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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교도 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유정식
제 2 장 프린스턴 대학과 펜실베이니아 서부 지역 부흥
18세기 후반의 주요 인물들의 관련성
1761년 당시 13개의 식민 지역의 총 인구는 100만 명을 조금 웃돌았다. 인구는 매우 급속하게 팽창했으며, 5년 후인 1766년에는 약 250만 명에 육박했고, 이런 인구의 증가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본장은 18세기 후반의 주요 인물이 어떻게 섭리적으로 서로에게 관련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연관성의 출발점을 뉴브런즈윅 장로교 노회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이유는 뉴브런즈윅 장로회가 새뮤얼 데이비스를 준비시켜 목회 사역지로 파송했던 장로회이기 때문이다. 이 뉴브런즈윅 장로회에는 존 로저스와 로버트 스미스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새뮤얼 블레어의 신학교에서 새뮤얼 데이비스와 함께 공부하던 동료 학생들이었다.
로저스는 1727년, 아일랜드에서 출생했으며, 영적 대각성 운동의 초기에 조지 휫필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인물이다. 1743년, 로저스는 목회 사역에 전념하기 위해 블레어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새뮤얼 데이비스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종종 함께 설교하기도 했으며, 데이비스의 죽음 이후 로저스는 데이비스의 어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 왔고, 뉴욕의 장로교회에서 청빙 받았을 때도 데이비스의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떠났다. 그는 1811년, 64년간의 목회 사역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로버트 스미스는 데이비스와 같은 해에 출생했으나, 당시 미국 대륙에서 주요한 설교자로 인정받지는 못했던 인물이다(펜실베이니아의 페퀴아에서 사역:1751-1793). 그러나 부분적으로 신학교 동료학생들과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그가 죽은 후 한 동료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거룩한 사역에 있어서 스미스 박사보다 더 유익하고 존경을 받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는 총회 앞에서는 놀라우리만치 겸손하고 수줍어했지만, 강단에서는 결코 사람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강단에 서기 전,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해 있었으며, 부나 지위나 재능을 포함해서 세상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모두 무가치한 배설물로 여겼다.
1740년대에 뉴브런즈윅 장로회를 통해 목회 사역에 헌신하게 된 또다른 사람은 바로 새뮤얼 핀리다. 그는 아마도 최초의 윌리엄 테넌트 통나무 대학의 학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핀리는 노팅엄에 정착하기 전 2년 동안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설교했으며, 위에 언급한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에서는 새뮤얼 데이비스의 후계자로 그의 사역을 마감했던 인물이었다. 핀리는 또한 학문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노팅험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프린스턴 대학의 영향
뉴브런즈윅 장로회의 통일된 영향력은 1756년 프린스턴에 설립된 뉴저지 대학의 나소 홀 때문에 더욱 극대화되었다. 영적 대각성 시기의 모든 복음적 지도자들이 이 대학의 열렬한 후원자들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영국의 조지 휫필드는 이 대학의 열렬한 지지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772년, 프린스턴의 학장은 ‘대학생들의 숫자가 거의 4배로 증가했으며, 뉴잉글랜드 남부 지역의 그 어떤 대학보다도 많았고 아마도 당시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가장 큰 규모였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던 것이다. 기독교 복음의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나소 홀에서 배출되었으며, 사회 각계 각층의 중요한 부서를 맡게 되었고, 초기 80년 동안 2500명의 졸업생 가운데 무려 500여 명이 복음 설교자가 됨으로써 이 대학의 설립자의 본래 의도가 성취되었다.
프린스턴 대학 초기에는 모두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이었다. 초대 학장이었던 조나단 디킨슨을 비롯하여 아론 버 경, 조나단 에드워즈, 새뮤얼 데이비스 그리고 새뮤얼 핀리였다. 핀리 학장 이후 이사회는 후계자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가까운 페이즐리에서 목회하고 있던 존 위더스푼을 초청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45세였던 위더스푼은 이 초청을 수락하는 데 쉽게 결정하지 못했으나 조지 휫필드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정했던 것이다. 이사회 또한 한 번도 그를 직접 눈으로 본 적도, 귀로 그의 설교를 들은 적도 없는 사람을 학장으로 선임한 것이다. 단지 그의 책들과 그의 평판만으로 그를 초청한 것이다. 결국 이사회의 판단은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프린스턴 대학의 영적 성장의 비밀은 교과과정에 있지 않았다. 교과과정은 다른 대학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또 종종 ‘성직자 제조 공장’이라고 비난을 받는 신학교와도 같지도 않았다. 학장과 세 명의 교수가 교육하는 4년의 과정은 학생에게 단단한 기초를 제공하고자 계획한 것이었다. 학생이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며, 평생 읽고 연구하는 습관을 길러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단지 신앙 체험과 언변의 능력만 키워 주어 급하게 사역지로 내보내는 정책은 프린스턴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프린스턴은 여러 가지 예술을 강조하고 졸업 후에도 지속적인 사역을 위해 부가적인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신앙과 분리된 ‘불경건한 학문’을 위험한 것으로 여겼고, 알고 있어야 할 것 이상으로는 여기지 않았다. 따라서 프린스턴에서 가르친 모든 교과과정은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중대성에 대한 견해를 고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기독교 사역에 헌신하고자 프린스턴에 몰려든 학생들이 인정했던 프린스턴의 중대한 영향력은 의심할 여지 없이 교수들의 모범과 영성에 있었다. 그들은 영적 대각성 운동에서 물려받은 복음에 대한 설교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당시 프린스턴의 지도자들은 매우 중대한 질문에 직면하고 있었다. ‘순하고도 영적인 설교에 지대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대한 그들의 공통적인 대답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그 설교의 실재를 설교자 자신이 경험해야 한다는 설교자들의 인식과 경건함이었다.
결국 참된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교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참된 설교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중적인 설교와 웅변의 기술적인 측면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가장 중대한 요소는 결코 아닌 것이다. 새뮤얼 데이비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에서 대중들을 현혹하기 위해 입을 딱 벌리게 만드는 열띤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소음을 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령에 깊이 충만한 것, 하나님과의 비밀스런 동행을 유지하는 것,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들도 거룩해야 하는 것 등은 지대한 헌신적 수고이자 위대한 설교자의 참된 사역이다.’ 존 위더스푼은 프린스턴에서의 첫 설교에서 ‘사역의 성공과 효용성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재능이나 신분의 탁월함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참된 경건’이라고 설교했다. 그의 강의에서도 같은 내용이 발견된다.
1.경건은 설교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그 복음을 확신하는 것과 그의 마음에 새겨진 믿음에 대한 살아 있는 인식과도 같다.
2.경건은 목사가 해야 할 최고의 봉사다. 경험적 지식은 그 어떤 것들보다 우월하며, 다른 모든 교양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것은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이며, 그의 삶에서 날마다 연습해야 하는 것이며, 설명하고 권면해야 할 의무적인 사역이다.
3.참된 경건은 목사가 전하는 복음과 교훈에 형언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실어 준다. .....우리는 삶을 겪어 오면서 능력은 훨씬 더 많으나 신중하지 못한 사람보다 많이 열등하다 할지라도 참되게 경건한 자가 더 큰 존경을 받고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더 큰 성공을 거두는 것을 종종 보곤 한다.
프린스턴이 배출한 인물들이 주도한 부흥
1760년대에 임한 미국 부흥을 언급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1764년에서 1765년 사이에 뉴욕 뉴어크의 모리스타운에 있는 장로교회에서 부흥이 있었다. 첫 번째 사건은 1742년부터 모리스타운에 거주했던 티모시 요네스에 의한 것이다. 요네스는 롱아일랜드 출신이었고, 예일 대학을 졸업했으며, 프린스턴 대학을 위한 매우 헌신적인 역할을 감당한 이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764년 7월 1일 주일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은혜가 놀랍게 흘러넘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해 1년 동안 94명이나 회심했고 그들은 모두 신자로 등록했다.
존 위더스푼은 1768년 8월 프린스턴에 정착했다. ‘놀라운 부흥’이 그의 임직 ‘3년과 4년째 되던 해’에 임했는데 아쉽게도 그것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770년대 초기 프린스턴의 영적 각성시기를 직접 경험한 한 학생은 자신의 자전적 전기의 일부분에 이 시기에 대해 기록해 놓았다. 이 저자는 존 맥밀란인데, 로버트 스미스 밑에서 공부한 인물이다. ‘그 곳에 있는 동안 여호와께서는 그의 위대하신 영을 학생들에게 부어 주셨으며, 이로 말미암아 영원한 영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표명하지 않은 학생들은 거의 없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들 시대의 축복의 상징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탁월한 유익이 되었다.’
프린스턴 대학의 졸업생 가운데 테데우스 도드와 존 맥밀란과 교류를 나눈 제임스 파워와 조셉 스미스가 있는데, 이들은 함께 서부 산악 지역 최초의 장로회를 조직한 인물들이다. 파워와 스미스는 처음 노팅험에서 공부했으며 그 다음에는 뉴저지 대학에서 새뮤얼 핀리 학장의 지도 아래 공부했다. 이들은 평범하고 순전하면서도 의연한 삶을 살아갔다. 당시 그 곳에는 빵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를 빻는 방앗간도 없었고 의식주에 필요한 물품들을 수송할 수송도로도 없었다. 1785년 전까지는 이 지역에 교회 건물이 하나도 없다가 1790년이 되어서야 지어졌다. 이런 어려운 상황은 인디언들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더욱 위험해졌다. 서부 지역의 초기 정착민들의 모든 무덤은 북미 인디언들이 전쟁용으로 사용했던 살상 무기인 큰 도끼로 맞아 일찍 생을 마감해야 했던 순교자들을 웅변적으로 증언해 준다.
놀랍게도 펜실베이니아 서부 지역에서 첫 번째 부흥이 임했던 때가 바로 나라 전체가 이렇게 엄청난 독립전쟁(1775-1783)에 휩싸인 원시적 전쟁 상태의 한복판이었다는 것은 대단히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이 부흥에 대해 맥밀란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첫 번째 성령의 놀라운 부어 주심이 1781년 12월 중순경에 시작되었다. 이 부어 주심의 첫 번째 모습은 의회가 지정한 추수감사주일 저녁 예배 때 모였던 몇몇 사람에게서 먼저 나타났다. 이런 성령의 부어 주심은 주일 저녁에 또다른 모임을 결정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의 영은 계속 부어졌으며, 이 때부터 주일 저녁 모임은 2년 동안 계속 지속되었다. 주일 밤을 지새우는 것이 일반화 되었고, 그 시간은 전혀 지루하지도 않았다. 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새롭게 하시는 은혜의 포로가 되었다. 성령님의 사역이 시작된 이래 행해진 첫 번째 세례식 때 45명의 신자들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계속해서 의의 열매를 맺었고 교회의 중대한 직책들을 감당하게 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테데우스 도드와 조셉 스미스의 교회에서도 같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도드가 목회하던 교회의 초기 회중은 요새에서 모였고, 1781년 8월에 25명의 신자들이 모여 교회를 조직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45명이나 증가되는 열매를 맺은 경건의 부흥으로 충만해졌다.
서부 펜실베이니아에서 일어난 부흥은 목사에게 더 강한 사역을 요구했다. 그들은 신학교를 세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조셉 스미스와 존 맥밀란 그리고 테데우스 도드 모두 이 사역에 동참했으며, 결국 각각 자신들이 운영하는 신학교를 세웠다. 스미스는 언제나 교회에 유용하게 쓰일 만큼 재능을 갖춘 전도유망한 경건한 젊은 청년을 발견할 때마다, 그 청년을 자신의 가족처럼 대했으며, 학비를 받지 않고 가르쳤고 목회 사역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훈련했다. 서부 개척 초기에는 알려지지도 않았고 이름조차 없었던 이 학교들은 매우 광범위하고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맥밀란은 그의 집에서 신학을 계속해서 가르쳤고, 이런 사역은 ‘신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펜실베이니아 서부 지역 부흥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
다음 장으로 나아가기 전에 서부 펜실베이니아 지역으로 전파된 복음 사역에 대한 몇 가지 최종적인 관찰을 제시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서부 펜실베이니아라는 이 지역은 장엄한 미시시피의 계곡과 태평양으로 향하는 복음전파의 열쇠 역할을 했던 지역이다. 이 곳의 교회들은 깊고도 확실한 기초와 이 지역을 초월한 많은 지역의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과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신앙적 모범들을 제공해 주었다. 더욱이 분열과 혼동 없이 이루어진 이런 확장은 통일된 지도력을 요구했다. 프린스턴 대학의 위더스푼의 학생들은 교회가 성장할 때, 그 교회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서로를 돕는 ‘왕성한 지도력’이 발생한다고 늘 말하던 위더스푼의 말을 듣곤 했다. 바로 그들의 단합과 통일성은 사역이 성공한 근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역사하시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했고 믿었으며 그것을 확신했던 것이 성공의 원인이 었다.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또다른 하나는 그냥 무심히 간과하고 지나가기에는 너무나 중대한 사실이다. 그것은 이 위대한 인물들의 중대한 조력자였던 그들의 아내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남편들과 비교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신앙적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이 여인들은 모두 훌륭한 교육을 받은 세련된 동부의 문화와 관습에 익숙해 있던 여인들이었다. 전쟁 통에 자녀를 잃고 일상에서 당하는 모든 혹독한 고난과 고독에서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비범한 경건’ 때문이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없었다면 이 부흥에 대한 서술은 사뭇 다르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18세기 후반의 힘의 상징이었던 인구의 이동은 또다른 결과를 낳았는데, 후세대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 결과를 매우 슬퍼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서부 개척지의 좀더 싼 땅을 사서 떠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동부 지역의 많은 교회 회중은 점점 감소했고 마침내 벽돌로 지은 그들의 화려한 교회는 적은 수의 사람을 수용하기 위한 다른 건물로 대치되고 말았던 것이다. 옛날 화려했던 예배당과 그 예배당을 가득 메운 회중을 점점 보기 힘들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