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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RPG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이를 통해 불쾌감을 느끼게 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 RPG에서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명, 국가, 회사 또는 단체, 그 밖에 모든 명칭, 사건과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예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RPG는 특정한 사상, 이념, 정치체제, 인권 탄압과 폭압적 정치 질서를 옹호, 미화하거나 찬양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고? 글쎄. 그걸 말하기에는 아직도 너무 이르지 않겠나?
- 마오쩌둥
12-1. 정치적 거래
야심차게 출발한 사회노농당-급진당의 소위 녹적연정은 서로의 정체성을 둔 갈등에 빠졌습니다. 지방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제1당이 된 노농당의 입장에서 도시 노동자들을 위한 법안인 “카르노 법”을 내각의 첫 행보로 삼기에는 부담이 있었던 상황이나, 급진당 역시 노동권 분야에서 많이 양보했기에 더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죠. 이런저런 토론 끝에 도출된 결론은 노농당의 숙원 입법과 급진당의 노동개혁안을 함께 상정하는 그림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노농당이 심혈을 기울였던 정교협약 재건, 즉 교회가 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의 자율을 누리는 안은 로베스피에르의 후예들인 급진당에게 당연히 마뜩찮게 느껴졌지만, 정부기관의 관리감독권을 조금 더 강화하고 정교분리의 정신을 더욱 살리는 방향의 타협안이 제시되었습니다. 심지어 그것을 핑계로 급진당은 노사정 협의체에서 노동조합의 파업 최후통첩권을 신설하며 연금 의무지급 조항이 추가된 조금 더 과감한 노동법을 밀어붙일 수 있었죠.
당시에는 대부분이 이를 ’윈-윈‘의 계약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는 기실 노농당의 승리나 다름없었습니다. 급진당은 정교협약안 ’자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노농당은 노동법 개정에 대해 반대한 것이 아니라 시기에 대해 우려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으니까요. 게다가 노동자들이 상공 부르주아 계층을 강하게 압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현재 지형에서 (타협을 주도할 수 있는) 국가권력이 자본가들을 쥐고 흔들 수 있다는 의미였으므로, 노농당에게도 결코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었습니다. 노농당의 천하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굳어져가고 있었습니다.
12-2. Afrancesados
아메리카의 사실상 완전 상실 이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는 대부분의 권위를 잃었습니다. 콜롬비아로 망명했던 옛 자유주의 군부 지도자들이 좌익 군사모험주의자들이 되어 돌아와 혁명군사위원회를 결성했고, 그나마 온건한 성향이었던 코르테스(의회) 역시 우선 카를로스의 퇴위를 전제조건으로 삼았죠. 1823년 여름, 주스페인대사로 발령된 샤를루이 피네는 ”스페인인들 사이에 만연한 반불감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의회를 지원하라“는 훈령을 받고 마드리드에서 여러 어려운 공작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어디를 후원하냐와 별개로 혁명진영이 분열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기에, 피네는 스페인 진보주의자들의 아버지나 다름없는 포쿠이를 특별사절로 초청했습니다. 포쿠이는 길고 긴 설득 끝에 의회의 자유주의자들을 공화국의 대의로 끌어오는 데 성공했고, 마침 극우정권이 수립된 영국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극우파(카를로스 국왕과 미겔 왕자)를 지원하면서 좌익의 가장 큰 약점이었던 반불감정 역시 상당부분 희석될 수 있었습니다. 톨레도 공화정부, 즉 짧았던 스페인 공화국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12-3. 구원연합
스페인에서 제2차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시작될 무렵, 시몽 아시에르는 주러시아대사로 파견되었습니다.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로마노프는 드 메스트르의 강한 영향을 받아 야심차게 준비했던 교회통합 계획이 모조리 실패하며 모든 국정을 방기했고, 일부 청년장교들이 공공연하게 선위와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재개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 중 일부는 신앙의 형제들(그리스 독립운동)을 돕는다는 핑계로 무단으로 남진할 우려가 있었기에, 시몽은 팔자에도 없는 러시아 국내정치 개입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모스크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 참배하고 싶다는 헛소문까지 퍼뜨려가며 시몽은 뜻밖의 장소에서 차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속세에 대한 미련을 버린듯한 차르는 “폭력으로 세상을 바꾸려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말을 건넸고, 이후 황태제 니콜라이가 선위받는 데 성공함과 별개로 이는 시몽의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물론 새 황제는 오스만 제국을 향한 전면 공격을 시작했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프랑스가 지원하려던 그리스의 급진공화주의 계열 독립군을 지원할 수 있으니, 임무는 일단 성공한 셈이었습니다.
13. 피사 회의
일본에서는 막부가 존황파에 대한 대토벌을 단행하고 미국에서는 보수적 관료독재 정권이 탄생하던 1824년 말엽, 각각 유럽의 서쪽 끝과 동쪽 끝에서 벌어지는 두 전쟁의 전황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우려했던 대로 지방을 중심으로 한 공화국 비토 여론 탓에 왕당파가 점점 세를 넓히고 있었고, 그리스에서도 오스트리아가 조기에 개입하고 영국 역시 전면 개입할 조짐을 보였습니다. 이 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린 피사 외교회의에 파견된 프랑스 대표단의 마음은 두 전쟁 모두에서 혁명진영을 적극 지원하는 방향으로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콜롬비아군과 남미 좌익 예수회를 끌어들여 서쪽에서의 위기를 타개하고 혁명진영의 결속을 다진다거나,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스페인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 수립 실험을 한다거나 하는 아이디어들이 잔뜩 튀어나왔죠. 이는 영국과 오스트리아로부터 상시 전쟁위협을 받는 입장이었던 이탈리아에게는 좋은 일이었으나, 무역으로 먹고 살며 전쟁은 곧 멸국을 의미하는 바타비아(네덜란드)에게는 최악의 수였습니다.
그러한 “혁명외교”에 강경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이익위원장(대외무역 담당) 피네는 자신이 포쿠이의 지원을 받아 스페인 공화국을 사실상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스페인 공화정부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영국과 타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상 정치생명을 건 도박이었죠. 하지만 아예 유럽을 다시 대전쟁으로 몰아넣을 것이 아니라면 피네의 주장이 옳았습니다. 영국이 활발한 대외개입을 이어가는 이유 자체가 서유럽 혁명진영의 군사세력화,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혁명진영이 러시아와 손잡는 일이었던 만큼, 지금껏 나왔던 주장들이 관철된다면 제2차 혁명전쟁이 발발할 것이 명백했으니까요. 게다가 우방국 중 하나인 네덜란드에서는 소식을 듣고 기겁하여 프랑스인들이 모인 방에 항의방문을 온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상대적으로 조용히 있던 ‘권력의 핵심’ 잔 드술리가 피네의 편을 들며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본래 친영주의자였음에도 혁명외교 전략에 동조하던 시몽은 자신이 ‘그가 생각하는 국익’을 대변한답시고 신념과 정반대의 주장에 찬동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부끄러워했고, 이미 혁명외교에 푹 빠져있었던 자크 역시 중앙권력에서 완전히 퇴출되었습니다. 수상 생시몽, 외무장관 메를랭은 사실상 정치적 생명이 끝장나고 말았죠. 결국 스페인과 포르투갈 양국에 ‘극히 명목상의 입헌군주제 자유주의 정권’을 세운다는 타협안이 도출되었습니다. 서쪽에서 한시름 돌린 영국은 총 15만명의 원정대를 꾸려 러시아를 향한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 군사기술의 빠른 발달과 상대적으로 느린 전술 및 의료체계 발전이 결합되어 참혹한 희생을 낳은 일명 ‘5년 전쟁’이 발발한 것입니다.
14. 킨키나투스
피사 회의의 여파로 영국과의 ‘굴욕적 타협’에 실망한 도시 노동자들이 사회노농당을 규탄하고, 반대로 지방의 부농들과 그들이 조직하는 ‘농민조합’ 표심은 압도적으로 “평화를 가져온“ 노농당 측에 쏠리는 가운데, 내각이 총사퇴하고 정국의 키를 잡은 잔 드술리가 의장에게 조기총선을 건의하면서 프랑스의 미래를 결정지을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민심의 파도를 직격당한 대부분의 제정당들은 계급간 협동을 통한 국민연합정부를 원하고 있었기에, 범인당(구 공화인민당)과 급진당 등 진보 좌익정당들마저 노농당과의 연정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물론 문제는, 노농당의 주인이자 도시를 제외한 국가 ‘전체’의 지지를 얻는 잔 드술리는 단 1 밀리미터도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총 650석 중 무려 371석을 차지하며 1792년 이래 가장 막강한 단일정파가 된 노농당은 의회가 구성되자마자 [분리될 수 없는 공화국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1825년 6월 22일법], 일명 [수권법]을 통과시키고 국론을 통합한다는 미명 하에 조합주의 체제를 ‘강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잔은 ‘필요한’ 인력들을 모두 파리나 기타 대도시로부터 미리 빼돌리고는 모든 정보기관과 각종 준군사조직들을 통합한 ‘내무위원회’의 수장 자리에 스스로 올랐습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급진공화파, 그것도 로베스피에르의 추종자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잔은 ‘일부러’ 파리와 각 대도시의 봉기를 유도했습니다. 총선 전 정식으로 노농당에 입당한 외무위원장 피네는 잔의 충실한 도우미 역할을 자처했고, 자크는 총선을 앞두고 손수 그리스 공화파를 지원하기 위한 의용대에 자진 참가한 터라 당장 영향력을 미치기 어려웠습니다. 오직 시몽 아시에르만이, 포위된 파리에서 ‘코뮌’의 패전투수 역할을 자청했을 뿐이었습니다..
15.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
이미 예상된 시나리오대로 연극을 올리듯, 내무위원장 잔은 “나머지 도시들은 ‘자비롭게’ 조기 진압하되, 파리만큼은 가능한 가혹하게 ‘처벌’한다”는 전제 하에 모든 계획을 집행했습니다. 파리로 들어가는 모든 식량과 원자재를 봉쇄하고 도시 전체를 아사시킨다는 작전안이 그대로 실행되었죠. 마치 1,000년동안 프랑스의 주인으로 행세한 파리를 단죄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당연히 1825년 여름부터 겨울까지의 ‘진압작전’은 파리에 대한 사형 집행의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한 잔과 구비옹생시르 등 노농당 지도부가 간과했던 점은, 부질없는 저항을 시도하던 좌익 역시 악에 받힐 대로 받혔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몽이 의장으로 앉은 파리 코뮌은 (처음에는 협상을 강요할 목적으로, 그 다음에는 순전한 적의의 표시로) 도시의 모든 금, 은, 기타 귀금속들을 회수할 수 없는 형태로 파괴하는 형태로 새로운 압제자에 대한 생체적 저항을 보여주었고, 결국에는 스스로 파리를 불태운다는 선택지를 택했습니다. 물론 잔과 그녀의 새 동료 피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협상은 물론 항복조차 받아주지 않는다“는 미명 하에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파리 시민들에게 ‘대포가 고장날 때까지’ 산탄 사격을 퍼붓는다는 충격적인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정작 가장 의외의 결과는 권력투쟁에서 완전히 배제된 줄 알았던 자크 카르노의 귀환에 따른 영향이었습니다. 사실 (아무리 정예병력이라지만) 고작 1만명 남짓의 혁명수비대를 이끄는 자크를 ‘무시’했던 잔은 심드렁하게 반응했지만, 딱히 개인적 복수에는 뜻이 없고 그저 급진좌익이 나라를 망치는 게 싫었던 피네는 야전사령관 폼루 원수의 35,000명 병력을 따라 이탈리아로 나섰습니다. 병력이 파견되었던 이유는, 자크가 이탈리아에 상륙해(당장 동부전선에서 프랑스군을 배제하기를 원했던 영국군과의 밀약이 있었습니다) 남부의 ‘이탈리아 민족사회주의자’들과 합세해 정변을 일으킬 것을 극히 우려했던 라벤나의 온건파 정부가 프랑스에게 원군을 요청했던 까닭이었습니다. 문제는 이탈리아 정부의 두려움이 곧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예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 정부군을 연쇄적으로 격파하던 자크는 정말로 이들 민족사회주의 세력의 반란을 촉발시켰고, 라벤나 정부마저 전복되면서 이탈리아 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애시당초 이탈리아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던 잔, 그리고 ‘빨갱이’ 정부든 뭐든 국내문제를 외국과의 전쟁으로까지 번지게 하고 싶지 않았던 피네는 인민공화국을 승인하고 방위협정을 맺고서 빠져나왔습니다. 물론 자크 카르노는 이탈리아의 영웅이 되어 프랑스로 다시는 귀환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제출한 뒤였죠.
아무튼 파리는 완전한 폐허가 되었고, 노농당에 붙었던 자유당이나 질서당 인사들은 ‘제물’이 되어 대부분 ‘순교’했으며, 급진당과 범인당 주요 인사들은 특별재판소에 의해 진행되는 불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조용히 ‘처리’된 후 의도적으로 명예를 살인당했습니다. 심지어 노농당 정부는 파리를 복구하지도 않고 루이 14세가 세웠던 계획도시 베르사유를 [뤼테세Lutèce] 또는 뤼테티아(Lutètia)로 개명하며 신수도로 삼았습니다. 이는 프랑스가 파리의 천년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남을 의미함과 동시에, 혁명과 공화국의 대의가 - 이후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 “국가가 ‘자애로운 노예주’이자 압도적 폭력의 제공자로서 압제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으로 완전히 덮어씌워졌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렇게, 분리될 수 없는 단일의 프랑스 공화국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완성되었습니다.
Epilogue.
1825년 “보수혁명”을 일으켜 총 파리에서만 16만명, 이후 추가 숙청 과정에서 10-40만명을 더 살해하고 파리를 완전히 파괴한 채 출범한 사회노농당 국민화합정부는 과감한 조세 일원화 정책과 노동화폐 도입, 강력한 노동규율 확보 등을 통해 내전의 상흔을 극복하려 애썼습니다. 이를 위해 급진당과 범인당의 잔존인사들은 물론이고 자유당이나 질서당까지 통합해 ‘공화국 국민의 정당’이 된 사회노농당은 1831년까지 일당제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원하던 복수를 끝마친 내무위원 잔 드술리는 사회주의도, 민족주의도, 그렇다고 급진적인 산업자본주의 방향으로도 강한 드라이브를 걸지 않았습니다. 전형적인 프랑스인도 아니고 정책 전문가는 더더욱 아니었던 그녀는 필연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인사가 될 수밖에 없었고, 당초 계획했던 산업생산성을 담보하기 위한 모든 조치는 차일피일 미뤄졌습니다.
이 꼴을 보다못한 다르구, 피네 등 오히려 국가자본주의, 정통 조합주의자 인사들이 ‘좌익‘을 표방하며 탈당해 민주공화당을 차렸고, 그럼으로써 잔의 지도력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19세기 내내 프랑스의 고질적 문제가 된 통화의 이중가치(대내적 가치와 대외적 가치의 불일치) 문제는 무역수지의 악화를 불러온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기에, 이 국가자본주의자들은 어떻게든 대외 개입을 늘려 “프랑스의 의지가 곧 법으로 통하는” 지역, 즉 식민지 또는 시장블록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세포이 반란 시기 허울만 남은 무굴 제국을 살려내 영국 동인도회사를 동부 해안지대로 쫓아내고, 북중국(임칙서의 반정으로 대하(夏)국)의 남벌을 지원하고, 만주에 애신각라조를 다시 복구시켜 또 다른 괴뢰국인 조선의 이중 괴뢰국으로 만드는 등 동양에서의 활발한 행보, 그리고 술탄과 조약을 맺고 알제리를 정복해 바르바리 해적을 끝장내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죠.
그 결과, 1840년대의 프랑스는 몇몇 ”국영재벌“들이 국가의 지도를 받아 경제를 기획하고 지방에서 끊임없이 노동자와 정치엘리트를 공급하는 체계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오히려 미국에게 지나치게 많은 부채를 지게 되어 외교의 주도권이 뒤바뀌는 문제, 자코모 카르노의 영향으로 선군사회주의 국가가 된 이탈리아가 끊임없이 프랑스의 영향권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문제, 대외팽창으로 생긴 막대한 대외부채를 블록경제 수입이 좀처럼 따라오지 못하는 문제, 결정적으로 중부유럽에 생긴 새로운 패권국이자 입헌군주제 국가 “독일제국”에 대한 국력 열세 등은 19세기 내내 프랑스를 괴롭히게 될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1848년 독일제국 성립 직후 이탈리아가 독일제국과 이중동맹조약을 맺으며 공공연하게 프랑스의 서유럽 지배권을 위협하는 꼴이 되자, 무려 23년간 외무위원으로 재임한 피네는 폴란드로 끊임없이 서신을 보내 잔과 폴란드와의 동맹조약 체결을 논의했지만, 답장은 없었습니다.
1848년의 프랑스는 내적으로는 정합성 있는 체제를 완성하였으며, 군주정의 씨앗이 완전히 소실되어 설령 외국에 의해 정복되더라도 공화주의의 틀을 벗어나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현재 지도부의 통치가 영원토록 이어질 거라 기대하기는 무리인 모양입니다. 엉뚱하게도 영국과 독일 어드메에서 찾아온 소위 “공산주의”라는 유령과 이미 실현된 악몽인 “대독일”이 언젠가 프랑스 조합주의 정권을 박살내기 위해 찾아올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말이죠.
잔 펠리시 드술리(1786-1849)
폴란드-리투아니아 크라쿠프 시의 병원에서 콜레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 이후 뤼테티아로 시신이 운구되어 국장이 거행되었으나, “그 누구도 슬퍼하지도, 그렇다고 기뻐하지도 않았다”고 전해짐. (최종 직위: 프랑스 공화국 내무위원장 겸 사회노농당 조직지도부장)
자코모(자크) 카르노(1774-1858)
독일 제국 외무상서 비스마르크와 회동 이후 지병인 피부병을 치료하러 찾아간 바덴바덴의 온천에서 급성 뇌졸중으로 사망. 그가 1848년 탈환한 칼리아리가 카르노 시로 개명.
시몽 조제프 아시에르(1774-1825)
1825년 급진좌익 반란 진압 과정에서 권총자살. 보복성으로 동지 노동자를 학살한 주범으로 몰려 전향한 구 급진당원들의 주적이 되었으나, 잔 드술리 사망 이후 복권됨.
샤를루이 에마뉘엘 모리스 피네(1780-1869)
제1차 유럽 대전쟁 발발을 앞두고 전쟁을 막기 위해 20년만에 외무위원장으로 복귀했으나, 공산주의자의 정치테러로 사망함. 유언은 “프랑스.. 조국.. 너무 늦었다..”로 전해짐.
초대 팡탈레옹 남작 조제프(1774-1815)
1815년 프랑크푸르트 회의 당시 프랑수아 마르셀 진압을 저지하다 오스트리아 근위병에 의해 사살됨. 1826년 방데 해방령 직후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나, 반대급부로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영웅시됨.
프랑수아 마르셀(1774-1815)
프랑크푸르트 황태자 모살사건의 주범으로, 현장 사살됨. 전세계적으로 “맹목적 애국주의자”를 지칭하는 단어인 ’마르셀리스트‘의 어원이 되었으며, 이탈리아 공화국 건국영웅에 추서되고 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총 5개의 도시가 그와 관련된 이름으로 개명됨.
롤랑 미셸 조르주 비셸론(1781-1817)
보나파르트주의 쿠데타의 주범인 안느 장마리 사바리에 의해 마약에 중독된 채 외교적 실책을 저지르고, 사회 각계각층의 비난 속에서 자살로 위장하여 독살당함.
제4대 몽포르 후작, 프랑수아자비에 이브 조제프 포쿠이(1756-1840)
1825년 급진좌익 반란 당시 스페인에서 신정부 수립을 돕던 중 소식을 접하고 한동안 행방이 묘연해졌으나, 이후 러시아로 이주해 니키타 무라비요프 등을 도움. 1840년 보수주의 왕당파 이반 표도로비치 파스케비치예레반스키 원수에게 살해당했으며, 분노한 작가이자 사상가 및 급진 공화주의자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그의 원수를 갚겠다며 파스케비치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마찬가지로 살해당함.
[목표] 분리될 수도, 굴복할 수도 없는 공화국을 재건하고 유지하십시오.
목표 달성도.
🟩 “분리될 수 없으며“ (성공)
🟨 ”굴복할 수 없는“ (절반의 성공)
🟩 ”프랑스 공화국“ (성공)
총평 : 대체적 성공(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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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지파일 만주를 따려면 목재와 철이 필요하다는 것이 문제이니, 일단 들이박는 게 중요합니다(?)
@dear0904 우리도 한번 만주로 갔고요.
@E.E.샤츠슈나이더 아닠ㅋㅋㅋㅋ 데드락이잖아요 ㅋㅋㅋ
@dear0904 산보다는 사실 하상계수가 진짜 난관이라서 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21세기에도 제어 못하는걸 전근대에 어케 하냐...
@E.E.샤츠슈나이더 아 ㅋㅋㅋ... 하상계수 꼬라지보고 진짜 통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뭐 이렇게 억까를 당하나 싶어서(...)
@E.E.샤츠슈나이더 정크선과 플뢰위트 건조법을 입수해서 중일무역 노략질을 한다던지 (...)
@dear0904 그 외에도 “조선은 왜 원양항해 못하는 평저선 따위나 만들었죠?“에 대한 대답도…
“갯벌이 저렇게 많은데 그럼 첨저선을 어떻게 쓰냐”로 반박이 가능합니다(…)
@렌지파일 특정 작가가 또(?)
@E.E.샤츠슈나이더 진짜 파다보면 이 거지같은 땅에서 어떻게든 살기 위해 노력했다는걸 알게되죠(...)
@E.E.샤츠슈나이더 그 갯벌들이 소금, 해조류, 낙지, 굴 등 먹을걸 제공해주고 태풍을 막아주긴 하지만요.
@dear0904 그리고 이 거지같은 땅 반쪽만 가지고도 이정도 수준까지 된건 참 대단한...
@dear0904 사실 은도 나고 상업도 발달한 일본의 사회구조(기술력 경제력이 아니라)가 조선보다 훨씬 후진적이었단걸 생각해보면..
@렌지파일 ㅋㅋㅋㅋ... 그렇죠. 땅이 안좋으니 사회구조는 선진적이어야 했던걸 수도 있겠네요 ㅋㅋ
@dear0904 근데 왜 지금은 이모양 이꼴...(국정원에 끌려간 작성자입니다)
@렌지파일 그러므로 조선의 희망은 바로…(?)
@E.E.샤츠슈나이더 세상에 이게 언젯적..
@렌지파일 그래도 10-20년쯤밖에 안 지났습니다(?)
@dear0904 기후의 문제, 부존자원의 문제, 기타 여러 지정학적 문제점 등 당대 현실상 해결이 어려운 여러가지 단점들을 안고 그래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방책이 논의되긴 했다는 것 자체가 조선의 (당대 기준) 제도적 선진성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E.E.샤츠슈나이더 근데 김씨랑 조씨가 다 말아먹고 마지막으로 민씨가 나라를 팔아먹었죠.
@E.E.샤츠슈나이더 청나라가 중국사에서 유독 까이는 이유가 화려한 몰락 그 자체보다도, 만주족이 중국과 '하나'로써 중국 발전 자체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라는 논리가 있죠.. 물론 한족 왕조라고 잘하진 않았을것 같긴 하지만, 결국 만주족은 정체성이건 고향이건 다 만주식을 유지했으니
@렌지파일 문제는 그러고도 현재는 소멸위기라는게 참 아이러니 하네요(...)
@렌지파일 사실상 만주제국의 식민지 중원(?) 같은 느낌이긴 하죠. “결국엔 한족 신사층이 고위직이고 뭐고 다 해먹었지 않냐! 청나라도 중화제국이다!” 라고 한다면 인도계가 총리였던 영국 역시 인도 제국의 일부라는 충격적 결론이(…)
@dear0904 7대한을 극복하기 위한 7대강 사업(?)
@E.E.샤츠슈나이더 아, 그리고 정치적인 요소로, “인조의 박살난 왕실권위로 대규모 토목사업을…?”이라는 점이 있는데 반정하면 되니 괜찮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계룡 출신 정씨 캐릭터를..(?
@렌지파일 거기다 종교는 예수회 가톨릭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