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22. 불교의 신라 전래와 발전
우여곡절 끝 공인… 국가통합 사상 기반 제공
|
<아도스님이 창건한 도리사> |
사진설명: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서라벌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것을 본 아도스님이 세운 사찰이 도리사다. 사진은 도리사 적멸보궁과 사리탑. |
불교는 우여곡절 끝에 신라 땅에 도착했다. 고구려나 백제처럼 ‘별 무리 없이’ 안착한 것은 아니었다. 신라 제23대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가 있은 후 불교는 비로소 국가적 신앙으로 자리 잡았지만, 이것이 신라불교의 처음은 아니었다.
고구려를 통해 ‘아차돈 순교’보다훨씬 이전에 불교가 들어왔고, 전래과정에 대해선 몇 가지 이설(異說)이 있다. 불교의 신라 전래와 관련된 가장 빠른 기록은 〈박인량수이전〉과 〈삼국유사〉에 전한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제13대 미추왕 2년(263) 고구려 아도(我道. 수이전엔 阿道)스님이 신라에 불교를 전했다.
조위(曹魏) 출신인 아굴마(我堀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 고구려 여인 고도령(高道寧)과 알게 돼 아도(我道)를 낳았다. “너는 스님이 되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아도는 16세에 위나라로 가 아버지를 만난 뒤 현창(玄彰)스님에게 불교를 배웠다.
19세에 귀국한 아도스님에게 어머니가 말했다.
“고구려는 불교가 흥왕할 기운이 익지 않았다. 신라로 가라. 거기에도 지금 불교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없으나 이후 30개월만 되면 불교를 보호하는 밝은 임금이 등극하여 크게 불교를 일으킬 것이다. 또 그 나라 서울에는 사찰을 세울 만한 곳이 일곱이 있으니,
첫째는 금교의 천경림(지금의 흥륜사),
둘째는 심천기(지금의 영흥사),
셋째는 용궁의 남쪽(지금의 황룡사),
넷째는 용궁의 북쪽(지금의 분황사),
다섯째는 신유림(지금의 사천왕사),
여섯째는 사천니(지금의 영묘사),
일곱째는 서청천(지금의 담엄사)이다.
이곳들은 불법이 멸하지 않는 전생부터의 절터다. 너는 마땅히 그 땅으로 가 처음으로 현묘한 부처님의 취지를 전하고 불교의 시조가 되는 것이 아름답지 아니하냐.”
어머니의 말을 듣고 스님은 국경을 넘어 신라의 왕성 서쪽 마을에 가 살았다. 그 때가 미추왕 2년(263) 계미년이었다고 〈박인량수이전〉에 기록돼 있다. 아도스님이 불교 믿기를 권하자, “전에는 보지 못하던 바”라고 괴상하게 여겨 죽이려는 자가 나타났다. 그래서 스님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선산군) 모례(毛禮)의 집에 가 숨었다.
해를 피해 있기를 3년 만에 성국궁주가 병에 들었다. 왕은 사방으로 사신을 보내 병 고칠 사람을 구했다. 아도스님이 마침 대궐에 들어가 병을 고쳐 놓았다. 왕은 기뻐하며 원하는 바를 스님에게 물었다. “다만 천경림에 절을 창건하게 된다면 제 소원은 만족한다”고 답했다. 왕은 이를 허락했다.
당시 세상은 질박하고 백성들은 완고하므로 제대로 된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초가집으로 절을 삼았다. 7년 뒤 출가하려는 사람이 나타나 그 스님에게 불법(佛法)을 전했다. 모록(毛祿)의 누이 사시(史侍)가 아도스님에게 출가, 삼천기에다 사찰을 세워 영흥사(永興寺)라 하고 거기에 거주시켰다.
미추왕이 죽고 뒤이어 등극한 왕이 불법을 공경하지 않고 사찰을 폐하려 하자, 스님은 속림(續林)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서 시멸(示滅)했다고 〈박인량수이전〉은 전한다. 〈삼국유사〉 ‘아도기라’조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阿道전래 등 다양한 전래설화 간직
불교전래와 관련된 두 번째 기록은, 김대문의 〈계림잡전〉을 인용한 〈삼국사기〉.〈해동고승전〉.〈삼국유사〉의 기술이다. 19대 눌지왕 때(417~458) 사문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에 도착,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렀다. 모례는 자기 집안에 굴실(窟室)을 만들고 묵호자를 거처하게 했다. 그 때 양(梁)나라에서 사신 편에 옷가지와 향을 보내왔는데, 군신들이 쓰임새를 몰랐다.
왕이 나라 안에 사람을 보내 두루 알아보게 했다. 묵호자가 그것을 보고 향이라는 것과 쓰임새를 가르쳐 주고, 향을 사루어 삼보에 발원하면 반드시 영응(靈應)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 때 왕녀가 병이 났다. 묵호자가 분향(焚香)하고 기도하니 병이 나았다. 왕은 매우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했다. 묵호자는 모례의 집으로 돌아가 왕으로부터 받은 물건을 다 주고는 “나는 지금 갈 곳이 있다”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
사진설명: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높이 1.04m의 이차돈순교비. |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엔 다른 기록도 있다. 묵호자 기록에 이어 나오는 것으로, 21대 비처왕 때 (479~500) 아도(阿道)화상이 시자 3인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다.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몇 년 머물다 병들어 죽고, 시자들이 남아 있으며 경률(經律)을 강독하자 신봉자가 생겼다. 물론 〈해동고승전〉엔 고기(古記)를 인용한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양(梁) 대통(大通) 원년(법흥왕 14년. 527) 3월11일 아도(阿道)스님이 일선군 모례의 집에 왔을 때, 아도스님을 본 모례가 놀라 “전에 고구려 승 정방(正方)과 멸구자(滅垢疵)가 왔다가 죽음을 당했다”며 아도스님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집안에 숨겨두고 모셨다.
마침 그 때 오나라 사신이 법흥왕에게 향을 바쳤는데, 왕은 용처를 몰랐다. 나라 안에 두루 묻게 했다. 사자가 일선군에 이르러 스님에게 물었다.
아도스님은 향을 사루어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임을 알려주었다. 사자는 아도스님을 모시고 서라벌로 돌아갔다. 법흥왕은 아도스님을 사신과 만나게 했다. 아도스님을 본 사신은 절하면서 “이 먼 변국(邊國)에 고승께서 어떻게 와 계십니까”하고 물었다. 이로 인해 법흥왕은 불승(佛僧)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신행을 허락했다.
이처럼 불교의 신라 전래와 관련해 여러 종류의 기록이 있다.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阿道). 혹은 我道)스님은 세 사람이나 되며, 전하는 내용는 모두 비슷하나 연대 등은 종잡을 수 없는 것이 특징”(동국대 김영태 명예교수)이다. 따라서 “이 같은 전래설들은 불교의 민간유포를 보여주는 것이자, 전법승(傳法僧)들이 끊없이 신라에 들어와 포교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김영태 교수)으로 판단된다.
나아가 일선군 방면, 모례의 집이 포교의 중심무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저런 연유로 불교가 이미 신라에 퍼졌기에, 법흥왕(재위 514~540)은 즉위하자 불법(佛法)을 국가적 신앙으로 공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완고하고 배타적인 대신들과 관리들의 반대로 불교신앙은 허용되지 않았다.
불교는 국가에 복을 가져오고,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임을 확신한 법흥왕은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펴지 못하자 속으로 고심했을 것이다. 반면 왕의 내심을 알게 된 이차돈(異次頓. 506~527)은 국가와 왕을 위하고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해 몸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신라불교 최초의 순교자인 이차돈의 성은 박씨, 이름은 염촉(厭觸), 거차돈(居次頓)이라고도 하며, 태어난 해가 501년이라는 설도 있다. 아버지 아름은 알 수 없으며, 지증왕의 생부인 습보감문왕의 후예라 한다.
〈삼국유사〉 주(註)에 나오는, 김용행이 지은 ‘아도비문’엔 이차돈의 아버지는 길승,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부는 홀해왕으로 돼 있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온화하고 곧아 주위의 신망이 높았다.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했지만, 불교가 허용되지 않음을 한탄했다.
법흥왕의 내심을 헤아린 이차돈은 결국 “나라를 위해 몸을 죽이는 것은 신하의 대절이요,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바른 뜻”이라며, 거짓 전명(傳命)한 죄를 내려 자신의 머리를 베면 만인이 굴복하여 교명을 어기지 못할 것이라고 왕에게 말했다. 법흥왕은 이를 반대했다.
527년 이차돈 순교 뒤 공인… 흥륜사 창건
|
사진설명: 이차돈 사후 534년 세워진 흥륜사에서 발굴된 인면문와당. |
이차돈은 다시 “모든 것 중에서 버리기 어려운 것이 신명이지만 이 몸이 저녁에 죽어 아침에 대교(大敎. 불교)가 행해지면 불일(佛日)이 다시 중천에 오르고 성주(聖主)가 길이 편안할 것”이라며 왕에게 허락을 청했다.
마침내 천경림에 절을 짓기 시작했다. 이차돈이 왕명을 받들어 불사(佛事)를 시작한다는 소문이 퍼져 조신들은 크게 흥분하며 왕에게 물었다. 왕은 자신이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며 이차돈을 불렀다.
“부처님 뜻에 따라 불사를 일으켰으며, 불법을 행하면 나라가 크게 편안하고 경제에 유익할 것이니 국령(國令)을 어긴다 한들 무슨 죄가 되느냐”며 오히려 반문했다.
신하들의 반대가 거세지자 법흥왕은 처음 약속한 대로 이차돈의 목을 베도록 했다. 이차돈은 “부처님이 신령하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이 일어날 것”이라며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목을 베자 머리는 멀리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고, 잘린 목에서 흰 젖이 솟아올랐다. 대신들은 어리석음을 깨닫고 불교를 공인하는데 반대하지 않았다.
그때 이차돈의 나이 26세(또는 22세). 순교 장면은 백률사에 전해오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이차돈순교비(육면석당. 높이 1.04m)에 잘 새겨져 있다.
수 년 뒤인 534년(법흥왕 21) 천경림에 신라 최초의 사찰 흥륜사(興輪寺)가 세워졌다. 절이 완공되자 법흥왕은 진흥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출가해 법공(法空)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차돈이 순교한 뒤 기일(忌日)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를 추모했다.
흥륜사는 그 뒤 더욱 증축, 544년 2월에 금당이 완공돼 십성(十聖)을 모셨는데, 이차돈도 포함됐다. 특히 이차돈을 위해 자추사를 세우기도 했다. 신라불교는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공인돼 국가통합과 삼국통일의 사상적 원천을 제공하게 된다.
선산.경주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목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