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안면 만음리 책바위 부근의 길안천. 자갈밭에 엎드려 골부리를 줍던 아주머니들은 추위와 함께 다 떠나고 그 자리는 한가로운 백로가 차지하고 있다.
진덕문(進德門)을 지나면 읍청루가 시원스레 나타난다. 높은 누각에 앉아 시문을 짓고 대담을 하던 묵직한 옛 선비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토록 시끌벅적한 난리통같은 시국에....마른 가지만 남았으나 봄에는 절개의 홍매화가 만발하는 아주 아름다운 서원이 묵계서원이다.
묵계서원(默溪書院)은 보백당 김계행(寶白堂 金係行 1431~1517)과 응계 옥고(凝溪 玉沽 1382~1436)선생을 봉향하는 서원으로 숙종 13년(1687)에 창건되고 고종6년(1869) 훼철 되었다가 1997년에 유림에 의해 복원 되었다.
저기 강건너 첫번째 얕은 골짜기에 만휴정(晩休亭)이 있다. 오래전 요~아래 아스팔트의 도로가 열리기 전에는 여기 진덕문 코앞으로 비포장의 도로가 먼지를 풀풀 날리기도 했었는데 약간 가파른 언덕위에 있는 관계로 여름에는 너무나 시원한 서원 마루위에 벌렁 드러누워 쉰적도 있다. 지금은 농로겸 마을길로만 이용되고 있어 다행이다. 여기 묵계리에 구한말 문장가라고 자처하는 영천사는 선비가 어느 여름날 안동으로 들어 가는 길에 비를 피해 어느집 처마밑에 서 있었는데 그는 시(詩)짓기를 하자고 마을 사람들에게 운자를 떼었다. 마침 이마을 농부들도 누런 흙탕물이벤 바지를 입고 비를 피해 들어왔다. 운자를 떼기가 무섭게 농부들도 저마다 시 한수씩 읊어 내었다. 선비는 놀라며 농부들도 저마다 이런 훌륭한 시를 읊으니 여기가 바로 문한(文翰)이로구나 하면서 이런 조그만 골짜기도 이러한데 안동이란 도대체가 어떤 곳이란 말이냐 하면서 기(氣)에 눌려서 되돌아가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저기 폭 10여m의 좁은 다리 아래에는 커다란 글씨로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라고 음각해 놓았는데 보백당은 선명하나 만휴정천석은 오랜 세월의 물길에 닳아 띄엄띄엄 알아 보기가 쉽지 않다. 물이 고였다가 한두바퀴 휘돌아 떨어지니 송암폭포가 된다. 이 뒤로도 농로는 나 있으나 지금 선 자리는 마치 커다란 멍석을 펼쳐 놓은 것처럼 너른 바위이므로 차를 돌리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미끄러워 굉장히 위험하고 잘못하면 진짜... 다치니 입구에서 주차를 하고 걸어 오는게 상책이다. 언덕밑의 입구에 그런 안내 간판이 없다는게 좀 아쉽다.
만휴정은 보백당이 만년을 보내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이다. 옛 선비들의 꿈은 이처럼 계곡에 정자를 짓고 만년을 보내는 것이라 하는데...묵계서원도 그러 하지만 만휴정도 언제 어느때고 활짝 문을 열어놓고 있어서 마음에 썩 든다. 오히려 사람이 드나들어야 온기가 느껴지고 살아있는 느낌을 받는다. 어떤 조그만 서당도 가보면 녹이 잔뜩 오른 자물통이 체워져 있고 잡초가 무성해서 지뢰밭에 들어온듯 조심조심 정숙보행을 하는데 이렇게 활짝 문을 열어놓고 있으면 후손뿐 아니라 그 조상들도 괜히 커보인다.
송암폭포라는 이름을 가진 20여m 높이의 폭포와 용추. 맑고 깨끗함은 비할데 없으나 시기적으로 수량이 부족해 폭포 아래에서도 떨어지는 물소리가 촬촬....조용하다.
"내집에 보물은 없다. 보물이 있다면 오직 맑고 깨끗함 뿐이다"
"몸가짐에 근신하며 사람을 대할 때 충심으로 후하게 하라"
라는 보백당의 유훈과 명현들의 시판, 중수기등 현판이 여럿 걸려있다. 보백당(寶白堂), 자체가 청백(淸白)을 보물로 삼는다는 뜻이며 실천적인 삶을 살아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의 검찰총장격인 대사간의 보백당은 푸르기가 청옥같고 깨끗하기가 백옥을 닮았다고 하였다. 만휴정의 주변과 너무나 어울리는 모습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