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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 2024. 10. 29(화) 호이안 성당(미사) - 호이안 구시가지 |
떠나기 전에
작년 3월 전국 성지 순례를 시작하여 90% 능선을 넘은 시점에서 10월은 쉬기로 했다. 이유는 완답을 앞두고 숨을 고르려는 의미도 있지만 해외성지 순례 때문이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줄곧 한식만 먹다가 더러는 다른 나라 음식도 먹어 입맛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듯, 약 1년 반 동안 국내 성지만 150여 개소를 순례하다보니 순교성지의 특성이나 이에 따른 순교자의 개별적 영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쉽게 말해서 성지마다 거기가 거기인 듯 도매금으로 치부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러 때에 본당 교우들의 베트남 성지 순례가 있어 동참하게 되었다.
물론 따로 여행사 성지순례 페키지의 일원으로 갈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본당 신부님을 모시고 친숙한 본당 교우들과 함께하는 순례가 심리적으로도 안정되어 순례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베트남 성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아니 관심 자체를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동안 국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베트남 순교자와 성지를 생각하게 하는 곳이 두 군데가 있었다. 그 하나는 대구 관덕정 순교기념관이고 다른 하나는 인천교구청 성모당이다.
관덕정 순교기념관의 순교자 현시실(顯示室)에는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베트남에서 선교하다 순교한 장 루이 보나르, 피에르 뒤물랭 보리, 후앙 닷, 파울로 콴 등의 유해와 옷자락이 모셔져 있고 액자 안에 유품 인증서가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모두들 생소한 이름들이어서 옆에 있는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와 대구대교구 제2주보 성인인 성 이윤일 요한의 목관만큼의 감명이 따라주지 않았다.
또 하나 인천교구청 경내에 있는 성모당의 성모순례지 전시실에는 파티마, 알트외팅, 과달루페 등 피부색을 달리하는 각종 발현 성모상들이 회랑 양쪽에 모셔져 있는데 그 중에 베트남에서 발현한 푸른색의 라방 성모님과 흰색의 짝기우 성모님이 계셨다. 그 중 라방 예수님을 안은 아오자이 성모님은 엄청 아름답게 다가와서 언제 한번 뵈올 날이 있을까 했는데 이번에 두 성모님을 다 뵙는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유물, 유적이나 성지, 성인들도 관심을 가진 만큼 가깝게 다가오고 아는 만큼 보인다. 성지 순례를 준비하면서 베트남 역사와 순교사를 정리해 보려 했는데 우리의 역사와 순교사와는 달리 너무나 복잡하여 쉽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사실 우리의 박해사는 비록 정치적 목적이 가미되어 있다 하더라도 박해 주체인 관청과 피해자인 신자라는 단선 구조이지만 베트남의 경우는 정파에 따라 우호와 적대감이 다르고 거기다 프랑스라는 외국 세력의 개입에 따른 민족적 감정이 수반되는 등 너무 복잡하여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런 미흡한 상태에 성지에 가서 무엇을 얻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순례단은 신부님 포함 모두 31명이다.
【성건성당 베트남 성지 순례단】
지도신부 - 김 미카엘
단장 - 지 스테파노
총무 - 김 마리나
단원 -
김 토마, 오 엘리사벳(부부), 도 미카엘, 최 젬마(부부), 차 임마누엘, 송 아가다(부부),
문 베드로, 유 헬레나(부부), 김 요한, 박 실비아(부부),
이 도로테아, 이 마르타, 배 아가다, 진 글라라, 박 골롬바, 김 아녜스(복삼).
송 루시아, 최 가타리나, 김 아녜스(상미), 박 젬마, 이 모니카, 김 세시리아,
정 세시라아, 이 수산나, 서 아녜스, 송 소피아, 이 안젤라, 강 벨라뎃다.
05 : 30 출발. 본당 성모상 위로 하얗게 야윈 하현달이 가늘게 빛을 드리우고 있는 미명의 시간이다. 김해공항 가는 버스에 탑승하여 순례자의 기도와 아침기도를 바쳤다.
태초에 빛을 있게 하시고
당신 말씀을 보내시어
저희를 구원하신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순례의 길을 떠나면서 당신께 의탁하오니
당신 아들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는 저희를 인도하소서.
성경 안에서, 전례 안에서, 가르침 안에서 만났던
예수님을 이제 성지에서 새롭게 뵙고자 하오니
저희로 하여금 신앙과 사랑을 다하여
당신의 구원 의지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느끼게 하여 주소서.
좋으신 아버지, 저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이 순례 동안에 항상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게 하시고
서로 사랑하게 하시며, 앞으로의 모든 날이
이 순례의 은혜로 인도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말씀의 진리 안에 사는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또한 저희가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저희 가족들에게 영육으로 건강하도록 은혜 주시옵고,
저희의 길을 안내할 모든 이들도 축복하여 주소서. 아멘.
김해공항 국제청사에 도착하여 07:00 분도 여행사 인솔 가이드 박순인(글라라) 자매와 만나 출국 수속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는 아침 식사를 못한 터라 공항 식당가에 삼삼오오 개별적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한꺼번에 한 업소에 밀어닥치면 혼잡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09 : 35 제주항공 7C 2955기로 이륙. 베트남 다낭공항으로 출발했다. 약 5시간 소요되리라 한다. 창가 좌석이라 창문 밖에 펼쳐지는 형형색색의 구름의 쇼가 보너스로 주어진다. 베트남의 일반 개황을 정리해 본다.
◆베트남 개황
【국명】 - 베트남(Việt Nam). 이는 베트남의 고대국가 ‘Nam Việt(南越)’에서 따온 말이다. 여기서 ‘越(V’iệt)’이란 중국 남부지방의 민족을 중국에서 부르던 이름이다. 예부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이름은 ‘越’ 이외에 ‘安南’, ‘越南’, 交趾, ‘印度支那’ 등이다.
【정치체제】 - 사회주의 공화제 및 공산당 일당 체제의 국가다. 따라서 대통령이 없고 5년마다 개최되는 공산당 전당대회를 통해 권력 서열 1위의 서기장을 뽑는다.
【문화】 -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관계로 중국의 유교문화를 유지해 왔다. 곧 효사상과 조상 숭모 의식,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정서가 내재하고 가족의식이 강하다.
【언어 · 문자】 - 베트남어는 오스트로아시아어족에 속하는 언어로 어미의 변화가 없는 고립어이다. 오래도록 한자를 사용했기에 언어의 60% 정도가 한자어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와 같다.
15세기말에 한자와 비슷한 문자인 쯔놈(chữ Nôm)이 발생하였지만, 그 사용은 한문에 익숙한 일부 지식인층에 국한되었다. 19세기부터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외국 선교사에 의해 고안된 베트남어의 로마자 표기가 추진되어 현재는 꾸옥 응으(quốc ngữ)로 불리는 로마자 표기를 쓴다.
【지리】 -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동단에 남북으로 약 1,600km에 걸쳐 길게 뻗어 있다. 면적은 약 33만km²이다. 북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라오스 및 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하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남중국해에 면해 있다. 국토는 크게 북부 고원 지대, 홍강 삼각주, 안남산맥, 해안 저지대, 메콩강 삼각주의 다섯 지역으로 이루어진다.
【인구 종족】 - 2023년 1억 30만 명(2023년 기준)으로 아시아에서 9번째, 전 세계에서 16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베트남은 다민족 국가로서 베트남 정부가 공인하는 민족의 수가 54개에 이른다. 최대 민족은 킨족(京族, 일명 viet족, 越族)으로 보통 베트남인이라고 할 때 이 종족을 가리키며 베트남 전체의 86.2%를 차지한다.
【경제】 - 노동인구의 66%가 농업 등 제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근년에는 제2차, 제3차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다. 관광산업의 신장세가 특히 현저하여, 중요한 외화획득원이 되고 있다. 베트남은 쌀, 후추, 커피의 세계 3대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1인당 GDP는 약 4,350달러(2023년 기준)
【기후】 - 국토의 길이가 남북으로 1,700km에 이르기 때문에 지방에 따라 기후가 크게 다르다. 북부 지방은 사계절이 뚜렷해 여름에는 30℃ 이상, 겨울에는 10℃ 이하를 기록한다. 중부 지방은 3~8월이 건기, 8~10월이 우기로 강수량이 많은 편이다. 남부 지방의 경우 크게 5~10월의 우기와 11~4월의 건기로 나뉘며 기온은 연중 26~28℃ 정도다. 연평균 강우량은 2,151mm 로 한국보다 2.4배 많다.
【종교】 - 전국민 1억 중에서 불교는 70-80%라고 하지만 이는 전통신앙과 도교 등이 혼합된 것으로 통계상 무신론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순수 불교 신자는 실제로는 약 10-13%이며 프랑스의 영향으로 가톨릭이 7%, 개신교 2%, 까오다이교, 토속신앙 등이 있다
【행정구역】 - 베트남의 행정 구역은 3단계로 성(Tỉnh/ 省, 제1급 행정구), 현( huyện/ 縣, 제2급 행정구), 사( xã/ 社, 제3급 행정구)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성은 현재 58개이며, 중앙직할시로는 하노이(721만), 호치민(822만), 하이퐁(196만), 다낭(102만), 껀터(125만). 수도는 하노이.
◆베트남의 역사
【선사시대】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베트남 원주민은 약 30만 년 전부터 거주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4천 년부터 청동기문화가, 기원전 2천 년에는 철기문화가 시작하였다고 한다.
【고대】
베트남은 우리의 단군신화처럼 톡특한 건국신화가 있다. 龍神 락 롱 꾸언(Lac Long Quan 貉龍君)과 雪山 요정 어우 꺼(Au Co 嫗姬)가 만나 100명의 아들이 탄생하였는데, 절반씩 부모를 따라 각각 바다와 산으로 이주했는데, BC 7세기경 이중 장남 훙 브엉(鴻龐 홍방)이 베트남 최초의 부족국가인 반랑국(Van Lang, 文郞國)(홍방왕조)을 세웠다고 한다.
이는 고대 동남아시아 청동기문화가 절정에 달한 BC3세기부터 AD1세기경의 동선문화(Dong Son culture)의 유물 및 유적이 발굴되면서 전설상의 반랑국(文郞國, 베트남어: Văn Lang)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후 기원전 257년에 안즈엉 브엉(安陽王)(일명 蜀泮 툭판)은 반랑국을 멸망시키고 어우락(甌駱) 왕국을 세웠고, 어우락 왕국은 기원전 207년 중국 秦나라의 장수인 찌에우 다(趙佗)에 의해 멸망한다. 찌에우 다(趙佗)는 남비엣(南越)을 세운다. 찌에우 다는 중국인 관리에서 시작하였지만 자신을 현지인들과 동일시하면서 중국의 漢나라와 대립하였기 때문에 베트남인들은 그를 위대한 황제로 존경을 했다. 남비엣(南越)은 BC 111년 전한(前漢)의 무제(武帝)에게 정벌됨으로써 중국에 병합되어 행정구역상 '교주(Chiao Chau 交趾)'로 명명되었다. 베트남은 그 후 서기 938년까지 약 1000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1차 중국지배) 당대(唐代)에는 이곳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어 중국의 영토 안에 편입되었다.
【중세】
서기 938년 응오 왕조를 세운 ‘응오 꾸옌’(Ngo Quyen, 吳權)이 박당(Bach Dang) 전투에서 중국의 五大十國의 하나인 南漢과 싸워 972년 중국으로부터 독립했다. 그러나 응오 왕조는 몇 년 만에 망하고 이후 다음의 왕조가 이어졌다.
▲레 호안(Le Hoan, 黎桓)의 레(Le, 黎) 왕조(980-1009),
▲리 꽁 우언(Ly Cong Uan, 李公蘊)의 리(Ly, 李) 왕조(1009-1225)
▲쩐 흥 다오(Tran Hung Dao, 陳興道) 장군의 쩐(Tran, 陳) 왕조(1225-1400)
쩐왕조는 몽골의 침입(1258-1287)을 세 차례나 받았으나 이를 훌륭하게 격퇴시켰다.
이후 쩐 왕조는 호(胡)씨 정권(1400-1407)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호씨 정권은 명나라에게 멸망하고 약 20여 년간(1407-1427) 명나라가 베트남 지배(제2차 중국지배)
【근대】
레 러이(Le Loi, 黎利)가 응우엔 짜이(Nguyen Trai, 阮廌) 장군의 도움을 받아 명의 군대를 격퇴하고 새 왕조 후기 레(Le, 黎) 왕조(1427-1789) 창건했다. 학문과 교육 장려, 동남아에서 가장 발달된 법전편찬, 토지 및 사회개혁 실시.
그러나 부흥 운동 이후의 후 레 왕조는 힘이 없어 사실상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는 두 가문인 북쪽 찐 주(鄭主)의 北河國(交趾國)과 남쪽 응우옌 주(阮主)의 廣南國(1558-1777, 1차 응우엔 왕조)남북조로 분리되어 있었다. 1777년 격화되는 농민 항쟁을 막지 못한 후 레 왕조는 결국 멸망하고 떠이 선 왕조(西山朝)(1778-1802)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남부 실권자였던 응우옌 주(阮主)는 떠이선 왕조를 격파하고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 왕조(1802-1945 2차 응우엔 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이 왕조는 국호를 과거의 중국에서 불렀던 남비엣(南越)와 구분하여 '비엣남' (viet 越南)이라고 하였으며 1945년까지 지속된다.
응우엔 왕조의 2대 황제 민망제(明命帝)가 로마 가톨릭 선교사 박해사건을 일으키자, 1858년이를 구실로 프랑스가 침입하여 긴 전쟁 끝에 1885년 베트남을 청나라로부터 분리하여 완전 프랑스 식민지로 만들었다. 자체 통치권을 잃고 허수아비가 된 응우엔 왕조는 1945년 2차 대전 종료까지 통치하였다.
【현대】
1882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면서 민족의 독립을 표방하는 반(反)프랑스운동이 맹렬히 추진되었고 프랑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베트남인의 독립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중 세력과 조직력이 가장 뛰어났던 계열은 사회주의의 '베트남 독립연맹'(viet Minh, 비엣민, 越盟)이었다.
1945년8월 전쟁 끝나자 비엣민을 중심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전의 지배권을 되찾고자 다시 군대를 남쪽에 파견하였고 이는 호찌민이 지도하는 민족 세력인 비엣민(월맹)과 남북으로 대립하게 된다. 이로 인해 1946년 말부터 양국 사이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1954년 3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군이 철수를 하면서 베트남은 독립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약속하였던 전국 선거를 거부한 채 응우엔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를 왕으로 내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하였다. 베트남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딘디엠의 쿠데타로 붕괴하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져 남북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으로 보아서는 월남이 공산화되면 주변국이 모두 적화된다는 이른바 도미노 이론으로 인해 분단국을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대한 미국의 지원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도 있다.
베트남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고 196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은 미국 맞서서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러야 했다. 미국은 반전 여론에 밀려 결국 1973년 파리 협정을 맺고 철군하자 1975년 북베트남은 사이공을 점령하였고, 1975년 베트남의 전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베트남은 공산주의 체제인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전후 시대】
전쟁 후 베트남은 전후 복구와 계획 경제체제를 통한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1979년 크메르 루주와 전쟁을 치렀고, 중국과도 국경분쟁으로 중국-베트남 전쟁을 치르는 등 순탄하지 않았다. 1986년 베트남 공산당은 개혁책인 도이머이를 시작하여 시장 경제를 도입하였고, 2000년에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와 수교를 맺었다.
◆베트남의 천주교 복음사
베트남의 천주교 선교는 일본의 천주교 선교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 16세기 중반 예수회는 일본에 본격적 선교를 시작해서 상당한 수의 신자를 양성할 수 있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속 박해 등으로 일본에서 더 이상 선교가 힘들 것으로 판단하고 새로운 대안지를 찾았다. 그곳이 바로 선택된 곳이 베트남이었다. 베트남은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는 다르게 불교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유교 중심인지라 천주교의 선교가 쉬웠기 때문이다. 1553년 선교사 이냐시오 첫발을 내디디기 사작하여, 1615년 일본에서 추방된 부요미 등 세 명의 예수회 신부가 왔고, 1624년 알렉산드르 드 로드 신부에 의해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는 1627년부터 북부 베트남에서도 선교를 시작해 6,700여 명을 개종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당시 정권 지배자들의 선교 금지정책에 의해 베트남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선교에 대한 열의는 잃지 않았고 예수회에 이어 파리 외방 전교회가 사명을 띠고 비밀로 선교사를 파견하여 선교에 나섰다. 당시의 전후 선교 양상은 여타 유교권 동아시아 국가와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정부의 배격과 문화의 차이로 인한 갈등 속에서도 근대 문물과 평등 사상에 대한 긍정적 수용이라는 모순적 상황 속에서도 신자수는 늘어만 갔다. 17세기 중반 40만, 종반 80만에 이르렀다
천주교 선교는 정치적 상황과 매우 관련성이 깊다. 1771년 일어난 떠이 썬(西山)의 난은 천주교도의 입지를 바꿀 수 있는 큰 기회였다. 떠이 썬 반군은 사회적 약자들의 힘을 모으기 위해 처음에는 천주교도들에게 유화정책을 폈었고, 이를 진압하려는 응우엔은 베트남의 주교와 천주교 신앙의 자유화를 조건으로 협조체제를 제의하고 프랑스 군을 불러들였다. 응우엔 푹 아인(나중 응우웬 왕조 초대 가륭황제, 1802-1820)은 기존의 약속을 지켜 1802년 베트남을 통일한 이후 천주교 선교를 허용하였다. 따라서 선교도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2대 민망(明命) 황제(1820-1840)는 괴력난신을 믿지 않는 유교주의자였기에 천주교에 대한 시선을 곱지 못했다. 더욱이 1833년 일어난 레 반 코이의 난에서 천주교도들, 특히 사제들도 참가했다는 것에 분노해서 천주교 박해를 재개했다.
천주교도의 박해는 필연적으로 프랑스의 개입을 초래하여 1858년 1차 침입을 시작으로 전쟁이 끝난 1885년대까지 전란 속 에 휩싸였다. 프랑스의 침공이 계속되자 천주교도는 환영하였지만 정부는 물론 일반 베트남인들까지도 천주교도들을 증오하게 되고 박해를 하게 되었다. 천주교도는 친불 부역자가 되고 박해 순교자 역시 늘어갔다. 혹독한 시련기였다.
일부 발표에 의하면 본격적으로 천주교가 들어온 1625년부터 프랑스 식민지가 되어 박해가 끝난 1886년까지 53번의 박해로 13만 명이 순교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후 베트남이 남과 북으로 나눠진 1954년까지 교세가 커져 북쪽은 111만, 남쪽은 48만 명이었다. 그러나 천주교를 옹호하는 남베트남에서는 교세가 성장하였지만 북쪽에는 통제된 사회주의 체제여서 박해를 받자 많은 신자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남쪽의 신자수는 65만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다가 1975년 남부 월남이 패망하고 사회주의체제로 의해 통일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베트남 교회는 통제 속에서 약 7%의 신자수를 유지하고 있다. 인구가 1억이니 신자수는 700만으로 우리나라의 600만보다 많은 숫자이다.
1988년 6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17명이 순교성인으로 시성 되었다. 이는 프랑스, 이탈리아, ᄉᆖ페인에 이어 네 번째로 성인 수가 많은 나라라고 한다.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관계
베트남과 한국의 역사적인 관계는 13세기초 고려 고종 (1213년~1259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트남에 쩐(陳) 왕조(1225년~1400년)가 들어서자 멸망한 리(李) 왕조(1009년~1225년)의 왕자 이용상(李龍祥)이 고려로 피난와 귀화하여 화산군(花山君, 현재의 황해도)이라는 봉작을 받고 화산이씨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서 조선시대에서도 서거정(徐居正), 이수광 등이 명나라에서 베트남 사신을 만나 필담을 주고 받으며 교류를 했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인 1687년에 제주도민 24명이 배를 타고 추자도로 가다가 큰 바람을 만나 표류해 베트남의 호이안(會安)에 도착했다. 거기서 후에로 이동하여 당시 지배자였던 廣南國의 응우엔푹떤(Nguyen Phuc Tan)을 알현하고 그의 도움을 1년 반 만에 21명이 돌아온 기록이 순조 때 정동유의 晝永編(1808년)에 나온다. 그때 베트남 왕의 통상을 원한다는 국서를 가지고 왔다고 하는데 假定이긴 하나 그때 베트남과 교역을 했다면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현대에서 베트남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은 베트남전 참전이었다. 미국의 요청으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연인원 32만명이 파병되어 5천명이 전사했다. 월남전 참전의 대가로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자금을 지원받았고, 이는 경주고속도로 건설 비용으로 일부 충당되었다. 베트남 전쟁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목숨을 담보로 한 용병, 고엽제 후유증, 민간인 학살 사건 등 부정적 평가도 있다.
베트남 통일 후 1992년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어 양국 정상이 상호 방문하고 각분야에 걸쳐 교류를 증진해 가고 있다. 베트남에 대한 우리나라의 투자가 급증함에 따라서 한인동포의 수도 급증하여 13만 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증가추세에 있다.
현지 시간 12시 30분 다낭공항에 내려 입국 수속하고 수화물 찾느라 거의 한 시간을 경과하여 4박 5일 동안 함께 할 현지 가이드와 만났다. 이름은 박규동(리노) 40대 후반의 약간 터프한 인상이다.
이번 성지 순례 일정은 베트남 중부지역으로 해당 도시로는 다낭, 호이안, 후에이며 다낭에 공항이 있기에 다낭에 입국하여 다낭에서 출국하니 다낭은 이번 일정의 시작이요 마침이다.
오늘은 호이안에 가서 호이안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베트남의 전통이 살아 있는 구시가지 관광을 하고 숙소도 호이안이다. 이동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다.
일단 공항 인근 식당으로 가서 쌀국수로 점심을 먹고 첫 행선지인 호이안으로 이동한다. 쌀국수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우리가 오늘 먹는 쌀국수는 하노이식으로 체인점 본점은 하노이에 있다고 한다.
다낭에서 호이안까지는 약 30km로 소요시간은 40분. 베트남은 도로사정이 좋지 못해 대체로 50km를 한 시간으로 잡는다. 가이드 리노 형제는 짧은 이동 시간을 이용하여 베트남 5000년 역사를 요약하고 호이안과 관련된 베트남 복음사 및 박해사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호이안 (會安, Hội An)
호이안은 다낭에서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투본 강(Thu bon River) 어구의 남중국해 연안에 위치한다. 원래 이름은 하이포(Hai Pho)라고 불렀고 이는 "바닷가 마을"이라는 뜻이었다.
호이안의 초기 역사는 참족(Cham 族)의 역사이다. 말레이계인 참족은 기원전 200년경과 기원후 200년 경에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이곳으로 건너와서 참파왕국을 이루어 16-17세기까지 존속하다가 북쪽 세력의 남하에 의해 멸망했다.
호이안은 16세기 중엽 이래 인도, 포르투갈, 프랑스,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의 상선이 기항하였고 무역도시로 번성하였다. 곧 해양실크로드의 거점이었다. 당시에 거래된 물품으로는 도자기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일본인 마을이 생겨날 정도로 일본과 교역이 많았다. 그 흔적으로 내원교(일명 일본교)라고 부르는 다리가 남아있지만 이것이 유일하며 현재 호이안의 복고적인 도시 외관은 대부분 중국인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호이안은 고풍스런 도시의 분위기 때문에 최근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오래된 가옥을 개조하여 멋스러운 마을로 변신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구시가지의 내원교와 풍흥 고가(古家), 쩐가 사당, 턴키 고가(家) 등이 있으며 중국인들의 회합장소로 사용된 광조회관, 복건회관, 도자기 박물관, 호이안 역사문화박물관 등이 있다. 당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이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한국군이 주둔하였다. 호이안의 구시가지는 199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인구 약 15만 명(2018년 기준)의 작은 도시이다.
호이안 성당 - 베트남 첫 성당
아시아에 복음이 전해진 때는 대체로 16세기 중후반 외국 선교사에 의해서이다. 물론 당나라 때인 7세기 중반에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장안에 전래되기도 했지만 정통 가톨릭은 아니다. 중국은 1582년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마태오리치가, 일본은 1549년 스페인의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코 하비에르에 의해 전래되었다. 전래 초기에는 두 나라 모두 선교사들이 현지 문화 전통을 존중하고 또한 신문물, 신학문을 소개하여 이들에게 퍽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이 지닌 자유와 평등사상은 당시 신분 사회의 권력구조에 위협이 되어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은 1570년에 약 3만 명, 1579년에 10만 명, 1582년에 15만 명, 1587년에 20만 명의 천주교 신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587년을 기점으로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최고 통치자 도요토미 헤데요시 집권 초기에는 천주교도 보호 정책을 썼지만 1587년 6월 천주교에 대한 힐문서(詰問書)를 발송하고, 곧이어 천주교를 사교로 판정하고 금교령을 내렸다. 이는 도꾸가와 막부에도 이어져 가혹한 탄압으로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예수회에서는 일본의 선교가 막히자 탈출구로 베트남이 선택되었다. 1615년 일본에서 쫒겨난 세 명의 예수회 신부 프란체스코 부조미(이탈리안인), 디에고 카르발류(포르투갈인), 안토니오 디아스(포르투갈인), 그리고 두 명의 일본인이 선교를 위해 다낭에 도착했다. 이것이 베트남 복음사의 시작이다. 이후 점차 선교 활동이 진행되면서 1616년 1월18일 이탈리아 신부 프란시스코 부조미가 이곳 호이안에 베트남 첫 성당을 세웠다.
오후 3시 50분 경 호이안 성당에 도착. 정문의 지붕 아래 십자가에는 1615라는 숫자가 적혔는데 이는 베트남 천주교의 원년이다. 경내에 들어서니 관리동인 듯한 황색 건물이 나타나는데 GIAO XU HOI AN(호이안 성당)이라는 성당 이름이 걸려있고 그 밑에 성 요셉 부자상이 서 있다. 높은 종탑 건물에는 예수부활상이 팔을 벌려 환영하신다.
처음 1616년에 지어진 첫 성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300년이 지난 1914년에 새 성당도 재건되었다가 허물어졌다. 지금의 성전은 1965년에 고딕 양식과 호이안 전통 건축양식으로 건립된 건물이다. 입구에는 3개의 지붕 형상 밑에 3개의 문이 가지런히 삼문 형식을 취한 것도 유교식 전통 양식으로 보인다. 높은 종탑 꼭대기에 십자가가 솟아있고 그 아래 역시 팔을 벌린 예수부활상이 배치되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이 3층탑과 같다.
성전 오르는 계단 양쪽에는 순교 성인상이 좌우에 서 있는데 오른쪽은 베트남 최초의 순교자인 성 안드레아 퓨엔이고 왼쪽은 성녀 아그네스 레 티탄이다.
성 안드레아 퓨옌(1625-1644)은 베트남 첫 순교자이며 교리교사의 주보이시다. 그는 1625년 지금의 푸옌성 망랑 지역에서 태어났다. 16살 때인 1641년 예수회 알렉산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신부로부터 온 가족이 세례 받고, 로드 신부가 설립한 교리교사 양성소에 들어갔다. 그후 선교사들과 여러 지역 다니며 교리를 전파하다가 1644년 박해 때 체포되어 처참하게 처형되었다. 처형될 때 관례대로 천으로 된 밑자리를 깔자 만류하면서 내 피가 그대로 이 땅에 스며들어 복음의 씨앗을 가꾸는 거름이 되겠다고 했다. 19세 소년답지 않은 참으로 가상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성녀 아그네스 레 티탄(1781-1841)은 6남매의 어머니인 평범한 주부 평신도로 신앙심이 돈독하여 박해시기에 외국 사제를 체포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관리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두 분의 신부님들을 숨겨주었다. 그러나 나중 이것이 탄로가 나서 투옥되어 고문 끝에 60세로 옥사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6년이나 자신의 집에서 숨겨주고 사목 활동을 도운 복녀 강완숙 골롬바가 연상된다. 당대 도덕 규범상 홀로 사는 여자가 외간남자를 집에 들이는 것은 비상직적이었기에 이를 역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엄중하던 시절이라 국사범을 보호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성녀 아그네스는 베트남 성인 117명 중에서 유일한 성녀여서, 이는 103위 중 절반 가까이가 성녀인 한국보다 더 유교적 봉건관습을 가지고 있다고 가이드는 말한다.
성전 오른쪽에는 교리관이 있는데 복음 초기 호이안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이나 순교자의 이름을 따서 방을 만들었다. 이들의 이름은 안드레아 퓨옌, 닥 로, 부요미, 피나가 있고 맨 오른쪽은 성체조배실이다.
안드레아 퓨옌 성인은 소년 성인으로 베트남 최초의 순교자이시다. 그리고 닥 로 신부는 ‘베트남의 사도’로 불리우는 예수회의 알렉산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신부의 베트남식 이름이다. 로드 신부는 1623년 성탄절에 이곳에 도착하여 1645년까지 추방과 재추방을 거듭하면서도 6,700명이나 되는 수많은 베트남인들에게 세례를 주어 베트남 교회를 일으킨 큰 별이다. 더욱이 그에 의해 완성된 베트남어의 로마자 표기인 꾸옥 응으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부조미 신부는 1615년 베트남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러 온 선교사이며 프란치스코 드 피나 신부는 알파벳으로 베트남어를 기록하게 베트남 문자를 고안하여 로드 신부에 의해 꾸욱응으를 완성하게 한 계기를 만들었다.
성체조배실은 반닫이 문으로 열려 있어 언제 누구라도 들어가 성체 조배를 할 수 있도록 허용이 되어 있다. 안에는 간단한 의자가 몇 개 놓여있고 벽면 십자가 아래에 성작 형상의 제대와 감실이 배치되어 있다. 시간에 쫓겨 짧은 묵상으로 조배를 대신하고 나왔다.
경내 한쪽에는 석조 기념물이 하나 있는데 400이라는 숫자는 복음 전래 이후의 햇수를 말하는데 1615년에 복음이 전래되었으니 아마도 이 기념물은 2015년에 세ᄋힵᆻ다고 짐작된다.
그리고 한쪽에는 성모동굴도 있다. 위쪽 작은 동굴에는 성모자상이 있다.
이제 성전 내부에 들어가서 미사를 드리는 시간이다. 매일 미사 한 대를 드리는데 오늘이 그 시작이다. 다들 성당과 성체만 빌려서 우리 신부님이 미사 집전을 한다. 그러기에 외국 성당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설령 외국신부님이 외국어로 미사를 집전해도 전례의 절차나 내용은 다름이 없기에 그냥 얼마든지 따라 할 수가 있다. 이것이 가톨릭 교회의 보편성이다.
성전 내부는 엄청 넓다. 제대 후면 벽에는 길다란 라틴형 십자가를 진 예수님 고상이 있고 그 밑에는 맹인이 눈을 뜨게 한 예수님의 말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코 10, 52)가 새겨져 있다.
제대는 여러 가지 청동 조각으로 꾸며져 무게를 더하고 있고, 벽면 아래쪽 좌우에 성모자상과 성 요셉상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좌우 벽면 아래쪽에는 커다란 문이 여닫도록 되어 있어 답답하지가 않다. 그 문 위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다. 그리고 좌우 벽면 위쪽에는 세 가지 종류의 스테인드 글라스 세트가 색깔을 달리하며 자리하고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 내용은 잘은 모르겠으나 모두 다 십자가를 기본 모티브로 하고 첫째 것은 승리의 팔마 가지, 둘째는 성령의 비둘기, 셋째 것은 키로(chi ro) 성작이 있어 성체를 상징하는 것 같다.
나오는 길에 사제 묘역에 가서 참배를 했다.
피에르 갈리오즈 선교사는 1882년 프랑스 장드 모릭에서 태어나 1907년 사제 서품을 받고 1935년 베트남으로 가서 1953년 호이안 흐엉에서 71세로 선종했다. 응우엔 투온크 사제는 1909년 출생. 1939년 서품 1964년 호이안에서 55세로 선종했다.
호이안 구시가지
5시 20분 호이안 성당 순례를 끝내고 오늘 둘째 일정인 호이안 구시가지 순회 관광차례다. 호이안의 구시가지는 베트남의 전통이 살아 있고 중국이나 일본과 일찍이 통상을 했기에 중국과 일본의 건축과 문화가 아직까지도 존재한다. 이런 이유로 199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도시 발전 자체로만 보면 호이안은 다낭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다낭은 현대에 들어와서 개방적으로 항만을 개설하여 외래문화를 받아들이고 수출을 주도하여 100만이 넘는 도시로 발전했다. 그러나 호이안은 폐쇠적으로 자체 전통을 지켜왔다. 그러기에 발전이 정체되었다. 호이안의 인구는 15만정도이다.
가이드는 우리나라의 경우로 광주와 나주의 차이라고 한다. 나주는 전라도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전주와 함께 조선시대에 전라도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광주는 신흥발전 도시로 지금은 전라도를 대표하는 거점도시로 발전했다.
몇 년 전 나주향교를 갔을 때, 그때까지 여성이 유림에서의 활동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보수적이었다. 반면 광주는 개신교가 일찍 들어와서 여성의 사회활동의 금기가 일찍부터 타파되었다고 한다. 이로 보면 가이드의 비유는 적절하다. 가까운 예를 더 든다면 경주와 울산, 경주와 포항도 이런 관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호이안은 이런 전통의 유지로 인해 세계유산에 등록ᄃᅿ어 현재 관광객들이 발디딜 틈이 없도록 몰려들고 있으니 이를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구시가지는 도시 기반 시설이 이루어지지 않고 도로가 좁아 대형 버스가 진입할 수가 없어 변두리에 주차를 하고 7인승 전동차를 다고 들어간다. 자동차 대신 오토바이 물결이 장관이다. 그리고 우리 같은 관광객이 이용하는 시클로 행렬이 좁은 도로를 누빈다. 시클로는 자전거로 끄는 인력거이다. 유모차 같은 수레의 앞자리에 앉으면 인력거꾼이 뒷바퀴를 밟아 자전거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혼잡한 거리에서 따르릉 장치나, 클랙션도 없 그냥 뭐라 소리를 지르며 인파를 잘도 헤쳐 나간다.
호이안 구시가지를 관광하려면 미리 티켓을 예매해야 한다. 먼저 몇 군데 볼 것인가를 정하여 티켓을 일괄 구입하여 관광지마다 한 장씩을 떼 주고 다닌다. 의류, 기념품, 실크 등의 가게가 즐비하다.
가이드는 옷 가게 앞에서 실크나 아오자이, 아니면 양복 정장도 지금 주문하면 내일 아침이면 제품이 배달된다고 한다. 그 신속성이 놀랍다. 관광지에 가서 돌아보고 나올 때 이미 사진사가 사진을 완성하여 해당 관광객을 찾아 판매하는 것과도 같다.
복건회관
호이안 구시가지 관광지로는 고가(古家), 사당, 회관 등의 이름이 붙은 곳이 많다. 시간이 없어 오늘은 그 중 복건회관 한 곳으로 만족한다. 복건회관(福建會館)은 광조회관(廣肇會館)과 함께 대표적인 회관이다. 회관이란 일찍이 베트남에 진출한 중국 상인들의 출신 지역별 거점이다. 자신들의 상권을 보호하고 친목을 다지기 위해 설립되었다. 일종의 향우회이면서 상인협회이다. 광조회관은 광동성 출신들이고 복건회관은 복건성(福建省) 출신들이 조직한 것이다.
복건성은 중국 강남 남부해안에 있는 성으로 종족상으로 황하 중심의 한족과 구별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춘추전국시대의 초(楚), 오(吳), 월(越) 지역이다. 17세기 중반 한족 명나라가 여진족 청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복건성 사람들은 중국을 버리고 인도지나 반도 남쪽지방으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상권을 형성하였고 그들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지켜왔다.
복건회관은 1697년에 설립하였다. 회관의 중심은, 항해시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여신 티엔허우(Thien Hau)을 모신 본전(本殿)이며, 그리고 이곳에 처음 발을 내디딘 그들의 선조 6명들을 모시는 사당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커다란 패방(牌坊)이 서 있고 그 위에 복건회관이라는 한자 현판이 결렸다. 패문(牌門)이라고도 하는 패방은 중국 건축의 독특한 양식이며 중국 문화의 상징이다. 전 세계 차이나타운에는 이것이 세워져 차이나타운의 경내에 들어옴을 나타낸다.
정문 패방을 지나면 다시 몇 개의 문을 통과한다. 첫문은 매우 큰 삼문형식의 문이 있다. 입구부터 커다란 청동 향로가 놓여 있다. 몇 개의 문을 통해 본전에 이르면 남중국해의 거세 바다를 안전하게 항해하기 위해 티엔허우라는 여신을 모시고 있다. 그들은 이 여신에게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다. 향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다.
마지막 문간에는 두 개의 그림이 좌우로 걸려 있는데 왼쪽은 말을 타고 적을 퇴치하는 그들의 조상을 그린 그림이고, 오른쪽은 그들이 바다에서 배가 파도에 휩싸여 위험에 빠져 있을 때에 바다의 신 티엔허우(Thien Hau)가 그들을 구해주기 위해 달려오는 그림이다.
6시 식당에 도착 구시가지 가운데 있는식당으로 상호는 레이(LY). 호이안 전통식당인데 호이안에서 가장 이름난 식당 중의 하나라고 한다. 코스로 나오는 6-7가지 메뉴를 망고 쥬스와 와인을 곁들여 푸짐하게 먹었다. 야시장을 안 볼 수 없어 약 40분간 자유시간을 갖고 저녁 8시쯤 호텔에 도착.
8시 호텔에 도착. 투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