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杜稿鍾隸요; 두조(杜操)의 초서(草書)와 종요(鍾繇)의 예서(隸書)이고 창힐(蒼 )이라 전해지고 있다. 하(夏)·은(殷)·주(周) 삼대를 거치며 한자는 거의 완성된다. 서체(書體)로는 진(秦)나라의 예인(隸人 : 하급관리)인 정막(程邈)이 예서(隸書)를 만들었고, 동한(東漢)의 두조(杜操)가 초서(草書)를 만들었으며, 위(魏)나라의 종요(鍾繇)가 소예(小隸)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해서체(楷書體)이다. 篆字體로 쓰인 글은 전한(前漢) 때 노(魯)나라의 공왕(恭王)이 孔子의 사당을 수리하다가 벽 속에서 상서(尙書 : 書經)를 찾아냈는데 옛 篆字로 죽간(竹簡)에 옻칠하여 쓴 것이었다. 공자 사당의 벽 속에서 얻었으므로 '벽경(壁經)'이라 한다. 漆書壁經이라 함은 흔히 '周易'을 말하는데 이는 공자가 周易을 완성하고 점을 쳐보니 훗날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일어날 것을 내다보고 주역을 점서로 만들어 벽속에 감춰두었다는 데서 일컫는 말이다. 않은 원고(原稿)를 뜻한다. 본래 글자는 高 아래에 禾를 붙인 글자로 아직 탈곡하지 않은 볏단을 높이 쌓아둔 모양을 나타냈다. 뒤의 (돼지머리 계)는 손으로 붙잡음을 나타낸 모양이다. 즉 꼬리를 붙잡고 뒤쫓는 것에서 '미치다' 또는 '밑'을 가리킨다. 求(구할 구)의 뜻과 같이 아래의 를 물 그대로 보면 손으로 파서 땅 밑(속)의 물을 찾아낸다는 뜻이 된다. 나무밑을 살펴본다는 뜻과 가 합쳐져 '살피다'라는 뜻이 나오고, 의 잡는다는 의미를 더 강하게 부각시키면 '종, 노예'의 의미가 된다. 그런데 隸書體는 본래 이 서체를 만든 정막의 벼슬이 隸人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