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판 산상수훈 “솜씨 좋은 백정은 어떻게 소를 잡을까”
예수는 소금에 이어 ‘빛’도 말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마태복음 5장 14~15절)
해가 질 무렵 갈릴리 호수 주변의 고원 등성이에는 붏이 하나 둘 켜진다.
산촌 마을의 집들에서 불을 켜는 풍경이다. "산 위에 자리잡은 마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는 성경 구절이 실감난다.
갈릴리 호수를 빙 둘러서 산과 고원이 있다. 그 위에 마을들이 있다. 날이
저물면 마을에 불이 켜진다. 갈릴리의 밤 풍경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산 위의 마을, 그 불빛들이다. 그 광경을 보면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라는 성경 구절이 절로 실감 난다. 예수는 그런 빛이
모두를 비춘다고 했다.
솜씨 좋은 백정은 어떻게 소를 잡을까
붓다는 삼십대 초반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50년가량 인도 북부 지방을
돌아다니며 설법을 했다. 그런 붓다에게 시자(일종의 비서실장)가 있었다.
붓다의 사촌인 아난이다.
아난은 40년 넘게 시중을 들면서 바로 곁에서 붓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
봤다. 붓다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했는지 아난은 모두 기억
하고 있었다. 그만큼 영리하고 총명한 사람이었다. 붓다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아난의 기억력에 의지해 붓다의 어록을 복원했을 정도다.
그런 아난도 붓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도 제자들이 진정한 ‘예수의 주인공’을 알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제자들은 예수가 진정 누구인지
깨닫지 못했다. 붓다는 말년에 “여기저기 부서진 수레를 가죽끈으로 동여매
억지로 지탱하듯, 내 몸도 그와 같다”라며 자신의 열반을 예견했다. 그 말을
들은 아난은 눈앞이 캄캄했다. ‘붓다께서 살아 계실 때도 깨닫지 못했는데,
이제는 누구를 의지해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 아난은 절망하여 슬퍼하며 울었다. 붓다는 그런 아난을 불러 말했다.
“자신에게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 자신의 등불을 밝히고, 법의 등불을
밝혀라(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
이것이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 열반송이다.
붓다는 그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인도 북부의 쿠시나가르에서 숨을 거두었다.
붓다는 ‘마음의 등불’을 켜는 법을 일러주었다. 마음의 등불을 켜려면 먼저 ‘이치의
등불’을 켜야 한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법(法)’이라 부른다. 그렇게 법의 등불을 켠
다음에 내 마음을 갖다 대야 한다.
갈릴리 호수의 풍경은 평화롭다. 이 길들을 걸으며 예수는 주변 산촌 마을에
하늘의 메시지를 전했다.법의 등불과 내 마음의 등불은 둘이 아니다. 그러니
법이 ‘깜빡깜빡’할 때 내 마음도 ‘깜빡깜빡’하게, 법의 등불이 ‘활활’ 탈 때 내
마음도 ‘활활’ 타게, 법의 등불이 고요할 때 내 마음도 고요하게 맞춰나가야
한다. 그렇게 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불이 켜진다. 법의 등불과 똑같은 불이
내 마음에도 켜진다. 그것이 바로 자등명(自燈明)이다. 붓다가 설한 ‘내 마음의
빛’이다.
예수가 산상수훈을 설한 까닭도 그렇다. 그리스도의 등불을 보면서 내 마음의
등불을 밝히라는 뜻이 아닐까. 산상수훈에서 설한 ‘가난한 마음’ ‘깨끗한 마음’
‘자비로운 마음’은 모두 예수의 마음이다. 그러니 예수의 등불이다. 성경을
펼치면 그런 등불이 깜빡인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법등명(法燈明)’이다.
그 다음에는 어찌해야 할까. 거기에 내 마음을 갖다 대야 한다. 예수는 이를 두고
“각자의 십자가를 져라”라고 표현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라는 예수의 등불이 켜지면 내 마음도 가난의 십자가에 올려봐야 한다.
나의 일상, 나의 생활에는 늘 그런 십자가가 있다. 그럴 때 내 안의 등잔에도
불이 붙는다. 그게 그리스도교의 자등명(自燈明)이다. 그런 이들을 향해 예수는
말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갈릴리 호수에 해가 떴다. 티베리아스 건너편의 산등성이 위로 해가 솟았다.
순식간이었다. 어슴푸레하게 호수 위로 깔렸던 어둠이 물러갔다. 해가 뜨면
어둠이 눈이 녹듯 녹아버렸다. 호수가 금방 황금빛으로 물들고 주위가 환해졌다.
그게 빛의 힘이다.
예수는 빛과 소금을 말했다.
우리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인지 아닌지 살펴보라고 말했다.
예수는 빛과 어둠을 가르는 눈에 대해서도 설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누가복음 11장 34절)
사람들은 다들 몸을 중시한다. 그래서 몸에만 신경 쓴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한다. 예수가 겨누는 목표는 다르다. 몸이 아니라 눈이다. 예수는 눈을 맑게
하면 몸도 맑아진다고 했다. 또 눈이 어두우면 몸도 어둡다고 했다. 그래서 살펴
보라고 했다. 네 안을 비추는 것이 밝음인지 아니면 어둠인지 말이다.
예수가 말한 ‘눈’은 무엇일까. 안목이다. 무엇에 대한 안목일까. 이치에 대한
안목이다. 마음의 이치, 세상의 이치, 우주의 이치. 그게 ‘신의 섭리’다. 신약성서를
관통하며 예수가 설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이치(속성)이다. “하느님의 마음이
깨끗하니 네 마음도 깨끗하게 해라. 그래야 하느님 마음과 네 마음이 통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하느님을 볼 수 있다.”
예수는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하늘나라의 이치를 설했다.
터키 이스타불의 성 소피아 성당에 있는 예수의 초상화.
모자이크로 만든 작품이다. 예수의 얼굴이 전형적인 백인이 아니라
중동 지역 사람의 얼굴 모습이 비친다.
『장자』에도 ‘이치’에 대한 일화가 있다. 문혜군 앞에서 포정이 소를 잡았다.
포정이 칼질을 하자 살점이 쓱쓱 떨어져 나왔다. 살을 가르는 소리가 마치
‘상림의 춤곡(桑林之舞, 탕임금 당시 비를 바랄 때 연주하던 무곡)’과 ‘경수의
음악(經首之會, 요 임금 때의 악곡)’ 같았다.
문혜군이 물었다.
“어찌하면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말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도(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러니 포정은 ‘소 잡는 기술’이 아니라 ‘소 잡는 이치’를 터득한 것이다.
포정은 이치를 터득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처음에 소를 잡을 때는 소가 통째로만 보였다. 3년이 지나자 소의 몸통에서
갈라야 할 부분이 보였다. 지금은 소의 자연스러운 결(天理)에 따라 살과 뼈
사이의 빈틈에 칼을 넣어 움직이며, 원래 나 있는 길을 따라 나아간다. 뼈와
살이 엉겨 붙은 곳을 무리하게 가르려고 한 적도 없다. 하물며 큰 뼈를 자르는
일이 있었을까.”
포정의 설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솜씨 좋은 백정도 해마다 칼을 바꾼다. 살을 베기 때문이다. 평범한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꾼다. 뼈를 치기 때문이다. 지금 제 칼은 19년이나 됐다. 그동안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다. 그래도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하다.”
포정은 무엇으로 소를 잡았을까. 몸이 아니다. ‘눈’이다. 소를 꿰뚫고 칼을
꿰뚫는 눈이다. 그게 포정의 안목이다. 그 안목으로 소를 잡으면 다르다. 소의
자연스러운 결을 따라서 칼을 쓰게 된다. 힘은 적게 들고 효과는 더 크다. 왜일까.
자연스러운 이치와 함께 나아가기 때문이다.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설한 깨끗한 마음, 가난한 마음은 모두 하느님의
마음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그 마음을 닮으라고 했다.
예수가 말한 ‘눈’도 그렇다. 예수는 왜 산상수훈에서 ‘깨끗한 마음’
‘가난한 마음’ ‘자비로운 마음’을 설했을까. 그게 하느님 마음의 결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 결을 따라가라고 했다. 살과 뼈 사이의 빈틈으로
칼이 들어갈 때 우리의 삶도 수월해진다. 살코기의 자연스러운 결을
따라서 칼을 쓸 때 우리의 삶도 자연스러워진다.
“아! 이럴 때는 이쪽으로 칼을 쓰는 거구나” “아하! 그럴 때는 그쪽으로
마음을 쓰는 거구나!” 그런 깨침을 통해 눈이 맑아진다. 눈이 맑아질 때
우리의 몸도, 우리의 삶도 환해진다. 그렇게 내 안에 등불이 켜진다.
‘하느님의 마음’이 켜진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누가복음 11장34절)
[백성호의 예수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