매년 기로연(耆老宴)을 열어서 즐겁게 해 주었다…….”
하였다.
순암선생문집 제13권 잡저(雜著) 상헌수필 하(橡軒隨筆下) 호유잡록(戶牖雜錄)을 함께 덧붙임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시조 흥위위보승별장 추봉 신호위상호군공 관향유지사단기
(始祖 興威衛保勝別將 追封 神虎衛上護軍公 貫鄕遺趾祀壇記)
세적문헌록(世蹟文獻錄)-휘 응창(應昌)선조께서 적은글
1654년 시조공의 17대손인 당시 의성현감으로 계시던 응창(應昌)선조께서 주가 되어 단(壇)과 향려비를 세워 세사를 받들어 왔다.
시조(始祖)
시조 흥위위보승별장 추봉 신호위상호군공 관향유지사단기
(始祖 興威衛保勝別將 追封 神虎衛上護軍公 貫鄕遺趾祀壇記)
삼가 상고하건대 우리 순흥안씨가 고려시대로부터 동방의 대성(大姓)이니 휘(諱)자미(子美)께서 신호위상호군으로
추봉을 받으신바 참으로 안씨의 시조(始祖)이시다.
호군공께서는 세 아드님을 낳으신 바 3개파로 나눠지니 장남은 추밀부사(樞密副使) 영유(永儒)이시고,
추밀공께서 태사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 부(孚)를 낳으시고 태사공께서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향(珦)을 낳으시고
문성공께서 순평군(順平君) 문순공(文順公) 우기(于器)를 낳으시고 문순공께서 순흥군(順興君) 문숙공(文淑公) 목(牧)을 낳으시고
문숙공께서 순성군(順成君) 문혜공(文惠公) 원숭(元崇)을 낳으시고 문혜공께서 형조전서(刑曹典書) 경질공(景質公) 원(瑗)을 낳으시니 즉 제1파이다.
차남은 신기별장(神騎別將) 영린(永麟)이시니 이부시랑(吏部侍郞) 정준(貞俊)을 낳으시고,
시랑공께서 검교(檢校) 군기감(軍器監) 성철(成哲)을 낳으시고, 검교공께서 문의공(文懿公) 문개(文凱)를 낳으시고,
문의공께서 순성군(順成君) 천선(千善)을 낳으시니 즉 제2파이다.
다음은 영화(永和)이시니 득재(得財)를 낳으시고, 득재께서 희서(希諝)를 낳으시고
희서께서 제학(提學) 석(碩)을 낳으시고 제학공께서 문정공(文貞公) 축(軸)을 낳으시니 즉 제3파이다.
모두 도덕문장(道德文章)과 공훈(功勳) 높은 장상(將相)으로 대대(代代)로 그 거룩함을 이으시고
고려시대가 끝나고 우리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더욱 크게 번창하사 큰 선비와 현량(賢良)한 신하가 많이 나왔으며
모두 능히 역대 조정(朝廷)을 도우사 명신(名臣)이 되시어 혹은 개국창업(開國創業)의 공훈(功勳)을 이루고
혹은 정치를 도와 태평시대를 이루니 기린각(麒麟閣:공신의 초상을 걸었음)에 초상(肖像)을 그리어 거니
명성(名聲)이 역사에 빛나며 외손(外孫)으로 왕후(王后)가 되신 분이 십여분이시다.
호군공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5백여년전 이르되 자손의 번창과 가문(家門)의 귀(貴)하고 높음이 더욱 성하시니
아! 위대하시도다.
순흥부 평리촌(坪里村)은 호군공의 고향이시라 후손들이 이곳에 거주하는 자 호적(戶籍)에 많고 옛집의 큰 나무가 지금도 있는지라
정해년(丁亥年) 봄에 불초(不肖)가 순흥 도강리(道講里)의 16대조 추밀공(樞密公) 묘소와 백운동(白雲洞)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14대조 문성공(文成公)의 영정(影幀)에 배려하고 이어 호군공과 문성공께서 대대로 전하신 옛집 터를 찾아본즉 옛 부성(府城)의
남쪽 수리(數里)되는 평리촌 동향(東向)의 땅이니 문성공의 세연지(洗硯池)라 하는곳이 그 아래에 있는지라 도 부성 동쪽 1리에
제학공(堤學公) 문정공 부자분이 사셨던 곳을 찾으니 곁에 옛날 우물이 있어 비석을 세워 사현정(四賢井)이라 새겼으니
대개 사현(四賢:제학공, 문정공, 문경공, 제주공)께서 같은 우물물 마신 것을 표함이라.
내가 탄식하여 여러 종인(宗人)에게 말하기를 사현께서 쓰신 그 우물도 오히려 표석(表石)을 세웠으나
우리 선조께서 서로 전해오신 옛집에는 표시한 것이 없어 황폐하고 식별(識別)할 수 없노라,
또 호군공과 태사공의 묘가 이 고을에 있었다고 옛말에 전해오나 연대가 오래이고 능곡(陵谷)이 변천하여
그 지점을 알 수 없으니 이일은 평생의 한이로다.
그윽히 듣건대 근세(近世)에 대가(大家)인 청주한씨, 평상신씨, 안동권씨, 의성김씨들이 다 그들의 시조(始祖)를
고향에서 제사 지내고 조상의 은혜를 갚는 일을 극진히 한다하니 우리선조 호군 태사 두 분이 남기신 적선(積善)과
지손의 오랜 번성함이 저들 몇 집안에 두지지 않거늘 오히려 조상을 제사지내고 정성을 베풀 장소가 없으니 어찌 자손들의 수치가 아니리오.
생각컨대 이 옛터는 실로 호군공께서 대대로 사신곳이니 이제 비석을 세워 지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러 보는 곳이 되게 하고
또 그 곁에 단(壇)을 설치하고 근처에 전답(田畓)을 마련하여 제수를 풍족하게 하고 종인(宗人)으로 하여금 제사를 번갈아 맡게 하고
송(宋)나라 유현(儒賢)들이 정한 예식에 따라 10월1일 아침에 모여 제사를 드리는 것을 영원한 규칙(規則)으로 삼아
길이 바꾸지 않는 것이 조상을 받드는 아름다움이 아니리오 라고 말하였다.
다들 응낙하는지라 즉시 통문하여 동종(同宗)에 널리 고하여 각기 돈을 내어 사역(事役)을 도우니
아! 자고로 거가대족(巨家大族)이 조상의 충효근검(忠孝勤儉)으로 말미암아 성립되지 않은 것이 없고,
또 자손들의 완악(頑惡)과 오만으로 쇠퇴 멸망하지 낳음이 없나니 시조 호군공께서 언덕진 동산에 숨은 덕으로
집을 다스리고 자손이 다 부조(父助)의 교훈을 실천하고 힘써 전하니 증손 문성공에 이르러서는
유학(儒學)을 주창하여 밝히고 유풍(儒風)을 크게 열어 큰 스승의 계통을 곧게 이어 동방의 유종(儒宗)으로 우뚝 서시니
문묘(文廟)에 배향되시고 천추(千秋)에 제사를 받으시니 이는 참으로 유학의 준칙(準則)이라 자손에 본보기가 되나니
그 택리(宅里)를 표시하여 후인들이 보고 느끼게 하여 인간의 도리와 사회의 풍교에 도움이 되게 함이 어찌 적다 하리오.
이런 일은 가히 간략히 적지 않을 수 없고 대대로 전해오는 계파(系派)를 갖추어 함께 적는 것이며
관향(貫鄕)의 시향(時享)올리는 일과 비를 세운 전말(顚末)에 대하여 감히 새기기를 청하여 적는 바이니
엎드려 빌건대 살펴 보시옵소서.
갑오(甲午 1654) 1월 15일 후손 부사(府使) 응창(應昌) 삼가 적음.
사현정음기(四賢井陰記)/安應昌
高麗安先生碩生子軸,輔,輯 卽所謂四賢 此其舊井 玆植表庸眎後 崇禎丙子後二十一年丙申 同姓後學義城縣令應昌 立石
고려 안선생 석(碩)이 아들 축(軸), 보(輔), 집(輯)을 낳으니 사현인(四賢人)이라 한다. 그 옛 우물에 표석을 세워 후인에게 보이려고 한다.
숭정병자후 21년 병신 동성후학 의성현령 응창 비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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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비문은 「崇禎丙子 立」으로만 되어 있는데 근재집 추가본에는 「崇禎丙子後二十一年丙申 同姓後學義城縣令應昌 立石」으로 되었다.
이에따라 응창(應昌)공이 비석을 세운 년도가 다르게 해석이 되고 있다.
「崇禎丙子 立」= 인조 14년(1636년)
「崇禎丙子後二十一年丙申」 = 효종 7년(서기1656 丙申)이다.
응창(應昌)공이 1654년(효종 5)에 의성현감에 부임하고 1655년(효종 6)에 회헌선생향려비를 세운 것으로 보아 1656년(효종 7)이 올바를것 같다.
☞ 안응창(安應昌)
1593년(선조 26)∼1673년(현종 14).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우졸재(愚拙齋).
아버지는 진무공신(振武功臣)인 순양군(順陽君) 안몽윤(安夢尹)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문인이다. 음보(蔭補)로 부사(府使)를 하였고, 천거로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되었으며 순원군(順原君)에 추봉(追封)되었다.
振武功臣安夢尹嫡長子禦侮將軍行忠佐衛副司正臣安應昌
十九功臣會盟錄
順原君 栢岩 安應昌 頌德碑(순원군 백암 안응창 송덕비)
公은 始祖 諱 子美의 一八世孫으로 號는 栢岩이다. 先考는 右議政에 追贈된 諱 夢尹이며 先妣는 韓山李氏 德淳의 따님이다. 公은 一五九三년 出生하여 一六七七년(족보표기:一六0三년 출생하여一六八0년) 卒하였다.
公은 朝鮮近公은 金化縣監 義城縣令 醴泉郡守와 善山府使를 역임하였다 公이 別世하자 肅宗은 嘉善大夫 漢城府右尹 順原君으로 追贈하였다.
世史에 卓越한 敎育者요 著述家요 政治家이자 行政家였다. 敎育者로서 公의 行蹟은 丙子胡亂의 收拾策으로 仁祖의 二子인 鳳林大君과 三子인 麟坪大君이 瀋陽에 잡혀가자 仁祖는 그 時代에 人品과 學問이 뛰어난 應昌公을 大君師傅에 除授하였다. 公은 바로 淸나라로 가서 鳳林大君을 一六四○~一六四三年까지 敎育시키다가 昭顯世子 鳳林大君 一行과 같이 歸國하였다.
公이 著述한 追遠錄은 始祖 諱 子美公 出生부터 卒할 때까지인 一一八二~一六七三年 동안 順興安氏 五百餘年歷史의 史蹟과 詩文과 行狀 等이 記錄된 歷史事實과 崇祖思想의 敎育用으로 國寶에 버금가는 책이다. 一六七○年에 著述한 保宥錄은 文成公 諱 珦의 後孫들에게 代代로 軍役을 免하도록 하는 國家施策을 記錄한 책이다. 栢岩先生文集은 傳統文化와 歷史를 記錄하여 文化創造를 소상히 紹介한 韓國歷代文集叢書 中 二四八三號로 指定된 책이다. 公은 順興安氏歷史 이래 두 번째인 己亥族譜를 刊行하였고, 또 靑郊墨談도 著述하였으며, 이 밖에도 公이 쓴 順興安門의 墓誌와 墓碣銘 神道碑銘도 多數 있다.
政治·行政家로서 公은 金化縣監 在職 時에는 米包를 모아 民役에 보탰으며, 義城縣令 在職 時에는 保民廳을 만들어 民生을 살폈고, 醴泉郡守 在職 時에는 義倉을 設置하여 百姓을 救濟하고 無依託老人들의 生活對策과 慰勞잔치를 베풀었다.
公이 順興安門에 남긴 業績으로는 一六四八년 樞密公 墓所를 改修하고 墓誌를 지어 묻었다. 鄕閭壇을 設壇하고 追遠齋를 創建하였다. 一五四五年 豊基郡守 周世鵬이 四賢井碑를 세운 以後 一六三六年(仁祖 一四)에 公이 碑銘을 다시 쓰고 重修한 것은 現在 文化財로 慶北紀念物 六九號로 指定되었다.
參判公派順原君宗中에서는 公의 遺物 五○여점을 京畿道 龍仁文化遺蹟展示館에 寄贈함으로써 龍仁市는 公의 뜻을 기리고 寄贈文化를 定着시키는 契機를 마련한 順原君宗中에 感謝牌를 傳達했다.
公의 業績과 精神은 아직도 살아서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公이 吾安의 上代 崇祖歷史에 礎石을 다진 발자취와 業績을 永遠히 기리기 위해 順興安門의 뜻을 모아 頌德碑를 세운다.
二○一七年 七月 日
明知大 敎授 安龍煥 謹撰 順興安氏大宗會 謹竪
頌德碑建立推進委員會
委 員 長 : 安容奭 顧問 : 應模 希良 榮基 千學 名譽會長 : 在燦 永鴻
委 員 : 一中 在湜 準台 相勳 鳳洛 冕熙 淳榮 景五 郁 炳佑 俊榮 星憲 滭 壽基 甲元 根培 浩宅 根浩 淳根 吉佐 炳旭 鍾埰 棟周 相烈 在寬 哄玉 茂元 承翊 景煥 孝俊 承玉 泰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