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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승원이 쓰는 리뷰시 단평]
표범 여자
강가람
호피무늬 가죽이 정글의 한 페이지로
백화점 진열대 위에 쫙 펼쳐져 있다
넓적다리의 근육을 감싸고 있던
윤기 흐르는 기하학적 무늬
공포의 눈동자가 빠져나간
텅 빈 구멍
원시의 세계가 긴 침묵 속에 고요하다
밀림 속 사냥감을 쫓아다니던 사나운 발톱과 이빨
육중한 살덩이가 빠져나간 텅 빈 자루
야성은 야생에서 지속하는 법
가죽 속엔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있지
호피무늬 가죽 속에 내 몸을 넣어본다
문명으로 포장된 야성이 긴 잠에서 깨어
제 몸의 매캐한 누린내를 붉은 혀로 핥는다
찢어진 잇몸에서 이빨이 돋아나는 걸까
실핏줄마다 소용돌이치는 나에게
야성은 이미 야화다
감각의 끝에서
벌어진 입속의 은빛 총알
사로잡힌 자의 눈동자를 향해 겨냥하다
더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나는 표범 여자
당신의 목덜미를 꽉 물어드릴까요?
―『애지』 2009년 겨울호
문학의 역할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속도가 찬양받는 현실에서 문학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잠깐 멈추어보라고, 그렇게 빠르게 가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빠른 걸음 속에서 혹시 무엇인가를 잃지는 않았느냐고. 이런 질문의 연속선 위로 우리를 던져두는 것이야말로 문학이 스스로의 가능성을 잃지 않는 단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강가람의 「표범 여자」는 이러한 문학의 가능성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팔리기 위해 만들어진 욕망들과 그에 기꺼이 영합하는 우리의 욕망이 세련으로 가장된 백화점의 진열대 앞. 시인은 그 욕망의 급류 속에 빠져있는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곳은 개인들의 욕망이 억압되거나 “문명으로 포장”되기 이전, 어떤 것에도 길들여지지 않은 우리의 욕망이 “실핏줄마다 소용돌이치는” 세계이다. 긴박하게 흘러가는 자본의 흐름을 멈추게 한 시인의 의도가 드러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곳에 설 때만 그 흐름의 의도를 바로 볼 수 있을텐데, 강가람의 시는 바로 이런 노력을 통해 자본문명이 사실 우리를 “겨냥”하고 있는 “총알”같은 폭력성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지금, 백화점의 진열대 앞, 원시의 “야성”을 세련되게 포장한 “호피무늬 가죽”을 사고 있는 당신. 자신의 꿈을 시장의 욕망으로 바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강가람의 「표범 여자」가 “꽉 물어”가면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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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구름의 꽃에 관한 작법(作法)
강경보
나의 버드나무 노래를 듣고 사랑을 청한 꽃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의 귀를 통하고 입술을 통한 말, 동침을 하기도 전에 떠나가 버린 꽃
아름다웠는데, 그 아름다움에 견줄만한 다른 아름다운 꽃이 찾아 온 일이 있었다
나는 그 때 시를 짓고 있었고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쓸던 붓 같은 꽃은 곧 나에게 저의 몸을 채워 주었다
따뜻하였는데, 그 따뜻함에 견줄만한 다른 따뜻한 꽃이 잠시 나의 귀에 머물렀을 뿐,
내가 거문고를 뜯고 있을 때 나의 사랑을 시험한 꽃이 있었다
위험하였는데, 그 위험에 견줄만한 다른 위험한 꽃이 대신 나를 사랑해 준 일이 있었다
세월은 흐르고 잠시 나의 귀에 머물렀던 다른 따뜻한 꽃을 만난 일이 있었다
이것은 오래전에 다른 아름다운 꽃이 저의 마음의 하나인 듯 내게 보내기로 했던 약속의 꽃이었던 것
어느 날은 은혜로운 꽃이 사랑을 시험한 꽃과 한 몸인 것처럼 내게 청혼한 일이 있었다
세월은 흐르고 버드나무 노래 아득하게 떠났던 꽃이 은혜로운 꽃의 향기를 품으며 다가와 재회한 일이 있었다
세월은 흐르고 내가 전쟁 가운데에 있을 때 자객의 모습으로 찾아온 꽃도 있었다
내 죽어갈 목숨을 구하고 또 저의 몸을 허락한* 갸륵한 꽃이었다
이제 꽃 속의 꽃이 동정 깊은 물에서 나를 부르니 가야 하리
꽃으로 태어난 내가 스스로 찾아오는 이 춘정의 봄날을 거역할 수는 없어
화인(火印) 같은 화인(花印)을 콱! 찍어 남기고자 하노니,
―『시로여는세상』 2009년 겨울호
* 죽어갈 목숨을 구하고 또 (저의) 몸을 허락 : 김만중의 ‘구운몽’ 에서 인용
숫자 구(九)는 자연수의 마지막 숫자로, 아주 오래전부터 완성이나 성취를 의미하는 동시에, 다시 새로운 시작과 맞물려 있음을 상징해왔다. 특히 동양에서는 이를 신성시하여 궁극의 숫자로 여겨왔는데, 우리의 주변에서도 이를 활용한 사례는 많이 있어왔다.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 역시 널리 알려진 대로 숫자를 활용하며 해석해보면, 시작임을 자각한 일(一)이 회복과 재생의 의미를 가진 팔(八)을 만나 구(九)로 완성되어가는 불가의 반본환원(返本還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강경보 시인은 그의 데뷔작 「우포늪 통신」에서부터 “일억 년도 넘은” 사물들의 말을 몸과 가슴으로 “통신”할 줄 하는 희귀한 시인이다. 이 통신은 「아홉 구름의 꽃에 관한 작법」에서 인생 보편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으로 심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먼저 시인은 수많은 인연들을 만나는 우리의 살이[生]를 꽃들과의 ‘아름답고 따뜻하며 위험한’ 만남으로 다양하게 그려보인다. 그러나 결국 인연이라는 것은 단순한 만남들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목숨을 구하고 또” 스스로의 “몸”까지 “허락”함으로써 얽혀야[緣]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것들이 인연임을 자각하고 기꺼이 그것들에 내 몸을 내어주는 것. 모든 만물의 소리를 듣고자 스스로 자신을 열어 둔 시인의 감각이 이루어낸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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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ugar 뉴스입니다
강희안
한바탕 뉴수가* 판을 벌이며 북악산에 소리꾼이 등장했다 당 차원의 처방전에는 입맛을 바꾸라는 의사 표현이 난무했다 그가 일용할 양식을 적는 동안 요의를 느낀 사람들은 저마다의 당에 적을 두었다 불타는 목젖에 걸린 알약들은 지하철 3호선 계단에서 나동그라졌다 망가질 확률이 지식에 비례한다는 듯 열혈로 뭉친 당원들은 도처에서 제 이름값을 알리느라 분주했다 관저에서는 당의 수치에 따라 안국역에도 닿지 않는 최초의 만찬을 준비했다 종종 불순한 판에 끼지 말라는 경고성 문건을 날리기도 했다 한때의 명창이 목을 잘라 뗄까 고민하는 사이 금융지주회사법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자막이 떴다 소리꾼들이 뉴수가 치는 당에는 식이요법에 능란한 잡배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고난 주간에도 살아야 했으므로, 지하철 5호선은 광화문을 지나 무사히 의사당에 도착했다 각종 채널과 잡지에선 치정의 가능성에 빠진 붉은 사안들이 빗발쳤다 당은 부작용에 따라 적임자를 경질하고 즉각 비적임자를 소리꾼으로 선임했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적어도 그때는 어떤 방송이나 신문의 판에서라도 제가끔 방임했던 자신의 의사가 개입하여 당의 누수 현상을 야기한다는 풍문을 몰랐던 것이다
―『미네르바』 2009년 겨울호
판소리는 이른바 종합예술장르에 속한다. 판소리는 현대인에게 고루하고 정적인 선입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대와 관객을 필요로 하는 연희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동물 흉내 등의 탁월한 연기력으로 유명했던 오태석(吳太石) 명창의 경우처럼, 창자(唱者)에게 노래 외에 다양한 능력을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희안 시인은 이러한 판소리 장르의 특성을 우리의 정치 현실과 풍자적으로 병치하고 있다. 시인에게 정치인들은 이 시대의 소리꾼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판소리에서 창자에게 요구된 다양한 능력들이 관객의 즐거움을 위해 필요했다면, 현실 정치인들의 다양한(?) 능력들은 유권자인 우리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정치라는 현대판 종합예술은 이제 지루함을 넘어 우리에게 혐오감을 불러 일으킨지 오래이다.
강희안 시인은 기법 면에서도 판소리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12개의 문장들이 행 구분 없이 배치된 1연의 자진모리를 연상시키는 박진감은 우리에게 춘향가의 어사출두 장면을 연상시키면서 그대로 현실의 국회를 겨냥한다. 또한, 당(糖)과 당(黨)의 동음이의를 활용한 언어유희는 시 전체를 이끌면서 정치가 갖는 허구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결국 정치의 본질은 “부작용”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적임자를 경질하고 즉각 비적임자를 선임”하는 방식으로라도 문제점을 감추며 작동하고 있음을 말이다. 이렇게 강희안의 시는 판소리 장르의 기법과 적극적으로 교호(交互)하면서, 민생과 멀어져만 가는 정치현실을 풍자하며 등장했던 판소리의 기능을 되살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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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세계도시축전 관람기
고 철
사람들의 언어가 하나이므로 서로가 모여서 나쁜 것을 꾀하기에
사람들의 언어를 여러 가지로 나눠놓으셨다…
―창세기 11장 1절―9절에서
친구가 말했다
야 우리 계속해서 탑을 쌓자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말했다
우킬라 방구킬라 킬라 킬킬킬…
너 장난하지마!
그러자 옆에 있는 친구가
내 아를 나…
전혀 말이 통하지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은 모스크바의
오스칸 키노 텔레비전 탑으로 높이가
자그마치 537미터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탑의 수만 해도
453개…
우리 집도 3층에 있다
우리 집도 3층에 있다
인간은 더 이상 신(神)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지고 논다
―『작가와사회』 2009년 겨울호
로고스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로 ‘말하다’를 뜻하는 ‘legein’에서 나왔다. 이를 기독교에서는 신의 말씀과 동일하게 해석하여(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한복음1:1), 대화는 오직 신의 영역 안에서 진리를 주고받아야하는 행위로 여겼다. 따라서,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는 우리의 언어가 진리의 영역을 포기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고철 시인은 얼마 전 인천에서 열렸던 세계도시축전을 관람한 뒤, 이 바벨탑 이야기를 떠올린다. 요즘 성행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축제가 으레 그렇듯, 이 축제 역시 어느 정도의 문제점이 있었지만 비교적 성황리에 개최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접한 일이 기억난다. 그럼에도 시인은 이 축제를 관람 한 뒤, 왜 바벨탑 이야기를 떠올린 것일까. 그 이야기를 통해 시인은 축제가 내세우는 세계화의 이면을 경고한다. 무차별적 이윤 추구가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되고, 자본적 계급사회의 비인간성 역시 기회 평등의 결과로 인정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이면을 말이다. 오직 자본주의적 가치만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방식으로서의 세계화는 사실 로고스의 영역이 지향하는 미덕과는 거리가 있다. 시인은 ‘세계도시축전’장을 바벨탑 건설의 현장과 병치시킴으로써, 인간성을 도외시한 채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인류의 이 오랜 실수를 그려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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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의 방에 눕다
구봉완
눈물과 울음소리를 훔쳐
달아나는 고양이의 까만 밤
비린내를 몰고 오는 빗줄기를 털며
미운 것도 혼자의 마음
더러운 것도 혼자의 마음
흘러가는 삶의 부력에 몸을 눕힌다
물속에 방을 하나 얻어 살아오는 동안
물기 없는 얼굴 보여주는 연잎이
소식을 전해주는 빗소리 들으며
한줌 흙이 물이 되는 중이다
걷다 뛰다 누워 듣는 울음소리 뒤에서
비를 맞으며 살금살금 공격 해 오는
물의 보폭을 고양이는 흉내 내지 않을까
길은 뉴런처럼 연못으로 숨어들어
슬픔을 뿌리 내린다
야옹 야옹 비를 맞으며 지켜보는 길을
이만큼 지나 와 물기를 닦고 누운
연잎 한 장 크기의 부력
바람소리에 귀를 쫑긋하며 건너오는
어둠 속 영롱한 색의 하중을 딛고
물속의 방에 오그린 삶의 뒷모습
―『시에』2009년 가을호
문학적 상상력은 허구적 세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상(想像)이란 말의 기원이 코끼리를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코끼리뼈를 보며 그것의 형상을 떠올려본 일에서 왔듯이, 상상은 공상과 달리 자신의 한 축을 현실에 두고 있다. 그러니 문학적 상상력의 본질은 현실인 동시에 허구인 셈이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동시적이라는 것은 합리적 진술은 아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두 세계를 경계 없이 가로지르는 뫼비우스의 띠를 보라. 어쩜 그것이야말로 현실과 허구를 가로지르는 시적 상상력의 가장 적절한 형식인지도 모르겠다.
구봉완의 시 「물속의 방에 눕다」를 읽어가다 보면 이 두 세계가 서로 간의 경계 없이 드러나고 사라진다. 비오는 밤이라는 현실적 삶의 세계와 “물속의 방”이라는 시적 상상의 세계가 동시에 펼쳐져있다. 이 두 세계를 매개하는 것은 부유하는 삶에 대한 인식이다. 삶은 “눈물과 울음소리를 훔쳐/달아나는 고양이”와도 같아서 결국 자신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소외된 채 “혼자의 마음”으로 남겨진 채 “삶의 부력에 몸을 눕힌다”. 이로써 시인은 시적 상상의 거주 공간 “물속의 방”으로 자신의 삶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거기에서 “연잎 한 장 크기의 부력”으로 “오그린 삶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시인이 시적 상상의 세계에서 응시하는 것은 자신의 삶이자 자기로부터 부유하는 또 누군가의 삶들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삶에 대한 시인의 날카로운 직관이다. 현대의 우리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힘에 밀려 부유하는 오늘의 삶이란, “슬픔의 뿌리”에서 자란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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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갑사 꽃무릇
김경호
백로(白露) 지나 문득,
머언 어느 늦여름
그대에게서 받은 엽서가
생각나
빛바랜 지도 위, 이제는 지워진
남도의 옛 길 더듬어
푸른 새벽을 달려 왔네
천 년을 장대비 맞아
선홍빛으로
다시 천 년은
연분홍으로
마침내 일제히 무릎 꿇어
잿빛으로 스러져
불갑사 대웅전 주춧돌 속
따뜻한 화석이 되고 마는 너는
꽃인데 꽃이 아니었네
이제 겨우 반백 년
내 뼛속 그리움조차
불갑사 굴뚝부처님은
말 걸어오지 않고
돌아보면 아득한 길
나는 늘 너의 집 대문 앞
지나치며 살았구나
오늘은 불갑사,
가랑비 속에서
꽃무릇 서러운 향기에 취해
내 발길도 잃어버리고
이제야 그대에게
주소 없는
젖은 엽서를 쓰네
―『시에』 2009년 겨울호
사랑이나 미움, 행복 같은 말들은 많은 정의들을 내포하고 있다. 김경호 시인이 이 시에서 탁월하게 짚어낸 그리움이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실 너무 많은 정의를 지닌다는 것의 다른 의미는 정의의 불가능성이다. 이 불가능성의 이유 역시 무수히 많을 것이다. 주관적인 말이어서 라든지, 세월에 따라 의미가 변해서 라든지 말이다. 그런데 시인들은 끊임없이 대상 세계를 향해 자신을 기투하는 자들이어서 이 불가능성에 직면하곤 한다. 어떤 부류는 불가능성을 넘어서고자 세계를 투명한 언어 속에 재현하려는 꿈을 꾼다. 또 다른 부류의 시인들은 이 불가능성을 그대로 긍정해버린다. 그들은 세계의 불가해함 앞에서 대상의 흔적들과 만난다. 그들의 언어는 투명한 세계가 아니라 반복적인 흔적들이며, 세계의 잔여물들이다. 김경호 시인은 후자에 속한다. 그가 이 시에서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그리움이라는 것의 불가능성을 긍정하는 태도에서 형성된다. 그것의 증거는 우선 “꽃인데 꽃이 아”닌 꽃무릇이다. 시인은 그리움의 정서를 드러내는 객관적 상관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꽃무릇을 “주춧돌 속/따뜻한 화석”으로 변주함으로써 꽃에서 화석으로 전혀 다른 성질로의 비약적 변이를 제시한다. 이러한 시적 상상의 원동력은 바로 흔적에 대한 사유이다. 화석이란 말 그대로 오래된 흔적인 것이다. 이 시인의 언어가 반복과 흔적의 세계에서 얻어지고 있다는 두 번째 증거는 또 다른 객관적 상관물인 “엽서”이다. 이 엽서는 시 전체를 순환적 구조로 만든다. 1연에서 화자는 “그대에게서 받은 엽서가/생각나” 불갑사로 향하는데, 4연에서 “내”가 쓰는 “주소 없는” 엽서는 다시 1연의 ‘나’가 “그대에게서 받은 엽서”와 겹쳐지기 때문이다.
‘나’와 “그대” 사이에 남아 있는 그리움은 “꽃무릇”과 “엽서”처럼 반복과 흔적 속에서 나의 그대를 머물게 한다. 그러니 “나는 늘 너의 집 대문 앞”을 지나치며 살아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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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하나 훔치다
김선미
상가의 점심은 숟가락 쟁투다
손님들 시간 빌려
낮은 의자에 모여 앉으면
백반엔 그날의 화두가 나오기 마련
오늘 된장찌개엔 네 개의 숟가락이
제각각 모순을 들고 나타났다
밥그릇 싸움이라는 애매한 결론으로 귀결된
짧은 논쟁 끝에
숟가락 하나 훔쳤다
글씨 같기도 그림 같기도 한
오랜 동굴 속 벽화 같이
닳아서 잘 보이지 않는
식당 숟가락 하나 둥글거나 오목하거나
몇 사람이 먹었을까 구역질 나다가도
무엇을 지지고 볶고 뒤집었을까 냄새를 맡다가도
누구의 머리를 한 대 톡 때렸을까 웃다가도
누구에게 대거리 하며 욕을 했을까 불손하지 싶다가도
게걸스럽게 비벼먹는 인부들 생각이 나고
누룽지 긁어 먹는 여학생들 생각이 나고
행군할 때 들고 다니는 군인들 생각이 나고
수다 떨면서 아이들 칭찬에 목마른 아줌마들 생각이 나고
개미 퍼먹으며 울던 개그맨 생각이 나고
숟가락 그리워 할 노숙자들이 생각나고
숟가락 들지 못하는 환자들이 생각나고
산모가 떠먹는 미역국이 생각나고
첫 숟가락 뜨는 아기가 생각나고
나는 오늘 세상 하나를 훔쳤다
―『시와사람』2009년 겨울호
불가(佛家)의 가르침들은 정의할 수 없는 아포리아로 남기 일쑤이다. 그 곤혹스러움 앞에서 우리는 명확한 정의를 향해 쉽게 돌아선다. 하지만 명확한 정의의 세계가 한 개체를 설명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과 세계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데는 실패해왔다면, 이제 우리는 정의되는 것만을 사고하는 합리적 사유의 틀을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역설과 모순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사유의 벌판에서 우리는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는 않을까.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라고 일렀다. 한 개체가 곧 우주이고 그 역도 가능한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불가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김선미의 시는 말 그대로 ‘일즉다 다즉일’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일상의 틈에 잠자코 있던 숟가락을 통해 ‘세상’을 발견하는 이 시는 숟가락이라는 작은 대상으로부터 식당 풍경, 무수히 밥을 먹었던 사람들, 숟가락을 “그리워 할” 또는 “들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첫 숟가락 뜨는 아기”에 이르기까지 상상이 이어진다. 숟가락을 매개로 떠오르는 다양한 사람들의 군상은 사소한 언쟁부터 시작하여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까지 다다른 것이다. 그로써 “나는 오늘 세상 하나를 훔쳤다”는 시적 진술은 제법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또한 김선미의 ‘숟가락=세상’이라는 상상력이 가지고 있는 진실성은 그가 사람을 매개로 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문학적 상상력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는 작가에 따라 천차만별일 테고, 따라서 무엇이 그 중 나은 것인지 논하는 것 역시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사람을 향한 문학적 상상은 그것이 궁극에는 사람에 대한, 그리고 생명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음을 무심코 느끼게 한다. 문학적 주제 면에서 볼 때 사람과 생명에 대한 애정은 그야말로 진부하다. 하지만 그 애정을 드러내는 작품들은 우리들에게 여전히 결핍된 개인과 개인의 연대에 대한 토대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는 점에서 늘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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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안락 그리고 동의에 관한 시퀀스
김연종
#3
그들은 쉽게 동의했다
부계불확실성을 믿고 있는 남자가
잠깐 망설였지만
그 믿음 때문에 또 쉽게 승낙했다
막힌 하수구를 뚫듯 틔우지 못한 生을 긁어냈다
착상하지 못한 붉은 씨앗들은 어디로 쓸려갔는지
수선비용을 지불하자마자
수돗물처럼 생리가 되돌아왔다
#2
그들은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의뢰인과 킬러사이 폭력적인 결합엔
팽팽한 밧줄 대신
느슨한 링거 줄이 놓여 있을 뿐이다
포기각서처럼 봉인된 봉투를 교환하고
영혼을 위한 안락을 정맥주사하자
데드마스크를 쓰고 있는 결연한 표정의 의뢰인은
악착같이 산소를 흡입하고 있다
#1
그들은 잠시 숙연했다
호상이라는 그 한마디에
아무도 망자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잠깐 묵념하듯 영정사진과 눈을 맞추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상주와 눈을 맞추지 못한 조문객들만
밤새도록 화투 패를 뒤집었다
굳은 표정의 화투 패처럼 그들은
서로 닮았거나 또 확연히 달랐다
―『애지』 2009년 봄호
김연종이 그려내는 세 개의 장면은 각각 독립적이다. 그러나 각 장면마다 등장하는 “그들”이라는 3인칭 주체들의 “동의”와 “결정”과 “숙연”함은 타인에 대한 윤리를 망각한 “그들”의 공모라는 점에서 은밀히 결합된다. 사실 “그들”은 도덕적 질서를 넘어서지 않으며, 그들의 행위에는 비합리적 요소 또한 없다. 그럼에도 ‘그들’의 행위가 불온한 공모로써, 어둡고 불안한 흑백 영상으로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타인을 향한 윤리의 결여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존재는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주장했다. 주체와 동일시될 수 없는 타인의 존재는 그 얼굴을 통해 현현된다. 레비나스는 얼굴의 등장이야말로 윤리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 얼굴의 현현, 그것의 로고스는 살인하지 말라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두 장면 #3, #2는 이 윤리적 계명을 위반하고 있다. 낙태와 안락사는 -그 나름대로의 합리적 명분을 지니고 있음에도- 살인하지 말라는 타인의 얼굴을 외면했다는 데서 비롯되는 윤리적 가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1은 “영정 사진” 속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들 역시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데 실패한 자들이다. 타인의 얼굴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그들”의 “굳은 표정”은 윤리의 은폐를 “동의”하고 “결정”했음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이 세 개의 장면은 매우 일반적인 일상들에 대한 포착에 불과하기도 하다. 누구나의 삶 속에 남아 있는 한 장면의 기억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그 기억 속에는 슬픔과 애도로 충만한 ‘내’가 중심에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기억은 ‘나’를 3인칭으로 바꾸어 놓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연종은 시라는 형식을 통해 그것에 도전한 것으로 보인다. ‘나’를 3인칭으로 돌려놓음으로써 ‘나’라는 주체에 의해 은폐된 진실들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불편함은 타인의 얼굴을 외면한 “그들”이 바로 ‘우리’이며 ‘나’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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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집
김용길
아버지는 황소를 이용해 비둘기를 잡으셨다.
황소의 몸에 황토를 두껍게 바르고 군데군데 콩을 박고,
꼬리에 방망이를 묶어 두었다.
황소 몸에 박혀 있는 콩을 콕 쪼아 먹으러
잔등에 비둘기가 내려 앉으면
꼬리에 매달린 방망이가 비둘기를 때려잡는데
그렇게 두어 시간 놔두면
비둘기가 황소를 덮고 올라와 전리품이 되곤 했다.
배꼽을 잡고 먹는 비둘기 고기는 얼마나 일품이었던지
우리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날은
설날과 추석 제삿날 말고는 이때 뿐
일곱 중에 장남인 내가 집을 나올 때 까지
결코 우리 집에서 황소를 보지 못했지만
밤이면 아버지 입에선
황소와 비둘기와 죽지 않는 사람이 나왔다.
―『한비문학』2009년 1월호
이야기와 아버지는 우리의 심연에서 맞닿아 있다. 굳이 정신분석을 들지 않더라도, 죽음을 앞두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는 세헤라자데에게 샤프리 야르왕은 자신의 이야기를 지속시키게 하는 권위, 즉 아버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용길 시인의 「오두막집」에서 나타나는 ‘이야기 하는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 우리의 가족적 전통에서 이야기에 대한 추억은 아버지의 권위가 가닿지 않는 곳, 즉 ‘할머니’의 영역이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듣는 옛날이야기’로 상상하는 따뜻함의 추억은 권위의 폭력성이 거세된 공간을 추구하는 우리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오두막집」에서는 이 공간을 재미있게도 아버지가 스스로 형성하고 있다. 명절이 아니면 고기라고는 구경도 못하는 가난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우리”에게 “배꼽을 잡고 먹는 비둘기 고기”를 밤마다 선사하는 이는 다름 아닌 “아버지” 그 자신이다. 권위의 폭력성을 스스로 벗어난 아버지가 이야기를 통해 만드는 이 공간을 시인은 추억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의 관습대로 근엄하고 말이 없는 아버지 상이 아닌, 다소 예외적인 아버지이지만 우리는 쉽게 그 추억에 공감하게 된다. 그 이유는 단순히 가난했던 과거에 대한 공통적 추체험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우리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원형적 내면이 그 어떤 심급에서도 폭력적 권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공간을 남겨두기를 원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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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바벨탑
김윤환
구한말로부터 120년 동안 이방군인이 주둔하는 이태원 옆,
동족의 피를 기념하는 전쟁기념관 옆,
노숙자들의 점심식사와 재벌백화점이 만나는 용산역 옆,
군인들의 처진 어깨에 걸친 꽃잎들 역전 홍등가 옆,
실패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머무는 한강대교 옆,
급류처럼 벅찬 기적의 상징 한강의 기적 그 옆.
30년 식당 하던 70대 노인 이모씨, 이웃에 세 살던 양모씨, 이모씨,
여린 목숨이 신나 화염에 타올랐던 2009년 1월 20일 밤.
화산재가 되어, 비가 되어,
마침내 천둥이 되어,
남은 자의 가슴에 멍이 된
용산 제4구역
그 가난한 자의 무덤위에
뉴타운을 세운다.
바벨탑을 세운다.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실천문학사, 2009년 12월
통계로 확인할 수 있는 각종 경제 지표들 앞에서 삶의 빈곤은 동의할 수 없는 오래전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 맑스가 지적했듯이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절대적으로 향상할 수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노동자들의 처지는 여전히 악화상태에 있다. 통계의 수치가 보여주는 사회의 막대한 잉여가치에서 노동자들의 지분은 더욱더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통계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통계에 대한 믿음은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고 만다. 아니, 오히려 통계의 과학성이 현실의 고통을 생산한다.
“한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경제 발전 논리의 폭력성에 밀려난 곳, “그 옆”. 그 옆에는 그저 우리와 같은 “양모씨, 이모씨”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부를 끊임없이 잠식하는 발전 논리는 이들 삶의 터전을 노리게 되고, 과학적 통계가 뒷받침하는 효율우선주의는 한 순간에 이들을 범죄자로 내몰았다. “2009년 1월 20일 밤” 끝내 이들은 그 어떤 곳의 옆에도 서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련의 일들을 단순하게 ‘참사’라고 부름으로써, 현실 논리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예외적인 것으로 만들고 다시 통계의 안락함에 기대고 만다. 비극성은 박제되고 또 하나의 사건과 숫자로만 남게 된 우리 이웃의 지극히 평범했던 삶들. 김윤환 시인이 메마른 어조로 정리한 기록 속에서라도 “가슴에 멍”이 되어 영원히 살아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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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
김정원
우리 마을에 구제역이 돌았다
군청 직원들이 절뚝거리는 소들을 동구 밖에서 트럭에 싣고 있었다 도축하여,
다른 지역으로 전염하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해서였다
차에 오르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티는 소의 고삐를 마구 잡아당기고 엉덩이를 떠밀어대는 군청 직원들에게 용택이 아재가 간청했다
“하루만 말미를 달랑께요.”
군청 직원들이 그 까닭을 묻자
소의 눈물 속에 얼비친 글썽이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우리 소는 잘 멕이지도 못하고 맨날 부려먹기만 해서 부지깽이맹키로 삐쩍 말랐지라우. 단 하루라도 편히 배불리 멕이고 싶어서 그란당께요.”
눈시울 붉어진
군청 직원들이 짐짓 직무를 유기했다
―『리얼리스트』 2009년 창간호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시작품들에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에피소드를 통해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이고, 그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끌어들인 에피소드를 얼마만큼 변형시켜 시로 전환했는가가 다른 하나이다. 시적 가공의 세계보다 현실의 체험세계가 기본이 되는 시들에서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거의 날 것 그대로의 현실세계를 자신만의 시적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시인이 어떤 부분을 가공했느냐 이기 때문이다.
김정원의 「긍휼」에서 시인의 의도는 비교적 쉽게 다가온다. 자신이 키우던 소들에 전염병이 돌아 방역당국에 도축되기 위해 끌려가는 순간 소에게 식구(食口)의 정을 내비치는 “용택이 아재”. 그의 순수한 마음이 축산농가의 어려운 현실과 부딪쳐 구제역의 발생만을 알리는 신문기사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현장감을 우리에게 풀어놓는다. 그렇다면, 시인의 가공은 어디에서 이루어졌을까. 현실의 세계에서는 이루어지기 힘들 “군청 직원”의 “직무 유기”가 아마도 시인이 변모시킨 현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 시인의 궁극적 의도가 강하게 담기게 된다. ‘소-용택이 아재’가 보여주는 단편적 에피소드에 시인의 의도대로 ‘군청 직원’이 참여를 하게 되고, 나아가 이 장면을 목격하는 우리들에게까지 확산되면서 “긍휼”의 깊은 의미가 강하게 다가온다. 한 생명체는 결국 모든 생명체와 인연의 그물에 연결되어 있음을, 그리고 이 그물에 연결된 우리는 모든 생명체를 “긍휼”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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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거에 대한 명상
김지순
너는 푸르뎅뎅한 산이겠다
우뚝 솟은 오른쪽 기지국이 좋아
보랏빛 나는 왼쪽 안개숲이 참 좋아
내 어깨에 매달린 짐승들 터럭손 좀 봐
산토끼 쪼르륵 최신 되고송으로 달려가겠다
긴꼬리 은여우 파릇파릇 혓바늘 닦아주겠다
뻐꾸기 너의 둥지가 스파링 상대이겠다
너는 야생동물 이동통로이겠다
두 발 달린 바퀴는 행군이 좋아
터럭발로 숨통 죄는 불안이 참 좋아
여기저기 소리와 울음이 섞여
눈비 맞은 시장이자 빌딩, 성전이겠다
숨겨놓은 먹이 못찾겠다 꾀꼬리의 난장이겠다
말랑말랑 급소를 짚는 운지법이겠다
광란의 주술 무성한 바큇벌레이겠다
앵무새 죽이기로 곧 장풍이 불어닥치겠다
우우우 득달같이 달겨드는 네버랜드 동물이겠다
너는 푸르정정한 강이겠다
거꾸로 사는 커튼피그트리가 보기 좋아
울렁울렁 비릿한 하늘이 참 좋아
―『현대시학』2009년 4월호
수행을 위한 명상은 감각적 단상들을 잠재우는 것이지만 김지순 시인의 명상은 감각의 숨통을 터서 이미지들의 난장(亂場)을 만든다. 「행거에 대한 명상」은 이미지들이 난무하는 시인의 명상 혹은 이미지의 난장 속으로 독자의 감각을 흡입한다. 이 흡입력의 에너지원은 무엇보다 불확정성과 미결정성이다. 이 시에서 어떤 대상의 본질이나 결정적 의미들은 찾아볼 수 없다. 이 시가 그러내는 세계는 말 그대로 “네버랜드”, ‘NEVER-LAND’이다.
“푸르뎅뎅한 산”, “안개숲”, “야생동물 이동통로”등과 같은 시어들은 지금 화자의 공간이 행거가 놓인 방이라는 사실을 망각케한 채 우리를 “네버랜드”와 같은 비구체성의 장소로 이동시킨다. 이곳에서 우리는 “산토끼”, “긴꼬리 은여우”, “뻐꾸기” 등 온갖 야생동물들의 흔적(trace)을 만난다. 이 시 안에는 온갖 동물들의 이미지가 등장하지만 정작 “산토끼”나 “긴꼬리 은여우”를 직접 마주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들이 지나간 발자국들이 만들어놓은 흔적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흔적이란 말 그대로 현전(presence)도 부재(absence)도 아니다. 그것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진 경계이다. 흔적의 세계는 선명히 분리할 수 없는 “소리와 울음이 섞여”있는 난장의 세계이며, 이질적인 것들이 직물(textile)처럼 직조된 세계이다. 온갖 옷가지와 소품들이 뒤섞인 채 걸려있는 행거를 통해 흔적의 세계를 발견하는 시인의 관찰력은 재기발랄하다. 그러나 이 재기발랄함은 결코 가볍지 않다. 왜냐하면 이 재기발랄함 이면에는 현전과 부재의 경계를 만들어 온 오랜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저항이 분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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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염(天日鹽)
김현식
썰물이 펼쳐 놓은 아득한 개펄
음험한 지하세계의 음모처럼 숨어든 정적
건조한 개펄의 표피를 뚫고 게들이
몸을 사린다
검게 타버린 사막처럼 눈이 아려 오는
지하감옥에 생매장된 반역자의 긴
한숨처럼 뜨겁게 타들어 가는
날카로운 사각(四角)의 동통,
호모 사피엔스를 지배해 온 수천 년의 역사
한때 눈부신 사금가루를 모래처럼
뿌려 왔다
태양을 향해 엎드린 끊임없는 백팔배
목마르게 추근거리는 바다바람의
지칠 줄 모르는 처절한 구애
하늘을 익혀 먹고 대지를 불태워 삼키던
태양마차가 미증유의 빛을 발하던
날,
반짝이는 사리 한 줌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현대시』 2009년 8월호
예수가 제자들에게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한 말을 굳이 빌지 않아도 소금을 둘러싼 인류 투쟁의 역사가 소금의 필수불가결성을 말해준다. 잘 알려진 것처럼 진시황은 소금을 기반으로 병사를 길러 자신의 영토를 넓혔고,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한 로마 역시 소금에 붙은 세금을 기반으로 제국으로 성장했다. 많은 역사적 전쟁의 발화점에는 미각을 짜릿하게 만들며 몸속에 스며들어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 요소로 기능했던 소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제 좀 다른 의미에서 소금과의 전쟁을 치루고 있다. 소금의 과다 복용이 도리어 인간에게 치명적인 까닭이다. 아이러니이지만 소금은 독이면서 약인 파르마콘(pharmakon)인 것이다. 파르마콘은 그 자체로 이중적인 존재를 말한다. 플라톤이 문자를 파르마콘으로 간주했던 이유 역시 그것의 이중성에 있다. 선과 악, 질서와 혼돈, 빛과 어둠……과 같은 경계 양쪽 모두에 속하는 소금의 이중성에 대한 인식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노출된다. “음험한 지하세계의 음모”와 “반짝이는 사리 한 줌”이라는 극명한 이미지의 대립은 대상의 본질을 파헤치려는 시인의 끈질긴 사유에서 나온다. 시인의 사유 과정은 이 시의 전개와 반대로 진행되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개펄에 바닷물이 스미는 데서부터 시작하지만 실은 그러한 전개의 발단은 이미 완성된 소금이다. 따라서 시인의 사유는 소금이라는 대상에서부터 그것의 기원을 더듬어가다가 종국에는 한 대상의 본질이 하나의 응집된 기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계 없는 세계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통찰하고 있다. 이 시를 천일염의 탄생 과정으로만 읽는 것은 좀 진부한 독법이 될 것이다. 부디 소금이라는 결정체 안에 서로 상반된 이미지들이 혼재돼있음을 만끽하며 소금이라는 파르마콘을 향유하기 바란다.
남승원
서울 출생.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에티카』2010. 상반기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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