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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기사 경(S8:12) 12. Vaṅgīsasuttaṃ 8:12(1-12) 방기싸의 경
220. Ekaṃ samayaṃ āyasmā vaṅgīso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1.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바나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2. 그 무렵 왕기사 존자가 아라한과를 증득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해탈의 행복을 누리면서 이 사실에 대해서 이 게송들을 읊었다.
Tena kho pana samayena āyasmā vaṅgīso aciraarahattappatto hutvā [hoti (sī. syā. kaṃ.)]
vimuttisukhaṃ paṭisaṃvedī [vimuttisukhapaṭisaṃvedī (sī. pī.)] tāyaṃ velāyaṃ imā gāthāyo abhāsi –
2. 그때 존자 방기싸는 거룩한 님이 된 지가 오래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해탈의 행복을 즐기면서 마침 이와 같은 시를 읊었다.
“시상(詩想)에 취해 전에 나는 방랑했나니
마을에서 마을로 도시에서 도시로.
그때 나는 완전하게 @@깨달은 분 뵈었고
그분께 대한 깊은 믿음 생겼도다.
‘‘Kāveyyamattā vicarimha pubbe, gāmā gāmaṃ purā puraṃ;
Athaddasāma @sambuddhaṃ, saddhā no upapajjatha.
[방기싸]
"마을에서 마을로, 도시에서 도시로
일찍이 시에 도취되어 방랑했으나,
마침 올바로 깨달은 님을 만나서
그분에 대한 믿음이 우리에게 일어났다.
그분은 그런 내게 @@법을 설하셨으니
@[5]온과 [12]처와 [18]계에 관한 것이었도다.
그분 설한 이러한 법을 듣고 나는
마침내 출가하여 집 없는 자 되었도다.
‘‘So me dhammamadesesi, khandhāyatanadhātuyo [khandhe āyatanāni dhātuyo (syā. kaṃ. pī. ka.)];
Tassāhaṃ dhammaṃ sutvāna, pabbajiṃ anagāriyaṃ.
[* Tassāhaṃ vacanaṃ sutvā,
khandhe āyatanāni ca;
..................Dhātuyo ca viditvāna, pabbajiṃ anagāriyaṃ.]
3. 그분은 나에게 가르침을 설하셨다.
존재의 다발과 감각의 영역에 관해
나는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집 없는 삶으로 출가했다.
참으로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정해진 행로를 체득한
비구들과 비구니들을 위하여
그분 성자께선 @@깨달음을 실현하셨도다.
‘‘Bahunnaṃ vata atthāya, @bodhiṃ ajjhagamā muni;
Bhikkhūnaṃ bhikkhunīnañca, ye niyāmagataddasā.
4. 참으로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올바른 자제를 알고 있는
수행승과 수행녀들을 위하여
현자는 올바른 깨달음을 얻으셨다.
내가 출가하여 부처님 곁에 머문 것
그것은 참으로 잘 온 것이었으니
@@세 가지 명지[三明]를 나는 증득하였고
부처님의 교법대로 수행 실천하였도다.
‘‘Svāgataṃ vata me āsi, mama buddhassa santike;
Tisso vijjā anuppattā, kataṃ buddhassa sāsanaṃ.
5. 내가 부처님 곁에 있을 때
그분은 나에게 아름다운 벗이었으니,
나는 세 가지의 초월적 지혜를 체득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겼다.
[나 자신의] 전생의 삶 알게 되었고
신성한 눈 청정해졌나니
@@삼명 얻고 여러 신통 구족한 나는
[남의] 마음 아는 데도 능숙하게 되었도다.”
‘‘Pubbenivāsaṃ jānāmi, dibbacakkhuṃ visodhitaṃ;
Tevijjo iddhipattomhi, cetopariyāyakovido’’ti.
6. 나는 전생의 삶을 알고 있고,
하늘눈은 맑아졌고,
세 가지 명지에 정통하고, 신통을 갖추어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
[Theragāthā Mahānipāta Paṭhamavagga
21.1. Vaṅgīsattheragāthā
“Kāveyyamattā vicarimha pubbe, Gāmā gāmaṃ purā puraṃ;
Athaddasāma sambuddhaṃ, Sabbadhammāna pāraguṃ.
So me dhammamadesesi, muni dukkhassa pāragū;
Dhammaṃ sutvā pasīdimha, saddhā no udapajjatha.
Tassāhaṃ vacanaṃ sutvā, khandhe āyatanāni ca;
Dhātuyo ca viditvāna, pabbajiṃ anagāriyaṃ.
Bahūnaṃ vata atthāya, uppajjanti tathāgatā;
Itthīnaṃ purisānañca, ye te sāsanakārakā.
Tesaṃ kho vata atthāya, bodhimajjhagamā muni;
Bhikkhūnaṃ bhikkhunīnañca, ye nirāmagataddasā.
Sudesitā cakkhumatā, buddhenādiccabandhunā;
Cattāri ariyasaccāni, anukampāya pāṇinaṃ.
Dukkhaṃ dukkhasamuppādaṃ, Dukkhassa ca atikkamaṃ;
Ariyaṃ caṭṭhaṅgikaṃ maggaṃ, Dukkhūpasamagāminaṃ.
Evamete tathā vuttā, diṭṭhā me te yathā tathā;
Sadattho me anuppatto, kataṃ buddhassa sāsana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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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하는가 경 Mn103 MAJJHIMA NIKâYA III 1. 3. Kintisuttaü
3. Kintisuttaṃ (103) What do you think of me?
http://www.metta.lk/tipitaka/2Sutta-Pitaka/2Majjhima-Nikaya/Majjhima3/103-kinti-e.html
34. Evaṃ me sutaṃ – ekaṃ samayaṃ bhagavā pisinārāyaṃ [kusinārāyaṃ (sī.)] viharati
baliharaṇe vanasaṇḍe.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 ‘‘bhikkhavo’’ti.
‘‘Bhadante’’ti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Bhagavā etadavoca –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새존께서는 꾸시나라의 발리하라나 숲에 머무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kinti vo, bhikkhave, mayi hoti –
‘cīvarahetu vā samaṇo gotamo dhammaṃ deseti,
piṇḍapātahetu vā samaṇo gotamo dhammaṃ deseti,
senāsanahetu vā samaṇo gotamo dhammaṃ deseti,
itibhavābhavahetu vā samaṇo gotamo dhammaṃ desetī’’’ti?
2.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문 고따마는 옷을 위하여 법을 설하거나 사문 고따마는 음식을 위하여 법을 설하거나
사문 고따마는 거처를 위하여 법을 설하거나 사문 고따마는 더 나은 존재를 위하여 법을 설한다고
[생각하는가]?"
‘‘Na kho no, bhante, bhagavati evaṃ hoti –
‘cīvarahetu vā samaṇo gotamo dhammaṃ deseti,
piṇḍapātahetu vā samaṇo gotamo dhammaṃ deseti,
senāsanahetu vā samaṇo gotamo dhammaṃ deseti,
itibhavābhavahetu vā samaṇo gotamo dhammaṃ desetī’’’ti.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에 대해 '사문 고따마는 옷을 위하여 … 음식을 위하여 …
거처를 위하여 … 더 나은 존재를 위하여 법을 설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Na ca kira vo, bhikkhave, mayi evaṃ hoti –
‘cīvarahetu vā samaṇo gotamo dhammaṃ deseti…pe…
itibhavābhavahetu vā samaṇo gotamo dhammaṃ desetī’ti;
atha kinti carahi vo [atha kinti vo (sī. pī.), atha kiñcarahi vo (ka.)], bhikkhave, mayi hotī’’ti?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참으로 나에 대해 '사문 고따마는 옷을 위하여 … 음식을 위하여 …
거처를 위하여 … 더 나은 존재를 위하여 법을 설한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Evaṃ kho no, bhante, bhagavati hoti –
‘anukampako bhagavā hitesī; anukampaṃ upādāya dhammaṃ desetī’’’ti.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께서는 @@연민하는 분이시고 [저희들의] 이익을 바라시며
연민으로 [저희들에게] 법을 설하신다.'라고 이와 같이 세존에 대해 생각합니다."
‘‘Evañca [evaṃ (sī. pī.)] kira vo, bhikkhave, mayi hoti –
‘anukampako bhagavā hitesī; anukampaṃ upādāya dhammaṃ desetī’’’ti.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그대들은 나에 대해 '세존께서는 연민하는 분이시고
[그대들의] 이익을 바라시며 연민으로 [그대들에게] 법을 설하신다.'라고 생각하는구나."
35. ‘‘Tasmātiha, bhikkhave, ye vo [ye te (ka.)] mayā dhammā abhiññā desitā, seyyathidaṃ –
cattāro satipaṭṭhānā cattāro sammappadhānā cattāro iddhipādā pañcindriyāni pañca balāni satta bojjhaṅgā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tattha sabbeheva samaggehi sammodamānehi avivadamānehi sikkhitabbaṃ.
3.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 법을 최상의 지혜로 알아서 그대들에게 설했나니, 그것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과 네 가지 노력[四正勤]과 네 가지 성취수단[四如意足]과
다섯 가지 능력[五根]과 다섯 가지 힘[五力]과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와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이다.
여기에 대해 그대들은 모두 사이좋게 화합하여 분쟁하지 않고 공부지어야 한다."
Tesañca vo, bhikkhave, samaggānaṃ sammodamānānaṃ avivadamānānaṃ sikkhataṃ
siyaṃsu [siyuṃ (sī. syā. kaṃ.) saddanīti oloketabbā] dve bhikkhū abhidhamme nānāvādā.
4.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사이좋게 화합하여 언쟁하지 않고 공부지을 때
두 비구가 수승한 법에 대하여 서로 다른 주장을 할지도 모른다."
Tatra ce tumhākaṃ evamassa – ‘imesaṃ kho āyasmantānaṃ atthato ceva nānaṃ byañjanato ca nāna’nti,
tattha yaṃ bhikkhuṃ suvacataraṃ [subbacataraṃ (ka.)] maññeyyātha so upasaṅkamitvā evamassa vacanīyo
– ‘āyasmantānaṃ kho atthato ceva nānaṃ, byañjanato ca nānaṃ.
Tadamināpetaṃ [tadimināpetaṃ (syā. kaṃ.)] āyasmanto jānātha –
yathā atthato ceva nānaṃ, byañjanato ca nānaṃ.
Māyasmanto vivādaṃ āpajjitthā’ti.
5."이 [보리분법에] 대해 만일 그대들이
'이 존자들은 뜻에 대해서도 다르고 표현에 대해서도 다르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대들은 [그들 중] 말귀를 더 잘 알아듣는다고 생각되는 비구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존자들은 뜻에 대해서도 다르고 표현에 대해서도 다릅니다.
존자는 이런 이유로 뜻에 대해서도 다르고 표현에 대해서도 다르다고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존자들은 논쟁하지 마십시오.'
Athāparesaṃ ekatopakkhikānaṃ bhikkhūnaṃ yaṃ bhikkhuṃ suvacataraṃ maññeyyātha so upasaṅkamitvā
evamassa vacanīyo – ‘āyasmantānaṃ kho atthato ceva nānaṃ, byañjanato ca nānaṃ.
Tadamināpetaṃ āyasmanto jānātha – yathā atthato ceva nānaṃ, byañjanato ca nānaṃ.
Māyasmanto vivādaṃ āpajjitthā’ti.
그런 후에 반대편 비구들 중에서 말귀를 더 잘 알아듣는다고 생각되는 비구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존자들은 뜻에 대해서도 다르고 표현에 대해서도 다릅니다.
존자는 이런 이유로 뜻에 대해서도 다르고 표현에 대해서도 다르다고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존자들은 논쟁하지 마십시오.'
Iti duggahitaṃ duggahitato dhāretabbaṃ, suggahitaṃ suggahitato dhāretabbaṃ.
Duggahitaṃ duggahitato dhāretvā suggahitaṃ suggahitato dhāretvā
[iti duggahitaṃ duggahitato dhāretabbaṃ, duggahitaṃ duggahitato dhāretvā (sī. syā. kaṃ. pī.)
anantaravārattaye pana idaṃ pāṭhanānattaṃ natthi]
yo dhammo yo vinayo so bhāsitabbo.
If it is something difficult to understand, it should be borne as something difficult to understand.
The Teaching and the Discipline should be consulted,'
이와 같이 잘못 파악한 것은 잘못 파악한 것이라고 명심해야 한다.
잘못 파악한 것은 잘못 파악한 것이라고 명심하면서 법과 율을 설해야 한다."
[* 잘못 파악하고 있었음을 수지(납득)하도록 해당되는 法.律을 설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36. ‘‘Tatra ce tumhākaṃ evamassa –
‘imesaṃ kho āyasmantānaṃ atthato hi kho nānaṃ, byañjanato sametī’ti,
6. "이 [보리분법에] 대해 만일 그대들이
'이 존자들은 뜻에 대해서는 다르지만 표현에 대해서는 일치한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tattha yaṃ bhikkhuṃ suvacataraṃ maññeyyātha so upasaṅkamitvā evamassa vacanīyo –
‘āyasmantānaṃ kho atthato hi nānaṃ, byañjanato sameti.
Tadamināpetaṃ āyasmanto jānātha – yathā atthato hi kho nānaṃ, byañjanato sameti.
Māyasmanto vivādaṃ āpajjitthā’ti.
Athāparesaṃ ekatopakkhikānaṃ bhikkhūnaṃ yaṃ bhikkhuṃ suvacataraṃ maññeyyātha so upasaṅkamitvā
evamassa vacanīyo – ‘āyasmantānaṃ kho atthato hi kho nānaṃ, byañjanato sameti.
Tadamināpetaṃ āyasmanto jānātha – yathā atthato hi kho nānaṃ, byañjanato sameti.
Māyasmanto vivādaṃ āpajjitthā’ti.
그대들은 [그들 중] 말귀를 더 잘 알아듣는다고 생각되는 비구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존자들은 뜻에 대해서는 다르지만 표현에 대해서는 일치합니다.
존자는 이런 이유로 뜻에 대해서는 다르지만 표현에 대해서는 일치한다고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존자들은 논쟁하지 마십시오.'
그런 후에 반대편 비구들 중에서 말귀를 더 잘 알아듣는다고 생각되는 비구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존자들은 뜻에 대해서는 다르지만 표현에 대해서는 일치합니다.
존자는 이런 이유로 뜻에 대해서는 다르지만 표현에 대해서는 일치한다고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존자들은 논쟁하지 마십시오.'
Iti duggahitaṃ duggahitato dhāretabbaṃ, suggahitaṃ suggahitato dhāretabbaṃ.
Duggahitaṃ duggahitato dhāretvā suggahitaṃ suggahitato dhāretvā yo dhammo yo vinayo so bhāsitabbo.
The difficult to understand should be borne as the difficult to understand
the easily understood should be borne as the easily understood.
The Teaching and the Discipline should be consulted,
이와 같이 잘못 파악한 것은 잘못 파악한 것이라고 명심해야 하고,
잘 파악한 것은 잘 파악한 것이라고 명심해야 한다.
잘못 파악한 것은 잘못 파악한 것이라고 명심하고,
잘 파악한 것은 잘 파악한 것이라고 명심하면서 법과 율을 설해야 한다."
[*잘못 파악한 것은 잘못 파악하고 있음을, 잘 파악한 것은 잘 파악하고 있음을 수지하도록
그에 해당되는 法.律을 설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37. ‘‘Tatra ce tumhākaṃ evamassa –
‘imesaṃ kho āyasmantānaṃ atthato hi kho sameti, byañjanato nāna’nti,
7. "이 [보리분법에] 대해 만일 그대들이
'이 존자들은 뜻에 대해서는 일치하지만 표현에 대해서는 다르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tattha yaṃ bhikkhuṃ suvacataraṃ maññeyyātha so upasaṅkamitvā evamassa vacanīyo –
‘āyasmantānaṃ kho atthato hi sameti, byañjanato nānaṃ.
Tadamināpetaṃ āyasmanto jānātha – yathā atthato hi kho sameti, byañjanato nānaṃ.
Appamattakaṃ kho panetaṃ yadidaṃ – byañjanaṃ.
Māyasmanto appamattake vivādaṃ āpajjitthā’ti.
Athāparesaṃ ekatopakkhikānaṃ bhikkhūnaṃ yaṃ bhikkhuṃ suvacataraṃ maññeyyātha so upasaṅkamitvā
evamassa vacanīyo – ‘āyasmantānaṃ kho atthato hi sameti, byañjanato nānaṃ.
Tadamināpetaṃ āyasmanto jānātha – yathā atthato hi kho sameti, byañjanato nānaṃ.
Appamattakaṃ kho panetaṃ yadidaṃ – byañjanaṃ.
Māyasmanto appamattake [appamattakehi (sī. pī.)] vivādaṃ āpajjitthā’ti.
Iti suggahitaṃ suggahitato dhāretabbaṃ, duggahitaṃ duggahitato dhāretabbaṃ.
Suggahitaṃ suggahitato dhāretvā duggahitaṃ duggahitato dhāretvā yo dhammo yo vinayo so bhāsitabbo.
그대들은 [그들 중] 말귀를 더 잘 알아듣는다고 생각되는 비구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존자들은 뜻에 대해서는 일치하지만 표현에 대해서는 다릅다.
존자는 이런 이유로 뜻에 대해서는 일치하지만 표현에 대해서는 다르다고 알아야 합니다.
표현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존자들은 논쟁하지 마십시오."
그런 후에 반대편 비구들 중에서 말귀를 더 잘 알아듣는다고 생각되는 비구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존자들은 뜻에 대해서는 일치하지만 표현에 대해서는 다릅다.
존자는 이런 이유로 뜻에 대해서는 일치하지만 표현에 대해서는 다르다고 알아야 합니다.
표현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존자들은 논쟁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이 잘 파악한 것은 잘 파악한 것이라고 명심해야 하고,
잘못 파악한 것은 잘못 파악한 것이라고 명심해야 한다.
잘 파악한 것은 잘 파악한 것이라고 명심하고,
잘못 파악한 것은 잘못 파악한 것이라고 명심하면서 법과 율을 설해야 한다."
38. ‘‘Tatra ce tumhākaṃ evamassa –
‘imesaṃ kho āyasmantānaṃ atthato ceva sameti byañjanato ca sametī’ti,
8. "이 [보리분법에] 대해 만일 그대들이
'이 존자들은 뜻에 대해서는 일치하고 표현에 대해서도 일치한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tattha yaṃ bhikkhuṃ suvacataraṃ maññeyyātha so upasaṅkamitvā evamassa vacanīyo –
‘āyasmantānaṃ kho atthato ceva sameti, byañjanato ca sameti.
Tadamināpetaṃ āyasmanto jānātha – yathā atthato ceva sameti byañjanato ca sameti.
Māyasmanto vivādaṃ āpajjitthā’ti.
Athāparesaṃ ekatopakkhikānaṃ bhikkhūnaṃ yaṃ bhikkhuṃ suvacataraṃ maññeyyātha so upasaṅkamitvā
evamassa vacanīyo – ‘āyasmantānaṃ kho atthato ceva sameti byañjanato ca sameti.
Tadamināpetaṃ āyasmanto jānātha – yathā atthato ceva sameti byañjanato ca sameti.
Māyasmanto vivādaṃ āpajjitthā’ti.
Iti suggahitaṃ suggahitato dhāretabbaṃ.
Suggahitaṃ suggahitato dhāretvā yo dhammo yo vinayo so bhāsitabbo.
그대들은 [그들 중] 말귀를 더 잘 알아듣는다고 생각되는 비구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존자들은 뜻에 대해서는 일치하고 표현에 대해서도 일치합니다.
존자는 이런 이유로 뜻에 대해서는 일치하고 표현에 대해서도 일치한다고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존자들은 논쟁하지 마십시오.'
그런 후에 반대편 비구들 중에서 말귀를 더 잘 알아듣는다고 생각되는 비구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존자들은 뜻에 대해서도 일치하고 표현에 대해서도 일치합니다.
존자는 이런 이유로 뜻에 대해서도 일치하고 표현에 대해서도 일치한다고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존자들은 논쟁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이 잘 파악한 것은 잘 파악한 것이라고 명심해야 한다.
잘 파악한 것은 잘 파악한 것이라고 명심하면서 법과 율을 설해야 한다."
39. ‘‘Tesañca vo, bhikkhave, samaggānaṃ sammodamānānaṃ avivadamānānaṃ sikkhataṃ
siyā aññatarassa bhikkhuno āpatti siyā vītikkamo,
tatra, bhikkhave, na codanāya taritabbaṃ [coditabbaṃ (syā. kaṃ. ka.) turitabbaṃ (?)].
Puggalo upaparikkhitabbo –
9.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사이좋게 화합하여 분쟁하지 않고 공부 지을 때
다른 비구가 계를 범하고 율을 어길지도 모른다."
10. "비구들이여, 이 경우에 그대들은 서둘러 질책해서는 안되며 그 사람에 대해서 자세히 검증해야 한다.
‘iti mayhañca avihesā bhavissati parassa ca puggalassa anupaghāto,
paro hi puggalo akkodhano anupanāhī adaḷhadiṭṭhī suppaṭinissaggī,
sakkomi cāhaṃ etaṃ puggalaṃ akusalā vuṭṭhāpetvā kusale patiṭṭhāpetu’nti.
Sace, bhikkhave, evamassa, kallaṃ vacanāya.
'이렇게 하면 나도 성가시지 않을 것이고 저 사람도 괴롭지 않을 것이다.
저 사람은 분노하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을 것이며
자기 견해에 국집하지 않고 쉽게 그것을 실토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사람을 해로움에서 벗어나서 유익함에 굳건히 머물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만일 이와 같이 생각되면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Sace pana, bhikkhave, evamassa –
‘mayhaṃ kho avihesā bhavissati parassa ca puggalassa upaghāto,
paro hi puggalo kodhano upanāhī adaḷhadiṭṭhī suppaṭinissaggī,
sakkomi cāhaṃ etaṃ puggalaṃ akusalā vuṭṭhāpetvā kusale patiṭṭhāpetuṃ.
Appamattakaṃ kho panetaṃ yadidaṃ –
parassa [yadidaṃ mayhañca vihesā bhavissati parassa ca (ka.)] puggalassa upaghāto.
Atha kho etadeva bahutaraṃ – svāhaṃ sakkomi etaṃ puggalaṃ akusalā vuṭṭhāpetvā kusale patiṭṭhāpetu’nti.
Sace, bhikkhave, evamassa, kallaṃ vacanāya.
11. "비구들이여, 그런데 만일 그대들에게
'나는 성가시지 않을 것이나 저 사람은 괴로울 것이다.
저 사람은 분노하고 앙심을 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견해에 국집하지 않고 쉽게 그것을 실토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사람을 해로움에서 벗어나서 유익함에 굳건히 머물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사람이 괴로운 것은 사소한 것이지만
내가 이 사람을 해로움에서 벗어나서 유익함에 굳건히 머물도록하는 것은 더 큰 것이다.'라고
생각되면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Sace pana, bhikkhave, evamassa – ‘mayhaṃ kho vihesā bhavissati parassa ca puggalassa anupaghāto.
Paro hi puggalo akkodhano anupanāhī daḷhadiṭṭhī duppaṭinissaggī,
sakkomi cāhaṃ etaṃ puggalaṃ akusalā vuṭṭhāpetvā kusale patiṭṭhāpetuṃ.
Appamattakaṃ kho panetaṃ yadidaṃ –
mayhaṃ vihesā [mayhañca vihesā bhavissati parassa ca puggalassa upaghāto (ka.)].
Atha kho etadeva bahutaraṃ – svāhaṃ sakkomi etaṃ puggalaṃ akusalā vuṭṭhāpetvā kusale patiṭṭhāpetu’nti.
Sace, bhikkhave, evamassa, kallaṃ vacanāya.
12. "비구들이여, 그런데 만일 그대들에게
'나는 성가실 것이나 저 사람은 괴롭지 않을 것이다.
저 사람은 분노하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견해에 국집하여 쉽게 그것을 실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을 해로움에서 벗어나서 유익함에 굳건히 머물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성가신 것은 사소한 것이지만
내가 이 사람을 해로움에서 벗어나서 유익함에 굳건히 머물도록하는 것은 더 큰 것이다.'라고
생각되면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Sace pana, bhikkhave, evamassa – ‘mayhañca kho vihesā bhavissati parassa ca puggalassa upaghāto.
Paro hi puggalo kodhano upanāhī daḷhadiṭṭhī duppaṭinissaggī,
sakkomi cāhaṃ etaṃ puggalaṃ akusalā vuṭṭhāpetvā kusale patiṭṭhāpetuṃ.
Appamattakaṃ kho panetaṃ yadidaṃ – mayhañca vihesā bhavissati parassa ca puggalassa upaghāto.
Atha kho etadeva bahutaraṃ – svāhaṃ sakkomi etaṃ puggalaṃ akusalā vuṭṭhāpetvā kusale patiṭṭhāpetu’nti.
Sace, bhikkhave, evamassa, kallaṃ vacanāya.
13. "비구들이여, 그런데 만일 그대들에게
'나는 성가실 것이고 저 사람도 괴로울 것이다.
저 사람은 분노하고 앙심을 품을 것이며
자기 견해에 국집하여 쉽게 그것을 실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을 해로움에서 벗어나서 유익함에 굳건히 머물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성가시고 저 사람이 괴로운 것은 사소한 것이지만
내가 이 사람을 해로움에서 벗어나서 유익함에 굳건히 머물도록하는 것은 더 큰 것이다.'라고
생각되면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Sace pana, bhikkhave, evamassa – ‘mayhañca kho vihesā bhavissati parassa ca puggalassa upaghāto.
Paro hi puggalo kodhano upanāhī daḷhadiṭṭhī duppaṭinissaggī,
na cāhaṃ sakkomi etaṃ puggalaṃ akusalā vuṭṭhāpetvā kusale patiṭṭhāpetu’nti.
Evarūpe, bhikkhave, puggale upekkhā nātimaññitabbā.
14. "비구들이여, 그런데 만일 그대들에게
'나는 성가실 것이고 저 사람도 괴로울 것이다.
저 사람은 분노하고 앙심을 품을 것이며
자기 견해에 국집하여 쉽게 그것을 실토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을 해로움에서 벗어나서 유익함에 굳건히 머물도록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되면 그 사람에게는 무관심해야 한다."
40. ‘‘Tesañca vo, bhikkhave, samaggānaṃ sammodamānānaṃ avivadamānānaṃ sikkhataṃ
aññamaññassa vacīsaṃhāro [vacīsaṅkhāro (sī. pī.)] uppajjeyya diṭṭhipaḷāso [diṭṭhipalāso (sī. ka.)]
cetaso āghāto appaccayo anabhiraddhi.
Tattha ekatopakkhikānaṃ bhikkhūnaṃ yaṃ bhikkhuṃ suvacataraṃ maññeyyātha so upasaṅkamitvā
evamassa vacanīyo – ‘yaṃ no, āvuso, amhākaṃ samaggānaṃ sammodamānānaṃ avivadamānānaṃ
sikkhataṃ aññamaññassa vacīsaṃhāro uppanno diṭṭhipaḷāso cetaso āghāto appaccayo anabhiraddhi,
taṃ jānamāno samaṇo garaheyyā’ti [samāno (sī. ka.)].
Sammā byākaramāno, bhikkhave, bhikkhu evaṃ byākareyya –
‘yaṃ no, āvuso, amhākaṃ samaggānaṃ sammodamānānaṃ avivadamānānaṃ
sikkhataṃ aññamaññassa vacīsaṃhāro uppanno diṭṭhipaḷāso cetaso āghāto appaccayo anabhiraddhi,
taṃ jānamāno samaṇo garaheyyāti.
Etaṃ panāvuso, dhammaṃ appahāya nibbānaṃ sacchikareyyā’ti.
Sammā byākaramāno, bhikkhave, bhikkhu evaṃ byākareyya –
‘etaṃ, āvuso, dhammaṃ appahāya na nibbānaṃ sacchikareyyā’ti.
15.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사이좋게 화합하여 논쟁하지 않고 공부 지을 때
상호비방, 비열한 견해, 마음의 상처, 불쾌함, 반감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떤 한쪽 편 비구들 중에서 말귀를 더 잘 알아듣는다고 생각되는 비구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도반이여, 우리들이 사이좋게 화합하여 논쟁하지 않고 공부 짓는 동안
상호비방, 비열한 견해, 마음의 상처, 불쾌함, 반감이 생겼습니다.
사문께서 이것을 아시면 걱정하시겠습니까?'
비구들이여, 바르게 설명하는 비구는 이렇게 설할 것이다.
'우리들이 … 아신다면 사문께서는 걱정하실 것입니다.'
'도반이여, 이런 법을 버리지 않고 열반을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바르게 설명하는 비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도반이여, 이런 법을 버리지 않고서는 열반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
‘‘Athāparesaṃ ekatopakkhikānaṃ bhikkhūnaṃ yaṃ bhikkhuṃ suvacataraṃ maññeyyātha, so upasaṅkamitvā
evamassa vacanīyo – ‘yaṃ no, āvuso, amhākaṃ samaggānaṃ sammodamānānaṃ avivadamānānaṃ
sikkhataṃ aññamaññassa vacīsaṃhāro uppanno diṭṭhipaḷāso cetaso āghāto appaccayo anabhiraddhi,
taṃ jānamāno samaṇo garaheyyā’ti.
Sammā byākaramāno, bhikkhave, bhikkhu evaṃ byākareyya –
‘yaṃ no, āvuso, amhākaṃ samaggānaṃ sammodamānānaṃ avivadamānānaṃ
sikkhataṃ aññamaññassa vacīsaṃhāro uppanno diṭṭhipaḷāso cetaso āghāto appaccayo anabhiraddhi
taṃ jānamāno samaṇo garaheyyāti.
Etaṃ panāvuso, dhammaṃ appahāya nibbānaṃ sacchikareyyā’ti.
Sammā byākaramāno, bhikkhave, bhikkhu evaṃ byākareyya –
‘etaṃ kho, āvuso, dhammaṃ appahāya na nibbānaṃ sacchikareyyā’’’ti.
16. "그러고는
다른 편의 비구들 중에서 말귀를 더 잘 알아듣는다고 생각되는 비구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도반이여, 우리들이 사이좋게 화합하여 논쟁하지 않고 공부 짓는 동안
상호비방, 비열한 견해, 마음의 상처, 불쾌함, 반감이 생겼습니다.
사문께서 이것을 아시면 걱정하시겠습니까?'
비구들이여, 바르게 설명하는 비구는 이렇게 설할 것이다.
'우리들이 … 아신다면 사문께서는 걱정하실 것입니다.'
'도반이여, 이런 법을 버리지 않고 열반을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바르게 설명하는 비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도반이여, 이런 법을 버리지 않고서는 열반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
‘‘Taṃ ce, bhikkhave, bhikkhuṃ pare evaṃ puccheyyuṃ –
‘āyasmatā no ete bhikkhū akusalā vuṭṭhāpetvā kusale patiṭṭhāpitā’ti?
Sammā byākaramāno, bhikkhave, bhikkhu evaṃ byākareyya –
‘idhāhaṃ, āvus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ṃ, tassa me bhagavā dhammaṃ desesi,
tāhaṃ dhammaṃ sutvā tesaṃ bhikkhūnaṃ abhāsiṃ.
Taṃ te bhikkhū dhammaṃ sutvā akusalā vuṭṭhahiṃsu, kusale patiṭṭhahiṃsū’ti.
17. "비구들이여, 만일 다른 비구들이 그 비구에게
'존자가 이 비구들을 해로움에서 벗어나 유익함에 굳건히 머물도록 하였습니까?'라고 물으면,
바르게 설명하는 비구는 이와 같이 설할 것이다.
'도반이여, 저는 세존을 뵈러 갔습니다. 세존께서는 제게 법을 설해주셨습니다.
그 법을 듣고 저는 비구들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그 비구들은 그 법을 듣고 해로움에서 벗어나 유익함에 굳건히 머물렀습니다.'
Evaṃ byākaramāno kho, bhikkhave, bhikkhu na ceva attānaṃ ukkaṃseti, na paraṃ vambheti,
dhammassa cānudhammaṃ byākaroti,
na ca koci sahadhammiko vādānuvādo gārayhaṃ ṭhānaṃ āgacchatī’’ti.
비구들이여, 이렇게 설명하는 비구는 자신을 칭송하지 않고 남을 비난하지 않고
[세존의] 가르침대로 설명한다.
어떤 이유로도 그의 주장은 비난받지 않는다."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te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nti.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 비구들은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Kintisuttaṃ niṭṭhitaṃ tatiyaṃ.
어떻게 생각하는가 경(M103)이 끝났다.
미주현대불교-염화미소-작성시간2013.10.03
*본 경은 대림 스님이 번역하신 맛지마 니꺄야 제3권 635쪽-를 寫經한 것입니다.
저작권은 옮긴이: 대림스님, 펴낸이: 차명희, 펴낸곳: 초기불전연구원
* 주> 표시는 번역자이신 대림 스님의 '주' 입니다.
*팔리 경 출처: http://www.tipitaka.org/romn/
*사전 출처: http://dictionary.buddhistdoor.com/
===우다나 Bodhi
Khuddaka Nikāya, udānapāḷi, 1. bodhivaggo n, 1. paṭhamabodhisuttaṃ (KN 3.1) 제1 품 깨달음 품 Bodhi-vagga(Ud1:1~10) 깨달음 경1(Ud1:1)54) Bodhi-sutta 54) 우러나온 말씀[自說, udāna]을 포함한 본경은 율장『마하왁가』(대품) 제1편 대 편(Mahākhandhaka)의 첫 번째 설명인 깨달음에 대한 설명(Bodhikathā)의 첫 번째 부문(pathamavāra, Vin.i.2)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즉 율장 『마하왁가』도 본경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 1. Evaṃ me sutaṃ — 1. 이와 같이 [1] 나는 들었다. Ekaṃ samayaṃ bhagavā Uruvelāyaṃ viharati najjā Nerañjarāya Tīre bodhirukkhamūle paṭhamābhisambuddho. 한때 세존께서는 처음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나서55)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의 언덕에 있는 깨달음의 나무[菩提樹] 아래에서 머무셨다.56) Tena kho pana samayena bhagavā sattāhaṃ ekapallaṅkena nisinno hoti vimuttisukhapaṭisaṃvedī . 그때 세존께서는 해탈의 행복을 누리시면서57) 칠 일 동안 단 한 번의 가부좌로 앉아 계셨다.58) 55) '처음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나서'는 주석서 “처음으로 완전히 깨달은 분이 되시고 나서(paṭhamaṃ abhisambuddho hutvā)라는 말이며 모든 것의 처음이라는 뜻이다(sabbapaṭhamaṃyevāti attho).”(UdA.27)라고 설명한다. 56) uruvelāyaṃ viharati najjā nerañjarāya tīre bodhirukkhamūle paṭhamābhisambuddho를 옮긴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우루웰라(uruvelā)는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지역의 이름이고 그곳을 흐르는 강이 네란자라 강(nadi nerañjarā)이며 그곳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rukkhamūle)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증득하셨다. 여기서 깨달음은 네 가지 도에 대한 지혜이며(bodhi vuccati catūsu maggesu ñāṇaṃ) 그래서 그 나무를 이렇게 깨달음의 나무(Bodhi rukkha), 즉 보리수라고 부르고 있다.(VinA.v.952) 『우다나』의 첫 구절인 본경의 이 구문은 본경을 포함한 『우다나』의 6개 경들(Ud1:1; 2; 3; 4; 11; 30)의 첫 구절로 나타나며 4부 니까야 가운데 D16 §3.34; D21 §1.6; S4:1~3 §1; S4:24 §1; S6:1~2 §1; S47:18 §1; S47:43 §3; S48:57 §1; A4:21 ~ 22 §1의 13개의 경들과 율장 『마하왁가』(대품)의 맨 첫 구절(Vin.i.1)로도 나타나고 있다. 57) '해탈의 행복을 누리시면서'는 vimuttisukha-paṭisaṃvedī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이 해탈의 행복을 과의 증득의 행복(phalasamāpatti-sukha)으로 설명한다.(UdA.32) 계속해서 주석서는 해탈을 다섯 가지 해탈(pañca vimuttiyo), 즉 ① 억압에 의한 해탈(vikkhambhana-vimutti) ②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함에 의한(paccanīkavasena pariccattāhi tadaṅga-vimutti, SA.iii.209) 해탈 ③ 근절에 의한 해탈(samuccheda-vimutti) ④ 편안함에 의한 해탈(paṭippassaddhi-vimutti) ⑤ 벗어남에 의한 해탈(nissaraṇa-vimuttīti)로 나열하고 이 다섯 가지를 설명한다. 그러면서 ⑤ 벗어남에 의한 해탈이란 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sabbasaṅkhata-nissaṭattā) 모든 형성된 것들[諸行]로부터 해탈한(sabbasaṅkhāra-vimutta) 열반(nibbāna)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주석서는 이러한 열반을 대상으로 가지는 것(nibbānārammaṇā)이 바로 이 과의 증득(phalasamāpatti)이라고 마무리한다.(UdA.33) 다섯 가지 해탈에 대해서는 『맛지마 니까야』제4권 「경이롭고 놀라운 일 경」(M123) §2의 해당 주해를 참조하기 바란다. 58) “단 한 번의 가부좌로(ekapallaṅkena)'라고 하였다. 위사카 달의 보름에(visākhāpuṇṇamāya) 아직 태양이 떠오르지 않았을 때(anatthaṅgateyeva sūriye) 패하지 않는 으뜸가는 자리인(aparājitapallaṅkavare) 금강의 제단[金剛壇, vajirāsane]에 앉으신 때로부터 시작하여(nisinnakālato paṭṭhāya) 단 한 번도 일어서시지 않고(sakimpi anuṭṭhahitvā) 가부좌를 트신 그대로(yathā ābhujitena) 단 한 번의 가부좌로(ekeneva pallaṅkena)라는 뜻이다.” (UdA.31; VinAT.iii.132) Atha kho bhagavā tassa sattāhassa accayena tamhā samādhimhā vuṭṭhahitvā rattiyā paṭhamaṃ yāmaṃ paṭiccasamuppādaṃ anulomaṃ sādhukaṃ manasākāsi —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 칠 일이 지난 뒤 그 삼매로부터 출정하셔서 밤의 초저녁[初夜]에59) 연기를 발생하는 구조로[流轉門]60) 이처럼61) 잘 마음에 잡도리하셨다.62) 59) '밤의 초저녘[初夜]에는 rattiyā paṭhamaṃ yāmaṃ을 옮긴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의 「깨달음 경」2(Ud1:2) §1의 주해를 참조하기 바란다. 60) “'발생하는 구조로[流轉門, anulomaṃ]'라고 하셨다. 이것은 ‘무명을 조건으로 [업]형성들[行]이'라는 등의 방법으로 설하신 무명 등으로 시작하는 [12연기의] 조건의 형태가 (avijjādiko paccayākāro)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에(attanā kattabbakiccakaraṇato) 발생하는 구조라고(anulomoti) 말씀하신 것이다. 혹은 처음부터 시작해서 끝에 도달하도록 하면서 설해졌기 때문에 (ādito paṭṭhāya antaṃ pāpetvā vuttattā) 혹은 전개됨에 의해서 발생하는 구조로 되기 때문에(pavattiyā vā anulomato) 발생하는 구조인데(anulomo) 그런 ‘발생하는 구조로(anulomaṃ)'라는 뜻이다.”(UdA.37~38) 61) 여기서 ‘이처럼'은 iti를 옮긴 것이다. 이 용어는 PTS본에는 "yāmaṃ paṭiccasamuppādaṃ anulomaṃ sādhukaṃ manasākāsi iti : imasmiṃ sati …”로 편집되어 나타나고 VRI본에는 “yāmaṃ paṭiccasamuppādaṃ anulomaṃ sādhukaṃ manasākāsi — iti imasmiṃ sati …"로 편집되어 나타난다. 역자는 전자로 읽어서 옮겼다. 그런데 주석서는 iti를 'imasmiṃ sati …'와 함께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UdA.38) VRI본의 편집이 주석서의 입장과는 더 어울리는 것으로 여겨진다. 62)부처님의 성도 과정과 성도 후의 일화를 담고 있는 『맛지마 니까야』「성스러운 구함 경」(M26)에 해당하는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MA.ii.181 ~ 186)에는 세존께서 깨달음을 증득하신 뒤 7X7=49일 동안에 하셨던 일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흥흥거림 경」(Udl:4) §1의 해당 주해를 참조할 것. ♦ “ Iti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 yadidaṃ — avijjā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ṃ, nāmarūpapaccayā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taṇhāpaccayā upādānaṃ, 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ī”ti. 2.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 즉 무명을 조건으로 [업]형성들[行]이, [업]형성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識]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名色)이,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觸]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取],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과 슬픔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老死優悲苦惱]이 발생한다.63) 이와 같이 이러한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64) 라고.65) 63) 여기「깨달음 경」1/2/3(Ud1:1~3)에 나타나는 무명 등의 12연기의 구성 요소들에 대한 설명은 『초기불교 이해』 299쪽 이하의 <(5) 12가지 연기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정의>를 참조하고 『아비담마 길라잡이』제8장의 <I. 연기의 방법 - §3. 기본 정형구>(제2권 179쪽 이하)의 해설도 참조하기 바란다. 64) “'이와 같이(evaṃ)'라는 단어는 설명되는 것(niddiṭṭha)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것이 무명 등의 원인(kāraṇa) 때문에 있는 것이지 자재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라는 등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na issaranimmānādīhīti dasseti), '이러한(etassa)'이라는 것은 이미 말한 것의(yathāvuttassa)라는 뜻이다. '전체(kevalassa)'라는 것은 섞이지 않은 혹은 모두의(asammissassa sakalassa vā)란 뜻이다. '괴로움의 무더기[苦蘊, dukkhakkhandhassa]'란 괴로움의 덩어리(dukkhasamūha)라는 뜻이고 중생(satta)이 아니고 영혼(壽者, jīva]도 아니고 아름다움이나 즐거움 등(subhasukhādi)도 아니라는 뜻이다. ‘발생한다.(samudayo hoti)'란 생성이 있게 된다(nibbatti sambhavati)라는 뜻이다.” (UdA.44) 비슷한 설명이 『청정도론』제17장(XVII) §50에도 나타난다. 65)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 즉 무명을 조건으로 [업]형성들[行]이 … 이와 같이 이러한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라고‘는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 yadidaṃ — avijjāpaccayā saṅkhārā,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를 옮긴 것이다. 여기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와 다음 경의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할 때 저것이 소멸한다.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Ud1:2 §2)와 함께 연결되어서 연기의 추상화된 정형구로 나타나고 있다. 본서에서처럼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와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할 때 저것이 소멸한다.’가 12연기의 유전문의 정형구(Ud1:1 §2)와 환멸문의 정형구(Ud1:2 §2)에 분리되어서 나타나는 경우는 『맛지마 니까야』제2권「갈애 멸진의 긴 경」(M38)에서 §19와 §22로 분리되어 나타나는 것과 『빠띠삼비다 막가』(무애해도, Ps.i.114)에서 발생구조만이 언급되는 것 외에는 니까야의 경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 연기의 추상화된 정형구와 12연기의 유전문, 환멸문, 순관, 역관 등에 대해서는 『초기불교 이해, 230~231를 참조할 것, 그리고 이 연기의 디 상화된 정형구에 대한 담마빨라 스님의 심오하면서도 긴 주석은 『우다나 주석서』(UdA.38~42)에 들어있다. 관심 있는 분들은 Masefield가 번역한 『The Udana Commentary I』의 66~72쪽을 일독할 것을 권한다. ♦ Atha kho bhagavā etamatthaṃ viditvā tāyaṃ velāyaṃ imaṃ udānaṃ udānesi — 3. 그때 세존께서는 이 의미66)를 아시고 그 즉시 바로 이 우러나온 말씀을 읊으셨다.67) 66) 여기서 '의미'로 옮긴 용어는 attha이다. 범어 일반에서 attha(Sk. artha)는 다양한 뜻으로 쓰인다. 초기불교에서는 주로 ① '이로운 것, 이익' ② '뜻, 의미 ③ '이치, 목적, 주제, 본질'이라는 세 가지 뜻을 나타낸다. 냐나몰리 스님은 이 셋을 각각 ① beneft, good ② meaning ③ purpose, aim, goal, need로 정리하고 있다.(NMD s.v. attha) ① '이로운 것, 이익'의 뜻으로 쓰일 때는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세상을 연민하고 신과 인간의 이로움과 이익과 행복 을 위하여”(D14 §3.22 등)라는 문맥 등에 많이 나타난다. ② ‘뜻, 의미'로는 “의미와 표현을 구족하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梵行)을 드러낸다.”(D2 S40 등)라는 정형구에서 보듯이 '의미(attha)와 표현(byañjana)' 이라는 문맥에서 많이 쓰인다. ③ '이치, 목적, 주제, 본질'의 뜻으로 쓰일 경우에는 “그들이 [드러내는] 그 궁극적인 이치는 청정하나니(tesaṃ so attho paramo visujjhati)"(It3:49 §4) 등으로 나타나며 특히 아비담마에서는 빠라맛타(paramattha, parama + attha, 구경, 궁극의 이치, 궁극적인 것)라고 정착이 되었고 중국에서는 勝義, 眞實, 第一義(승의, 진실, 제일의) 등으로 번역하였다. 이 문맥에서 attha는 인도의 육파철학, 특히 논리학에서의 빠다르타(padārtha, Pāli: padattha, pada + attha, 논의의 주제, 즉 그 파에서 주장하고 정리하고 논의하고 관심을 가지는 근본주제)와 일맥상통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여기에 대해서는『아비담마 길라잡이』역자 서문 §2를 참조할 것. aāttha가 가지는 이 세 가지 뜻이 모두 본경 이 문맥의 attha에 적용된다고 볼 수 있지만 특히 세 번째의 의미가 강하다. 바로 다음 주해도 참조하기 바란다. 67) "'이 의미를 아시고(etamatthaṃ viditvā)'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처럼 무명 등을 통해서 [업]형성들[行] 등의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난다고 말씀 하셨는데 모든 측면에서(sabbākārena) [앞에 서술된 부분의] 이 의미를, 아시고라는 뜻이다. ‘그 즉시 바로(tāyaṃ velāyaṃ)'라는 것은 그 의미를 아신 그 즉시에(tassa atthassa viditavelāyaṃ)라는 말이다. '이 우러나온 말씀을 읊으셨다(imaṃ udānaṃ udānesi),'라는 것은 그 의미를 아셨을 때(tasmiṃ atthe vidite) 원인과 원인에서 생긴 법들을 꿰뚫어 아는 위력을 밝히는 것이며(hetuno ca hetusamuppannadhammassa ca pajānanāya ānubhāvadīpalkaṃ) ‘참으로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날 때'로 시작하는 이 우러나온 말씀을 읊으신 것이다. 이것은 기쁨과 함께하고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somanassa-sampayutta-ñāṇa samuṭṭhānaṃ).”(UdA.44) 한편『상윳따 니까야 주석서』는 '이 의미를 아시고(etamatthaṃ viditvā)’를 “그 경우(측면)를 아신 뒤에(taṃ kāraṇaṃ jānitvā)” (SA.i.144)로 설명 하고 있는데 attha를 kāraṇa로 해석하고 있다. 한편 나나몰리 스님은 kāraṇa의 용례로 ① act of causing to do ② instrument ③ cause, reason ④ case, instance의 네 가지를 들고 있다.(NMD s.v. kāraṇa) 한편 Ireland는 본 문장을 “Then, on realizing its significance, the Lord uttered on that occasion this inspired utterance.” (Ireland, 13 등)로 옮겼고, 타닛사라 스님은 “Then, on realizing the signifcance of that, the Blessed One on that occasion exclaimed:” (Thanissara, 26 등)로 옮겼으며, Masefield는 “Fathoming this matter at that time the blessed One gave rise to this Udāna.” (Masefield, 74~75)로 옮겼다. 이처럼 앞의 두 역자는 attha를 significance(중요성)로 옮겼고 후자는 matter로 옮겼다. ♦ “Yadā have pātubhavanti dhammā, ♦ ātāpino jhāyato brāhmaṇassa. ♦ Athassa kaṅkhā vapayanti sabbā, ♦ yato pajānāti sahetudhamman”ti. paṭhamaṃ. ∴ “근면하고 참선을 하는 바라문에게68) 참으로 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날 때 그의 모든 의문들은 사라지나니 원인을 가진 법을 꿰뚫어 알기 때문이로다.”69) {1} 68) “근면하고 참선을 하는 바라문에게(ātāpino jhāyato brāhmaṇassa)'라고 하셨다. 여기서 '근면하고(atāpino)'란 바른 노력[正勤]으로 정진하는 자(sammappadhānavīriyavato)이고 '참선을 하는(jhāyato)'이란 대상을 명상하고(ārammaṇūpanijjhāna) 특징을 명상하는 것(lakkhaṇūpanijjhāna)으로 참선을 하는 자이다. '바라문에게(brāhmaṇassa)'란 사악함을 내몰아 버린(bāhita-pāpassa) 번뇌 다한 자에게(khīṇāsavassa)라는 뜻이다.”(Ud A.44) 한편 '사악한 법을 내쫓아 버린 바라문(yo brāhmaṇo bāhita-pāpa-dhammo)'이라는 표현이 본서 Ud1:4 §3과 Ud1:5 §3의 우러나온 말씀에 나타나는데 부처님께서는 바라문, 즉 brāhmaṇa라는 단어의 유래를 문자적으로 이처럼 bāhitapāpadhamma로 설명하신다. 그리고 본서「아자깔라빠까 경」(Ud1:7) §3에 해당하는 주석서도 “사악한 법들을 내몰았기 때문에 궁극적 의미에서 바라문이다 (bāhitapāpadhammatāya paramatthabrāhmaṇo)"라고 바라문을 정의하고 있는데 주석서도 brāhmaṇa를 bāhita+dhamma로 설명한다.(UdA.70) 다른 주석서들도 여기서처럼 “사악함을 몰아내어(bāhita-pāpa) 번뇌가 다한(khīṇāsava) 바라문"(SA.i.20, cf. AAT.ii.203)이라고 바라문을 설명한다. 『법구경』(Dhp) {388}, {396) ~{423} 등에서도 부처님은 바라문(brāhmaṇa)으로 불려진다. 아울러『맛지마 니까야』제3권「와셋타 경」(M98) §10 이하의 게송들과 『법구경』의 바라문 품(Dhp.390~423) 등에서 부처님께서는 진정한 바라문을 여러 가지로 정의하고 계시는데 태생에 의해서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탐·진·치가 다하고 번뇌가 다한 성자야말로 진정한 바라문이라고 강조하신다. 바라문 집단의 출현(brāhmaṇa-maṇḍala)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은 『디가 니까야』제3권「세기경」(D27) §22를 참조하기 바란다. 한편『맛지마 니까야 주석서』는 “'참선을 하라(jhāyatha).'는 것은 대상을 명상하는 것(ārammaṇ-ūpanijjhāna)으로 38가지 대상을, 특징을 명상하는 것(lakkhaṇ-ūpanijjhāna)으로 무더기[蘊], 감각장소[處] 등을 무상 등으로 명상한다는 말이다.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증장시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MA.1.195)로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38가지 대상은 38가지 명상주제(kammaṭṭhāna)를 말한다. 『청정도론』에서 명상주제는 모두 40가지로 정리되어 나타나는데 주석서 문헌에서는 이처럼 38가지로도 나타난다. 38가지로 정리한 것은 경에 나타나는 10가지 까시나 가운데 마지막의 두 가지 까시나(허공의 까시나와 알음 알이의 까시나)를 제외한 것이다. 이 두 가지 까시나는 네 가지 무색의 증득 가운데 처음의 둘인 공무변처의 증득과 식무변처의 증득에 포함되기 때문에 주석서 문헌에서는 이를 제외하고 38가지 명상주제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청정도론』에서는 이 둘을 제한된 허공의 까시나(paricchinnākāsa-kasiṇa)와 광명의 까시나(āloka-kasiṇa)로 대체해서 모두 40가지 명상주제로 정리하고 있다. 경에 나타나는 열 가지 까시나 등에 대해서는 본서「답바 경」1(Ud8:9) §2의 해당 주해를 참조할 것. 40가지 명상주제에 대해서『청정도론』III.103 이하와 『아비담마 길라잡이』제9장 §6 이하와 <도표19.1>을 참조할 것. 69)『우다나 주석서』는 부처님께서 정등각을 체득하고 읊으신 우러나온 말씀의 선후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다.(UdA,208 ~ 209)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세상 경」(Ud3:10) §3의 해당 주해를 참조하기 바란다. 『우다나 주석서』는 부처님의 첫 번째 우러나온 말씀으로 아래에 적고 있는 『법구 경』의 게송(Dhp{153} ~ {154})을 들고 있다.(UdA,208)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지혜를 얻지 못하여 치달려왔다. 집 짓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집 짓는 자여, [드디어] 그대는 드러났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다. [이제] 마음은 [업]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 (Anekajātisaṃsāraṃ, sandhāvissaṃ anibbisaṃ; Gahakāraṃ gavesanto, dukkhā jāti punappunaṃ. Gahakāraka diṭṭho si, puna gehaṃ na kāhasi; Sabbā te phāsukā bhaggā, gahakūṭaṃ visaṅkhataṃ; Visaṅkhāragataṃ cittaṃ, taṇhānaṃ khayam ajjhagā. ti, Dhp.23 {153}~{154}) 계속해서『우다나 주석서』에서 담마빨라 스님은 본서 여기 Ud1:1~Ud1:3에 나타나는 이 세 개의 우러나온 말씀은 부처님의 두 번째 우러나온 말씀이라고 적고 있다.(UdA.208) 그리고 부처님의 세 번째 우러나온 말씀은 본서「세상 경」(Ud3:10) §3의 “이 세상은 고통스러운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여여한 자는 모든 존재들을 넘어섰도다.”로 끝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UdA.208)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세상 경」(Ud3:10) §3의 해당 주해도 참조할 것. 『법구경』에 실려 있는 이 게송(Dhp {153}~{154})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오도송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디가 니까야 주석서』서문은 이것이 부처님의 첫 번째 말씀이라고 설명한다. (DA.i.16 = 『디가 니까야』제3권 부록 『디가 니까야 주석서』서문 §42(567쪽) 참조) 한편『법구경 주석서』는『법구경』에 나타나는 이 오도송은 스승께서 깨달음의 나무 아래에 앉으셔서 우러나온 말씀을 통해서 읊으신 뒤 나중에 아난다 장로가 질문을 하자 말씀해 주셨다고 설명한다. (imaṃ dhammadesanaṃ satthā bodhirukkhamūle nisinno udānavasena udānetvā aparabhāge ānandattherena puṭṭho kathesi, DhpA.iii.127) 『율장 주석서』가운데 바라이죄에 대한 주석(pārājikakaṇḍa-atthakathā)의 서문(ganthārambhakathā, VinA.i.17)에서도 붓다고사 스님은 『법구 경』의 이 오도송(Dhp {153} ~{154})이 부처님의 첫 번째 우러나온 말씀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율장『마하왁가』(대품)에서는 본서에 나타나는 Ud1:1~Ud1:3을 첫 번째로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러나 이것은 [12연기 의 유전문과 환멸문으로] 수행을 하시던 그날에 일체지(一切知)를 얻으셨기 때문에 기쁨으로 가득한 지혜로 조건(paccaya, 緣, 緣起)의 구조를 반조 하실 때 일어난 감흥어의 게송이지, [깨달으신 후에 첫 번째로 읊으신 게송이 아니]라고 알아야 한다.” (esā pana pāṭipadadivase sabbaññubhāvappattassa somanassamayañāṇena paccayākāraṃ paccavekkhantassa uppannā udānagāthāti veditabbā, VinA.i.17; DA.i.16 = 『디가 니까야』제3권 부록 『디가 니까야 주석서』서문 §42(567쪽) 참조)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비록 율장『마하왁가』는 본서에 나타나는 이 세 가지 게송을 맨 처음에 언급하지만 부처님의 첫 번째 우러나온 말씀은 위에 소개한 오도송 (Dhp {153}~{154})이라는 것이 『율장 주석서』에서 붓다고사 스님의 설명이다. 한편『담마상가니 주석서』서문(『담마상가니』제2권 부록 『담마상가니 주석서』서문 §§39~40(510~512쪽 참조)은 본서 여기 Ud1:1 ~Ud1:3에 나타나는 세 개의 우러나온 말씀이 부처님의 첫 번째 우러나온 말씀이라고 적고 있다.(DhsA.17 =『담마상가니 주석서』서문 §39) 그런 뒤에 “그러나『법구경』을 암송하는 자들은 … [위의 게송] … 이것이 첫 번째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DhsA.18 = §40)라고 하면서 『법구경』의 위의 오도송(Dhp {153}~{154})을 적고 있다. 이처럼 같은 붓다고사 스님이 지은 주석서 가운데『디가 니까야 주석서』서문 등은 『법구경』의 오도송(Dhp {153}~{154})이 부처님의 첫 번째 우러나온 말씀이라는 입장이고, 『담마상가니 주석서』서문은 본서 Ud1:1 ~ Ud1:3에 나타나는 세 개의 우러나온 말씀이 부처님의 첫 번째 우러나온 말씀이라는 입장이다. 같은 붓다고사 스님이 지은 주석서들 가운데서도 이렇게 입장이 다른 것은 붓다고사 스님이 주석서를 지을 때 저본으로 사용한 각 각의 경들에 대한 싱할리 주석서 등의 필사본들의 입장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한편 붓다고사 스님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쿳다까빠타』(小誦經)의 주석서는 이렇게 덧붙인다. 『법구경』의 오도송(Dhp {153} ~{154})은 부처님의 모든 말씀 가운데 처음이다. (sabbassāpi buddhavacanassa ādi), 그러나 이것은 마음으로써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는 처음이지만 말로써 말씀하신 것으로서는 그렇지 않다 (tañca manasāva vuttavasena, na vacībhedaṃ katvā vuttavasena), 그런 뒤에 본서 Ud1:1 ~ Ud1:3의 게송들이 말로서 말씀하신 것 가운데 처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KhpA.13) *流轉門(苦集)을 緣起라고 설하시는 경문 S12:20(paccaya sutta)에서는 還滅門은 나타나지 않는다. (還)滅을 (緣)起라고는 할 수 없다. [Iti kho, bhikkhave, yā tatra tathatā avitathatā anaññathatā idappaccayatā – ayaṃ vuccati, bhikkhave, paṭiccasamuppādo.] |
첫댓글 아래 우다나 깨달음bidhi 품,
bodhirukkhamūle paṭhamābhisambuddho.
한때 세존께서는 처음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나서...
56)주석에서,
나무아래에서(rukkhamūle)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증득하셨다.
여기서 깨달음은 네 가지 도에 대한 지혜이며(bodhi vuccati catūsu maggesu ñāṇaṃ)
세존께서는 보리수하 고락 양극단의 bodhi후 그 칠 일이 지난 뒤 그 삼매로부터 출정하셔서 밤의 초저녁[初夜]에 연기를 발생하는 구조를 이처럼 12연기의 집성제에 잘 작의하셨다.
Kāye vā hānanda sati kāyasañcetanā-hetu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vācāya vā hānanda sati vacīsañcetanā-hetu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mane vā hānanda sati manosañcetanā-hetu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SN. vol.2. pp.39~40]
Avijjāpaccayā sāmaṃ vā taṃ Ānanda kāya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yam paccayāssa taṃ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parevāssa taṃ Ānanda kāyasaṅkhāraṃ abhisaṅkharonti, yam paccayāssa taṃ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pe)…. …vacī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 …(pe)…. mano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pe)….[SN. vol.2. pp.39~40]
아난다여, 身이 있어서 身思(kāya
@행복한 포교사 sañcetanā)를 因(hetu)으로 안으로(ajjhattaṃ) 樂과 苦가 生起한다. 아난다여, 또한 語가 있어서 語思(vacīsañcetanā)를 因(hetu)으로 안으로(ajjhattaṃ) 樂과 苦가 生起한다. 아난다여, 意가 있어서 意思(manosañcetanā)를 因(hetu)으로 안으로(ajjhattaṃ) 樂과 苦가 生起한다.
아난다여, 無明을 緣하여(paccayā) 스스로(sāmaṁ, 자신이) 身行(kāyasaṅkhāra)을 결합시킨다면(abhisaṅkharoti) 그것을 緣으로 하여(paccayāssa) 안으로(ajjhattaṃ) 樂과 苦가 生起하고, 아난다여, 다른 상태에서 身行을 결합시킨다면 그것을 緣으로 하여(paccayāssa) 안으로(ajjhattaṃ) 樂과 苦가 生起하며, …[생략]… 語行(vacīsaṅkhāraṃ)을 결합시킨다면. …[생략]… 意行(manosaṅkhāra)을 결합시킨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