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가을 들녘이 황금색으로 변화합니다.
풍성한 풍년입니다.
큰 탈 없이 벼농사는 잘 될 듯합니다.
한편으로 근심도 큽니다.
땀으로 지은 농사가 제대로 대접을 못 받으니...
오늘은 '세계 이주민, 난민의 날'이기도 합니다.
현대 인도주의의 국가들 중에 다문화 가정을 가진 국가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내년도 국가 예산중에 다문화에 관한 예산이 많이 줄였고, 구미시에서도 다문화 가정에 관한 예산이 많이 깎여 줄었다고 합니다.
또 구미시에 있는 다문화 가족들과 다른 종교에 위탁되어 있는 사업들도 많이 축소되어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보다 더 가난한 이들인 이주민과 다문화 가정, 난민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어제 제가 경제 진흥원에 가서 어떤 분에게서 E, M (봉생)에 관한 말을 들었습니다.
칠곡 석적에 사시는 분인데 그분이 살던 아파트에서 어느 날부터인가 심한 악취기 나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그분이 살던 아파트에서 악취가 많이 발생하자 아파트에 살던 많은 주민들은 불쾌하게 느끼고 악취를 잡지 못하여 집 값이 계속 떨어지자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지난번 저의 E, M(봉생이)에 관한 강의를 듣고 그곳 주민들에게 우리 E, M을 사용할 것을 건의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 주민이 한 마음으로 한 뜻으로 사용했더니 아주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악취 제거!"(신자들 답변)
그래요 바로 심하게 나는 악취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심하게 나는 악취가 사라지니 집값이 안전되고 주민들이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를 내겠습니다
"우리 봉생이를 사용해야 될까요, 사용하지 말아야 할까요?
"사용해야 합니다"( 신자들 답변)
세상이 돌아가는 현실이 너무나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강대국이고 선진 국가인 러시아가 병력 부족으로 동원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동원령을 피해 국경 밖 다른 나라로 도망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만, 만약 우리나라에도 이 같은 동원령을 내린다면 저는 도망가기보다 붙잡혀 가야 할 것 같습니다.(군종 신부님 대령 예편으로) (신자들 웃음)
아무튼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더 이상 번지지 않고, 인명 피해가 없이 잘 마무리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지금 21세기에는 아주 많은 반론이 있는데. 한 개인과 , 군 장성들을 잘 이해하고 그 상황들을 극복해야 하는 일이 정말 아주 많습니다.
제1 독서 아모스 예언서 묵상입니다.
아모스는 기원전 722년인 2800~2700여 년 전의 예언자 입니다.
이때에도 하느님을 무시하며 살던 이들은 배부르고 등 따스하게 살기를 바랐고 또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얀 상아로 아름답게 장식된 침대를 사용하고 안락한 의자에 앉아 포도주를 마시고 즐기며 향유롭게 살았습니다.
"잘했지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만생이 편안하다는 일념으로 향기로운 포도주를 마시고 고기는 송아지를 잡고 어린 양고기 등 부드럽고 맛 좋은 고기만 먹고살았습니다.
"잘했지요?"
"우리 입에 딱 맞지요?"
"우리들도 먹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신자들 조용)
저도 가끔은 맛 좋은 포도주에 한 잔에 양고기는 6개월 미만의 아주 부드러운 어린 양고기와, 송아지 고기를 먹고 싶습니다.
서울에 있는 유명 맛집에 가면 그런 종류의 부위를 골라 요리로 사용하여 돈 많은 이들이 즐겨 먹고 있습니다.
그건 것을 보면 2천7, 8백 년 전의 사람들과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아모스 예언자께서 이야기합니다.
제발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렇게 살면 불행합니다.
망합니다.
하고 그 당시의 부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불행하여라.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이방인의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상아 침상, 안락의자, 어린 양고기, 가무를 즐기는 자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 마시며 즐기며, 향유를 바르고 희희낙락하는 요셉의 집안은 망한다.
그들이 제일 먼저 끌려가 끝장이 나니 제발 그렇게 안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그렇게 살면 결국에는 불행해집니다,"
라고 아모스 예언자가 했으나 그 당시의 사람들은 예언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뿔뿔이 다 흩어지고 포도주 잔을 잡았던 손은 노예의 손이 되었습니다.
노예의 손이
예언자의 말씀처럼 정신을 차리십시오. 라고 충고하는 그런 1독서의 내용입니다
제2 독서 티모테오 1서 말씀 묵상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전에는 바리사이가 아닙니까?
바리사이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 이것이 축복이다.
죽은 뒤에 천국으로 가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살아 있는 동안 잘 사는 것이 큰 축복을 받은 것이고, 못 사는 것은 저주를 받은 것이다.
이런 사고를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천국이고 하늘 나라고 다 필요 없다.
현실에 충실해라 하고 그런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던 바오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신도들을 만나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티모테오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의로움과 신심, 사랑과 인내, 온유를 추구하여라.
특히 미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라
빌라도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지시를 합니다.
계명을 지켜라.
바오로 사도는 사고나 의식, 생활을 다 바꾸어 버립니다.
바꾸지 않고서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 묵상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라자로와 부자인 비유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복음에서는 죽은 자와 나자로의 비유를 통하여 바리사이들의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이름은 없습니다.
그가 누구인가 밝히지는 않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부자들은 마음속 아무 뜻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 부자입니다.
구체적인 신앙이 없습니다.
그러나 라자로는 구체적인 사람입니다.
즉 가난한 사람, 그의 몸에는 종기가 있고, 배가 아주 고픈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자이면서도 라자로로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내 자신은 부자이면서 또한 가난한 라자로입니다.
우리는 항상 동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세에만 집중하며 살아간다면 부자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현세 안에서도 하느님의 도움을 절실하게 느낀다면 라자로가 됩니다.
라자로라는 말은 하느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을 절실하게 바라며 이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기 전에 그 삶을 바라면서 일도 열심히 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삶이 나쁘게 살아서 불행하다는 이는 아닐 것입니다,
그냥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결론이 무엇입니까?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걱정 없이 사는 것, 그것이 부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있어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그래요?"
"어제는 있었고 오늘은 없고 그렇습니까?"
"그럼 내일은?"
오늘 강론은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높은 산이 있으면 골이 그만큼 깊어지는 것처럼 이쪽 삶을 추구하면 그만큼 하느님과의 갭은 점점 커지겠지요?
아무튼 우리는 라자로처럼 살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것을 아는 곳도 있으나 또 궁금해지는 것도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이 두 가지 현실과 깨달음의 진리의 세계
그 갭을 우리는 메워 나가는 것이 사도 바오로의 강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의로움을 간직하고 심심과 믿음 사랑과 온유함을 추구하라는 것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합니다.
부자가 향유하는 것은 축복입니까?
아니면 불행입니까?
현세에서는 누구나 바라는 것이고, 안락하고, 평화롭고 잘 나 보이고, 남 부럽고, 행복하고,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말할 수 있는 온갖 것들이 풍부한 것입니다.
이 삶이 불행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사람 기준으로는 그러합니다.
그 부자 곁에는 부자도 어쩔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자기들 책임도 아닙니다.
그들이 죄를 지어 저렇게 불행한 것입니다.
종기 투성이 구약의 욥도 그렇게 불행을 겪었습니다.
나 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향유할 뿐입니다.
라자로는 가지 이름처럼 하느님께서 도우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돕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절실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 의탁하고 기도하고 신심 깊게 살다 죽습니다.
우리는 향유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안에서 향유하고픈 마음과 생각을
언제나 머릿속에서 생각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아멘
2022년 9월 25일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주중 미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