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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지지난주 제가 했던 첫 번째 법회에서
우리가 이제 괴로워하는 것은 이번 생을 살면서 인생을 살면서 괴로워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
사실은 괴로울 이유가 아무 것도 없는데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평화와 부처로서 완성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라고 했습니다.
그걸 분별심이라고도 하고 교리에서는 식(識)이라고도 하고 육식(六識)(六識)이라고도 하고
알음알이 분별심 때문에 분별망상 때문에 괴로울 뿐 진실은 괴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분별망상을 일으키는 자는 나 거든요.
내가 분별망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괴로워진다.
즉 다시 말해서, 내 바깥에 나를 괴롭히는 나를 괴롭히는 자아가 있거나 나를 괴롭히는 어떤 특정한 상황이 있거나 그 사람 때문에 괴롭다거나 그 사건 때문에 내가 괴롭다거나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져서 나는 괴롭다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전혀 진실이 아닌 것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을 뿐입니다.
불자들이 내가 수행자인가를 가늠해 보려면
첫째, 가장 중요한 첫 번째가 외부 탓을 하느냐 남 탓을 하느냐?
아니면 근원에서는 모든 것이 내 책임이고 내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분명한 자각이 있느냐?
이게 가장 큰 차이입니다.
수행자는 외부로 화살을 돌리지 않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내면을 살필 뿐이죠.
괴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백프로 내 내면에서 내 스스로 만든 괴로움일 뿐이다.
이것을 분별심이라고도 하고 육식(六識)이라고도 한다고 했는데
오늘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해 보려고 하는데요.
분별심 내지는 분별망상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리로 본다면 육식(六識)이라고 합니다.
우리 몸의 눈귀코혀몸뜻 이라는 감각기관 감각작용이 있구요.
눈귀코혀몸뜻에 대응하는 바깥에 외부 경계가 있습니다.
눈으로는 바깥에서 색깔을 보죠 모양을 보고
귀로는 소리를 듣고 코로는 냄새를 맡고
입으로 맛을 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뜻으로 생각하는 모든 대상들이 법이라고 하는데요.
이렇게 여섯 가지로 우리는 세상과 접촉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12연기에서 무명행식(無明行識) 명색육입(名色六入) 촉수애취(觸手愛取) 유생노사(有生老死)
이렇게 나오는데
촉(觸)이라는게 육식(六識)과 명색(名色)과 육입이 접촉을 한다.
쉽게 말하면, 눈으로 무언가를 볼 때 우리는 어떤 일을 벌이냐 하면
여기서 우리가 괴로움을 만들어 냅니다.
눈으로 무언가를 보는 데는 아무 문제도 없는데
눈으로 무언가를 보자마자 여기에 육식(六識)이 작용을 합니다.
안식(眼識)이라고 해서 볼 때 식별을 하는 거에요.
분별심을 일으킵니다.
즉 보자마자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을 합니다, 재빨리.
난생 처음 보는 한 사람을 만났어요.
우리는 눈으로 보자마자 저 사람 호감형이야 별로야 하고 판단 합니다.
옛날에 나를 괴롭혔던 사람과 비슷하게 닮았으면 별로 안 좋은 인상을 선입견을 가지게 되죠.
무엇을 보더라도 그것을 보자마자 분별을 하게 됩니다.
안식(眼識)이라고 해요, 육식(六識) 중에.
눈에서 일어나는 식별이다.
똑같이 귀로도 뭔가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에요.
똑 같은 소리를 들어도 어떤 사람은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싫어합니다.
너 요즘에 얼굴 좋아 보인다 건강해 보인다고 얘기했을 때
건실해 보인다 얘기했을 때 어떤 사람은 아주 좋아할 거고
살찐 거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은 나보고 살쪘다고 하는 줄 알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똑 같은 소리를 들었는데 어떤 사람은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하고
똑 같은 소리를 들었는데 좋아하기도 한다는 거죠.
누가 했느냐에 따라서도 마찬가지고 분별심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소리에 반응을 할 수도 있고 반응을 안 할 수도 있고
우리는 인식을 일으켜서
귀로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분별심을 일으켜서 저 사람이 나를 욕했구나
어쩌면 그 사람은 나를 욕할 의도가 전혀 없이 있는 그대로를 표현한 말일 수 있는데
그 말을 듣고 자기 마음 안에 트라우마가 있거나 한 사람은 거기에 격하게 반응할 수도 있는 거겠죠.
소리를 듣고 이렇게 분별합니다.
좋거나 싫거나 좋은 소리인지 싫은 소리인지.
코로 냄새 맡는 거 입으로 맛 보는 거 다 마찬가지죠.
좋은 냄새인지 나쁜 냄새인지
청국장 냄새가 났을 때 우리나라 사람은 좋다고 느낄 수 있고
처음 느끼는 사람이라면 화장실 냄새가 난다라고 느낄 수도 있겠죠.
맛보는 것도 어떤 사람은 아주 좋아하지만 어떤 사람은 아주 싫어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똑 같은 맛이지만 누구에게는 정말 싫은 맛이 되고 누구에게는 아주 맛있는 환상적인 맛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목포를 처음에 갔을 때 저를 초대했던 분께서 목포까지 와서 이걸 안 먹으면
정말 여기 온 보람이 없다 하면서
목포에서 가장 잘 하고 가장 맛있는 제대로 삭힌 홍어라고 하면서
여기까지 와서 이걸 안 먹어보면 평생 못 먹어 볼 수 있다.
저 앞에 있는 거 만으로도 냄새가 심했는데
자꾸 먹으라 해서 어쩔 수 없이 입에 넣었는데
저한테 그분은 이 맛을 보면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그러면서 너무 너무 환상적인 맛이라고
제가 먹고 봤더니 정말 평생 잊지 못할 환상적인 맛이었습니다.
그때부터 홍어 가까이만 가도 냄새를 못 맡을 정도가 됐었는데요.
똑 같은 음식이지만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합니다
누구는 과도하게 좋아하고 누구는 과도하게 싫어합니다.
접촉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와서 살을 부딪혔다.
아주 설레고 고마운 느낌이겠지만
내가 정말 스치기도 싫은 사람이 나한테 와서 자꾸 툭툭 친다
아주 기분 나쁜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생각의 대상도 마찬가지구요.
똑 같은 생각을 해도 어떤 사람은 그 생각으로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생각으로 불행합니다.
고등학교 친구 한 명은 그 친구는 보름달만 보면 눈물을 흘리면서 괴로워했습니다.
저 달 좀 치우라고 보름달이 뜨던 날 그녀와 헤어졌는데 너무 심하게 차여 가지고 달만 보면 아주 그 생각이 나서 괴롭다고
우리는 누구나 자기 안에 무엇이 있냐에 따라서 이런 식으로
눈귀코혀몸뜻이 세상을 접촉할 때 반드시 분별심을 일으켜서 그 분별심으로 인해서 괴로워지는데
그 분별심의 특징이 뭐냐 하면
대상을 보자 마자 생각하자 마자 반드시 두 가지로 생각을 몰아갑니다.
첫 번째는 좋다거나 두 번째는 싫다거나
제가 오늘 여기 앞에서 설법을 합니다.
저를 보자마자 ‘좋다’ 할 수도 있고 ‘싫다’ 할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두 가지로 생각을 몰아갑니다.
좋다거나 싫다거나
어떤 사람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 둘 중에 하나에요.
‘그 사람 괜찮아 좋아’
‘그 사람 별로야’
사실 어떤 사람이 좋거나 싫거나 두 가지로 분별 될 수가 없습니다.
그 단 두 가지 말로 그 사람을 표현할 수가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좋다거나 싫다거나로 몰아간다는 거죠.
좋은 것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 많이 보고 싶고 그 소리를 더 많이 듣고 싶고
내 칭찬을 더 많이 듣고 싶고 맛있고 향기 좋은 것은 더 많이 먹고 싶고
더 많이 만지고 싶고 더 많이 생각하고 싶고
좋은 것은 내 걸로 만들기 위해서 집착을 합니다.
더 많이 내 걸로 만들기 위해서 그때부터 안간 힘을 쓰고 노력하기 시작하죠.
그러다가 이게 내 것이 됐으면 좋겠는데
내가 이만큼을 가졌으면 좋겠는데 내 걸로 소유되지 못할 때
내가 취하고 싶지만 취하지 못할 때
내가 싫어해요
그냥 싫어하면 괜찮은데 몸서리치게
이 사람은 절대 만나고 싶지 않아 라고 밀쳐내기 시작하면
거부하기 시작하고 미워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을 만나면 괴롭기 시작합니다.
좋다 싫다라고 둘로 분별을 하는 것은 괜찮은데
그 분별심이 극단을 치닫게 되면
좋아도 그냥 좋아하면 괜찮은데 과도하게 좋아지면 그걸로 인해 괴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싫어도 그냥 싫어하면 괜찮은데 과도하게 싫어져서 밀쳐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우리 삶은 괴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중요한 점은 지금 여러분이 만약에 무언가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백퍼센트 내가 무언가를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거나
싫어해서 밀쳐내려고 미워하고 있거나 거부하고 있거나 하고 있거나
집착하고 있거나 거부하거나
특정한 생각에 집착해서 그것에 사로 잡히면 그 생각밖에 못하죠.
어떤 홈쇼핑을 보다가 무언가가 나타났는데 갑자기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점점 더 매진된다고 하고 이걸 사야 될 거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단 말이죠
혹은 자동차를 사겠다 뭐를 사겠다 했을 때
한번 꽂히기 시작하면 점점 그걸 사기 전까지는 그 생각만 맴돈단 말이죠
정신 없이 그것을 검색하고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사 버리죠.
사버리고 나서 나중에 생각할 때 ‘그때 뭐가 씌웠었나봐’ 이러죠.
심리학에서는 이걸 인지협착이라고 부르대요.
내가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아주 비좁게 협착이 되는 거죠
아주 제한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무언가 어떤 대상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것은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앗아가 버립니다.
그럼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지도 말고 싫어하지도 말아야 하느냐
당연히 그건 아니죠.
부처님이 되면 깨닫고 나면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이 분별하지 않으니까 판단도 못 내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걸 좀 쉽게 풀이하면 좋거나 싫거나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쉽게 말해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면 이게 좋아 저게 좋아
식당 가서 짜장면 먹을래 짬뽕 먹을래 이런다고 해서
부처님이 딱 오셨을 때 ‘짜장면 드실래요 짬뽕 드실래요’
부처님이 나는 분별이 없으니 아무거나 시키시오.
‘김치찌개 먹을래요 된장 찌개 먹을래요’
나는 아무거나 분별이 없으니 아무거나 똑같습니다.
굳이 그러지 않는다는 거죠.
깨달음을 얻은 사람일지라도 선호할 수 있죠.
이것과 이것 중에 이것을 더 선호한다.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것이죠.
선호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 때 있어서 과도하게 집착해서 사로잡히는 대신 선호하는 방식을 써 보세요.
선호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요.
이것보다 이것을 조금 더 선호한다
이것도 싫지 않지만 요거보다 요걸 더 선호한다.
그럼 이것도 싫지 않다.
선호하게 되면 괴로움이 뒤따르지 않습니다.
이거보다 이걸 더 선호할 뿐이에요.
선호한 게 되면 좋고 안되더라도 좋은 거죠.
과도하게 절대 이것은 있으면 안돼 해서 과도하게 밀쳐내는 법이 없으니까
단순히 선호하게 되면 괴로움이 뒤따를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도 좋고 저렇게 되어도 좋죠.
이 사람이 이렇게 해도 괜찮고 저렇게 해도 괜찮습니다.
반드시 이렇게 되야 한다 하고 집착을 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괴로움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 노보살님들이 많이 계시는데 아들이나 딸이 사위나 며느리 될만한 친구를 데리고 와서 소개를 시켜 줬어요.
부모님들께서 내 사위는 이래야 된다 내 며느리는 이래야 된다.
내 꿈꾸던 사위상 며느리상을 딱 가지고 있습니다.
반드시 내 며느리는 이런 사람이 돼야 해.
음식도 잘 하고 성격도 착해야 하고 남편만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사람이어야 하고 능력도 좀 있었으면 좋겠고 학벌도 좀 좋았으면 좋겠고 집안 배경도 좋았으면 좋겠고 성격도 좋아서 내가 톡 쏘아 붙여도 ‘예 어머니’ 하면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 말을 다 들어주는 이런 완벽한 사람을 원하는 마음이 있을 수는 있어요.
그런 사람을 선호할 수는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어야만 해 하고 집착을 하기 시작하면
본인도 괴롭고 아들도 괴롭고 며느리도 괴롭고 전부 다 괴로워지기 시작하죠.
내 생각 때문에 괴롭다고 생각을 못하고
너 때문에 며느리가 잘 못 들어와서 내가 괴롭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란 것이 인생이 다 그런데요.
사랑만이 아니라 성공실패도 성공하고 싶다고 다 성공하는 거 아니죠.
부자 되는 것도 다 부자 되고 싶지만 누구나 부자 되는 것이 아니듯이
자식이 결혼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내가 내 구미에 맞는 사람과 딱 결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맘에 안 들어도 본인은 맘에 들 수 있죠.
그럼 그것을 가지고 바깥 탓을 한다는 거죠.
저 사람 때문에 내가 괴롭다.
진실을 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실을 말하면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죠.
바깥의 특정 상황이 나를 괴롭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특정 상황 때문에 괴롭다고 말한다면
그건 자신 스스로를 지혜롭지 못한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내 바깥에 있는 주변 상황 이나 환경이나 경계나 어떤 사람이
나를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살아왔지만
그러다 보니까 바깥 경계를 바꾸려고 노력해 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는 분별심 때문에 괴로운 것일 뿐이다.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상황 모든 사람 모든 일들 모든 것들을 대할 때
그것을 좋거나 싫은 쪽으로 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도 인제 요즘은 때때로 그런 걸 느끼기도 하는데
제가 뭘 결정하더라도 이것이 아주 도리에 어긋나거나 아주 아니다 싶은 것이 아니면
물론 저도 원칙주의 같은 게 있어서 이건 해야 되고 저건 해야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선 지키는 편인데 어지간한 상황들 있잖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반반 나뉘어서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둘로 나뉘거나 그랬을 때
저는 이렇게 해도 괜찮고 저렇게 해도 괜찮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알아서 고민해 보세요.’
그럼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더라구요
우리 법사님이 하나를 딱 찍어 주셔야지
항상 그것을 희망하시더라구요.
그걸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는데
이렇게 해도 괜찮고 저렇게 해도 사실은 괜찮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거 아니면 저거라고 반드시 결정을 내려야만 자기 소견이 뚜렷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한단 말이죠
반드시 그럴까요?
물론 그렇게 결론 내릴 수 있겠죠.
그러나 그 내린 결론에 대해서도 과도하게 이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자신을 속박시키고 있는 겁니다.
구속하고 있는 거에요.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은데 다만 선호할 뿐이죠.
불교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요
옳고 그른 게 분명한 사람이라기 보다
자기 안에서 옳고 그른 게 분명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을 분명히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닌 게 불자가 아니죠.
좋고 싫은 거 분명하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것에도 과도하게 치우쳐서 집착하지 않고
싫은 것에도 과도하게 치우쳐서 집착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하자 했는데 그게 안됐어요. 무산이 됐어요. 그래도 끝 상관이 없는 겁니다.
뒤끝이 남지 않는 거죠.
크게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좋은 것에 과도하게 집착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우리는 이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희망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반드시 가져야겠다고 집착하면
그것을 가지기 더 쉬워질 거라고 생각해요.
옛날에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해서 베스트셀러가 오래동안 된 책이 있었어요.
연금술사에서도 시크릿이라는 책에서도 그랬죠.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하니까 사람들이 간절히 원합니다.
자식이 서울대 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내가 원하는 며느리감을 데려 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진급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서울 강남에 오십평 칠십평 아파트를 사기를 간절히 원하고
엄청나게 큰 것을 간절히 원하면서
나는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에 난 진리와 하나된 삶을 살고 있다.
간절히 원하니까 이루어질 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 간절히 원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부처님을 원망하고 진리를 원망하고
나는 간절히 원했는데도 왜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하고 따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은요.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는 맞는데요.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간절히 원해야 하느냐?
간절히 원한다는 것은요.
집착하지 않고 순수하게 원한다는 겁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이죠.
내가 원하는 바를 간절히 원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원해야지 삶이 이루어집니다.
일체유심조 (一切有心造) 가 삶의 원칙이기 때문에
마음 낸 대로 삶은 펼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 이란 말처럼
과도하게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내라는 말처럼
불교에서 중도의 진리처럼
간절히 원하되 그것에 집착하면서 원하면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과도하게 집착하는 쪽으로 치우쳐 지면
그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중도의 법칙이고 우주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절대적으로 ‘이거 안돼’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좋습니다.
열심히 돈을 벌라는 거죠.
최선을 다해서 돈을 버는 게 좋단 말이죠
그러나 ‘돈을 안 벌면 절대 안돼 난 반드시 돈을 벌어야 해’ 하고 집착하면 돈이 안 벌린단 거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데
반드시 난 이 사람과 연결되어야 하고 반드시 나랑 사랑하고 나랑 결혼해야 돼
그렇게 과도하게 집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너무 과도하게 집착하니까
집착을 받는 사람은 저 사람이 나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앎과 동시에
마음이 멀어지게 되어 있어요.
적당히 밀당을 하라고 혜민 스님이 책에서 얘기 하셨더군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요.
적당히 밀당을 하라는 얘기는 과도하게 집착하지 말라는 거죠.
과도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면 상대방이 부담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상대방에 대한 매력이 떨어지게 돼요.
군장병들이 여자친구와 헤어질 거 같다고 얘기하면
절대 여자친구한테 전화해서 ‘너 어디서 뭐했냐? 누구를 만났냐?’ 하고
하나하나 따지듯이 집착하듯이 하면 멀어지게 돼 있다.
‘쿨하게 얘기를 해봐라’ 이런 얘기를 많이 해 주는데
집착을 하게 되면 상대방은 매력을 못 느낍니다.
그래서 멀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나는 집착하니까 반드시 연결되고 싶으니까 더 쫓아가죠
그러면 상대방은 스토커라고 몰아 부치기 시작합니다.
그럼 그 사랑은 물 건너 가기 시작해요.
모든 게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이 우주의 법칙이 그렇습니다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요.
마음 먹은대로 이루어진다 그랬잖아요.
적당히 순수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원하면 그것은 강력한 힘으로 이루어집니다.
왜 이루어지냐 하면 내 마음이
간절히 원했던 내 마음이 우주전체의 마음과 한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내가 곧 우주 전체이고 우주가 나이고 내가 바로 여러분이고 여러분이 나이고
우주법계 전체가 나와 둘이 아니라는 한마음을 깨닫는 거에요.
불이법을 깨닫는 겁니다.
둘이 아니라는 진실에 통하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나와 우주가 둘이 아니게 된다는 거죠.
그런데 중요한 점은
깨달음을 얻어야지만 둘이 아닌 것이 아니라
우리는 늘상 둘이 아닌 마음으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이 마음을 일으킨 것은 여러분 개인이 마음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우주법계가 하나가 되어서 마음을 일으킨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내 마음이라고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내가 마음을 일으킬 때 우주전체가 한마음을 일으킨 것이기 때문에
우주법계 전체에 책임감을 가지고 그 마음을 일으켜야 하는 겁니다.
내가 마음을 일으키면요.
그게 우주전체와 소통하게 되어 있어요.
양자물리학에서 뭐라고 하냐 하면요.
우리가 마음을 하나 일으킬 때
일으킨 마음이 우주전체로 퍼져 나가는데 저 안드로메다 별 끝까지 퍼져 나가는데 얼마만큼 시간이 걸리냐?
비국소성 비국지성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전혀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마음을 내면 우주 끝까지 퍼져 나가는데 0.0000001초도 안 걸린다.
그래서 내가 마음을 일으키면 우주 전체가 함께 마음을 일으킨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내가 마음을 낸 것이 우주법계 전체의 마음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것이 현실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내가 마음을 일으켰을 때 이건 무조건 이루어지겠지 하는데 이게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과도하게 집착을 하게 되면 한쪽으론 이걸 이루어야지 한쪽으론 이걸 이루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운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순수하게 원하면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해 저 사람을 사귀고 싶어 돈을 벌고 싶어 나는 진급을 하고 싶어 순수하게 원하면 그건 이루어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런데, 절대 이게 아니면 안돼 하고 집착을 하기 시작하면 어떤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냐 하면
이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해요.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하면
중요한 것이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끌어당기는 힘이 됩니다.
내 마음에 두려워하는 마음과 그것을 원하는 마음이 동시에 있는 겁니다.
내 마음에 두 가지 마음이 싸우게 되니까 이루는데 힘이 덜 붙게 되는 거죠.
안되면 어쩌지 하는 두려운 마음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집착이 크면 클수록.
신기한 것은 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이 됩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이 됩니다.
제가 이런 비유를 많이 드는데요.
살찌는 것에 대해서 과도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안먹고 안먹기 시작하다가 거식증이 걸렸다가 폭식증으로 바뀌는 것처럼 내가 간절히 원하지만 거기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람은 안 이루어지는 쪽으로 갑자기 삶의 흐름이 바뀌어 버리는 경우가 생깁니다.
내가 두려워했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이 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두려워할게 없다라고 얘기를 하죠.
이게 진리이기 때문에 이렇게 얘기하는 건데요.
진정한 진리는요.
좋고 나쁜 것을 나눠놓고 나쁜 짓 하면 지옥 간다 좋은 일 하면 천당 간다
이 둘로 나눠 놓고 좋은 일만 해야 돼 이렇게 얘기하면서 나쁜 짓 한 사람한테 겁을 주면서
나쁜 짓 했지 절에 와서 참회하던가 보시를 하던가 또 다른 복을 지어야 돼하고 겁박을 하거나
제 얘기가 아니라 제가 어떤 책을 보니까
종교학자가 써 놓은 책을 보니까 모든 종교가 가장 많이 써왔던 방편이
아주 수준 낮은 방편을 가지고 신자들을 우롱해 왔다, 종교가.
뭔 내용인지 읽어봤더니 정말 맞는 얘기를 써 놨더라구요.
종교가 신도님들을 어리석은 중생들을 자기 방식대로 통제하기 위해서 더 많이 보시하게 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종교가 쓴 방법이 두려움을 조장했다는 거죠.
여러분 죄 지었죠?
절에 더 많은 사람이 온다는 거죠.
겁을 줘야 쉽게 말해 종교 장사가 된다는 거죠.
그래서 종교가 그런 장사를 많이 해 왔다라고 적나라하게 쓰고 있더라구요.
제가 가만히 보니까 그게 맞는 이유가 뭐냐 하면요.
낮은 수준의 신앙을 하다가 높은 수준의 신앙으로 옮겨 가야 하거든요.
낮은 수준에만 매여 있을 때는 선과 악에 과도하게 집착합니다.
지옥 갈까 두려워하는 마음 이런 마음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낮은 수준의 방편으로 언제까지 그것만 쓰고 있겠습니까.
언제까지 두려움에 떨고 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요.
지금까지 수준 낮은 방편에서 배워온 것처럼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여러분을 괴롭게 할 이유가 아무런 의도가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괴로워할 뿐이지
부처님께서는 이 우주의 진리는 여러분을 지옥에 넣을 이유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지옥을 만들었을 거라고요?
신께서 지옥을 만들어 가지고 잘못한 사람을 거기에 쳐박을 거라는 생각처럼 허무맹랑한 거짓말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자식이 큰 잘못을 저질러서 범죄를 저질렀거나 누굴 죽였어요
어머니가 내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걸 어쨌든 사랑해 주지
어떤 방법을 써서든 보듬어 주려고 하지 미워하진 않겠죠.
하물며 진리가 있고 신이 있고 부처님이 있다면 그 분이 어머님의 사랑보다 못 하겠습니까?
죄 지은 사람은 부처님이 덜 사랑하고 착한 일 많이 한 사람은 더 사랑하고 이런 일 없습니다.
불자들이 제대로 알아야 하는 상황이에요.
선과 악이라는 게 정해진 게 없죠.
그건 우리 머리 속에서 만들어 낸 환상일 뿐입니다.
선과 악이라는 것은.
인연 따라 선이 되고 인연 따라 악이 되기도 하죠.
최악의 악이라고 생각하는 게 뭡니까?
사람 죽이는 거죠.
사람 죽이는 건 무조건 절대 악일까요?
사람 죽이는 게 최악이잖아요.
절대 악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히.
의도가 중요합니다.
그 행위 자체가 선인지 악이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행위 자체가 선인지 악인지는 그 행위를 보고는 알 수 없어요.
그 사람의 의도가 어떠냐에 따라서 어떤 의도로 했느냐에 따라서 누가 한 행동은 선이 되고 누가 한 행동은 악이 됩니다.
전쟁이 났어요.
막 쳐들어 왔는데 가만히 있으면 우리 가족 우리 국민 전체가 다 죽을 거 같아요.
그래서 전쟁에 나가서 싸웠단 말이죠. 적을 총을 쏴서 죽였다.
그럼 그건 악이 되느냐? 살생을 한 과보가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전쟁에 참여한 의도가 뭐겠어요?
죽이려는 의도가 아닌 거에요.
어떤 신병 중에 저한테 그런 질문을 물어 봤었어요.
약간 그런 종교에 있었는데
어떻게 스님이 사람을 죽이는 군대에 와 있습니까?
제가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해줬죠.
‘너는 사람을 죽이는 군대를 왔단 말이니?
난 정말 충격적이구나.
넌 사람을 살리려고 군대 온 거 아니니?
평화를 지키려고 온 게 아니니?
전쟁을 일으키려고 온 것이 아니라 평화를 지키려고 온 거 아니냐’
우리의 의도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한참 했습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업이라는 것이 업에 따라 과보를 받잖아요.
A라는 행동을 했으면 A라는 과보를 무조건 받는 게 아닙니다.
똑 같은 행위를 했어도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
전쟁에 나가 나라를 지킨 군인들은 영웅이 되잖아요. 실제 진리에서도 영웅입니다.
평화를 지키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살리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이처럼 불교에서는 겉에 들어나는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이면의 의도 마음이 중요합니다.
일체유심조이기 때문에
마음을 잘 써야 하는데 이 마음을 어떻게 써야 되느냐?
과도하게 집착할 것도 없고
과도하게 거부할 것도 없는
그런 삶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의 삶입니다.
과도하게 집착하면 그걸 이룰 줄 알지만 사실은 두려움을 조장시켜서 이루어지지 않게 만드니까
그래서 불교에서 무외시를 가장 중요시 여깁니다.
상대방의 마음 속에서 두려움을 없애 주는 보시
관세음보살을 시무애자라고 해서 중생들의 두려움을 없애 주는 분 이러거든요.
어떤 작가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글들을 많이 보시나 봐요.
제 글을 보시더니 저한테 했던 얘기가 뭐냐 하면요.
스님은 제가 많은 스님들을 만나봤지만 심하다 싶을 정도로 긍정의 끝판왕이시더덴요.
이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요.
스님 책을 보면 긍정도 그냥 긍정이 아니라 완전 긍정.
어떻게 진짜 세상이 이럴까?
진짜 우주의 법칙이 이럴까?
완전한 긍정의 끝판왕이라는 것을 느끼셨다며
그게 진실이라면 정말 그렇게 세상이 아름답고 멋지고 장엄한 곳이라면
정말 희망차지 않을 수가 없다.
너무 희망차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희망에 찼으면 좋겠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요.
제가 지금부터는 앞으로 법회를 할 때 정말 희망찬 이야기들을 많이 하게 될 겁니다.
그 얘기를 듣고 여러 분들이 의심하실 거에요.
나쁜 짓 하면 지옥 가 그러니까 절에 와서 보시도 많이 하고 이런걸 배웠는데
선악은 정해져 있지 않다.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죄의식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참회기도 죽을 때까지 하겠다
저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참회기도 죽을 때까지 하는 거 아닙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그 마음이 죄지.
실제 죄가 정해진 게 없어요.
죄무자성 종심기(罪無自性 從心起) 잖아요.
참회기도는 일주일이든 삼일이든 하루든 간단히 하고 딱 끝내 버리는 겁니다
완벽참회가 끝났다 하고 완전 믿어버리고 내가 부처인데 내가 내 마음을 참회했는데
어디 가서 부처님에게 용서를 구한다? 이거 거짓말입니다.
부처님은 여러 분을 용서해 주지 않습니다.
왜인지 아세요? 용서할 게 없어요.
단 한번도 응징한 적이 없었는데
부처님이 단 한번도 응징하거나 판단하지 않았는데
무한정 용서밖에 없는 거죠.
무한한 사랑과 자비 밖에.
그게 우주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분별심을 일으켜서
스스로 괴로워하고 스스로 두려워했을 뿐입니다.
죽음 이후는 두려울 것이다
내 미래가 두렵게 바뀌면 어쩌지
내가 나중에 가난해지면 어쩌지
아파트 값이 뚝 떨어져서 가난해지면 어쩔까
나중에 병이 나서 아프면 어떨까
내가 죽고 나서 지옥 가면 어쩔까
이런 걱정을 이런 삶의 두려움을 절대 가지실 필요가 없다
분명히 없습니다.
왜 이 얘기를 하냐 하면요.
마음 먹은 대로 삶이 펼쳐져요
내가 두려워하는 삶을 연습하면 두려워지는 미래가 펼쳐져요.
여러분들이 지금 미래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미래는 두려워집니다.
희망찬 미래를 마음에 담고 있으면 희망찬 미래가 펼쳐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 희망찬 의식을 가지시지
두려움을 조장하는 마음을 얘기한다면 두려움에 빠져 계시지 않겠습니까
진리가 두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두렵게 만드는 것이니까
내 마음이 주인이거든요.
내 마음이 창조신입니다.
내 마음이 부처고.
그러니 어디 바깥에 탓할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좋거나 싫은 거에 과도하게 극단으로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지막 정리를 해드립니다.
과도하게 좋은 거에 집착할 필요가 없죠.
과도하게 싫은 거를 거부할 필요가 없죠.
삶은 언제나 나를 위한 최적화된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삶만이 펼쳐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입처개진 (立處皆眞)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참된 진실의 자리
내가 바로 부처거든요.
부처의 삶밖에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 단 한번도 실수한 적도 없고 잘못 살아온 적이 없어요.
내가 살아 왔기 때문에 내 인생이 지금 이렇게 펼쳐졌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진리는 지금 이렇게 펼쳐지고 있는 지금
‘지금 이대로’가 진리입니다.
이대로 펼쳐지고 있는 ‘지금 이대로’가 진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이대로’가 부족하다고 느껴서
‘지금 이대로’가 단 하나도 바꿀 필요가 없이 ‘지금 이대로’가 진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조금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대로’이길 꿈 꿔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 이길 원해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가 진리이니까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진리의 자리이니까
어떤 삶을 살면 되겠습니까?
과도하게 집착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고
‘지금 이대로’ 산다.
나에게 주어진 ‘지금 이대로’의 진리의 삶을 통째로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살면 됩니다
‘지금 이대로’에서 한발짝도 옮겨 가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나 자신을 괴로움이 생기면 생긴 그대로 그 괴로움을 받아들여 주는 겁니다.
괴로움이 오는 이유는 그걸 통해 깨달음을 얻으라는 건데
그걸 거부하려고 하면 그 괴로움이 더 오래 지속 됩니다.
병이 났어요. 이 병이 일주일 있다가 가야 되는 병인데 약 먹고 밀쳐내기 시작해요.
아픔을 받아 들여 줄게 하고 내가 충분히 아파해 줄게 하고 그 아픔을 받아 들여 주면 일주일이면 지나가고 아픔을 완전히 받아 들이면 이틀 삼일도 안돼서 지나 갑니다.
아픈 게 싫어서 밀쳐내려고 애쓰면 일주일이면 될 게 이주 삼주 사주 계속 아파집니다.
삶의 진실이기 때문에 왔는데 그 진실을 거부하니까
괴로운 일이 왔으면 그걸 거부하려고 하지 말고
‘잘 왔어, 네가 있고 싶은 만큼 있다가 가라, 그걸 내가 허용해 줄게’
그럼 그 괴로움은 잠시 왔다가 흘러 갈 겁니다.
반드시 흘러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과도하게 집착하지 말고 거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허용하고 받아들이고 살게 되면
이대로의 삶에서 놀라운 삶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아주 신기한 점은요.
여러분이 무언가를 바꾸고 나면 놀라운 인생이 눈부시게 바뀔 거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서 인생이 바뀌지 않습니다.
내가 이것만 이루고 나면 성취하고 나면 놀랍게 인생이 바뀔 거야
이것만 이루고 나면 난 행복해질 거야.
내 자식이 수능에서 합격만 하면 내 인생은 행복할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끝이 있죠.
잠깐 행복했다가 사라집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 드린 이것은 ‘이대로’이길 허용하기 시작하면 하나도 바꾸지 않았는데
이대로 완전한 만족감뿐 아니라 놀라운 경이로운 완전한 평화에 눈 뜨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정말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주어져 있는 완전한 평화에 눈 뜨기 시작하면요.
아주 작은 것들이 갑자기 놀랍게 아름다워 지기 시작합니다
제가 말한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보면서 거기서 아주 깊은 평화를 느끼게 돼요.
심지어는 괴로운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괴로움을 충분히 허용하면서
그 괴로움을 마주하고 감당해 주고 그걸 관찰해 주고
그런 것 속에서 알 수 없는 미묘한 기쁨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지만
있는 그대로 완전히 통째로 허용해주면 삶이 놀랍게 바뀌어요.
이렇게 얘기를 했더니 어떤 보살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법사님 좋습니다. 아 그렇게 살겠습니다.’
그러면서 바로 이어 질문했던 게 뭐냐 하면요
‘제가 여기 몸이 좀 안 좋은데 그러면 받아 들여주면 몸이 낫겠네요.’
‘이걸 받아 들여주면 내 자식이 서울대 가겠네요.’
‘이걸 받아 들여주면 내 문제가 다 해결 되겠네요.’
이 말은 받아 들이지 않았다는 얘기죠.
받아 들이는 거를 거래한 거죠.
받아 들이면 내가 좋아지겠지.
좋아지기 위해서 받아 들이는 척 한 겁니다.
진짜 받아 들인 게 아닙니다.
‘받아 들여주면 이렇게 되겠죠’ 가 아니라
‘지금 이대로’이길 완전히 받아드려야 된다는 거죠.
받아 들였으니까 바뀌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여지없이 행복해 진다니까요.
여기서 몇몇 분들이 앞으로 조금 조금씩 이 기쁨이 무엇인지 이 고요한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
기존에는 무언가 하는 게 있어서 원하는 거 얻는 게 있어서 기뻤는데
이제는 지금 있는 것만으로 기쁩니다.
이걸 Being 이라고 해요
우리는 Doing의 상태에 있었는데 Being 존재의 상태
지금 이대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무한한 충만감이 깃드는
여러 분에게 주어진 지금 이대로의 삶의 충분한 기쁨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에
기쁨을 충분히 누리는 한 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Being 존재의 상태, 지금 이대로 존재하는 무한한 충만감. ..()()()..
법우 법우님!^^
녹취해 주셔서 늘 감사하고 고맙습니다!^^_()_
법상스님 법문! 고맙습니다!_()_
법당에 모셔진 탱화의 완성은, 마지막 눈동자를 찍는 것에 있다지요.
법상스님의 가르침은, 저에게는 화룡점정입니다!
감사하고 고맙고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절에 수십년 다니고 계신 불자님들
새롭게 다니는 불자님들
모두모두
스님의 법문을 듣고 읽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드립니다!^^_()_
희망찬 법문이시네요~ 마음이 환해집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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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