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론
접힘과 펼침, 보편과 특수의 물들임
임지훈
윤석산 시인은 일찍이 여러 차례 천도교의 교의와 수운 최제우의 사상에 대해 살핀 바 있다. 그 중 천도교의 자연관에 대해 쓴 글에서는 수운 선생의 주문 해의를 살핀 바 있는데, 이 가운데 ‘시천주(侍天主)’의 ‘시侍’에 대한 수운 선생의 해의를 살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시(侍)’란 신령(神靈)이라는 한울님 마음을 지니고, 기화(氣化)라는 한울님의 실천적 삶을, 각지불이(各知不移)를 통하여 옮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본다면, 시천주(侍天主)라 곧 내 안에 자리한 참주체인 영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한 치도 그 뜻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이라 하겠다.
물론 이때의 ‘시侍’란 모든 존재의 내면에 존재하는 ‘귀한 분’이자 나의 주체로서의 한울님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문학의 형식으로서의 ‘시詩’와는 다른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윤석산 시인이 가진 ‘시侍’에 대한 마음이 흡사 시인의 ‘시詩’에 대하는 태도를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가령, 그가 수운 선생의 해의를 다시금 풀어내며 강조하고 있는 바란 자기 안에 존재하는 참됨에 대한 성찰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그 참됨이란 단지 앎의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의 확장성을 갖추고 있다. 자기 안의 참됨에 대한 앎은 ‘나’라는 한 개체에 대한 앎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유기성, 혹은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우주에 대한 앎으로 자연스레 확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됨에 대한 앎은 곧 균형과 조화에 대한 앎과 실천으로 이어지며, 이는 곧 개인의 삶의 태도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 ‘시侍’에 대한 앎이란, 곧 전통적인 서정시의 기치와 통하지 않는가? 예컨대, 자연을 제재 삼아 그 안에 흐르는 유려함을 통찰하고 이로부터 인간 존재의 내면에 잠든 고아한 정신을 일깨우는 작업이 곧 전통적인 서정시의 시적 태도이지 않았는가. 마찬가지로 자연이 부러 힘을 주지 않고 모든 요소가 일체의 흐름 속에 자신을 맡기고 참됨을 실천하듯이, 오늘 우리가 만난 윤석산의 시 또한 인위적인 기교나 부러 늘려 쓰거나 줄인 흔적 없이 일상의 평온한 언어로 자기 존재의 모습을 풀어내고 있다.
조금 더 면밀하게 살펴보자면 윤석산의 시는 개인으로서의 한 존재의 경험이 눅진하게 녹아든 모습을 보여준다. 많은 시편이 특수한 일회적 상황을 가정하지 않고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현상, 사물 따위를 시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반복적인 일상성이란 객관적인 정의가 아닌 한 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한 언어를 통해 표출되기에 가장 보편적인 순간 속에 피어나는 개인의 특수한 정서가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마을버스는 엄마의 직장이다.
왼 종일 버스에 앉아 마을 곳곳을 돌고 돈다.
운전석 등걸에는 출퇴근 배낭 덩그러니 걸려 있고
유리창 왼편에는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두 남매의 사진.
덜컹거림 속 간간이 돌아보는
엄마의 왼쪽
뺨, 하루의 피로, 노을 속 붉게 잦아지고 있다.
- 「마을버스」, 전문.
표현하자면 보편 속에서 드러나는 특수성의 양상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가령 「마을버스」라는 시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은 위와 같은 형세로 그려지고 있다. 시적 대상으로서의 ‘마을버스’는 보편적이면서도 평온한 개인의 소박한 삶을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시적 공간으로서 오묘한 균형감이 깃든 덜컹거림을 전달한다. 그리고 이 보편적인 공간을 객관적인 시선이 아닌 “엄마”의 자식이라는 주관적 시선으로 관찰함으로써 시적 대상에는 특수한 색채가 물들여진다. “엄마의 왼쪽/뺨”과 하루의 끝을 상기시키는 “노을”이 교차되는 모습이란 그 자체로 보편성 속에서 피어난 특수성이 다시금 보편성을 물들이는 자태라 할 법 하다.
그런 윤석산 시인의 시를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시의 언어로 말해보자면, 일상의 세밀한 관찰로부터 길어 올려진 시적 대상과 그 안에 새겨진 상징성을 포착하여 간결한 언어를 통해 깊은 여운을 전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인 언어로는 윤석산의 시가 가진 특수한 정서를 온전히 포착하고 있다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이자면, 윤석산의 시가 가지는 핵심적인 개성은 상반되는 요인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절묘한 균형감이 아닐까 싶다. 그건 우리가 일상적 공간으로서의 “마을버스”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덜컹거림이 전달하는 오묘한 균형감과도 같은 것이면서, 외부로 나가는 “버스” 속에서 가장 내밀한 “엄마”를 느끼는 일이며, 타인에게서 나의 경험을 조우하는 일로, 궁극적으로는 인간 존재 일반의 보편성 속에서 나의 특수성이 다시금 셈해지는 동시에 나의 특수성으로 하여금 보편성을 다시금 헤아리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누라가 무어라고 잔소리를 해대도
그저 웃으며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맞아요.
그런 큰 사람,
한 번도 돼보지 못했다.
- 「큰 사람」, 전문.
위에 제시한 「큰 사람」에서도 이 절묘한 균형감은 더욱 깊이 있는 감정을 선사하고 나누는 일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단지 상실감을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상실감이 일련의 독특한 정서적 흐름을 지닐 수 있게 만드는 시의 핵심은 ‘나’의 주체성과 타자에의 순종이 이루는 절묘한 균형감에 있다. “마누라”의 말에 “그저 웃으며/그래 당신 말이 맞아, 맞아요”라고 말하는 화자의 모습이란 흡사 면피를 위한 순종에 불과해 보인다. 하지만 그 순종의 대상이 ‘나’의 상실한 대상이라는 점, 그리고 ‘나’의 순종이 마지막 구절인 “그런 큰 사람, 한 번도 돼보지 못했다”가 이야기하듯 끝내 현실화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겹쳐질 때, 주체성과 타자에의 순종은 기묘한 균형상태에 이른다. 예컨대 그 순종이 ‘나’의 실현되지 못한 의지임으로써, 그것은 순종이 아닌 타자를 향한 사랑에의 순응으로 모습을 바꾸는 것이다.
우두커니 밥상머리에 앉아
무심코 젓갈을 들다, 그만 한 쪽을 떨어뜨렸다.
그렇지, 짝 없는 젓가락 하나만으로는
무엇도 잡을 수 없지
마누라를 잃은 사람,
젓가락 하나만 덩그마니 들고 망연할 뿐이다.
- 「젓가락질」, 전문.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조망되어야 하는 균형점은 한 인간이 가진 상실감을 극적인 비관이나 슬픔의 태도로 포장하는 대신 절묘한 슬픔의 언어로 풀어냄으로써 쓸쓸함의 무게를 필요 이상으로 강요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겠다. 입말처럼 편안한 언어로 솔직하게 구사되는 시적 화자의 내면은 ‘나’의 상실을 절대화하는 대신 조금 누그러뜨린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데, 역설적이게도 이 한층 누그러진 언어를 통해 인간의 유한성과 시간에 대한 비가역성이 존재의 쓸쓸한 실루엣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부러 힘을 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포착한 일상의 한 토막이 윤석산 시인의 자연스러운 언어로 풀어짐으로써 잔잔한 슬픔이 주체의 쓸쓸함으로부터 피어오르는 것이다.
아직 한 겨울인 듯 쌀쌀한데
여지없이 배달이 된다.
옷깃을 파고드는 찬바람 사이를
헤치고 현관문 앞에 당도한다.
비대면이므로 문 앞에 놓고 갑니다.
반짝 문자가 뜬다.
굳게 닫힌 문틈 비집고
햇살 한 움큼 조심스레 떨어진다.
- 「입춘」, 전문.
위에 제시한 시에서도 화자는 반복되는 일상의 한순간으로부터 시적 성찰을 전개하고 있다. 이 시는 한 겨울 현관문 앞에 당도한 누군가의 택배로부터 봄의 도래를 느끼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안과 밖의 균형감이다. 화자는 분명 안이라는 공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가 있는 것은 안과 밖이 겹치는 균형 지대로써의 문지방이고, 그 문지방에서 화자는 비로소 타인의 존재를 실감하는 동시에 자연의 흐름과 마주한다. 그런 의미에서, ‘안’에 있는 화자와 그런 화자의 ‘안’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바깥이며, 그러한 바깥의 의미를 포착하고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은 화자의 공간인 ‘안’과 그의 내면인 ‘안’의 존재 때문이다.
얼핏 대립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안’과 ‘밖’이라는 두 요소는 이처럼 윤석산 시인의 시에서 경계짓고 구획화되어 상호간 대립을 통해 긴장감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절묘하게 얽히고 또 나누어지는 가운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 가운데 ‘안’과 ‘밖’은 대립적 관계로써 의미화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미를 형성하고 균형을 이룸으로써 일종의 관계성을 성립할 수 있게 만든다. 이러한 ‘안’과 ‘밖’의 대립 또한 앞서 살펴본 시편들에서 나타났던 두 개의 서로 다른 요소들의 절묘한 균형 관계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셈이다. 더불어 이러한 두 요소의 상호적 관계란 곧 앞선 시에서 나타났던 보편성과 특수성의 상호적 관계와도 같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눈 뜨는 아침이며 문득 찾아와서는
펼쳐놓는
무궁의 시간
광활한 우주, 또 하루를 걸어 나간다.
- 「하루」
존재가 마주하는 한 폭의 시간에 대해, 윤석산 시인은 「하루」라는 시를 통해 위와 같이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밤새 접혀 있던 존재의 시간이 다시 펼쳐져, 깊고 찬란한 무궁을 펼쳐내는 아침. 존재는 다시금 광막한 세계 속으로 걸음을 옮긴다. 존재는 그렇게 접힘과 펼침을 반복하며 세계라는 무대 위를 유랑하며 광활한 세계 속의 또 다른 광활함이 되어간다. 어떻게? 마주한 세계를 의미화하며, 그것을 때로 언어로 펼쳐내며, 펼쳐진 의미 속에서 함축과 전이를 반복해 마침내 시적인 순간에 도달함으로써.
헤아릴 수 없이 휘날리는 그 빽빽한 밀도
현란함으로, 우리는
그러나 늘 아득하기만 한
우리를 가둔 그 순백의 시간.
그래서 우리 모두 황홀한 방황일 뿐이네.
- 「눈보라」, 전문.
그 순간 한 인간의 언어는 비로소 보편적인 세계 속의 특수한 시선으로 변신하고, 그러한 화자의 관점 속에서 세계의 보편은 녹아들어 다시금 펼쳐진다. 언어로 접힌 세계가 도리어 세계의 광막함을 다시금 펼쳐내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한 윤석산 시인의 작품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아닐까. 그리하여 그가 언어로 펼쳐낸 ‘시詩’의 세계는 ‘시侍’의 세계와 맞닿는다. 시적 언어가 세계의 접힘을 펼쳐낼 때, 우리는 그 자리가 바로 ‘시侍’의 자리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윤석산 시인의 시가 오래도록 세계의 광막함과 아득함을 향해 가기를, 그리하여 그 “황홀한 방황”을 오래도록 이어가기를 바란다.
임지훈
2020년 서울신문,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으로 등단
공저, 지구 밖의 사랑(넥서스,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