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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 라이너 마리아 릴케
9월 11일 툴리에 거리에서
그래, 그랬었던가. 이곳에 사람들이 오는 것은 살기 위해서였던가. 나는 오히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죽어간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밖으로 나가 보았다. 나는 보았다. 여러 개의 병원이 보였다. 그리고 비틀비틀 쓰러질 지경에 놓인 어떤 사람이 보였다. 나는 또 임산부를 보았다. 햇볕을 받아 따뜻해진 높은 담을 따라 무거운 몸을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이따금 손을 뻗어 담을 더듬었다. 아직도 담이 그곳에 있는가 하고 확인하듯이. 분명 담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담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도를 꺼내 찾아보았다. 시립 산부인과 병원이었다. 그렇다. 그 여자는 해산을 하러 가는 길인 모양이다. 그 앞은 생자끄 거리. 둥근 지붕의 큰 건물이 있다. 지도에 발스 글라스 육군 병원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런 것을 알 필요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렇지만 어쨌든 좋다.
뒷골목으로 들어서니 주위에서 이상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냄새를 식별해 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말한다면 요드포름 냄새, 감자 튀기는 기름 냄새, 그리고 불안의 냄새가 강렬하게 풍기고 있었다.
어느 도시든 여름이면 냄새가 풍기는 법이다. 다음에 나는 야릇하게 흑내장을 연상시키는 집을 한 채 보았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문 위에 쓰인 글을 아직도 제법 뚜렷이 읽을 수 있었다. 간이 숙박소. 출입구 옆에 요금표가 붙여져 있었다. 읽어 보았는데 비싸지는 않았다.
그 밖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유모차 안에 있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 애는 통통하고 푸른빛이 돌았으며 이마에는 종기 자국이 선명했다. 자세히 보니 다 나은 자국이라 아플 것 같지는 않았다. 어린아이는 잠이 들어 있었다. 입을 벌리고 요드포름 냄새와 감자튀김 냄새와 불안을 호흡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중요한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일이다.
창문을 열어둔 채 잠자는 버릇을 고칠 수가 없었다. 전차가 내 방을 지나 빵빵거리며 지나간다. 자동차가 나를 치고 달려간다. 문짝이 하나 쾅하며 닫힌다. 어디선가 유리가 떨어져 깨어진다. 큰 파편은 큰 소리로 웃고, 조그만 조각은 킬킬거리며 웃는다.
그러자 별안간 다른 방향에서 희미한 소리가 난다. 집안이다. 누군가가 층계를 올라온다. 오고 있다. 쉬지 않고 오고 올라왔다. 움직이지 않고 한참 서 있다. 그러다가 지나간다. 그러자 또 길거리에서 처녀의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린다. 네, 그만두세요, 이제 그만둬 주세요. 전차가 미친 듯이 거칠게 달려온다. 그 목소리를 치고 달려간다. 누군가가 외친다. 사람들이 달린다. 발소리가 어지럽게 들린다. 개가 짖는다. 개라는 동물은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른다. 새벽녘에는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한없는 위안이다. 그러다 갑자기 잠이 들었다.
이것은 모두 소리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무서운 것이 있다. 그것은 침묵이다. 큰 화재가 났을 때 흔히 이런 극도로 긴장된 순간이 있는 법이다. 쏟아져 나오는 물이 끊어지고 소방관들은 더 이상 사닥다리에 오르지 않으며 아무도 꼼짝하지 않는다. 소리도 없이 거뭇거뭇한 추녀 끝이 앞으로 기운다. 타오르는 불길을 등지고 높은 담이 소리 없이 무너진다.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선 채 어깨를 움츠리고 이맛살을 찌푸린 채로, 무서운 일격을 기다린다. 여기서의 침묵도 바로 그런 것이다.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내 자신도 어떻게 된 셈인지는 모르나, 모든 것이 전에 없이 깊숙이 내 속으로 들어와 여느 때 같으면 막다른 곳에 이르러 막히게 될 곳에서 막히지 않는다. 나에게는 나 자신도 몰랐던 마음의 내부가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지금 그곳을 향해 들어온다. 거기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오늘 편지를 한 장 썼다. 그때 깨달은 일이지만, 나는 아직 이곳에 머무른 지 불과 3주일밖에 안 되는 것이다. 다른 장소에서의 3주, 이를테면 시골에서는 3주가 마치 하루같이 여겨졌던 일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이 여러 해에 해당된다. 이제 편지도 쓰지 않겠다. 내가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무엇 때문에 남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변해가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이미 지난날의 내가 아닐 것이다. 이전과 다른 내가 되어 있다면 나에게 한 사람의 친구도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수는 없다.
벌써 이야기했던가?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렇다. 이제 시작했다. 아직은 잘 안 된다. 그러나 이 일에 나는 내가 가진 시간을 쓰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이제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얼굴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얼굴이 있다. 누구나가 여러 개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이고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그 얼굴은 여행하는 동안 끼고 다니던 장갑처럼 낡고 더러워지고 쭈글쭈글해져 있다. 그들은 얌전하고 단순한 사람들이다. 얼굴을 바꾸려하지 않고, 세탁을 하러 보내려고도 않는다. 그들이 그것으로 족하다고 주장한다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러한 의문이 당연히 남는다. 그들도 그밖에 몇 개인가의 얼굴을 가지고 있을 텐데, 그 밖의 얼굴을 어떻게 하는 것일까? 간직해두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라도 줄 작정으로, 그러나 그들이 키우는 개가 그 얼굴을 달고 밖으로 나다니는 일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왜 없겠는가? 얼굴은 얼굴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 무서울 만큼 재빠르게 연거푸 얼굴을 바꾸어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처음에는 얼마든지 바꾸는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그럭저럭하다가 마흔 살이 될까말까한 때 벌써 마지막 얼굴이 되고 만다. 물론 여기에는 그 나름대로의 비극이 있다. 그들에게는 얼굴을 소중히 하는 습관이 없다. 마지막 얼굴도 일주일만에 닳아 버린다. 구멍이 뚫어지고 여기저기 종잇장처럼 얄팍해져서 어느덧 점차 안이 드러난다. 그렇게 되면 이미 얼굴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그들은 그것을 달고 어정거리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글쎄, 그 여자는 몸을 구부리고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노늘담 데 샹 거리의 모퉁이에서였다. 나는 그 여자를 보고 발소리를 죽이며 지나가려 했다. 불쌍한 사람들이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어떤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그 텅 빈 거리는 따분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발걸음을 제대로 뗄 수도 없었다. 내가 걸어가는 발소리가 마치 나막신 소리처럼 여기저기에 울렸다. 여자는 깜짝 놀라 구부리고 있던 몸을 폈다. 몹시 급해서 세찬 몸짓을 했으므로 얼굴이 두 손 안에 남고 말았다. 거기에 얼굴이, 얼굴이 움푹한 모양으로 뚜렷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손에만 눈길을 보내고 손에 얼굴을 내어준 머리 쪽을 보지 않으려고 나는 무척이나 노력해야 했다. 손 안에 있는 얼굴을 보는 것도 끔찍했지만, 상처가 난 얼굴 없는 머리는 훨씬 더 무서웠다.
나는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 무섭다면 어떻게든지 그 공포와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병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비참한 마음이 될는지. 누군가가 재빨리 나를 시립병원으로 싣고 간다. 만약 그렇게라도 되는 날에는 나는 틀림없이 거기서 죽게 될 것이다. 이 병원은 시설이 잘된 병원이라 굉장히 번창하고 있다. 병원의 위치가 노틀담 사원 앞 광장이었기 때문에 사원의 정면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은 어지간히 조심하지 않으면, 전속력을 내어 병원으로 달려가는 마차에 자칫하면 치일지도 모른다. 노상 방울을 울려대는 조그만 승합 마차라도, 아무리 보잘것없는 서민이 죽음에 임박하면 [하나님의 집]이라는 이름의 이 병원에 정신없이 달려가려고 마음먹었다면, 그것이 마지막으로 설사 사강 대공이라 할지라도 자가용 마차를 멈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 죽어가는 사람이란 고집이 센 법이다. 마르띠르 거리의 고물상, 르그랑 부인 따위라도 이 시떼 섬의 어느 광장에 달려왔다고 하면 파리 전체의 교통이 두절되고 만다. 내친 김에 말하지만 이러한 고약한 승합 마차에는 매우 호기심을 끄는 젖빛 유리창이 달려 있다. 그 배후에 있는 근사한 고뇌의 장면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 상상을 위해서는 접수고에 있는 여비서 정도의 상상력이면 충분하다. 상상력이 더 풍부해서 그것을 더욱 다른 방향으로 진전시킬 수가 있다면 이런저런 억측이 실로 끝이 없게 될 것이다. 나는 그밖의 무개 역마차가 도착하는 것도 보았다. 시간에 따라 요금을 받는 역마차이므로 규정된 요금으로 달린다. 임종의 삯이 2프랑이 되는 셈이다.
이 훌륭한 병원은 매우 오래 되어서 이미 클로드비히 왕때부터 이곳의 몇 개의 간이 침대에서 사람이 죽어갔다. 지금은 5백 59개의 침대에서 죽어간다. 물론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 같은 그런 식이다. 이런 대량 생산으로는 하나하나의 죽음이 그리 정성껏 만들어질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양인 것이다. 지금 세상에 도대체 누가 정성들여 완성시킨 죽음을 비싸게 살 것인가? 그런 사람이 있을 턱이 없다. 공들인 죽음을 하려고 생각만 한다면 할 수도 있는 부자들마저 될 대로 되라는 무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있다. 고유한 죽음을 갖고 싶다는 소망은 점점 더 엷어져 가고 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그러한 죽음은 자기 자신에게 적합한 생과 마찬가지로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되고 말 것이다. 당초 무엇이든지 간에 눈앞에 진열되어 있는 세상인 것이다. 태어난다. 어떻게든지 하나의 살 길을 발견한다. 이미 만들어진 삶, 그것을 몸에 걸치기만 하면 된다. 이 세상에서 떠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혹은 그렇게 강요당한다. 이 또한 문제없는 일이다. [거기 당신의 죽음이 있습니다, 손님] 운명에 따라 죽어간다. 몸에 들어온 병이 시키는 대로의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은, 모든 병이라는 병을 판별할 수 있게 된 이래로, 온갖 최후의 결말은 병이 짓는 것이지 인간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병자는 말하자면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요양원에서 환자들은 그야말로 무조건 복종하여 의사나 간호원에게 감사까지 해가며 죽어가지만, 실은 요양원 지정의 죽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집에서 죽게 되면 자연히 예법에 맞는 상류계급의 죽음을 택하게 된다. 즉, 죽음과 동시에 제일급의 매장이나 그것에 따르는 일련의 화려한 의식이 이미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은 말할 필요도 없이 평범해서 거추장스런 일은 일체 없다. 몸에 대충 맞는 죽음이 발견되기만 하면 만족이다. 다소 크더라도 상관없다. 인간은 언제든지 약간은 커질 수 있는 법이다. 다만 품이 작다든가 목이 답답하다든가 하면 좀 곤란하다.
이제 더 이상 아는 사람도 없는 고향을 떠올려보면, 이전에는 사정이 달랐었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알지 못했다 할지라도 느끼고는 있었다.). 마치 과실이 씨앗을 갖듯이 사람은 자신의 속에 죽음을 갖는 것이라고. 아이들은 조그만 죽음을, 어른들은 커다란 죽음을 갖고 있었다. 여자들은 뱃속에, 남자들은 가슴속에 자기의 죽음이라는 것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독특한 위엄과 조용한 긍지를 주었다.
늙은 시종관이었던 나의 할아버지 브릿게도, 당신 안에 죽음을 담아두고 계셨다는 것을 나는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죽음은 얼마나 대단했는지 모른다. 두 달 동안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그 외침소리는 멀리 떨어진 농장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토록 길고 유서 깊은 그 저택도 이 죽음을 치르기엔 너무나 좁아서 옆채를 더 늘려 지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의 몸은 자꾸 뚱뚱해져 가는데다, 온종일 이방, 저방으로 옮겨 다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이 아직 채 저물기도 전에 벌써 방마다 다 누워 보았다면서, 맹렬히 노여움을 폭발시키는 것이었다. 그러자 하인, 하녀 그리고 개들, 늘 그가 병상에서 시중들게 하던 자들을 거느린 행렬이 층계를 오르고, 청지기를 앞장 세워 이제는 돌아가시고 없는 증조할머니께서 임종한 방으로 향했다. 그 방은 23년 전에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즈음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으며 평소에는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곳이었다. 그곳에 폭도 한 무리가 들이닥친 것이다.
커튼이 걷히자, 황량한 빛이 겁이 나 놀라는 가구들을 일일이 비추며, 드러난 거울 속에서 딱딱하게 반전했다. 사람들의 동작도 이것과 똑같았다. 호기심에 차서 손을 어디다 대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하녀, 힐끔힐끔 주위를 둘러보는 젊은 급사, 그리고 나이 먹은 하인들은 서성대면서 운 좋게 들어온 이 출입금지의 방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특히 개들은 곰팡이 냄새를 풍기는 방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이상한 자극을 느끼는 것 같았다. 키가 크고 늘씬한 러시아산의 그레이하운드들은 안락의자 뒤를 부지런히 뛰어다니면서 춤을 추듯이 다리를 뻗었다가 몸을 흔들었다가 하면서 방을 가로질러 가느다란 앞발을 백금색 창틀에다 대고 흡사 문장 속의 개처럼 일어서서 뾰족한 얼굴을 긴장시키고 이마를 뒤로 젖히면서 이리저리 안뜰을 살피고 있었다.
장갑을 연상케 하는 몸집이 작은 누런색 다크스훈트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표정으로 창가에 놓인 폭 넓은 비단의자에 앉아 있고, 기분이 나빠 보이는 붉은 털의 포인터는 금빛 다리가 달린 테이블 모서리에다 등을 비벼대고 있어 그 채색된 테이블 위에서 세브르산 찻잔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분명 멍청하고 게으르게 잠을 자고 있었을 이 물건들로서는 무서운 한순간이었다. 누군가의 부산한 손이 서투르게 펼친 책에서 장미 꽃잎이 미끄러지듯 떨어져 짓밟혔다. 조그맣고 연약한 물건이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곧 깨져버려, 재빨리 본래 자리로 되돌려지거나 커튼 뒤로 던져지거나 했다. 이따금 무엇인가가 떨어졌다. 융단 위에 조용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거나 모자이크 바닥에 날카로운 울림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여기저기서 물건들이 깨졌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지기도 하고, 거의 소리 없이 깨지기도 했다. 조심조심 다루어진 물건들은 떨어지기만 하면 영락없이 깨지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문득 이렇게 물었다고 하자. 이 소동의 원인은 무엇인가, 무엇이 조심조심 지켜져 온 이 방에 파괴를 불러들였는가.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즉, 죽음이었던 것이다.
울스고르의 시종, 크리스토프 데틀레우 브릿게의 죽음이었다. 그는 암청색 시종복에서 거의 빠져나와 바닥 한복판에 누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퉁퉁 부어 괴상한 모습이 되어서 이제는 알아 볼 수 없게 된 얼굴의 두 눈은 문을 닫아 놓은 것처럼 감겨져 있었다.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는 보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처음에 그를 침대에 눕히려고 했는데, 그가 거부했던 것이다. 병이 더해 가기 시작한 그 처음의 밤부터 지금껏 그는 침대를 싫어하고 있었다. 게다가 위층의 이 침대는 너무 작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융단 위에 눕히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아래층에는 도무지 내려가려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한 까닭으로 그는 그곳에 누워 있었다. 죽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개들은 한 마리, 두 마리 문틈으로 빠져나갔다. 다만 털이 빳빳한, 기분 나쁜 표정을 한 한 마리의 개만이 주인 곁에 웅크리고 앉아 굵직한 털복숭이 앞발 하나를 크리스토프 데틀레우의 큼직한 잿빛 손바닥 위에 얹어 놓고 있었다. 하인들도 이제 거의 방을 나가 흰 벽의 복도에 서 있었다. 그곳이 방안보다 밝았다. 그러나 아직도 방안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은 방 한복판에 누운 채 점차 거무스름해져 가는 커다란 덩어리를 이따금 훔쳐보고는, 이제는 적당히 썩은 물건을 가리는 커다란 의복에 지나지 않게 되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목소리였다. 일주일 전까지는 누구 한 사람 들은 적도 없었던 목소리. 왜냐하면 그것은 시종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목소리의 주인은 크리스토프 데틀레우가 아니었다. 그 주인은 크리스트프 데틀레우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크리스토프 데틀레우의 죽음은 벌써 여러 날 전부터 울스고르에서 살면서 누구에게나 말을 걸고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려 갈 것을 요구하고, 푸른 방을 요구하고, 작은 객실을 요구하고, 홀을 요구했다. 개들을 요구하고, 사람들에게 웃고 이야기하고 놀고 조용히 할 것을 요구했으며, 다른 모든 것을 요구했다. 친구를 만나고 싶다, 여자들과 죽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고 요구하고, 자기도 죽고 싶다고 요구했다. 무엇이든 덮어놓고 요구했다. 요구를 하고 그리고는 고함을 질렀다.
밤이 되어 피로에 지친 하인들 중 불침번이 아닌 사람들이 잠을 자려고 하면 그때마다 정해놓은 듯 크리스토프 데톨레우의 죽음이 고함을 질러댔다. 외치고 신음하며 으르렁댔다. 그 목소리는 기다랗게 쉴 새 없이 계속되었으며 처음에는 함께 짖어대던 개들도 끝내는 입을 다물고 드러누울 용기마저 없어 길고 가느다란 다리를 벌벌 떨며 움츠린 채 겁을 집어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외치는 소리가 광활한 덴마크의 은빛 여름밤들을 꿰뚫고 마을사람들에게 드릴 때마다 그들은 폭풍을 만났을 때처럼 후다닥 뛰어 일어나 옷을 입고, 말도 하지 않고 램프 둘레에 둘러앉아 외침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해산이 임박한 여인들은 제일 깊숙한 안방의, 특히 가장 두꺼운 칸막이가 있는 침실에 눕혀졌다. 그래도 외침소리는 들렸다. 그것은 마치 자기 뱃속의 외침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면 그녀들은 자기도 함께 깨어 있겠다고 애원을 하여 큼직한 흰 옷을 입고 나와 표정을 잃은 채 사람들 옆에 앉았다. 마침 그 무렵에 해산 기미가 있는 암소들은 구해줄래야 구해줄 길도 없이 태가 막힌 채였다. 어떤 암소는 아무래도 새끼가 나오지 않아 결국 죽은 태아와 함께 내장까지 후벼내게 되고 말았다. 모두가 일의 절차를 잊어버려 건초를 들여 놓을 시기조차 잊어버렸다. 낮이면 밤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밤은 밤대로 여러 밤 불면이 계속되거나 또는 느닷없이 위협을 받고 일어나곤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완전히 지쳐서 무엇 하나 생각을 정리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일요일, 사람들이 희고 평화로운 교회에 모이면 이제 울스고르에 어르신네는 필요 없습니다, 하고 기도했다. 이 어르신네는 무서운 주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속으로 생각하고 기도한 것을 목사가 꼴사납게 설교단에서 지껄였다. 목사도 밤마다 시간을 빼앗겨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교회의 종도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무서운 강적이 나타나 밤새도록 고함을 질러대는 바람에 종이 주물을 있는 힘껏 울어대 봤자 소용이 없었다. 정말이지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나 다 똑같았다. 젊은이들 가운데는 저택 안에 침입하여 쇠고랑으로 주인님을 때려죽인 꿈을 꾼 자까지 나타났다. 기진맥진하여 극대로 흥분해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젊은이의 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이 사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어른이 되어 있었던가 하고 저도 모르게 그 쪽을 바라보는 형편이었다. 주위 일대에 있는 사람들은 불과 두세 주일 전까지만 해도 시종을 사랑하고 딱하게 생각하고 있던 일을 잊어버리고 누구나가 똑같은 심정이 되어 모이기만 하면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주고받아 본들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크리스토프 데틀레우의 죽음은 울스고르에 살면서 허둥대지 않았다. 죽음은 십 여일 작정으로 찾아와서는 꼭 그만큼만 머물렀다. 그 동안 이 죽음은 일찍이 크리스토프 데틀레우 부릿게가 그러했던 것 이상으로 이곳의 주인이었다. 뒷날까지 두고두고 두려운 폭군이라 전해지는 임금과도 흡사했다.
그것은 일개 수종증에 걸린 사람의 죽음은 아니었다. 시종이 그 일생 동안 지녀왔으며 자기의 피와 살로 키운 것이니만큼 악의에 찬 왕후의 죽음이었다. 그 자신이 그 편안한 날에 다 쓰지 못했던 긍지며 의지며 남은 지배력의 모두가 그 죽음에게로 옮아가 그 죽음이 이제 울스고르에 버티고 앉아 그것을 탕진한 것이었다.
이런 식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 죽어야 한다고 그에게 요구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브릿게 시종관은 어떻게 여겼을까? 그는 실로 힘겹게 죽었다.
내가 나의 눈으로 본 사람, 또 소문으로 들은 사람 등 온갖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모두 다 매한가지인 것이다. 누구나가 저마다 자기의 죽음을 가지고 있었다. 갑옷 속 깊숙이 포로를 포섭하듯이 죽음을 갖고 있던 남자들, 늙어서 조그맣게 시든 몸을, 이윽고 무대를 연상케 하는 어처구니없이 큰 침대에다 눕히고 가족 모두, 하인들, 개들까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그러나 여주인다운 위엄을 갖고 세상을 떠난 여자들, 아니 아이들도, 아직 어린 젖먹이들까지도 어디서나 있는 아이의 죽음은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각오를 하고 이제까지 이루어져 있는 자기라는 것, 그리고 좀더 명이 길었더라면 그렇게 되어 있었을지도 모를 자기라는 것을 포함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죽음을 죽어간 것이다.
그리고 여자들이 임신을 하고 일어설 때, 그것은 그녀들에게 어쩌면 그렇게 슬픈 아름다움을 주는 것인지. 가냘픈 두 손이 저도 모르게 만지고 있던 그 볼록한 뱃속에는 두 개의 과실이 잉태되어 있었다. 태아와 죽음이. 그녀들의 해맑은 얼굴에 떠오른 그 섬세한 미소는 뱃속에 이 두 개의 열매가 자라고 있다고 남몰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공포에 맞서서 무언가를 한 듯했다. 하룻밤 내내 자지 않고 일어나 계속 글을 썼다. 나는 지금 울스고르의 들판을 멀리 걷고 난 뒤처럼 피로하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이 이미 없어지고 그 오래된 기다란 저택에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는 좀처럼 생각할 수가 없다. 지붕 아래 하얀 다락방에는 지금 하녀들이 잠을 자고 있을 것 같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곤한 잠을 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아는 이도 없고 소지품도 없이 트렁크 하나, 책보따리 하나만을 들고 아무런 호기심도 없이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남자가 있다. 집도 없고 유산으로 물려받은 물건도 없고 개도 없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하다못해 추억이라도 가졌더라면. 그러나 누가 추억이라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어린 시절은 있었겠지. 그러나 그것은 땅 속 깊숙이 묻혀져 있다. 그 모든 것에 다다를 수 있게 되려면 아마도 해를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이든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오늘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가을 아침이었다. 나는 튈르리 공원으로 갔다. 동쪽의 태양을 등진 모든 것이 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빛을 받고 있는 쪽은 안개가 자욱이 끼어, 마치 밝은 잿빛 커튼에 싸여 있는 것 같았다. 뜰 안에서는 아직 잿빛 안개 그늘에 잠긴 잿빛 동상이 빛을 받고 있었다. 기다란 화단에 심어진 꽃들이 여기저기서 눈을 뜨고 깜짝 놀란 목소리로 빨갛다 하고 외쳤다. 그때 무척 키가 크고 야윈 사나이가 샹젤리제 쪽에서 모퉁이를 돌아오고 있었다. 사나이는 목발을 옆에 끼고 있었으나 이미 겨드랑이에 갖다 대지도 않고 가볍게 앞으로 내밀며 이따금 의식을 맡아 보는 관리의 지팡이처럼 소리날 만큼 힘을 주어 땅을 짚었다. 사나이는 기쁨을 누를 수가 없어 지나치는 길의 모든 것에, 태양에, 나무에 미소를 보냈다. 사나이의 발걸음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조심스러웠으나 옛날에 걷던 걸음걸이의 추억에 가득 차서 이상하게 가뿐하였다.
저렇게 조그만 달에게 어쩌면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그런 힘이 있는 것일까? 주위의 것 모두가 투명해지고 가벼워져 밝은 대기 속에 보일락말락 흐려졌다가 더욱 뚜렷이 보이는 그런 밤이 있다. 가까이 있는 것이 금방 아득한 색조를 띠고 멀어져가서 다만 그 존재만이 나타날 뿐, 손에는 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아득함과 관계를 갖는 것, 강, 다리, 기다란 거리, 혹은 아낌없이 사방으로 통하는 광장 등이 이 아득함을 배후에 받아들이고 그 위에 마치 비단에 색칠을 한 것같이 그려진다. 그런 때 퐁네프를 건너가는 연두색 마차, 뚜렷이 포착하기 어려운 붉음, 혹은 늘어선 진주빛 집들을 에워싸는 방화벽에 붙어 있는 한 장의 포스터마저도 얼마나 의미로 충만한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모든 것이 단순화되어 마네의 초상화 얼굴처럼 몇 개인가의 정확하고 밝은 면으로 요약된다. 무엇하나 부족하거나 남는 것이 없다.
강가의 헌책 장수가 상자 속의 짐을 펼치고 있다. 가본으로 된 선명한 노랑, 퇴색한 노랑, 장정본의 보랏빛 나는 갈색, 좀 더 큰 화첩의 녹색, 그 모두가 잘 조화되고 어둠에서 전체의 부분이 되어 부족함 없는 하나의 조화를 이루어 낸다.
아래쪽 풍경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자가 밀고 있는 조그만 손수레, 그 앞쪽으로 세로로 실은 손풍금. 그 속에 아직 어린 젖먹이가 모자를 쓰고 좋아하며 발을 버티고 서서 앉으려하지 않는다. 이따금 여자가 손풍금을 돌린다. 그러면 어린아이가 또 바구니 속에서 일어서서 발을 굴러댄다. 초록색 나들이옷을 입은 어린 소녀가 춤을 추면서 위의 창문들을 향해 탬버린을 친다.
보는 법을 배우고 있는 이상, 나는 이제야말로 무엇인가 일을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스물여덟 살, 지금까지 무엇 하나 일다운 일을 하지 않았다. 나는 카르파치오에 대해 논문을 썼지만, 그것은 엉망이었다. 희곡이 하나, (결혼)이라는 제목으로, 잘못된 것은 애매한 방법으로 억지 이론을 붙이려 한 것이다. 그리고 시, 하지만 젊어서 쓴 시란 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기다려야만 한다. 일생 동안, 그것도 되도록 긴 일생을 두고 의미와 감미로움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만이 비로소 훌륭한 몇 줄의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라 감정이 아니라(감정 같으면 처음부터 충분히 갖고 있을 것이다.) 시는 체험인 것이다.
시 한 줄을 쓰기 위해 사람은 많은 도시를 보아야만 하고, 새들이 날아가는 것을 느껴야만 하고, 조그만 꽃들이 아침에 피어날 때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 낯선 고장의 길을, 뜻하지 않은 해후를, 서서히 다가오는 이별을 생각해 낼 수 없어서는 안 된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어렸을 적의 나날을, 기쁘게 해주려고 한 건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 알지 못해 부모에게 상처를 입혔던 것을(다른 아이 같으면 기뻐했을 텐데.), 그토록이나 기묘하게 시작되어 그토록이나 깊고 무겁게 변화했던 어릴 때의 병을, 조용하고 잠잠한 이 방 저 방에서 지낸 나날의 일을, 해변의 아침을 바다 그 자체를, 그 바다 이 바다를 하늘 높이 웅성대며 온 하늘과 별들과 함께 날아간 나그네길의 밤들을 생각해 내지 못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을 상기할 수 있는 건만으로는 아직 충분치 않다. 사람은 수많은 사랑의 밤들의 하룻밤 하룻밤이 각각 달랐던 사랑의 밤들의 추억을, 진통의 괴로움에 헐떡이는 여인들의 외침소리나, 육체가 닫혀지기를 기다리며 잠드는, 가뿐하고 하얗게 잠든 산모에 대한 기억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임종하는 사람들의 머리맡에 있었던 일도 없어서는 안 되며 창문이 활짝 열리고 소리가 멎었다가 다시 나곤 하는 방에 죽은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었던 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더구나 추억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추억이 많아지면 그것들을 잊어버릴 수 없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그 추억들이 망각의 저편에서 다시금 되살아나는 때를 기다리는 깊은 인내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추억 그 자체는 그대로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니까.
추억이 우리들의 내부에서 피가 되고 눈길이 되고 몸짓이 되어 이름이 없어져, 이미 우리들 자신과 구별되지 않는 것이 되는, 그때야 비로소 어떤 지극히 드문 시간에 시 한 줄의 첫 단어가, 그러한 추억들의 중심에서 일어나, 추억 속에서 걸어 나오는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 시는 그 어느 것도 그렇게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가 아니다. 희극을 썼을 때만 해도 나는 글쎄, 얼마나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른다. 서로가 고뇌를 주는 두 인간을 그리려고 하면서 거기에 제삼자를 필요로 한 것은 나도 역시 어리석은 모방자였던 까닭일까? 분별없이 나는 함정에 빠지고 있었다. 세상과 문학의 도처에 횡행하고 있는 제삼자, 끝내 실제로는 존재한 적이 없는 이 제삼자라는 망령이, 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임을 나는 알았어야 했다. 제삼자란, 그 가장 깊숙한 내부의 비밀을 인간들의 눈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항상 애쓰는, 그 자연의 속임수 중 하나인 것이다. 진짜 드라마가 연출되고 있는 것을 숨기는 칸막이인 것이다. 참다운 갈등이 벌어지는 소리 없는 정밀의 입구에서 떠들어대는 소음인 것이다. 문제의 두 사람만 이야기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누구에게 있어서나 너무 어려웠다고 생각된다. 제삼자는 가정의 존재이니 만큼 오히려 과제로서 쉽다. 그런 것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었다. 그러한 희곡에서는 처음부터 벌써 제삼자의 등장을 기다리는 초조함이 느껴진다. 거의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제삼자가 나타난다. 그러면 만사가 잘 진행된다.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일어날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이 정지하고 지체되어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지체와 정지와 수면이 그대로 계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될까, 극작가 선생이여, 그리고 인생에 대해 밝은 관객 여러분이여, 만약 어떤 결혼에도 짝 열쇠처럼 꼭 들어맞는 인기자인 이 방탕아 혹은 불손한 애송이가 소식불명이 되었다면, 예를 들어 그가 악마에게 납치라도 되었다면? 글쎄 그렇게 가정을 해보자. 갑자기 누구나가 다 극장이라는 인공의 공허함을 깨닫는다면, 극장이라는 극장은 위험한 구덩이처럼 판자로 둘러쳐지고 벌레들이나 구분된 관객석에 날아다닐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극작가 선생은 별장에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온갖 공공의 첩보기관이 그들을 위해 세계의 끝까지라도 희곡의 줄거리 그 자체였던 이 둘도 없는 제삼자를 찾아다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이 (제삼자)가 아닌 주요한 두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 섞여 살고 있는 것이다. 많은 말을 할 것 같으나 믿기 어려울 만큼 말을 아끼고 있는 이 두 사람은 고뇌하고 행위하며 자기들을 어떻게 구원해야할지 모른 채로 존재한다.
그것은 우스운 일이다. 나는 작은 방에 앉자 있다. 스물여덟 살이 되었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나, 브릿게가 말이다. 나는 여기에 앉아 있을 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층계를 다섯 개 올라간 방에서 잿빛으로 흐려지는 파리의 어느 오후에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그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생각한다. 이제까지 무엇 하나 참다운 것, 소중한 것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인식하지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사람들이, 사물을 보고 통찰하고 적어두는 것이 몇 천 년에 걸쳐 이루어졌건만, 그 몇 천 년을 마치 버터빵과 사과 한 개를 먹는 초등학생의 점심시간처럼 허무하게 흘러가는 대로 내맡겨 두었다는 일이 대관절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인류는 온갖 발견과 진보를 이루고 문화와 중교와 철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생의 표면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그 표면만 하더라도 어쨌든 무엇인가는 했을 텐데, 믿을 수 없을 만큼 형편없는 천으로 덮여져 마치 여름휴가 동안에만 사람들이 모이는 살롱의 가구처럼 변해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세계의 모든 역사가 오해되어 왔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과거의 모두가 잘못되었다. 길 가다가 쓰러진 남자의 주위에 사람들이 떼를 짓는 바로 그때, 이미 그 남자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죽어 버렸으니까 문제도 되지 않고,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은 오로지 주위의 군중이듯이 과거는 언제나 어중이떠중이에 대해서만 이야기되어 온 것이니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 그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을 낱낱이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누구나 다 지나간 세대의 모든 것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니까 옛날에 일어난 일은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것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참견은 필요 없다고 말하고 돌아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 그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 사람들은 모두가 있지도 않은 과거에 정통해 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현실에 일어난 일은 모조리 그들에게 있어 무의미하며, 그들의 인생은 빈 집에 걸려 있는 시계처럼 무슨 일에도 관여됨이 없이 끝나 버린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 그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지금 살고 있는 소녀들에 대해 무엇 하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여자들)이라고 말하고, (아이들)이라고 말하고, (소년들)이라고 말하지만, 그러한 말이 벌써 오래 전에 복수형을 상실하고 다만 무수한 단수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아무리 교양이 깊더라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 그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이라고 하여, 그것이 무언가 우리들에게 공통된 것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두 초등학생을 보라, 한 명이 먼저 칼을 산다. 그 옆의 다른 한 명도 같은 칼을 산다. 한 주일이 지난 뒤 두 아이는 서로의 칼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칼은 전혀 다르게 변해 있다. 따로따로의 손 안에서 이토록 다른 것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런 때 어느 쪽인가의 어머니가 말할 것이다. 정말 너희들은 무엇이든지 못 쓰게 만들어 버리는구나.) 그리고 또 그렇다. 사용도 하지 않는데 하나님을 가질 수가 있다고 믿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 그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설사 겉으로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때에는 이 세상에 무엇인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불안한 생각을 품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다. 이제껏 등한하게 내버려두었던 일을 완수하기 위해 당장에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별한 인간이 아니더라도 더구나 거기에 가장 적합한 인간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그는 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이 궁극적인 종결점일 것이다.
그때 나는 열두 살인가, 고작해야 열세 살쯤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우르네크로스터에 데려가셨다. 어떻게 아버지가 장인을 찾아갈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이 남자들 두 사람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래 몇 년이나 만나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브라에 백작이 만년에 조용히 은거한 그 오래된 저택을 방문한 적은 그때까지 없었다. 나는 그 이상한 집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조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집은 남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어린 마음에 남은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 집은 도무지 집 같은 모양을 가지지 못했었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서 아주 산산이 흩어져 있다. 여기 방 하나 저기 방 하나, 여기에 복도의 한 부분, 그것도 그 두 방을 연결하는 복도가 아니라 독립된 단편으로 기억된다. 방들, 거창하고 웅장하게 아래층을 통하고 있는 계단, 다른 좁다란 나선형 계단, 그 어두컴컴한 곳을 혈관을 도는 것처럼 지나갔다. 탑 속의 방, 높다랗게 튀어나온 발코니, 조그마한 문에서 밀려나가면 뜻하지 않게 눈앞에 있는 노대. 그런 모든 것이 나의 내부에 지금껏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존재할 것이다. 마치 이 저택 전체가 무한한 높이에서 나의 내부로 추락하여 내 마음 밑바닥에 부딪쳐 부서진 것 같다. 내 마음속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홀뿐이다. 밤마다 7시가 되면 저녁을 먹기 위해서 모두가 그곳으로 모이는 것이 습관이었다.------------------------------------------------ 나는 그 방을 낮에 본 적은 없었다. 창이 있었는지, 창이 어느 쪽을 향해 있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가족들이 그 방에 발을 들여 놓을 때는 언제나 묵직한 나뭇가지 모양의 촛대에 촛불이 타고 있었고, 몇 분인가 지나는 동안 누구나가 지금이 몇 시인지를 잊어버리고 밖에서 본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천장이 높은, 분명 아치형을 하고 있던 그 방은 다른 어떤 방보다 더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어둠을 더하는 천장,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는 네 개의 구석, 그 암흑의 넓이는 사람의 마음에서 온갖 영상을 빨아올리고는 다시 돌려보내 주지 않았다. 누구나가 얼빠진 사람처럼 거기에 앉아 있었다. 의지도 의식도 즐거움도 거부도 완전히 잃고 있었다. 누구나가 공허한 좌석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만 사람을 얼간이로 만드는 이러한 상태는 처음 얼마 동안은 나에게 메스꺼웠다. 배멀미를 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한쪽 다리를 뻗어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무릎에 갖다 대고는 가까스로 그것을 참았다. 아버지는 이 기묘한 행동을 이해해 주었다. 혹은 적어도 참아 주었던 것 같다고, 나는 뒷날에 가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아버지와 나 사이는 거의 냉정하다 해도 좋을 정도였으므로 평소 같았으면 이런 태도를 이해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나에게 긴 식사 시간을 견뎌내는 힘을 준 것은 그 은근한 접촉이었다. 그리하여 몇 주일인지 몸이 자지러지는 듯한 인내를 겪고 나자 나는 어느덧 아이들이 갖는 무제한이라 해도 좋을 순응력 덕분에 기분 나쁜 이 회식에도 익숙해져 두 시간 동안 식탁에 앉아 있는 일에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이제는 거기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데에 열중해 있었기에 두 시간은 상대적으로 더 빨리 지나갔다. 외할아버지는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호칭을 하는 것을 나는 들었는데, 이것은 정말 제멋대로의 말투였다. 왜냐하면 그 네 사람은 서로가 먼 친척 관계였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하나 된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옆에 앉은 백부는 이미 늙은이다. 굳어져서 그을린 얼굴에 몇 군데 검은 점이 있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화약 폭발로 입은 상처라고 했다. 기분이 늘 나쁜 불평장이였던 이 백부는 육군 소령으로 퇴역하여 그때는 이 저택의 내가 알지 못하는 한 방에서 연금술 비슷한 실험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인들이 말하기를 어느 감옥과 연락이 되어 있어 1년에 한 번이나 두 번 그곳에서 시체가 보내져 오면 밤낮없이 며칠이고 시체와 함께 방에 틀어박혀서 그것을 토막 내기도 하고 그것의 부패를 막는 비밀조치를 취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맞은편은 마틸데 브라에 양의 자리였다. 나이를 잘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내 어머니의 먼 친척 동생뻘이었으나, 말을 들으면 놀데 남작이라 자칭하는 오스트리아의 점성술사와 줄곧 편지 교환을 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녀는 그 사나이에게 완전히 반해 있어 미리 그의 동의라기보다 축복 같은 것을 받지 않는 한,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손을 대지 않는다고 했다. 그 무렵엔 유난히 뚱뚱해서 부드럽고 나른하게 풍만한 육체가, 헐렁하고 밝은 옷 속에, 말하자면 꾸밈새 없이 쏟아 넣어진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녀의 행동은 나른해 보여 분명치가 않고 그 눈에는 언제나 눈물이 어려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겐, 어딘지 모르게 나의 어머니의 부드럽고 가냘픈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 있었다. 그녀를 보면 볼수록 세상을 떠난 이래 뚜렷이 생각나지 않던 어머니의 아름다운 은근한 모습을 그 표정에서 남김없이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마틸데 브라에와 날마다 얼굴을 마주 보게 된 그때, 나는 다시금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아니, 그때 비로소 알았다고 하는 편이 좋을는지도 모른다. 토막토막으로 남아있던 죽은 사람의 인상이 이제 겨우 내 마음속에서 하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그 모습은 이제 어디로 가나 내게서 떠나지 않는다. 뒷날에 가서, 브라에 양의 얼굴에는 실제로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의 하나하나가 남김없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을 분명히 알았다. 다만, 그 이목구비 사이에 나타난, 눈에 익지 않은 또 하나 얼굴 때문에 그 특징의 어느 것이나 모두 산산이 사이가 뜨고 비뚤어져 서로가 연결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부인 옆에는 친척뻘 되는 어느 여자의 어린 아들이 앉아 있었다. 나와 거의 비슷한 나이의 소년이었으나 나보다 키가 작고 연약했다. 주름장식이 달린 것에서 가느다란 창백한 목이 내다보이다가 기다란 턱 밑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입술은 얄팍하고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콧방울이 살짝 떨렸으며 아름다운 암갈색 눈은 한쪽밖에 움직이지 않았다. 이따금 조용히 슬픈 듯이 내 쪽을 바라보았으나 움직이지 않는 쪽의 눈은 누군가에게 팔아 버려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그런 모습으로 늘 같은 한구석으로 향해진 채였다. 식탁의 맨 윗자리에는 조부의 무척이나 큰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단지 그 일만이 소임인 하인이 그 의자를 조부를 위해 당겨서 권하는 것이었으나, 노인은 그 속에 불과 얼마 안 되는 자지를 차지할 따름이었다. 귀가 먼 이 거만한 늙은 신사를 각하니, 외전관이니 하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장군이라고 부르는 자도 있었다. 확실히 그는 이 칭호를 어느 것이나 다 갖추고 있었으나 관직을 물러난 지 벌써 꽤 오래되므로 이제는 어느 호칭도 이해가 가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졌다. 나는, 조부처럼 어떤 때는 몹시 명료해지는가 하면 금방 또 애매해져 버리는 인품에는 도대체 일정한 명칭이 고정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나를 친절하게 가까이 불러서 내 이름에 이상야릇한 억양을 붙이고는 재밌어하기도 했으나, 나는 아무래도 외할아버지라고 부를 결심이 생기지 않았다. 어쨌든 가족의 누구나가 다 일종의 외경과 두려움이 뒤섞인 태도로 백작을 대하고 있었는데 에릭 소년만은 이 늙은 가장과 어떤 친밀한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그의 움직이는 쪽의 눈이 이따금 외할아버지의 동의를 쏜살같이 구했고, 그러면 외할아버지도 역시 쏜살같이 응답하곤 했다. 또 지루하게 계속되는 오후 같은 때, 깊숙한 회랑 너머에 두 사람이 나타나 손을 마주 잡고 거무스름한 오래 된 초상화 앞을 걸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말을 주고받고 있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다른 몸짓으로 서로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거의 온종일 정원이나 저택 밖의 너도밤나무 숲이나 들에 나가 지냈다. 다행히도 우르네크로스터에는 개가 있어 나를 따라다녔다. 군데군데 소작인의 농가나 낙농장이 있어 거기에 가면 우유나 빵이나 과일을 얻어먹을 수가 있었다. 나는 나의 자유로운 시간을 마음껏 즐긴 것으로 기억한다. 적어도 나머지 몇 주일은 저녁식사 모임을 생각하고 불안해하는 일도 없었다. 나는 누구하고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혼자 있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었다. 다만 개들하고는 짧은 말을 나누는 일이 있었다. 그들하고는 특히 기분이 잘 통했던 것이다. 말이 적은 것은 원래 우리 집의 특징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그랬으며 나도 그것에는 익숙해 있었다. 그러므로 만찬을 하는 동안 거의 이야기 같은 이야기가 교환되지 않아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마틸데 브라에가 굉장히 수다스럽게 굴었다. 아버지에게 외국의 되에 k는 옛 친지들의 소식을 묻고, 먼 옛날을 회상하며 죽은 여자 친구들이나 또는 남자들을 생각해 내고 눈물을 흘릴 만큼 복받쳐했다. 그녀의 이야기에서 짐작하건대 그 남자 쪽에서는 그녀를 사랑했는데, 그녀는 그 열렬한 짝사랑에 응하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예의바르게 귀를 기울이며 이따금 동의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극히 필요한 말만 대답하고 있었다. 백작은 식탁 윗자리에서 입술을 축 늘어뜨린 채 연방 미소 짓고 있었으나 그 얼굴은 여느 때보다 크게 보여 탈이라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자신도 이따금 말참견을 했다. 그 목소리는 누구에게 향해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무척 나직했던 그 목소리는 홀 구석구석까지 들렸다. 어딘지 한결같이 무관심하게 시간을 새기는 듯한 시계의 걸음걸이와도 흡사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에워싸는 정적에는 어떤 음절에도 항상 변함없는 일종의 독특한 허허로운 반향이 따르는 느낌이었다. 브라에 백작은 아버지에게 그의 죽은 아내, 즉 나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특별한 예의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녀를 시빌레 백작 부인이라 부르며 무엇인가 말을 끝낼 때마다 그 소식을 묻는 투가 되었다. 왠지 나는 화제에 오르고 있는 사람이 순백의 의상을 입고 있는 아직도 어린 어떤 소녀처럼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그 방에 들어오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될 만큼. 그가 이 말과 똑같은 어조로 (우리들의 귀여운 안나 소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어느 날 조부가 특별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 이 소녀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조부가 말하고 있는 것은 재상 콘라드 레벤틀로우의 딸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는 신하의 신분으로 고 프리드리히 4세와 결혼을 했고, 벌써 150년 전에 로스킬데에 묻힌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시대의 순서 따위는 외할아버지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죽음은 사소한 우연으로 완전히 무시되었다. 일단 추억 속에 깃든 인물은 언제까지나 계속 존재하였으며 죽더라도 사태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몇 년 뒤, 그것은 그 늙은 주인이 세상을 떠난 뒤의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가 미래의 일도 이것과 똑같은 완고함으로 현재의 일로서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말했다. 어느 때 그는 젊은 부인을 보고, 그녀의 아들의 일을, 특히 그 가운데 한 사람의 여행에 대한 것을 이것저것 이야기해다는 것이다. 젊은 부인은 마침 첫 아이를 임신한지 겨우 3개월째여서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거의 실신할 지경이 되어 노인 곁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내가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발단이었다. 나는 큰소리로 웃어댔는데, 나 자신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밤 마틸데 브라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늙어서 이제 완전히 장님이 되다시피 눈이 먼 급사가 그녀 자리에 오자 걸음을 멈추고 상대도 없는데 요리 그릇을 내밀었다. 한참 동안 그 자세대로 있다가 이윽고 그는 만족스러운 듯이 위엄을 보존하고 여느 때와 같다는 태도로 앞으로 나갔다. 나는 이 광경을 관찰하고 있었다. 보고 있는 동안은 우습지가 않았다. 그런데 한참이나 지나 음식을 한입 입에 집어넣는 순간 생각지도 않은 큰 웃음이 치밀어 올라 그만 나는 사레가 들렸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어떻게든지 침착 하려고 애를 썼으나 웃음은 여전히 솟구쳐 올라 나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실수를 얼버무리려고 그랬었는지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로 “마틸데 양은 기분이 좋지 않은가요?”하고 물었다. 조부는 언제나처럼 독특한 미소를 띠었으나 이윽고 무엇인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나는 나의 실수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에 잘 듣지 못했으나 “아니, 크리스티네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뿐일 거요.”하고 말한 것 같았다. 그러자 내 옆자리의 갈색 얼굴빛을 한 소령이 일어서서 무언지 분명치 못한 말로 백작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홀을 나가 버렸다. 그것이 조부의 말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만 그가 조부의 등 뒤에 있는 문께에서 다시 뒤돌아보고 에릭 소년에게, 그리고 또 굉장히 놀랍게도 나에게까지 손짓, 고갯짓을 하며 따라오라는 듯한 몸짓을 한 것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웃음을 뚝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뿐, 소령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소령이 좋지 않았고, 에릭도 그를 무시하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식사는 평소처럼 천천히 진행되었는데 마침 디저트가 나오려 할 때였다. 나의 시선은 홀 안쪽의 컴컴한 데서 일어난 움직임에 붙잡혀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다락으로 통하고 있다고 들은 문이, 나는 그곳에는 항상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줄만 알았는데, 그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호기심과 경악이 뒤섞인, 이제까지 느껴본 적 없는 심정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윽고 빠끔히 입을 벌린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의상을 입은 호리호리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나 천천히 우리들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내가 몸을 움직였는지 비명을 질렀는지 기억이 없다.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에 가까스로 나는 이 무시무시한 모습에서 눈을 돌렸다. 보니 아버지가 의자에서 일어나 죽은 사람처럼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움켜쥔 두 손을 늘어뜨리고 여자 쪽으로 다가가려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자는 이러한 광경을 거들떠보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들 쪽을 향해 움직여 이미 백작의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와 있었다. 그러자 백작은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아버지의 팔을 움켜잡고 식탁으로 다시 끌고 와서 그대로 붙잡고 있었다. 그 동안 낯선 여인은 천천히 주위에는 전혀 무관심하게, 이제는 누구 하나 방해하는 사람도 없는 홀을 가로질러 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 표현할 수 없는 정적 속을 지나갔다. 다만 어디선지 유리잔 하나가 떨면서 울리고 있었다. 여자는 방의 반대쪽 벽의 문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나는 낯선 여인의 뒤에서 몸을 깊숙이 구부리면서 그 문을 닫는 것이 에릭이라는 것을 알았다. 식탁에 앉은 채로 있었던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마치 뿌리가 박힌 듯이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으므로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 막연히 허공을 바라보았다가 문득 아버지의 일을 머리에 떠올렸다. 나는 노인이 아직도 아버지의 팔을 잡은 채로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은 이제는 노여움 때문에 시뻘게져 있었으나 외할아버지는 사나운 날짐승의 하얀 발톱처럼 손가락을 세워 아버지의 팔을 움켜잡은 채, 그 탈바가지 같은 언제나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무엇인가 말하는 것이 들렸다. 한마디, 한마디 잘라가며 하는 그 말의 뜻을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나의 청각에 깊숙이 배어 있었던 모양이다. 2년 전 즈음 어느 날 나는 그 말을 기억의 밑바닥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그것을 잊을 수 없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당신은 과격한 사람이오, 시종, 그리고 무례합니다. 왜 저마다의 사람에게 볼 일을 보게 내버려두지 않습니까?” “저건 누굽니까?” 아버지의 질문이 채 끝나기 전에 그가 외쳤다. “여기 있어도 괜찮을 여잡니다. 남이 아닙니다. 크리스티네 브라에입니다.” 그러자 또 그 기묘한 엷은 정적이 흘렀다. 또다시 유리잔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단숨에 팔을 뿌리치고 홀에서 달려 나갔다. 나는 아버지가 밤새도록 자기 방을 돌아다니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잠을 잘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벽녘 가까이 그래도 얼마간 잠이 들었던 나는 갑자기 눈을 떴는데 무언가 허연 것이 내 침대에 앉아 있는 것을 깨닫고 심장이 멎을 만큼의 두려움을 느꼈다. 이제 틀렸어, 하고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머리를 이불 속에 틀어박았다. 불안한 나머지 나는 그대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울부짖고 있는 눈앞이 서늘하게 밝아졌다. 나는 아무 것도 보지 않으려고 눈물이 흐르는 대로 두 눈을 꽉 감았다. 그러나 그때, 바로 가까이에서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가 내 얼굴에 와 닿았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는데, 바로 마틸데 양의 목소리였다. 나는 금방 안심했으나 울음을 완전히 거두고 나서도 한참 동안 위로하는 대로 맡겨두고 있었다. 이 상냥함은 너무 달콤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래도 기분이 좋아 그대로 응석을 부리면서, 왜 그런지 그런 위로를 받아도 괜찮을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줌마.” 나는 말하면서 그녀의 멍한 얼굴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찾아내려고 했다. “아줌마, 그 사람은 누구에요?” “아, 그건 말야,” 브라에 양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불쌍한 여자란다. 아가야, 불쌍한 여자란다.” 그날 아침 나는 방에서 짐을 꾸리고 있는 하인들의 모습을 보았다. 돌아가는 모양이구나 하고 짐작하고 지금 떠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날 밤 이후, 아버지가 여전히 우르네크로스터에 머물 작정을 한 것이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끝내 물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들은 떠나지 않았다. 다시 8주인지 9주일, 우리는 저택에 머무르면서 그 집의 짓누르는 듯하고 답답한 온갖 무서움을 참았고, 크리스티네 브라에를 세 번 더 보았을 뿐이었다. 그 당시 나는 그녀의 신상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먼 옛날 두 번째 아이를 낳고 죽었으며, 그때 태어난 사내아이는 자라서 불길하고 끔찍한 불운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기질이 과격하고 사물의 도리와 명확함을 존중한 아버지였으나 이 이상한 일에 한해서만은 자제를 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참으려고 스스로에게 강요했던 것일까? 나는 이해하지 못한 채 아버지가 고민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끝내 극기하는 모습역시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지켜보았다. 그것은 우리들이 크리스티네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였다. 이때는 마틸데 양도 식탁에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는 여느 때와 달랐다. 우리들이 이곳에 온 처음 무렵처럼 줄곧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지껄여댔다. 지껄이면서도 신경이 가라앉지 않는 모양인지 연방 머리나 옷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별안간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며 자취를 감추었다. 그 순간, 나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그 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과연 크리스티네 브라에가 나타나는 참이었다. 옆 자리의 소령이 심하게 몸을 떨었다. 몸의 떨림이 나에게 옮아왔다. 그러나 그는 일어설 기력마저 잃은 것 같았다. 그는 점투성이의 늙은 갈색 얼굴을 돌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차례차례 훑어보았다. 입은 벌린 채여서 굳어진 혀가 썩은 이빨 뒤에 엿보였다. 별안간 이 얼굴이 사라졌다. 그의 잿빛 머리만이 식탁에 엎어져 있었다. 두 팔은 산산히 떨어진 것처럼 하나는 식탁 위에 놓이고 하나는 식탁 밑으로 떨어졌는데, 말라빠진 기미투성이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막, 크리스티네 브라에가 지나가려 하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병자처럼 천천히 이루 말할 수 없는 침묵 속을 지나가는 참이었다. 잠잠한 방안에 늙은 개의 끙끙대는 소리와도 흡사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수선화를 가득 담은 백조모양의 커다란 은그릇 왼쪽에 나타난 것은 언제나의 잿빛 미소를 띤 노인의 가면이었다. 노인은 와인 잔을 아버지를 향해 쳐들었다. 그래서 크리스티네 브라에가 아버지의 의자 뒤로 막 지나갔을 때, 아버지는 술잔에 손을 뻗쳐 무언가 몹시 무겁다는 듯이 책상 위 한 뼘 정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 밤 길을 떠났다. 국립도서관에서 나는 앉아서 어느 시인의 글을 읽고 있다. 열람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런 느낌은 전혀 안 든다. 누구나 책에 파묻혀 있다. 이따금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도 있다. 자다가 꿈과 꿈 사이에서 몸을 뒤척이는 사람처럼. 책을 읽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모르겠다. 왜 사람들은 언제나 그러지 않을까? 누구에게라도 좋으니 다가가서 살며시 건드려 볼 수도 있다. 상대는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다. 또는 일어나려다가 옆자리 사람에게 살짝 부딪쳐 사과를 하면, 상대는 고개만 끄덕일 뿐, 몸을 돌리거나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의 머리칼은 자고 있는 사람의 머리칼 같다. 얼마나 마음이 편안한가 말이다. 나는 이렇게 여기 앉아 한 사람의 시인을 갖고 있다. 이 무슨 기이한 운명인가. 열람실에는 대략 3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누구나가 책을 읽고 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한 사람씩의 시인을 가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무엇을 갖고 있는지 누가 알 것인가) 3백 명이나 되는 시인이 있을 리는 없다. 그러나 글쎄 이게 무슨 기이한 운명일까. 바로 내가, 여기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아마 제일 비참하고 더구나 외국인인 내가, 한 사람의 시인의 글을 읽고 있다니. 가난한 나, 옷은 매일 입어 여기저기 해지기 시작했고 구두 역시 닳고 낡아빠졌다. 분명 내 옷깃은 깨끗하고 속옷은 청결하다. 이대로 어느 카페라도, 번화가의 카페에라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손은 주저 없이 과자 그릇에서 과자 한두 개를 집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고, 나를 나무라거나 쫓아내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이건 가문 좋은 사람의 손이다. 하루에 네댓 번은 씻고 있는 손인 것이다. 손톱은 정갈하고, 펜을 잡는 손가락에는 잉크가 묻어 있지 않다. 특히 손목은 더할 나위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거기까지 잘 씻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청결함으로부터 어떤 결론을 끄집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상점에서는 흔히 그런 방법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생 미셸 거리나 라신 거리에 가면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손목의 청결함 같은 것은 비웃어 버리는 패들이 있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내 사정을 알아본다. 나는 원래 그들과 동류지만 다만 희극을 조금 연출하고 있을 뿐이란 걸 알아채는 것이다. 마침 사육제 기간이다. 그들은 나의 즐거움을 망가뜨리지 않으려고 한다. 입을 조금 삐죽이고 히죽 웃으며 눈을 찡긋해 보인다. 그것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밖의 점에서는 그들은 나를 의젓한 신사로서 대우한다. 곁에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공손하게 인사까지 해 보인다. 마치 모피코트를 입고 자가용 마차를 뒤따르게 하고 걷는 사람에게 하듯이. 그들에게 동전 두 닢을 줄 때도 있지만 그런 때 나는 거절당하지 않을까 하고 불안해한다. 분명히 받기는 한다. 다만 그런 뒤에 다시 입을 삐죽이며 히죽 웃고는 눈을 찡긋한다. 그것만 없다면 이쪽도 지극히 편한 기분으로 있을 수 있으련만. 이 사람들은 어떤 자들일까?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는가? 확실히 나의 수염은 다소 텁수룩하게 보여서 조금, 아주 조금 그들의 병들어 보이고 늙어서 빛바랜 수염을 연상시키게는 한다. 그러나 수염의 손질을 하건 말건 내 자유가 아닌가? 바쁜 사람이란 대개 그럴 수 있고, 그런다고 해서 아무도 그 사람을 실패한 사람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아니, 나는 알고 있다. 그 패거리야말로 거지일 뿐만 아니라 패배자인 것이다. 아니, 그들은 결코 거지가 아니었다. 이것을 분명히 구별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쓰레기다. 운명이 뱉어버린 인간의 찌꺼기다. 운명의 타액에 젖어 그들은 담에, 가로등에, 광고탑에 철썩 달라붙고 또는 뒷골목을 축축하게 흘러가며 시커멓고 더러운 자국을 남긴다. 대관절 그 노파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말할 작정이었을까? 단추며 바늘이 몇 개 굴러 있는 침실용 테이블의 서랍을 빼어 들고, 어딘가의 움막에서 기어 나온 그 노파는? 왜 언제까지나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찬찬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곪아서 짓무른 눈으로 나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하는 것 같았고 그 눈은 마치 병자의 가래를 충혈 된 눈꺼풀 속에 뱉어 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키가 작은 회색 머리의 여인은 왜 15분 동안이나 쇼윈도 앞에 선 내 곁에 붙어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기형적으로 생긴 두 손에서 삐져나온 기다란 헌 연필을 하나를 무척 느릿느릿 내밀어 보였다. 나는 쇼윈도 안의 장식된 물건들을 보느라고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하는 척했다. 그러나 여자는 내가 자기를 보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선 채로, 사실은 여자의 행동에 생각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신호이다. 패배자들이라면 곧 알아 챌 수 있는 신호임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여자는 나에게 아무데로나 가라, 무엇인가를 해라, 하고 암시하고 있었고, 나는 그 암시를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상했던 것은, 정말 무슨 사전에 약속이 있으며, 이 신호는 미리 정해진 것이고, 이 장면도 사실은 내가 기대했던 것이란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점이다. 이것은 이 주일 전의 일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이런 종류의 사건에 부딪치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녁 무렵이거나, 대낮에 사람이 들끓는 길거리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몸집이 작은 사나이, 또는 늙은 여자가 느닷없이 나타나 고개를 끄덕이고 나에게 무엇인가를 보이고 이것으로 필요한 일은 모두 끝났다는 듯이 자취를 감춘다. 그들은 내 방까지 쫓아올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내가 살고 있는 곳 정도는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문지기에게 들키지 않고 지나가는 요령도 알고 있을 것이다.나는 다소 겁을 먹고 거리를 걷는다. 그러나 일단 이곳의 유리문 앞에 서기만 하면 나는 내 집에 돌아온 듯한 기분으로 그것을 열고 다음 문간에서 내 카드를 내보인다. (정말이지, 그들이 나에게 자신이 가진 물건을 보이는 것과 같은 식이다. 하지만 곧 상대가 내 기분을 이해하고 알아주는 점이 다르지만) 이윽고 나는 이 책들 사이에다 몸을 묻고 마치 죽어버린 사람처럼 그들로부터 풀려나 한 사람의 시인을 읽는 것이다. 그대들은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하는가? 베를렌느 정도는 알까? 전혀 모른다고?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럴 것이다. 당신들은 알고 있던 사람과 이 시인을 구별한 적이 없었겠지. 도대체 당신들은 구별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읽고 있는 것은 다른 시인이다. 파리에는 살고 있지 않는 전혀 다른 시인이다. 산 속에 조용한 집을 갖고 있는 시인인 것이다. 이 사람의 울림은 맑디맑은 종소리 같다. 자기 방의 창문에 대해 이야기하고, 호감이 가는 고독한 풍경의 펼쳐짐을 생각이 잠긴 듯이 비추고 있는 책장의 유리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행복한 시인. 나 자신이 그렇게 될 수만 있기를 바라마지 않던 그런 시인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소녀들에 대한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나도 그녀들의 일이라면 여러 가지로 알고 싶었다. 이 사람은 백 년전에 살았던 소녀들의 일을 알고 있다. 오래 전에 죽어 버렸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모든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는 처녀들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한다. 가늘고 긴, 오래된 듯한 꽃글씨로 가냘프게 써진 은밀한 울림의 이름, 또 그녀들보다 다소 손위의 여자 친구들의 결혼 후 이름, 환멸과 죽음의 그림자가 그 울림 속에 섞어 아련하게 들리는 어른스러운 이름 등을. 아마 그의 마호가니 책상 서랍에는 그녀들의 색이 바랜 편지며 일기장의 몇 페이지(철한 곳이 풀려진)인가가 간직되어 있을 것이다. 또 침실 안에 놓인 볼록한 오동장롱에는 그녀들의 봄옷을 넣어 놓은 서랍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활제 때 처음으로 입은 순백의 의상, 얼룩무늬의 망사비단으로 된, 사실은 여름 것인데 기다릴 수가 없어 입어 버린 의상 등. 오오, 얼마나 행복한 운명인가. 선조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집의 조용한 방에 차분한 옛날 그대로의 가구들만으로 둘러싸여 앉아서 창 밖 화창한 연두색 뜰에 올해 들어 처음 박새가 서투르게 우는 소리와 멀리 마을의 시계가 때를 알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 오후의 따뜻한 햇살의 줄무늬에 눈길을 멈추고, 옛날 소녀들에 대한 것을 많이 알며, 그리고 시인이라는 것, 이렇게 하고 있으면 나도 이 세상 어딘가에, 예를 들어 누구 하나 돌보는 사람 없는, 흔히 있는 못질된 어느 산장 같은 데라도 살 수 있었다면 그런 시인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박공이 있는 지붕 밑의 밝은 다락방이라도) 그 방에 들어앉아 나는 오래된 가구, 가족의 초상, 몇 권인가의 책과 함께 지냈을 것이다. 하나의 안락의자, 화초, 개, 그리고 자갈길을 산책할 때 짚는 지팡이, 그런 것만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 없을 것이다. 다만 상아빛 가죽 장정의 오래 된 꽃무늬를 찍은 표지의 노트가 한 권 있으면 거기다 나는 써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온갖 생각과 많은 사람들의 추억을 가졌을 테니까. 그러나 나의 생활은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아는 것이다. 나의 낡은 가구는 창고에서 썩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슬프게도 몸을 뉘이고 비를 피할 곳도 없다. 가끔 나는 세느 거리 근처에 들어선 조그만 점포 앞을 지난다. 가게 진열장에 물건을 잔뜩 쌓아올린 골동품 가게나 조그마한 헌 책방, 동판화 가게, 그러나 가게로 들어가는 사람은 없다. 가게 안을 들여다보면 틀림없이 주인이 앉아 있다. 한가롭게 앉아서 책을 읽다 내일을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팔리지 않는 것을 신경 쓰지도 않는다. 주인 앞에 기분 좋은 듯이 개가 앉아 있다. 또는 고양이가 책이 나란히 꽂혀 있는 책장 앞을 훌쩍 지나간다. 문득 책 표지에 새겨진 글씨가 지워지는 것 같아, 그것이 고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더욱 깊게 한다. 아, 그렇게만 되었으면. 나는 종종 진열장이 가득한 곳의 가게를 한 20년쯤 개와 함께 틀어박혀 있었으면 하고 소망하곤 한다. “아무 것도 아니었어.”하고 큰 소리로 말해 본다. 그것도 좋겠지. 다시 “아무 것도 아니었어.”하고. 허나 보람이 있을까? 또다시 난로에서 연기가 나서 나는 밖으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특별히 불행한 일은 아니다. 피로해서 감기기운이 있는 것도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온종일 뒷골목을 쏘다닌 것도 내 탓이다. 그럴 마음만 있으면 루브르 박물관에 앉아 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 역시 그렇게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곳에는 거기대로 몸을 녹이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벨벳을 덧씌운 의자에 앉아 스팀의 격자위에 두 다리를 걸쳐 놓고 있다. 마치 큼직한 빈장화가 나란히 놓인 것 같다. 훈장을 잔뜩 단 검은 제복을 입은 감시원들이 잠자코 묵인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는 아주 얌전한 사나이들이다. 그런데 내가 들어가면 이 패거리들은 빙긋 웃는다. 입을 실룩이며 웃으며 고개까지 약간 끄덕여 보인다. 그리고 내가 그림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노려본다. 혼탁한 눈으로 언제까지나 집요하게 내 모습을 살피는 것이다. 루브르에 가지 않았던 건 잘한 일이었다. 나는 계속 돌아다녔다. 얼마나 수많은 도시를, 거리를 묘지를, 다리를, 그리고 골목길을 돌아다녔는지 모른다. 어디서였던가, 나는 한 사나이를 보았다. 사나이는 야채수레를 밀고 있었다. 슈플뢰르, 슈플뢰르 하고 외치고 있었다. 그 사람은 구슬프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나이 곁에 성격이 모나 보이고 못생긴 여자가 붙어 있으면서 이따금 사나이를 쿡쿡 찌르자 사나이가 외쳤다. 자시 쪽에서 외치는 일도 있었으나 그것은 헛일이라 곧 다시 외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줄 만한 집 앞에 왔기 때문이었다. 그 남자가 장님이었다고 내가 말했던가? 아직 말하지 않았다면, 그 남자는 장님이었다. 사나이는 장님이었고 그리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사나이가 밀고 있던 수레에 대한 말을 빼놓았고, 슈플뢰르(양배추)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던 일도 깨닫지 못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일일까? 설사 중요한 일이라 할지라도 이 일 전체가 나에게 있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게 문제가 아닐까? 나는 한 늙은 남자를 본 것이다. 남자는 장님이었고 소리치고 있었다. 내가 본 것은 그것이었다. 그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런 집이 있다는 걸 사람들은 믿을까? 아니 또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야 말로 있는 그대로이다. 무엇 하나 빼지도 않고 물론 무엇 하나 덧붙이지도 않는다. 덧붙인다고 하지만 어디서 그것을 갖고 올 수가 있겠는가? 내가 무일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 않은가. 누구나가. 집이라고 했던가?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은 이미 집의 형체를 잃어버린 집들이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부서진 집이었다. 거기에 남은 것이라곤 옆에 서 있던 높다란 옆집뿐이었다. 그 옆에 있던 모든 집이 헐리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보였다. 기와 조각이 흩어진 집터와 앙상하게 드러난 벽과의 사이에 콜타르를 칠한 기다란 기둥의 뼈대가 비스듬히 박혀 있고 그것을 가까스로 받치고 있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벽에 대한 것이라고 처음에 말을 했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 벽은 거기 남아 있는 집들의 맨 앞의 벽(이라고 누구나가 생각하겠지만)이 아니고, 예전에 있던 집들의 마지막 벽인 것이다. 그 안쪽을 보았다. 각 층계마다 벽이 보이고 있었다. 거기에는 아직도 벽지가 붙어 있고 여기저기 바닥과 천장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방 벽과 더렵혀진 허연 공간이 가지런히 벽 전체에 걸쳐 남아 있고, 그 벽면을 꿰뚫고 말하기도 꺼림칙한 구더기처럼 징그러운, 말하자면 흡사 꿈틀거리는 내장과 같은 움직임을 보이며 녹이 슬어 노출된 화장실의 녹슨 파이프관이 삐져나와 있었다. 석탄가스 자국은 먼지가 낀 잿빛 힘줄이 되어 천장 테두리에 남아 있었으며 그 흔적은 여기저기에서 뜻하지 않는 구불거림을 보이다가 변색한 벽이나 거무튀튀하게 뚫린 구멍 속으로 빨려가기도 했다. 특히 잊을 수가 없는 것은 벽 그 자체였다. 각기 방마다의 끈질긴 삶은 결코 짓밟혀 없어지지 않았다. 삶은 아직도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튀어나온 못에 매달려 있는 듯싶었고 한 뼘 정도 남은 마루 조각에 눌어붙어 다소나마 아직 실내에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삶은 그것이 여러 해 되는 동안 서서히 변색시켜 온 벽의 빛깔 그 자체에 스며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푸른색의 곰팡이가 녹색으로, 녹색은 회색으로, 노란색은 오래되어 변질된 흰색으로, 해마다 조금씩 변화되어 왔다. 그러나 거울이나 그림, 장롱이 있던 뒷면처럼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된 곳에도 삶이 있었다. 가구들의 윤곽을 긋고, 또 다시 고쳐 그어 거미줄과 먼지와 함께 이 물건 뒤에 감춰져 있다가 지금에서야 드러나게 된 벽지에도 삶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삶은 벗겨진 벽 판자 하나하나에도 남아 있고 벽지 아래 끄트머리에 생긴, 습기가 차 불룩하게 부푼 곳에도 살고 있었다. 찢어진 벽지 위에서 펄럭이고, 오래 전에 생긴 더러운 얼룩에서 땀처럼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에는 파랑이나 초록이나 노랑이었던 벽, 지금은 흔적을 남겼을 뿐 부서진 각각의 칸막이벽에서는 그러한 삶의 숨결이 어떤 바람도 날려버릴 수 없는 끈덕진 곰팡내와 독기가 되어 피어오르고 있었다. 거기에는 가지가지의 대낮의 냄새와 질병의 냄새와 사람들이 뿜어낸 가스와 오랜 세월의 연기, 겨드랑이 밑에서 배어나와 옷을 축축이 적시는 땀, 입에서 내뱉는 맥 빠진 말과 더러운 발에서 나는 싸구려 술 냄새가 풍겼다. 코를 찌르는 오줌 냄새와 불타는 매연과 오래된 기름의 끈적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젖먹이 어린아이에게서 나는 달콤하고 진득한 냄새,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의 불안한 냄새, 어른이 된 소년들의 침대에서 발산되는 음울한 냄새가 있었다. 거기에는 온갖 고약한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거리의 심연에서 무슨 냄새가 피어오르고 위에서는 거리에 내리는 더러워진 비와 함께 떨어지는 냄새가 있었다. 언제나 이 골목 안에 머물고 있는 가축처럼 길들여진 연약한 바람이 나르는 냄새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고,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냄새도 있었다. 이 마지막 벽을 남겨 놓고 다른 것은 모두 부서졌다고 아까 말했던가? 내가 길게 말하고 있는 것은 모두 이 벽에 관한 일인 것이다. 꽤 오래 그곳에 서 있었을 거란 말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맹세해도 좋지만 나는 이 벽을 보자마자 뛰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벽을 인식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이 거리의 모든 것을 알아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도 염치없이 내 속으로 들어와 나의 내부에 살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뒤 나는 다소 피로해 있었다. 쇠약해져 있었다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그 사나이에게 잠복대개 당했다는 것은 나로서는 가혹한 일이었다. 사나이는 내가 달걀 프라이라도 두 개쯤 먹으려고 들어간 조그만 간이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배가 고팠다. 하루 종일 음식을 먹지 않고 있었다. 헌데 이번에도 식욕이 사라져 계란이 채 익기도 전에 무엇인가에 쫓기듯 거리로 뛰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리는 어디나 사람 무리의 두꺼운 흐름이 되어 나를 향해 밀어닥치고 있었다. 사육제의 밤인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한가로이 속삭이며 걸었고 서로 몸이 스칠 정도로 북적댔다. 그들의 얼굴은 극장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가득 받았으며, 그 입에서는 마치 벌어진 상처에서 고름이 흘러나오듯 웃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에는 파랑이나 초록이나 노랑이었던 벽, 지금은 흔적을 남겼을 뿐 부서진 각각의 칸막이벽에서는 그러한 삶의 숨결이 어떤 바람도 날려버릴 수 없는 끈덕진 곰팡내와 독기가 되어 피어오르고 있었다. 거기에는 가지가지의 대낮의 냄새와 질병의 냄새와 사람들이 뿜어낸 가스와 오랜 세월의 연기, 겨드랑이 밑에서 배어나와 옷을 축축이 적시는 땀, 입에서 내뱉는 맥 빠진 말과 더러운 발에서 나는 싸구려 술 냄새가 풍겼다. 코를 찌르는 오줌 냄새와 불타는 매연과 오래된 기름의 끈적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젖먹이 어린아이에게서 나는 달콤하고 진득한 냄새,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의 불안한 냄새, 어른이 된 소년들의 침대에서 발산되는 음울한 냄새가 있었다. 거기에는 온갖 고약한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거리의 심연에서 무슨 냄새가 피어오르고 위에서는 거리에 내리는 더러워진 비와 함께 떨어지는 냄새가 있었다. 언제나 이 골목 안에 머물고 있는 가축처럼 길들여진 연약한 바람이 나르는 냄새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고,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냄새도 있었다. 이 마지막 벽을 남겨 놓고 다른 것은 모두 부서졌다고 아까 말했던가? 내가 길게 말하고 있는 것은 모두 이 벽에 관한 일인 것이다. 꽤 오래 그곳에 서 있었을 거란 말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맹세해도 좋지만 나는 이 벽을 보자마자 뛰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벽을 인식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이 거리의 모든 것을 알아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도 염치없이 내 속으로 들어와 나의 내부에 살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뒤 나는 다소 피로해 있었다. 쇠약해져 있었다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그 사나이에게 잠복대개 당했다는 것은 나로서는 가혹한 일이었다. 사나이는 내가 달걀 프라이라도 두 개쯤 먹으려고 들어간 조그만 간이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배가 고팠다. 하루 종일 음식을 먹지 않고 있었다. 헌데 이번에도 식욕이 사라져 계란이 채 익기도 전에 무엇인가에 쫓기듯 거리로 뛰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리는 어디나 사람 무리의 두꺼운 흐름이 되어 나를 향해 밀어닥치고 있었다. 사육제의 밤인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한가로이 속삭이며 걸었고 서로 몸이 스칠 정도로 북적댔다. 그들의 얼굴은 극장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가득 받았으며, 그 입에서는 마치 벌어진 상처에서 고름이 흘러나오듯 웃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군중은 내가 초조하여 앞으로 나가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웃음소리를 높이며 떠밀었다. 어떤 여인의 숄이 어찌된 셈인지 나에게 걸렸다. 나는 그것을 질질 끌고 다녔다. 사람들이 나를 붙잡아 세우고 웃는다. 나도 웃는 편이 좋겠다고 느꼈다. 그러나 웃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내 눈에 한 줌의 콘페티(사육제 때 서로 던지는 조그만 석고, 또는 종이 뭉치)를 던졌다. 채찍으로 맞은 것처럼 쓰라렸다. 거리 모퉁이에서는 군중이 몸을 밀착시킨 채 얽혀서 쐐기가 박힌 듯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겨우 물결처럼 흐느적거리는 느릿한 기복이 전해질 뿐 모두가 선 채로 교합이라도 하는 것 같이 보였다. 이렇듯 군중이 앞으로 나가지 못해 애쓰고 있는 동안에 나는 간신히 차도 끝에 한군데 틈을 발견하고 미친 듯이 달렸으나, 사실 움직인 것은 그들 쪽이고 나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달려간다고 해도 사태는 여전히 변함없었을 것이다. 위를 쳐다보니 한쪽은 여전히 끝없이 같은 집들이고 다른 쪽은 극장이었다. 혹은 모든 것은 움직이지 않는데 다만 나와 군중이 착각을 일으켜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듯이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에 잠길 여유도 없었다. 몸은 땀으로 무거워지고 저린 아픔이 온몸을 스쳤다. 피 속에 무언지 터무니없이 거대한 것이 들어와, 그것이 돌아가는 곳곳에서 혈관을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공기가 벌써 다 없어져 나는 내가 뿜어낸 것을 다시 들이마시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끝났다. 나는 뚫고 나왔다. 램프를 켜 놓은 내 방에 앉아 있다. 약간 춥다. 난로를 피워 볼 용기는 없다. 또 연기를 내기 시작해서 다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앉아서 생각한다. 만약 내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다른 방을 빌렸을 텐데. 가구가 딸린 방 하나를. 그 가구류도 이처럼 헌 것이 아니고, 이처럼 전에 세들어 살던 사람들의 생활이 배어 있지 않은 방 하나를. 처음에는, 머리를 이 안락의자에 기대는 것이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초록색 등받이에는 기름때가 묻어 회색이 된 누구의 머리에도 맞을 만한 움푹한 자국이 나 있었다. 꽤 오랫동안 나는 머리 밑에 손수건을 대도록 조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쳐서 그렇게 할 생각도 나지 않는다. 앉아보니 별 불편함이 없었고, 이 조그맣게 꺼진 자국이 나의 뒤통수에 마치 치수라도 잰 것처럼 꼭 맞는다는 것도 알았다. 허나 나는 만약 가난뱅이가 아니었으면 무엇보다도 먼저 난로를 살 것이다. 그리고 연기를 내어 숨이 답답하고 머리를 몽롱하게 만드는 이 따위 지독한 조개탄이 아니라 산에서 배어낸 신선한 나무향내가 나는 큼직한 장작을 지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고도 재를 긁어낼 수가 있고, 내가 바라는 대로 불을 조절해 주는 사람이 하나 있어야 할 것이다. 고작 15분가량 난로 앞에 웅크리고 앉아 몸을 뒤흔들고 있노라면 이마는 가까운 불길에 상기되어 쓰라려지고 눈은 열기 때문에 바짝 말라 그것만으로도 하루의 힘을 완전히 다 써버리고 만다. 그런 뒤에 사람들 틈으로 빠져나오는 나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쯤은 쉬운 노릇이다. 혼잡이 심할 때는 마차를 세내어 유유히 달려갈 것이다. 날마다 듀발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할 것이다. 이젠 두 번 다시 그런 간이식당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 사나이는 듀발 같은 곳에도 있을까? 아니다 그런데서 나를 숨어 기다릴 수 없을 것이다. 다 죽어가는 사람을 들여 놓을 리가 없다. 죽어가는 사람이라고? 그러나 나는 지금 내 방에 앉아 있다. 여기서라면 차분히 사건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고 애매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때 내가 들어갔을 때 느낀 것은 다만, 내가 곧잘 앉던 테이블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앉아 있다는 것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