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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6회 말씀 395
능력있게 전하는 방법 (고전 2:1-5)
2009-7-5 주일예배 (좋은 교회)
알리바마의 도둑 이야기 아시지요? 동굴 속에 보물이 있는데, 어떻게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동굴에 표시가 있었던가요? 여기 보물있음? 평범한, 너무나 평범한. 그런데, 누가 가르쳐 주었지요? 그 동굴 안에 보물이 있다는 것, 그리고 “주문” 말, ““열려라 참깨”. 그 곳에 가서 그 말을 하니 보물이 열렸지요.
예수님은 동굴 안의 보물과 같음, 평범한. 그러나 그 안에 보물이 있고, 그 “말” 복음의 말을 말하고 믿을 때 들어간다.
예수님이 죽었다 부활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이 사실 앞에, 부활을 믿기가 참 힘들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부활을 계속 증거했다.
그러데 고린도 교회는 부활은 믿고, 성령은 믿는데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가볍게 생각하고, 사실은 망각해 가기 시작했음.
- 영적 신비적 경험: 방언, 예언 같은 성령 경험하니까, 성령님만 생각, 영적인 하늘의 경험만 생각. 땅에서 수고하며 서로를 섬기는 것에 관심은 적어진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도 적어지고, 십자가에 고난받으셨다는 것도 가볍게 생각한다. 또 헬라적인 지혜를, 육체와 관계없는 지혜를 찾는 헬라 문화의 영향, 또 수사적으로 멋있게 말하고, 논리적으로 잘 말하는 것을 말하니, 구체적 한 인물, 나사렛 예수에 대한 생각이 점점 약해진다.
이런 일은 사실은 고난받고 사랑으로 섬기기를 싫어하는 교만, 자기의 유익, 영적 경험을 추구하고 공동체에 무관심한 이기주의, 하나님의 영광에 무관심한 인본주의가 뿌리에 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신앙체험, 능력을 자랑하고, 자기에 맞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모이면서 파벌이 형성된다.
자기 죄에는 눈이 점점 어두워 진다.
이제 성령 받았다, 방언받았다, 우리는 영적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적으로 어떻게 살아도 우리는 영적 세계에 있다. 그래서 창녀에게 가서 같이 자고, 자기 아버지의 첩과도 잠자기를 하는 교인들이 생겼다. 교회의 요즘으로 치면 당회는 치리는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고, “아 우리는 참 관용이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세상 문제는 어떻게 해도 괜찮다고 하면서 교인들끼리 돈을 빌려 주고 받지 못하니까, 법원에 가서 소송을 하고, 세상에 조롱을 당한다. 우리 한국 교회와 교인들의 지금 모습 같다.
이 모든 문제, 영적인 기적체험에 대한 관심, 인간적 지혜의 추구, 교만, 분쟁, 죄, 권징을 시행하지 못함 문제는 많지만, 사도가 준 처방은 한가지. 질병의 증상은 많지만 원인은 한가지, 죄. 성령님이 주신 처방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 다시 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들으면서, 우리 모든 죄와 교만을 너머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님의 도움으로 성 삼위 하나님을 만나 경배드립시다.
고린도전서 1장부터 복습.
사도는 고린도 서신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말하면서 이편지를 시작했습니다. 사도가 축복할 때 하나님은 직접 일하셔서, 성도들에게 은혜 주시는 일을 하시고, 그 결과 성도들에게는 평화가 있습니다. 마음의 평화, 관계에서 사랑이 넘치고, 육체적 경제적으로 축복을 누리고, 힘들어도 감사와 기쁨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를 막는 일이 생겼습니다. 분쟁이 생겼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사도는, 분쟁을 해결해 주기 위해, 서로 참아라든지, 조금만 기다려 보라 든지 이런 조언을 하지 않습니다/고린도 교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다시 전했습니다. 우리 위해 고난 받으시고, 능력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누구도 사람을 자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합니다. 자기 자랑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됩니다.
사도는 고난받은 예수님이 참으로 능력과 지혜가 있다는 것을 세 가지 측면에서 말했습니다. 첫째, 메시지. 어리석어 보이고 약해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원하시니까, 십자가의 메시지가 능력이 있다. 둘째, 멤버, 십자가의 도리를 믿는 사람도 세력없고 학식없는 사람을 교회의 멤버가 되게 하셨으니까,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의 강한 것 보다 강하다. 셋째, 오늘 본문에서 messenger. 사역자, 전도자가 약하고 낮아질 때 성령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다.
첫째, 사도는 우리 교회와 성도도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예수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을 전한다고 선언합니다. 둘째, 약함과 겸손함 가운데서 성령님의 능력의 나타남으로 전도하여, 믿음이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전할 때,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믿음이 먼저 우리에게 모든 사람에게 넘치기 바랍니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인간의 지혜를 더하지 말고 복음만을 듣고 믿읍시다.
1)본문해설
2:1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5년여전에 사도가messenge로서 고린도 교회에 들어갔던 것을 회상합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하나님이 증거하라고 주신 그 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에 어떻게 전했는가를 말합니다.
“내가”는 정확히 “나도”, 즉, 1장 후반부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상적으로 지혜가 없는 사람들이듯이, 나도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 또,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나도, “주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대로 나도, 사도는 자기를 자랑하지 않았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하지 않았다. “아름다움”이란, 딤전 2:2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뛰어난 힘이란 것입니다. 사람의 말의 능력, 지혜의 힘. 능력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말은 “수사학” “유창한 말”을 말합니다. 말과 지혜, 즉 말의 지혜 (1:17), 말 재주, 말 장난, 말의 재미 그런 것에 의지하지 않았다. 물론 말을 잘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지만 그런 인간의 말재주에 의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2절, 원래는 “왜냐하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에 못박힌 것 외에는 아무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렇게 “결심했다”고 말한 것을 보니 바울은 말의 힘, 화려한 표현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교 배경 집안에서 헬라 교육을 겸하여 교육을 받은 바울이니까, 그런 수사학 철학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행 17장에서는 에피쿠레스와 스토와 철학자들과 토론한 기록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1:21에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 미련한 십자가를 통해서 믿는 자를 구원하기로 기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적으로 학식이 많지 않은 사람들을 먼저 구원하여, 아무도 사람의 지혜를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를 구원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증인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인으로, 회개하여 죄사함받고 구원받는 일에 대한 증인으로 세웠습니다. 증인에게는 말을 전해라고 받은 말이 있는데, 그 말을 전해야지 자기가, 아 이렇게 하면 더 멋있겠다, 바꾸면 큰 일납니다. 교회의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전달하고 서술해야 합니다.
무엇만을 전하기로 했다고요? “예수와 십자가에 못박힌 것”.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을, 바로 십자가에 못박힌 그 분을” 교회의 증거는 “무엇”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을 소개합니다.”
2) 사도들의 증거의 모범
사도행전에 나오는 증거에서도 항상 “바로 그분 (TOUTON).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강림 다음에도, 2:23에, 또 고넬로가 믿은 이야기를 강조할 때도, 10:40에도, 사도 바울이 13:16-50 바울의 첫 전도여행의 메시지에도, 바로 그분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들의 복음에는 “그분, 그분. 그분 예수”만을 말했습니다.
먼저 오순절 증거를 봅시다. 베드로는 방언이 온 다음 증거합니다.
행2:22 하나님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기적을 행하심으로 예수님을 증거하셨다.
23. 이 분을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았디
24. 그를 하나님이 살리셨다.
32, 이분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다. 33절 하늘에 높이시고 하늘에 앉게 하셨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입니다. 그래서도 사도 바울도 증인으로서 죽었다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목적어로 사용되었습니다.
33절,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예수님이 주어로서 나옵니다.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이 일, 성령님의 방언과 새로운 일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의 일이 나타나니, 사도들이 증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설명해 줍니다. 성령님은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께 받아서 보내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들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도들이 증거해야 합니다. 오순절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와, 성령님의 오심을 설명하는 것에 집중하고, 38절, 마지막으로 그 이름으로 회개하고 죄 사함 받아서 그러면 성령을 받으라, 생명의 성령을 받으라 초대합니다.
그들은 예수님 이름을 믿고, 성령 받아 새로운 사람,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성도들이 서로 떡을 떼며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를 만들었고, 세상 사람들은 많이 칭찬을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늘어 갔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구원을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 능력의 복음만 전하려 합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복잡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게 주로 복음을 전한 베드로 뿐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 바울도 예수님 그 분만을 소개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 1차 전도 여행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했는지 잘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목적으로 소개합니다. 사람의 지혜, 멋있는 표현이 없이 담백하게 예수님만을 전합니다.
23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6절, 이 복음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27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과 관원들이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고 예수를 정죄하여 죽였다.
28. 이것은 기록된 말씀을 응하게 하셨다.
30. 하나님이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여기까지 목적으로 나온 예수님은, 다시 주어로 나옵니다.
31절, 부활 후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들 앞에 (PROS) 그 분의 증인이라. 베드로와 11사도들이 백성들 앞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다.
32절에,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도,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하던 바나바도, 조상들에게 (pros) 주신 약속을 너희들에게 (pros가 없지만 생략) 전한다. 여기 전한다는 것은 “복음전도한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에게” “조상들에게” “너희에게” 에게 “pros” 전파하는 증인이다.
이 말을 고전 2:1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증거를 전할 때에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계속해서, 행 13:33, 34, 36에서 “그 분을” 하나님이 일으키셨다. 증거합니다. 그 증거를 믿고 43절에 몇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소개할 때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도는 예수님을 전합니다. 괜히 멋있는 말을 해서 사도 바울에게 관심이 쏠릴까 두려워서, 말과 지혜의 능력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오순절 설교도, 13장의 안디옥 설교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부활하신 예수님을 강조하는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예수님, 부활하신 그분”이라 말하지 않고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라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지식인 들 중에는 십자가와 관계없는 예수님을 원했습니다. 부활 승천하여 영적 세계에 있는 예수님, 방언 같은 신비한 경험, 차릿한 경험을 하게 해 주는 그런 예수님을 기대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같은 멋있는 철학을 말할 수 있는 그런 예수님을 원했습니다. 4: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하며” 이런 풍요하고 안락한 삶을 즐기게 해 줄 예수님을 기대했습니다. 자기 지식이나 지위를 자랑하게 해 줄 그런 예수님을 원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신 예수님은 참 거북한 모습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점점 무관심해 졌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예수님을,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다 전했지만, , 바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전했다.
그래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지금 우리가 누리는 영적 은사와 방언, 그런 것은 구체적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 지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은 헬라어로는 과거시제인데, 영어에 현재완료형 present participle 에 해당합니다. 전해 일어난 한 사건이 지금도 계속 효과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2천년 전에 일어난 한 번의 사건이지만, 사실은 계속 십자가에 달리신 그 효과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동입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계속적으로 그 효과를 우리 가운데 내시는 예수님의 일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죄용서의 은혜를 계속 주시는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사도가 십자가의 말을 전하러 올 때 사실은 영으로 예수님이 오신 것이었습니다.
“너희에게 나갔다” 와 비슷한 표현이 요 1:9 “참 빛, 즉 말씀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와서”라고 하는데, 고전 2:1 “내가 너희에게 나가서”와 같은 표현힙니다. 고전 2:4에 “내 말” (logos)인데, 요 1:1에 태초에 말씀, logos가 있었다 같은 로고스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2천년에 세상에 와서 죽었다 부활하여 하늘에 그 몸이 계십니다.
이제는 사도가 사람들에게 올 때, 나가서 예수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을 말할 때, 예수님이 다가오십니다. 사도는 자신의 말과 함께 예수님을 잘 배달해 주어야 하니까, 다른 멋있는 말로, 예수님을 흐릿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도 뿐 아닙니다. 교회는 항상 계속 십자가에 달리신 그 효과를 계속 우리에게 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계 5:5에서 사도는 하늘 보좌에 계신 어린 양 예수님을 보았는데,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여기 “죽임 당한”도 현재 완료형입니다. 이 땅에서 성도들이 죄와 싸우고, 고난받으며 주님을 섬기고 있는 동안, 승천해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도, 십자가의 상처를 간직한 분으로 우리를 만납니다. 제사장으로서 영원한 제사를 우리 죄를 위해 그 죽음의 효과를 적용하십니다. 우리의 고난과 아픔에 함께 참여하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교회가 사도와 함께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교회는 계속 죄사함의 은혜를 누립니다. 죄에게 지지 않고 승리합니다.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승리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 즉 의롭게 하심, 거룩, 구속함이 되셨습니다 (고전 1:30). 오늘도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선지자로서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니까, 교회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을 전합니다. 멋있고 유식한 말을 많이 쓰면 보통사람들은 잘 알아듯지 못하고, 그래서 그들이 구원을 받고, 구원안에서 자라가는 데 힘들게 만듭니다.
우리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을 정직히 소개하고 믿어서 구원얻고, 계속 구원 얻는 사람이 늘어 가기 바랍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도 말의 재주가 없다고, 말주변이 없어서 전도를 못하겠다 걱정하지 맙시다. 말재주가 없는 여러분들은 사도 바울 처럼 전도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을 전하면 됩니다. 사도는 말하는 방법이 아니라, 말하는 내용에 온 정신을 집중하여 전도했습니다. 2절을 문자대로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리신 분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했다. 유식한 말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은 가난하고 힘든 보통 사람들에게 잘 전도할 수 있으니 참 좋습니다.
3) 풍성하게 복음을 전함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신 그리스도만”이라고 해서, 사도가 예수님의 십자가만 전하고, 성경의 다른 가르침은 전하지 않았다. 이렇게 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십자가를 중심 내용으로, 그리스도를 중심내용으로 하지만, 하나님의 전체 비밀, 전체 계시를 가르쳤습니다.
골 2:3에서 사도는 비밀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로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달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사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 하나님의 구원의 풍성함, 성령 안에서 누리는 평화와 기쁨 등 모든 영적 좋은 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 모든 좋은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것이기에 십자가를 강조합니다. 오늘도 교회는 십자가의 복음에 중심하여, 하나님의 전체 성품, 삼위 하나님의 모든 성품, 우리에게 이루시는 모든 구원의 좋은 것을 풍성히, 풍부히 전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신 예수님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아가신 예수님을 배웁니다.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과 만나게 하시는 제사장이신 그리스도 뿐 아니라, 왕이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서, 온 세상 곳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갑니다. 가정에서, 교육에서, 교회에서, 직업에서, 지역사회에서, 정치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의 통치를 나타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이 지난 2천년 동안 서양에서, 한국에서, 이제 온 세계 곳곳에서 확장되어 왔는지도 배웁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금 온 세계 곳곳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지 관심을 가지고 알아야 합니다. 온 세계에서, 우리가 속한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자기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받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자료도 모으고,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철학도, 과학도, 예술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므로 잘 연구하여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좋은 것은, 그 자연적인 것들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사용합니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 당신의 직접적인 행동,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이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서, 그 구원의 능력을 우리 삶의 현장 곳곳에서 전파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믿고, 자랑하고 전도합시다. 말을 멋있게 조리있게 하는 데 집중하다가 그리스도를 잃어버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큰 일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전도합시다.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우리 온 삶을 새롭게 하시는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고 온 삶에서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도록 합시다.
둘째로, 사도는 약함과 겸손한 가운데서,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1) 약하며 두려워 떰
3절에, “내가” , “나도 너희 가운데 거할 때 약하며 두려워 하며 심히 떨었노라” 나도, 1장 마지막 부분에, 십자가의 도리를 믿음 성도들, member들이 약한 사람이듯이, 나도 너희들 처럼 약한 사람이 되었고, 두렵고 떨림이 있었다.
1-2절에서 바울이 지혜의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 결정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약한 것은, 바울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 외적인 위험, 핍박, 매일의 두려움 등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바울은, “내가 처음 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갈 4:13). 육체의 약함이란 육체의 질병을 말합니다. 병 가운데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육체적 질병은 고린도 후서를 쓸 때도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 질병을 낫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예수님은 “나의 은혜가 이미 너에게 족하다. 네가 약할 때 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난다”하시면서 병을 고쳐 주지 않았습니다.
두렵고 떨림이란 대개 하나님의 크신 능력 앞에서 느끼는 공경하는 마음에 쓰이는 표현입니다 (3출 15;16 창19:16)-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들의 두려움, 바울에게: 고후 7:15 디도를 두렵고 떨림으로 영접, 빌 2:12, 엡 6:5 종들아 두렵고 떨림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복종하라). 그러나, 바울은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처음 고린도에 들어가 1년 6개월 동안 비교적 오랫동안 머물려 전도했는데, 외부적인 협박 때문에 상당히 실제적으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반, 주님이 직접 환상으로 나타나서, 행 18:9 “바울아 두려워 하지 말고 잠잠치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렇게 격려해 주셨습니다. 고린도를 떠날 때도 바울을 향해 유대인들이 다들 소동을 일으켜서, 총독에게 끌고가서 재판을 받다가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대 사도도 몸은 쇠약하고 외부적인 위협 때문에, 아마 두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잠못이루는 밤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 두려움은 단지 죽음의 두려움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임무의 중대함 때문에 오는 부담감도 있었을 것이고, 크신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니다. 어쨌든 상황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영웅과 같은 담대함을 가장하지 않았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 처럼 자신은 “인생은 어차피 고난인 걸”하면서 고통을 느끼지 않거나, 고통을 그냥 즐기려는 금욕주의적 길로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한 사람으로 아파하고, 두려워 했습니다.이런 겁쟁이 바울?
5세기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의 중심 교회 소피아 교회에서 목회했던 존 크리소스톰 목사님은 바울을 칭찬합니. “그도 두려워 하였다. 아주 두려워 했다. 왜냐하면 그는 바울이었지만, 그도 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에 대해 비난할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연약성을 비난해야 할 일이다. 이것은 바울이 죽음과 채찍의 두려움 가운데서도 확고부동한 목적을 가졌기 때문에 칭찬할 일이다. 두려움 가운데서도 자기의 승리의 관을 가지기 위해 계속 달려갔다. 어떤 위험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세상을 청소하는 일을 계속했다. 바다와 육지에 복음의 씨를 뿌리면서”He did fear, and dreaded them excessively;
for though he was Paul, yet he was a man. But this is no charge
against Paul, but infirmity of human nature; and it is to the praise of his
fixed purpose of mind that when he even dreaded death and stripes. because being in fear, ….. he so ran as
ever to keep his crown; and gave not in for any danger, in his task of purging
out
사도 자신의 말을 통해 왜 이런 고난과 두려움 가운데 복음을 전하게 된 이유, 목적을 들어봅시다. 4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바울은 자신이 두려움, 고생을 너머서, 자신의 삶의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관심을 돌립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 “내 말, 내 전도함” 내가 하는 것이다.
“말”은 1:18에, “십자가의 도”가, “도”와 같은 말, 로고스입니다. 나의 말은, 십자가의 말,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나의 전도는 1:21에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 전도의 내용 미련한 십자가를 말합니다. 내가 말하고 내가 전하지만, 그것은 나의 감정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육체적 약함이나 두려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강함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지혜나 어리석음. 무엇이든지 내가 아니라. 십자가, 내 말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내 말은, 예수님이 하시는 십자가의 일이요, 하님께서 하시는 십자가의 일입니다.
그래서 내 말의 내용이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듯이, 내 말을 하는 방법도, 그 효과도 하나님이 하신다. 그 효과를 “지혜의 권하는 말”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 으로 전했다. 지혜의 말로 하는, 말재주, 말솜씨로 하는 그런 설득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의 나타남으로 했다.
나타남은 증명 (demonstration)인데 고대 수사학 용어로서 말의 “권함” (persuation)과 대조가 됩니다. 고대 수사학에서도 확실한 근거를 내보이는 것을 나타남이라고 하고, 내용이 없이 그냥 의견을 단순한 말재주로서 사람들에게 설득시키는 것을 권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이 용어를 빌려서 쓰면서, 사람이 하는 말과 지혜 수사는 어느 것이나 구원문제에서는 “권함”이요 인간의 의견에 불과하다. 인간이 구원받도록, 십자가를 믿고 구원받도록 하는 확실한 증명이나 근거는 오직 성령 하나님에게 있다. “성령과 능력의 증명” 이라 문자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행하시는 증명만을 사용했다고 고백합니다.
성령증명범입니다.
이것은 논리 증명법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증명법입니다.
사도행전 2:22”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증거가, 고전 2:4의 “나타남”과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를, 증명된 (나타나져) 사람, 즉 하나님으로부터 (apo) 너희에게 와서 (eis) 능력, 기적, 표적으로 증명이 된 분을 너희도 안다.” 네, 하나님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증명을, 오순절에, 사도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다시 생각나게 하고 있습니다.
그후 사도들은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증명법으로, “성령과 능력의 증명” 나타남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약함과 떨림과 두려움 가운데, 사람의 말재주가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만 쉽게 말할 때, 성령님이 나타났고,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증명은 문자 그대로 나타남입니다. 성령님이 나타나시는 것, 성령님께서 능력으로 일하시는 것, 그것이 사도가 할 수 있는 설득력의 힘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믿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내용, 실상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사람들이 구원을 받도록 이끄는 설득하는 힘은 성령님의 능력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기적”으로 해석하는 주석가도 있습니다. 실제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기적이 일어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자, 1:22에서, “유대인은 표적, 기적을 구하지만,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전한다”고 하면서 표적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기적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살전 1:5,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가운데 된 것이니”라 합니다. 성령님께서 일하신 가장 큰 증거는 고린도 교인들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삶의 변화에 있었습니다. 사도가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께서 불러 주셔서 강한 확신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사실을 나를 위한 것으로 발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일을 듣고 알고, 강하게 확신하며,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살전 1:7 “주를 본받는 자가 된 것” 1:9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마음의 큰 확신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사는 것, 예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로 이어 졌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서도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의 가장 핵심은 그들의 믿음의 강한 확신과 회개와 예수님 닮아 가는 새로운 삶의 변화였을 것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방언과 예언과 같은 그런 초월적 은사도 나타나 성령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전도하는 바울은 자신의 용기로도, 말의 실력으로도 이런 일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을 인정합니다. 오직 성령님이, 하나님이 당신의 결정으로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바울은 하나님이 하시니 가만히 있습니까? 하나님이 일하실 때 바울은 땀흘려 수고 했습니다. 편지를 쓰고 있던 “바로 이 시간까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또 수고하고 친히 손으로 일하며” 힘껏 복음을 전하며 수고 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많은 수고를 하지만, 다만 자기가 만든 지혜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그대로 비밀을 전했고, 그 말씀대로 충실히 살았습니다.
그 결과, 5절에,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도의 복음을 들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사람들의 지혜롭게 하는 말에, 인간의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하나님이 능력으로 일하심을 말합니다. 사도들과 함께 성령께서 능력으로 일하실 때, 그 능력은 보통사람들의 마음에 정착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믿음은 사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일하심에 있게 하려 함이라.
이 시대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야 할 시대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증거할 시대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을 하나님께로 얻을 시대입니다. 우리 시대에 성령의 나타남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서 나타납니다. 성령님을 의지하여 예수님을 증거할 때, 확신이 우리가운데 일어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들,
우리시대에 성령의 능력은, 크리소스톰, 사랑의 기적입니다. 기적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의 기적에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 다시 십자가의 순수한 메시지로 돌아 가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사람의 지혜 이상의 말이 나타나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만 전하도록 합시다. 우리 시대에 말 이상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곳곳에서 사랑으로 섬기고, 사랑으로 희망을, 사랑으로 웃음을 주는 기적이 일어날 때입니다. 우리의 삶을 보고서 사람들이 과연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알고 싶다 하며 주님께로 나올 것입니다.
여러 핍박 가운데서도, 고생과 굶주림 가운데, 성령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건강이 나쁘다면, 경제적으로 심히 힘들다면 이제 성령님이 능력으로 나타날 때입니다. 애매히 고난받으며 두려워 심히 떠는 일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 성령님의 큰 능력이 나타날 때입니다. 이 힘든 일과 고난이 끝난 다음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 힘든일과 고난을 통해 성령님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전도해야 한다면 바로 이 때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기적을 보여 주어여 한다면 바로 이 때입니다. 바로 지금도 일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님을 의지하여 입을 엽시다. 손발을 움직여 사랑을 실천합시다. 하나님은 능력으로 성령님은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열려라 참깨” 그 “예수 십자가에 죽었다 부활하셨다” 이 말은 모든 하늘과 땅의 보물을 얻는 비밀어입니다.
우리 모두를 통해, 십자가의 복음이,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 환히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