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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선물의 분량대로 22.4,17.
(에베소서 4:4~12)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집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이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 하나됨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다 다른 자리에서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출신도 다르고 기질도 다르고 문화나 이해하는 정도와 모든 성질이 다르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로 만나지는가? 어떻게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하나일 수 있는가? 우리가 하나되려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성격이 좋아서 두루뭉실하게 다 같이 잘 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로서는 안되는 일이다.
몸이 되어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는 말씀처럼 이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우리가 어떻게 하자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적을 두셨기 때문에 당신이 그것을 이루실 것을 믿는 것이지 ‘내가 되는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왜 안되는가, 왜 이것은 안되는가?”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의문이다. 우리에게 소원을 두신 분이 그 일을 행하시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 됨을 지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였다. 힘쓰라고 하고 지키라고 하니까 무엇을 하라는 말인 것 같지만 우리에게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그것을 붙잡으라는 말이다. 성령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다.
성령이 무엇이냐고 설명하라면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이것은 우리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생을 돌아볼 때 내가 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에 널려져 있다.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생각하면 “주의 손에 이끌렸다.”는 고백보다 완전한 고백이 없고 “하나님이 하셨다.” 이상의 표현이 없을 것 같다. 내가 노력해서 무엇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주께서 이끄신 결과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끄셨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령도 마찬가지다. 성령이 무엇인지 우리가 설명할 수 없지만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의 운명을 보고 팔자 사납다고 할 것이고 저주받은 것 아니냐고 할 것인데 우리에게는 그가 우리의 주로, 우리의 운명이며 길이 되셨다고 보인다. 이것은 우리가 똑똑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깨달아서 안 것이 아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성령께서 하셨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성령이 무엇인가? 요한은 성령을 예수의 영, 즉 예수를 알게 하고 예수를 증거하는 영이라고 했고 바울은 교회의 경험을 통해서 교회의 영, 즉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영이라 했다.
우리가 예수를 참된 복으로 알고 우리가 그 안에 포함된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성령이 하신 일이다. 하나될 수 없는 사람이 하나로 만나져서 주의 몸을 이루고 함께 산다면 이를 어찌 우리가 한 일이라고 하겠는가. 하나님이 하셨다고 할 수밖에 없고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성령이 하셨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나타난 결과를 보고 그런 고백을 한 것이고 성경도 그렇게 고백적으로 이 말을 쓴 것이다. 바울은 어떤 영을 알아서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한 말이 아니라 교회를 보니까 ‘아, 이것이 그 영이 아니면, 예수의 영이 아니면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구나.’라고 알게 되었던 것이다.
좀 더 다른 말로 생각해 보면 로마서 8장에는 ‘생명의 성령의 영’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다고 하였다. ‘생명의 성령’이라 했는데 수식어인 것 같지만 사실은 생명이라는 말과 성령을 대치해도 무방하다. 성령은 예수의 생명이다. 예수를 그렇게 살게 하신 생명이다. 왜 그분은 그렇게 사셨는가? 그분을 그렇게 살게 한 속 중의 속이 그리스도의 영, 그분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생명은 상반된 것을 하나로 살아내게 하는 힘이다. 생명은 살게 하는 힘, 서로 다른 것이 만나서 하나로 살게 하는 힘이다. 사람의 출생을 묘사하면서 “사람이 탄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쾌락과 고통의 위기가 수반된 아주 기이한 과정이다.”라고 설명한 글을 보았다. 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은 정말 다른 것이 만나서 쾌락과 고통이라는 상반된 과정을 통해 위기를 거쳐 생명이 탄생하니까 우리에게는 기이한 과정이다. 모든 다른 것을 하나로 만나게 하는 것이 생명이다.
생명력이 왕성할 때는 돌을 씹어도 소화가 된다고 한다. 나는 사춘기 때도 왕성함을 못느껴서 진짜 돌을 씹어도 소화가 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그만큼 소화력이 왕성하면 무엇이 들어와도 내 피와 살이 되게 만들어 버리지 않겠는가. 생명력이 약해지면 먹지 못하는 것이 생기게 되고 몸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생명이 사라지게 되면 한 몸이었던 것이 다 원소로 분해가 되어 버린다.
생명은 그 모든 것을 한 몸이 되게 하는 힘이다. 그 힘이 가장 왕성할 때는 무엇을 먹어도 된다. 나이 들어도 건강한 사람은 기름에 튀긴 불량식품을 늘 먹고 살아도 에너지가 넘쳐서 산다. 무엇이 몸에 좋고 무엇이 나쁜지 가리기 시작할 때는 이미 생명이 정점을 지나서다. 생명의 하나로 묶는 힘이 떨어지면 그렇게 된다.
생명은 정말 귀중한 것이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몸의 서로 다른 지체, 서로 다른 성질들이 한 몸을 이루고 살고 있다. 교회를 이루는 것으로 말하자면 생명의 성령이 그렇게 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은 당신의 집이 되게 하심이고, 하나님의 참된 형상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은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이다.
몸이 하나이고 성령이 하나이다.
우리는 지금 한 몸을 이루기 위해 한 소망 안에서 부름받았다. 한 몸을 이루게 하는 것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이다. 서로 다른 것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부터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부부라도 함께 살면 맞지 않는 것 투성이라서 ‘왜 안맞는가?’ 하고 찾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함께 하고 있나를 생각해 보면 만날 자리가 생긴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4절에는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였다. 몸이 하나고 그 안에 우리를 하나로 묶는 그 영도 하나다.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그렇게 통일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소망 안에 있다는 것, 이것만 우리는 인류 가운데서 너무나 귀한 사람들이다.
생명을 달리 생각해 보면 무엇이겠는가? 처음 목사님이 양문회보를 쓰실 때 “그것 빼면 없는 것이 생명이다.”라는 비유를 드셨다. 카메라의 생명은 렌즈다. 카메라에서 렌즈를 빼면 카메라라고 할 수 없다. 자동차의 생명은 엔진이다. 요즘은 모터가 되기도 하지만 자동차에서 그것을 빼버리면 아무것도 안되는 것, 그것 빼면 죽은 것, 시체인 것이 생명이다. 그것이 빠지면 시체인 것,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0절에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빼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하였다(빌3:8-9).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를 빼면 아무것도 없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로 만나졌고 하나로 모여진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인생에 그리스도가 소망이 되었고 죽고 다신 한 분이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 이 목표와 부르심의 소망만 해도 우리는 한 운명으로 한 배를 타고 항해하는 사람들이다. 배를 타고 항해하다가 뛰어내리면 갈 데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20대에 이 말씀을 듣고 와서 살다 보니까 이것이 내 전부가 되었다. 그러니 지금 와서 뛰어내리면 망망대해에서 어디로 가겠는가? 우리가 다 그런 사람들이다. 한 소망 안에 있다는 것은 한 배를 탔다는 것이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라고 하였다. 주가 한 분이라는 말은 우리의 대표자가 한 분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믿을만한 분, 우리가 진실이라고 말할 분은 한 분이다. 믿음이 하나라는 것은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한 분밖에 없다는 뜻이다. 예수는 우리의 대표자로서 우리 믿음의 대상이다.
세례도 하나라는 말은 우리의 죽음도 하나라는 말이다. 내 죽음이 다르고 네 죽음이 다른 것이 아니라 죽음도 하나다. 이 안에서 우리는 정말 귀한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만 해도 우리는 한 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죽음과 삶에 있어서 대표자는 그리스도밖에 없다. 예수 안에서 완전하게 끝나고 완전하게 산 생명을 보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새로운 생명의 대표자가 되신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은 우리의 근원이 하나라는 말이다. 우리는 한 근원에서 나왔다.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이시다. 아버지 앞에 가면 우리는 다 아들이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가면 우리는 다 당신의 뜻에 딸린 피조물이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만나진다. 그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일하시고 모든 것 가운데 계신 분이다. 아버지께로 가면 다 만나질 자리가 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하셨고 “내가 아버지께로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겠다.” 하셨다. 아버지께로 가면, 근원으로 가면, 십자가로 가면 거기는 거할 곳이 많기 때문에 누구나 있어도 되는 그 자리가 우리에게 열리게 된다. 우리가 다 근원으로 가면 더 근원으로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이 하나로 만나지게 된다.
하나님 말씀의 목표는 영원한 근원으로 우리를 모으는 것이다. 왜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되는가? 하나님 말씀이라야 우리가 다 만나질 수 있는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근원 안으로 우리를 모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귀하다. 요즘은 젊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를 주라고 하는 사람, 예수가 자기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지구의 인간을 통털어서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 제각각이라서 이 사람들이 어떻게 다 만나질지 우리는 모른다.
개신교는 성경 해석을 모든 사람에게 열어놓았기 때문에 만인이 제사장이 되고 모든 사람이 성령의 조명하심 아래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고 그 감동 안에서 볼 수 있게 했다. 그래서 백인 백색이 되었다. 그렇게 개신교가 너무 갈라지는 현상이 생기니까 성공회에서는 ‘예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우리를 변화시켰다는 것 외에는 어떤 정답을 두지 말자.’라고 정하고 지금까지 왔다고 한다. 가톨릭은 그보다 더 진보적이다. 그러니 어떤 것이 맞는지, 어떻게 다 하나로 만나질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의 근원이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를 지으신 분이 하나고 우리의 대표자가 한 분이라는 것이다. 이 안에서 우리는 다 만나지게 되는 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선 함께 한 것이 무엇인가? 4절부터 6절까지는 부부 싸움을 하기 전에 부부가 무엇으로 사는가 한번 생각해 보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7절에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고 했는데 본래는 앞에 ‘그러나’라는 말이 들어간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고 하는 것이 맞다. 앞에서는 우리가 근원이 하나라고 했고 우리가 한 주님, 한 믿음, 한 침례 가운데 있다며 함께 한 부분을 말했는데 7절에는 ‘그러나’라고 하여 각자 받은 선물의 분량이 다르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은혜가 부어져도 각자 받은 선물의 분량이 다르다. 한 피가 흘러서 몸을 하나로 묶고 공급하는데 지체마다 피가 흐르는 분량이 다 다르다. 뇌로 가는 것과 발끝으로 가는 선물의 분량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전에 요한복음을 말씀하실 때 성령을 나무에 흐르는 수액과도 같다고 비유하셨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데 수액이 흘러서 나무를 하나로 있게 하고 열매 맺게 하니까 굳이 비유하자면 성령을 수액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하셨다. 수액은 우리 몸으로 말하면 피가 흐르는 것과 같다. 그런데 몸의 지체마다 선물의 분량이 다르다고 하였다.
줄기세포라는 것을 보면 사람의 생명이 신기하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이 되면 수정란이 세포 분열을 시작한다. 하나인 세포 안에는 다른 것이 없는데 세포 분열을 하면서 이상하게 머리쪽으로 가는 세포는 뇌세포가 되고 간을 만드는 세포는 간세포가 되어서 그렇게 각 기관들이 분화가 일어난다. 그런데 줄기세포는 다르다. 간 세포가 되기로 미리 정해진 것도 아니고 뇌 세포가 되기로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닌데 똑같은 세포가 뇌에 가면 뇌 세포가 되고 폐에 가면 폐 세포가 된다. 그래서 줄기세포를 연구해서 질병을 치료하는 획기적인 치료법이 열리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몸의 조직이 분화되고 나면 뇌세포를 다시 간에 갖다 붙일 수도 없고 간세포를 폐에 갖다 붙일 수도 없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그것이 하나만 없어도 전체가 돌아가지 않는다. 이런 기이한 일을 이루고 사는 것이다.
몸은 서로 다른 지체가 한 몸을 이루고 살고, 생태계는 서로 다른 생물이 질서를 이루고 산다. 이것을 연구해서 나온 것이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조직도 가장 좋은 조직을 만들자면 몸 같은 조직, 생태계 같은 조직을 만들어야 된다며 시스템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생물학자들이다. 사람이 모여서 가장 완전한 조직체가 되자면 생명 같은 것이라야 된다고 해서 나온 말이 시스템이라고 한다. 하나인데 서로 다르고 서로 다르지만 하나인 것, 이것이 신비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아도 한 몸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다 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이고 그리스도의 몸의 비밀이다. 70억 인류가 지문 하나도 같은 사람이 없는데 이것이 지으신 이 앞에서는 다 하나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가야만, 우리가 더 넓게 봐야만 한 사람 한 사람이 꼭 있어야 될 사람이라고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간 속에서 뇌 세포를 알겠는가, 심장에서 어떻게 폐 세포를 알겠는가. 다 있어야 될 자리에 있다. 서로가 서로를 모를 수 있는데 좀 넓혀서 보면 ‘다 있어야 될 자리에 있구나. 하나도 필요없는 지체가 없구나.’라고 알게 된다.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그러면 우리에게 어떻게 은혜를 주시는가? 어떻게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가? 8절에는 시편 68편 18절을 인용해서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다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다. 내가 좋아보이는 것, 나를 빠지게 하는 것,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보였던 그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것을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사탄에게 사로잡혔던 것이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세상 영광에 사로잡혀서 종노릇하던 자들이다. 사탄에게 포로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 자리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세상에 일조하고 지나가는 것밖에 남는 것이 없었다. 성실히 무엇 하나 허튼짓한 것이 없이 살았어도 내 인생의 결과는 세상의 문명을 건설하는데 일조한 것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자들인데 그리스도께서 위로 올라가실 때 사로잡혔던 자들을 다시 사로잡으셨다고 하였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 우리를 다시 사로잡으셨다는 것이다. 위로 올라가셨다는 말은 영광스럽게 되셨다는 것이다.
영광스럽게 된 것을 볼 때 우리는 사로잡혔던 데서 다시 그리스도께로 사로잡히게 된다. 누구도 십자가를 보고 “내가 죽으러 가야지.” 하는 사람이 없다. 죽고 다시 사신 분의 영광이 보여서 우리가 이 자리까지 온 것이다. 처음부터 십자가만 보였다면 다 도망가고 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죽으신 분, 우리가 다 버린 그분, 세상이 버린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참으로 살아있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신 것을 보게 되어 다시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영광이라고 하니까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는데 가깝게 말하자면 우리 눈에 그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영광이다. ‘사람이 아름답구나. 저렇게만 살아도 좋겠다.’라고 보이는 것이다. 나도 그것이 보여서 왔다. ‘저렇게만 살아도 되겠구나. 하나님이 저런 사람을 자기에게로 데려가시지 지옥에 보내겠는가. 교리가 틀리고 앞뒤가 안맞는다 해도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어찌하시겠는가.’라고 보여서, 그 사람의 아름다움이 보여서, 영광이 보여서 왔던 것이다. 그를 위로 올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사로잡혔던 데서 다시 그리스도께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시편 68편 18절을 인용한 것이다. 원래는 포로를 사로잡아서 왕에게 선물로 드렸다는 뜻인데 에베소서 4장에서는 사로잡아서 사람들에게 사로잡혔던 자들을 선물로 주셨다고 하였다. 사로잡은 자들을 교회를 위해서, 교회에 선물로 주셨다는 것이다.
바울은 전에는 뭔가 다른 것에 씌였던 사람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 죽여야 할 사람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사람은 그냥 두면 안된다.’ 하고 체포 허가서를 받아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했고 스데반이 순교하는 것을 보고 거기 자기 옷을 벗어 놓고 “당연하다. 저 인간은 죽어야 한다.”라고 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예수에게 사로잡힌 바 되어 교회에 선물이 되었다. 선물이 되어서 교회를 건축하는데 지혜로운 건축자로 교회를 건축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싫어했던 이 한 사람, 무시하고 버렸던 이 한 사람을 일으키시고 만유 중에 가장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것이 우리 앞에 보일 때 우리는 사로잡히게 된다. 교회에 왔는데 좋아 보이면 계속 오지 않겠는가. 예비신랑 임형준 군이 오늘 처음 왔는데 사람들을 보니 너무 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따뜻하고 반갑다고 했다. 그러면 다음 주에 또 오고 싶지 않겠는가. 어떻게 그렇게 되겠는가. 이 영광에, 아름다운 분에게 사로잡히기에 그분 안으로 오는 것이다.
그분 안에 와 보면 어디서 그런 것이 나오는가? 한 근원이 있는데 그 근원이 십자가다. 왜 이렇게 사람이 좋은가? 왜 이렇게 사람이 아름답고 영광스러운가? 제자들은 그 영광을 보았지만 그 근원을 몰랐다.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했고(요6:68), 영생의 말씀인 줄 알았지만 그 말씀이 어디서 나오는지 몰랐기 때문에 영생의 말씀이 나오는 그 자리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니까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요한복음 7장 39절에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하였다. 그 영광이 보이기 전에는 성령이 그들에게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이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과정을 거쳐서 그 자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물로 주심
9절에는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라고 하였다. 높이 올리셨다고 하고 영광스러워지셨다고 하는 것은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는 것이다.
땅 아래 내리셨다는 것은 가장 비천한 자리에 전시되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 자리에 달려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볼 때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그 낮은 곳으로 내리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높이 올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무엇도 마다할 것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땅 아래 낮은 곳, 이곳이 사람을 지으신 자리다. 흙으로 사람을 지어 생기를 불어 넣으신 그 자리다. 창세기 2장에는 에덴의 동방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셨다고 하였다. 거기 두신 그 자리가 바로 내리셨던 그 자리다.
사람인 자리, 거기는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라는 것 외에 다른 수식어가 아무것도 없는 자리다. 사람으로 사는 것,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신 그 사람으로 사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축복으로 보이면 인생의 모든 의문이 풀리게 된다. 인생에서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 무엇에 사로잡혀도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높이 올리우신 분을 보고 다시 그분의 포로가 되고 그분에게 사로잡혀서 시편의 표현대로 하면 하나님 앞에 선물로 내놓이게 되었고, 에베소서의 말씀대로는 교회의 선물로 주어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와서 보니 높이 올리우신 분은 낮은 곳으로 내려졌던 분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그 자리를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신 것이다.
우리를 사로잡아 교회에 선물로 주셨다. 전에 사탄에게 쓰이던 우리 인생이 다 교회를 위해 쓰이게 되었다.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다 사로잡혔던 데서 사로잡힌 바 되어 교회에 선물로 주어진 사람들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선물이다. 우리 형제는 하나님이 예수의 피값으로 사셔서, 우리를 되돌리셔서 교회에 선물로 주신 것이다. ‘당신은 나의 사랑 주님의 선물’이라는 노래처럼 우리는 선물로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전에 우리는 다 사로잡혔던 자리가 있었다. 그래서 열심히 살았던 것이다. 의사도 있고 교사도 있고 몸을 써서 사는 사람 등 다양한 직업이 있는데 이것은 다 우리를 사로잡았던 것들이고 우리에게 소유의 영광이 보여서 열심히 산 결과였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다시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바 되니까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이 다 교회에 쓰이게 되었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공부하는데 도움을 주고 공무원들은 공시생들에게 자기가 배운 것을 그대로 전수해서 도움을 준다. 배설물처럼 여겼던 것인데 전에 가졌던 그것이 교회에 오니까 다 교회에 선물이 되었다.
바울은 전에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는데 사실은 바울의 모든 것이 교회에게는 선물이다. 그의 지식도, 경험도 선물이 되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것들이다. 성막을 건축할 때 금과 은과 동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다 애굽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광야에 무슨 금이 있고 은이 있겠는가. 애굽에서 가져온 것이 다 성막 건축에 쓰인 것이다. 성막 건축을 감독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바로의 국고성을 쌓고 바로의 창고를 짓는 일에 쓰였던 자들이다. 어디서 그런 기술을 배웠겠는가? 애굽이다. 그래서 “내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냈다. 애굽에서 양육했다.” 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불러냄을 받아서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쓰이게 된 것이다.
우리 안에 귀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떤 모양으로 살았다 해도 다시 그리스도께 사로잡혀서 사는 인생이 되면 그 모든 것이 교회에 선물이 되는 것이다. 설사 감옥에 갈만한 짓을 했던 사람이라도 교회에 오면 그의 인생이 누구에겐가 길잡이가 되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로잡는 힘이 얼마나 큰지를 세상에 알리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살았던 모든 것, 지식과 열심, 살아온 배경을 다 배설물로 여겼지만 그것이 다 교회에 선물이 되어서 교회를 위해 사용되었다. 우리도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이는 선지자로, 어떤 이는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이는 돌보는 사람 목사로, 어떤 이는 가르치는 교사로 부름받았다.
다 잘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다 다르다. 교회 와서 간증은 못하는데 나가서 전도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교회에서 간증을 안하면 입에 곰팡이가 슨다면서도 밖에 나가면 한마디도 전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다 받은 것이 다르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렇게 다른 지체들을 분량은 다르지만 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신다.
나를 이 모양으로 지어 부르시지 않았는가! 나도 나 혼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온전한 사람이 되려고 할 때는 그 길이 얼마나 요원한지 몰랐다. 그래서 늘 좌절했고 안될 것 같아서 또 다른 절망감이 엄습해 왔던 것이다. 에베소서 말씀에 막혀서 ‘이게 무엇인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 무엇인가?’ 하는 절망감에 목사님을 다시 만나게 되고 이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우리를 교회로 부르셔서 교회로 살게 하시고 교회로 완성하는 이 소망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정도밖에 안되고 다른 모든 것에 함량 미달일지라도 ‘나 한 사람이 교회에 있다고 교회가 손해 나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당당하게 살게 되었다. 자유케 된 것이다.
꼭 누구와 같을 필요도 없고 누구처럼 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집을 짓는데 나를 어느 모퉁이에 처박을지 모르지만 집이 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큰 집을 짓는데 우리는 다 모르지만 모두 다 필요하다. 부르신 사람은 다 필요하다 하신다. 이 생각만 하고 살아도 분량이 다르고 역할이 다르지만 귀하지 않은 지체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움
이렇게 불러서 선물로 주시고 여러 역할을 하게 하셨는데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였다. 우리를 온전케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온전케 하신다는 말과 같다. 우리가 어떻게 온전케 되는가? 서로 다름을 통해서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필요해서 서로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몸을 세우자면 다 한 부분이어야 한다. 내가 전체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면 몸이 될 수 없다.
캐나다에 가서 살았던 주택이 조합에서 룰을 정해서 세를 내는 조합주택이었다. 처음 집들이를 하는데 파트락을 한다며 자기가 먹을 것 한 가지씩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었다. 나는 우리 집에서 하니까 불고기도 하고 잡채도 하고 서양사람들이 먹어보지 못한 것을 했는데 집에서 먹던 샐러드를 한 접시 들고 온 사람도 있었고 칩 한 봉지를 들고 온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근사하게 요리를 해서 갖고 올 줄 알았는데 그렇게 온 사람들을 보고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도 거기 대해서 아무도 말이 없었다. 먹던 봉지 하나 들고 와서 내놓는데 처음에는 ‘무시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 있는 그대로 내놓았던 것이다. 마지막에 이사했던 동네에서는 이웃들이 가끔 방문했는데 바로 건너편 사람이 인사하러 와서 자기 집 뜰에서 딴 것이라며 고추 2개와 방울토마토 3개를 들고 왔다.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지만 인사는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알게 되었다. 쓸 만한 것을 갖고 와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마음 표시만 해도 되는 것이 인사다. 몸의 생활도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고추 2개와 방울토마토 3개라 할지라도 그것을 들고 교회에 와서 풍성해지면 되는 것이다.
내가 대단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전체를 아우러야 되는 것도 아니다. 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분량만큼 살아도 부족함이 없어야 안식하는 땅이고 안식을 주는 사회다. 작은 소찬 하나를 들고 와서 뷔페 상에 반찬 하나로 내놓는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도 전체의 풍성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단체적인 하나님의 표현을 원하시는데 우리 몸의 한 부분이 움직일 때도 사실은 온몸이 다 돕는다. 숨을 쉬는 것이 그냥 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폐가 숨을 쉬려면 갈비뼈가 움직여야 하고 횡경막이 받쳐줘야 한다. 숨 하나 쉬는 것도 종합예술이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류마티스에 걸려서 찬 바닥에 자다가 하루는 담이 왔는데 처음 겪는 경험이고 뭔지 몰라서 두드려 달라고 했는데 갈수록 더 심해졌다. 갈비뼈에 담이 오니까 숨 쉴 때마다 아프니 얼마나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평소에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숨쉬는 것 하나도 많은 지체가 받쳐줘서 하고 있는 것이다. 걸음 한 걸음을 걸을 때 근육 하나에 염증이 있어도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된다. 한 지체가 이상이 생겨도 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로 보아 하나이면서도 전부라는 말씀,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지체는 많으나 몸이 하나인 것처럼 그리스도도 그러하다는 말씀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사는 것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인가? 우리는 구속받았고 몸으로 부름받았다. 그러므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함께 한 몸이 되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이다.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이루는데 우리 지체가 거기 부름받은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를 불러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우리 보잘것 없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선물로 주시고 사용하시는 것을 감사드린다.
[ 기 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혼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할 때 얼마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졌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알고 우리를 몸으로 불러서 한 지체가 되고 한 부분이 되고 하나의 잔치상에 한 소찬이 되어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로 단체로 부르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불러 주의 몸을 이루게 하시고 이 일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한 선물로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형제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고 어디에 쓰일지 다 모르지만 하나님의 집에서 다 만나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불러서 이 아름다운 구속 안에 하나님의 집으로 건축되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