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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에메]
프랑스 문학의 희귀한 보석으로 평가받고 있는 짧은 이야기의 거장. 1929년 <허기진 자들의 식탁>으로 르노도 상을 수상하며 작가적 명성을 얻었다. 초록빛 암말, 술래잡기 이야기, 트라블랭그,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등의 걸작을 남겼다. 익살스럽고 특이한 인물 창조, 간략하면서도 신랄한 이야기 구성. 위트와 아이러니와 역설의 효과적인 배합, 독창적인 패러디로 특유의 익살을 펼치는 유쾌한 작가 마르셀 에메는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창조해냈다
여기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중에서 영화로 각색된 것이 세 편이 있다. 1951년에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가루가루>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감독은 장 부아예였고, 각색은 전후 프랑스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던 시나리오 작가 중 하나였던 미셸 오디아르가 맡았다. 다음으로 <칠십 리 장화>(1971년)이다. 프랑수아 마르탱과 프랑수아 슈발리에가 공동으로 각색하고, 프랑수아 마르탱이 감독한 이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원작과 다르게 각색되었다. 원작에서는 시대적 배경을 모호하게 처리하고 있는데, 영화의 줄거리는 1943년을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아이들은 용감하게도 독일군 순찰대와 맞서 싸우는 것으로 나온다. <칠십 리 장화>는 다시 텔레비전 영화로 제작되어 1990년 12월 당시의 프랑스 국영방송 ‘앙텐 2’를 통해 방영되었다. <천국에 간 집달리> 역시 텔레비전 영화로 만들어졌다. 감독은 피에르 체르니아가 맡았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파리 몽마르트르 오르샹가 75번지 2호의 4층에 매우 선량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뒤티유윌이라 불리던 그 남자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하나 있었다. 마친 열린 문으로 드나들 듯이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않고 벽을 뚫고 나가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코안경을 끼고 짤막한 검은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등기청의 하급 직원이었던 그는 겨울이면 버스를 타고 통근했고 날씨가 좋은 계절에는 중산모를 쓴 차림으로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뒤티유윌이 자기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깨달은 것은 마흔세 살에 막 접어들었을 때였다. 어느 날 밤 그가 자신의 독신자 아파트 현관에 있을 때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 그는 어둠 속에서 잠시 벽을 더듬거렸다. 전기가 다시 들어왔을 때 그는 자기가 4층의 층계참에 나와 있음을 알아차렸다. 현관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으므로 그가 문으로 나오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는 이성의 질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정말 벽을 통해 나왔는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집에서 나올 때처럼 아주 쉽게 벽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기이한 능력은 그가 품고 있는 어떤 열망을 실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고, 오히려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래서 토요일인 이튿날 오전 근무가 끝난 뒤 동네의 의사를 찾아갔다.
그는 자기 증상을 설명했다. 의사는 그의 말이 사실임을 확신하고, 진찰을 해본 뒤에 병의 원인이 갑상선 협부 상피의 나선형 경화에 있음을 알아냈다. 의사는 그에게 일을 많이 하여 체력을 과도하게 소모하라고 권하면서, 쌀가루와 켄타우루스 호르몬의 혼합물인 4가(四價) 피레트 분(粉) 정제를 일 년에 두 알씩 먹으라고 처방을 내렸다.
뒤티유윌은 처음 한 알을 먹고 나서 나머지 약은 서랍에 넣어둔 체 까맣게 잊고 말았다. 또 의사는 몸을 혹사하라고 권했지만, 그의 공무는 과로를 일체 용납하지 않는 관행의 규제를 받고 있었고, 그의 여가활동도 신문읽기와 우표 수집이 고작이라서 체력을 과도하게 소모시키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일 년이 지난 뒤에도 벽을 통과하는 능력은 온전히 간직되었다. 그러나 그는 부주의를 범하는 경우가 아니면 그 능력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는 모험에 별로 관심이 없고 상상력의 충동에도 잘 이끌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올 때면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갈 줄만 알았지 딴 방법으로 집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자기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갖지 않고 습관에 따라 살면서 아무 탈 없이 늙어갔을지도 모른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그의 삶을 갑자기 변화시키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뒤티유월의 평화롭던 삶에 회오리바람이 몰아닥친 것은 그의 상관인 무롱 과장이 다른 부서로 옮기고 그 자리에 레퀴예라는 사람이 오면서 부터였다.
그는 짐짓 뒤티유윌을 성가시고 추저분한 퇴물로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일은 그 신임 과장이 뒤티유윌의 평온한 삶을 여지없이 뒤흔들 개혁을 도모하고 있다는 거였다. 뒤티유윌은 이십 년 전부터 공적인 편지를 쓸 때면 으레 다음과 같은 상용 문구로 시작하곤 했다.
‘금월 모일의 귀환과 관련하여, 그리고 그 이전에 교환된 서신들을 참고하여, 귀하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레퀴예 과장은 이런 양식을 미국식 서간문에 더 가까운 딴 것으로 대체하고 싶어 했다.
‘귀하의 모 일자 서신에 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하는 식으로. 하지만 뒤티유윌에게는 그런 서간문 양식이 마냥 어색하기만 했다.
그는 점점 더 과장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직장의 분위기는 갈수록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아침마다 불안한 마음으로 출근을 했고, 밤이면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 일이 잦았다.
레퀴예 과장은 뒤티유윌의 복고적인 의지가 개혁의 성공을 저해하는 것에 역정이 나서 자기 사무실에 인접한 어둠침침한 골방으로 그를 쫓아버렸다. 그 골방은 복도 쪽으로 난 좁고 나지막한 문으로 출입하게 되어 있었고, 그 문에는 ‘허드레 물건 치우는 곳’이라고 크게 써놓은 표찰이 아직 붙어 있었다. 뒤티유윌은 이 전례 없는 모욕을 체념하는 심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신문의 사회면에서 사람이 죽거나 다친 참혹한 사건에 관한 기사를 읽을 때면, 레퀴예 과장이 그 사건의 희생자라고 상상하는 자신에 대해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뒤티유윌은 겸손하지만 자긍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골방에 혼자 남은 그는 신열이 오르는 기분을 느끼다가 문득 영감에 사로 잡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방과 과장의 방을 가르는 벽 속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서 난데없이 기침소리가 들렸다. 과장은 고개를 들었다. 뒤티유윌의 머리가 보였다. 과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 머리는 마치 사냥을 기념하기 위해 박제해놓은 짐승의 머리처럼 벽에 붙어 있었다. 게다가 그것은 박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머리였다. 가느다란 사슬이 달린 코안경 너머에서 증오의 시선이 번득이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머리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레퀴예 과장, 당신은 깡패에다 상놈에다 개망나니요.” 과장은 업에 질려 입을 딱 벌린 채 한동안 그 머리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복도로 후다닥 뛰어나가서는 골방까지 줄달음질을 쳤다. 뒤티유윌은 차분하고 부지런한 모습으로 손에 펜을 들고 여느 때처럼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과장은 한참 그를 바라보다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우물거리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머리가 또다시 벽에 나타났다. “레퀴예 과장, 당신은 깡패에다 상놈에다 개망나니요." 이날 하루 동안에만 그 무시무시한 머리는 스물세 번이나 벽에 나타났고, 그 뒤로 며칠에 걸쳐서 매일 그와 비슷한 횟수로 출몰했다. 뒤티유윌은 그 장난에 제법 미립이 나자 과장에게 욕지거리를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알쏭달쏭한 말로 그를 위협했다. 이를테면 악마 같은 음산한 목소리로 이렇게 소리치는 거였다. "나는 가루(Garou)*다! 가루! 늑대인간이다! (히히히) 모두가 전율한다. 부엉이들마저 혼비백산하여 달아난다.(히히히)“
두 번째 주가 시작되었을 때, 구급차 한 대가 그의 집으로 와서 그를 정신병원으로 데려갔다.
무엇이 벽 뒤에서 자기를 부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동경이 마음 안에 자리 잡았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자기 능력을 통해 이룩하고자 하는 것이 없었다. 그는 신문을 읽으면서 자기의 목적을 찾고자 했다.
뒤티유윌은 먼저 자기 능력을 도둑질에 사용해보기로 했다. 그가 처음으로 불법 침입을 행한 곳은 센느 강 우안의 상업 지구에 있는 큰 은행이었다. 그는 열 두 개쯤 되는 벽과 칸막이를 통과한 다음 여러 금고 속으로 들어가 호주머니에 지폐를 가득 채웠다. 그러고는 은행을 빠져나오기 전에 빨간 분필로 ‘가루가루’라는 가명을 써놓고 아주 예쁜 사인까지 남겼다. 이튿날 그 사인은 모든 신문에 그대로 실렸다.
뒤티유윌은 일약 파리의 거부들 중의 하나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등기청 직원으로 충실하게 근무하고 있었고, 그 충실한 근무 태도 덕분에 근정훈장 수훈자의 물망에 오르기까지 했다. 아침에 출근해보면 간밤에 그가 한탕 멋지게 해낸 일을 두고 동료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어느 날, 동료들이 늑대인간을 좋게 평하는 분위기에 너무 방심한 나머지, 그는 더 이상 숨기지 말고 비밀을 털어놓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저 사실은 말이야, 그 가루가루가 바로 나야.”
뒤티유윌의 고백에 와르르 터져 나온 동료들의 웃음이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그 고백으로 그가 얻은 것은 가루가루라는 조롱 섞인 별명뿐이었다.
며칠 후 뒤티유윌은 파리 시내에 있는 한 보석가게를 털다가 일부러 야간 순찰대에 붙잡힐 행동을 했다. 그는 카운터에 서명을 해놓고 순금 제 술잔으로 진열창을 깨뜨리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고백을 믿어주지 않아 그의 마음에 상처를 준 동료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였다. 아닌 게 아니라 뒤티유윌의 동료들은 그 이튿날 신문의 1면에 실린 그의 사진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천재적인 동료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고, 그를 본 따 짧은 턱수염을 기름으로써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어떤 동료들은 그에 대한 회한과 찬탄이 너무 지나쳐서 친구와 친지의 지갑이나 손목시계를 훔치려 하기도 했다.
그가 수감되고 바로 그 이튿날 교도관들은 뜻밖의 일을 접하고 경악했다. 뒤티유윌이 자기 감방 벽에 못을 하나 박아놓고 거기에 교도소장의 금시계를 걸어두었기 때문이다.
그 손목시계는 주인에게 되돌아갔다가 그 다음날 뒤티유윌의 침대 머리맡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시계 옆에는 교도소장의 책꽂이에서 가져온 <삼총사> 제 1권도 함께 놓여 있었다. 교도소장과 교도관들로서는 정말이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날 밤 그의 탈주를 막기 위해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었음에도 뒤티유윌은 정확히 11시 30분에 교도소를 빠져나왔다. 다음날 아침 이 소식이 대중들에게 알려지자 곳곳에서 열렬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뒤티유윌은 자기의 명성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벽을 통과하는 기쁨도 이미 감옥에 있을 때부터 조금 시들해져 있던 터였다. 아무리 두껍고 단단한 벽도 이젠 한낱 병풍처럼 시시해 보였다. 그에겐 무언가 새롭게 도전해볼 만한 것이 필요했다. 그는 이집트에 있는 어느 육중한 피라미드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보기를 꿈꾸었다.
어느 날 아침 화가가 동네의 길모퉁이에서 뒤티유윌과 맞닥뜨렸다. 화가는 다짜고짜 막된 말로 이렇게 말했다. “어이고, 보아하니 자네 곰들을 엿 먹이려고 등기로 상판갈이를 했구먼.”
바로 그날 오후에 그는 르픽 거리를 걷다가 어떤 금발의 미인을 십오 분 간격으로 두 차례 만나고 나서 그만 그 여인에게 연정을 느끼게 되었다. 마음에 사랑이 싹트자 그는 우표 수집도 이집트 여행도 피라미드도 금세 잊어버렸다.
불행하게도 그 아름다운 여인은 난폭하고 질투심이 많은 남자와 결혼해 있는 처지였다. 그 남편이라는 자는 저 자신은 밤마다 싸돌아다니며 방탕한 짓을 일삼으면서도 제 아내는 집 안에 꼭꼭 처박아두고 싶어 하는 졸렬하고 의심 많은 사내였다. 그자는 밤 열시에서 새벽 네 시 사이에 아내를 홀로 두고 밖에서 지내기가 일쑤였는데, 나갈 때는 그냥 나가는 게 아니라 아내가 혹시 밖에 나갈까 싶어서 방문에 이중으로 자물쇠를 채우고 덧창까지 채우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그는 장애물들을 통과하며 내처 달려서 그 아름다운 여인이 갇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 이튿날 뒤티유윌은 격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그는 우연히 서랍 속에 흩어져 있는 알약들을 발견했다. 그는 그 알약들을 아스피린으로 생각하고 아침에 한 알 오후에 한 알을 먹었다. 저녁이 되자 두통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뒤티유윌은 그 신비의 칸막이와 벽돌을 통과하면서 여느 때와는 다르게 허리와 어깨에 무엇이 스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담 속으로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분명히 어떤 저항이 있음을 느꼈다. 마치 어떤 물질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유체 같던 그 물질은 반죽처럼 끈적거리기 시작하더니 그가 힘을 쓸 때마다 점점 더 딱딱해졌다. 마침내 온 몸이 두꺼운 담 벽 속에 들어갔을 때, 그는 자기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문득 낮에 먹었던 알약에 생각이 미쳤다. 아뜩한 공포가 엄습했다. 그가 아스피린으로 생각했던 그 알약들은 지난해에 의사가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없애기 위해 처방해준 약이었다. 그 약을 복용한데다 힘을 격렬하게 사용한 효과가 더해져서 의사의 처방이 갑작스레 효험을 나타낸 거였다.
뒤티유윌은 꼼짝달싹 못하고 담 벽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지금 그는 여전히 돌과 한 몸이 된 채 그 담 속에 있다.
생존 시간 카드 쥘 플레그몽의 일기에서 발췌
2월 10일 항간에 터무니없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새로운 배급제에 관한 소문이다. 식량과 생필품 부족에 대처하고 노동계급의 수익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비생산적인 소비자들, 이를테면 노인, 퇴직자, 금리생활자, 실업자, 기타, 다른 군입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리라는 것이다.
2월 12일
당연한 예기지만 그 법령의 취지는 쓸모없는 사람들을 죽이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생존 시간을 줄이자는 것뿐이다.
쓸모없는 사람들은 한 달을 다 사는 게 아니라 그 무용성의 정도에 따라 일수를 정해놓고 다달이 그 일수만큼만 살게 될 거라고 했다. 그들에게 발급될 생존 시간 카드는 벌써 인쇄되어 있는 듯하다.
2월 13일
2월 16일 법령은 3월 1일부터 발효될 것이고 등록과 카드 발급은 이달 18일부터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자기들의 사회적인 처지로 말미암아 부분적인 생존이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일거리라도 찾아보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일이 있어야 한 달을 온전히 다 사는 완전 생존 자격 보유자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정당국은 이미 이런 사태가 올 것을 귀신같이 예견하고 2월 25일 전까지 고용과 해고를 비롯한 일체의 인사를 금지시켰다.
2월 17일
2월 18일 파리 제18구청에서 생존 시간 카드를 발급받기 위해 세 시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렸다.
마침내 생존 시간 카드를 받았다. 카드에는 배급표들이 연접되어 있다. 배급표 한 장이 24시간의 삶에 해당한다.
2월 24일
3월 5일
열흘 전부터 아주 열심히 살고 있다. 일기 쓸 시간을 못 낼 정도로 삶이 분주하다. 이토록 짧은 삶에서 무엇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밤잠을 잊을 지격이다. 글을 쓰는 것도 예전과는 다르다. 정상적인 삶을 살 때 석 주나 걸려서 쓴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원고를 최근에는 나흘 만에 해치웠다. 그런데도 문체에선 전과 다름없는 광체가 나고 사유에는 변함없는 깊이가 있다.
3월 7일
자정 일 분 전에 로캉통은 아내의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일러둘 말을 하고 있었다.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그녀는 남편의 손이 자기 손에서 녹아 없어지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 곁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텅 빈 파자마와 긴 베게 위에 놓인 틀니뿐이었다.
3월 12일
3월 13일
5월 8일 아침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 생존 시간 배급표를 장당 200프랑에 팔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팔 것이 오십 장쯤 있다고 했다. 나는 매몰차게 그를 쫓아버렸다.
5월 12일 바야흐로 생존 시간 배급표의 암시장이 대규모로 형성되고 있다.
속담
자코탱 씨는 주방의 식탁에 모여 앉은 식구들을 둘러보았다. 천장에 길게 매달린 전등의 환한 불빛을 받으며 식구들은 음식 위로 몸을 구부린 채 그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가장의 기분을 상할까봐 저어하는 눈치였다. 그는 가족을 위한 자기의 헌신과 희생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가정의 법도에 시시콜콜히 신경을 쓴 탓에 오히려 불공정하고 전제적인 가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그의 욱하는 성미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늘 거북스러웠고, 그는 또 그런 분위기 때문에 짜증이 나곤 했다. 그날 오후에 그는 자기가 문화훈장의 수훈자로 추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소식을 바로 식구들에게 알리는 것을 자제하고 저녁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치즈를 한 입 베어 물고 포도주 한 잔을 마신 다음, 말문을 열 채비를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행복한 소식을 전하기 위한 분위기가 그가 바랐던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그는 식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을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먼저 아내에게 눈길이 멎었다. 그녀의 초라한 모습과 그늘진 표정은 동료들 보기에 창피하다는 느낌을 주곤 한다. 다음으로 그는 쥘리 고모에게 눈길을 돌렸다. 나이가 많다는 것과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을 내세우며 집안에 눌러앉은 이 노인 때문에 칠년 동안 적지 않은 돈이 들었다. 노인이 죽고 나서 물려받을 재산보다 많은 돈이 들어갔을 게 틀림없다. 그 다음에는 두 딸아이다. 맏이는 열여덟 살이고 둘째는 열일곱 살이다. 둘 다 가게점원으로 한 달에 고작 500프랑을 버는 주제에 옷은 공주처럼 입으며 팔찌시계를 차고 금으로 된 핀 장식을 옷에 꽂는 등 분에 넘치는 치장을 한다. 어쩌면 그렇게 씀씀이가 헤플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자코탱 씨는 문득 자기 재산을 도둑맞고 있다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자기가 흘린 땀의 결실을 남이 가져가고 자기는 그저 우스꽝스러운 봉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술기운이 단번에 머리로 뻗치면서 그렇지 않아도 불그스레하던 그의 넓적한 얼굴이 더욱 벌겋게 달아올랐다. 마음이 그렇게 언짢아 있던 참에 그의 눈길이 아들 뤼시앵에게 쏠렸다. 열세 살 난 아이는 식사가 시작될 때부터 줄곧 아버지의 주의를 끌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이 핼쑥해지는 것을 보면서 뭔가 수상쩍은 데가 있음을 눈치 챘다. 아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자기를 살피고 있음을 느끼면서 초등학생들이 입는 검은 덧옷의 주름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조짐이 좋지 않은 목소리로 통을 놓았다. “그걸 찢어야 속이 시원하겠니? 어떻게 서든 그걸 찢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 아이는 옷을 놓고 두 손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접시 위로 고개를 숙인 채 누나들의 눈길에서 위안을 구할 엄두도 못 내고 다가오는 불행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내 말 안 들리냐? 어른이 물으시면 뭐라고 대꾸가 있어야지, 보아하니 너 마음에 뭔가 찔리는 것이 있구나?” 아이는 겁먹은 눈길로 그렇지 않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런 눈길로 아버지의 의심이 풀리기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자기의 눈에 두려움의 기색이 어린 것을 보지 못하면 아버지가 실망하리라는 것을 아이는 알고 있었다. “분명해. 너 뭔가 찔리는 개 있어. 오늘 오후에 무얼 했는지 말해보겠니?” “오늘 오후엔 피숑하고 같이 있었어요. 그 애가 두시에 나를 데리러오겠다고 했어요. 그 애와 함께 집에서 나가다가 심부름을 가고 있던 샤퓌조를 만났어요. 우리는 먼저 몸이 편찮으신 샤퓌조네 삼촌을 보러 병원에 갔어요. 그저께부터 간 쪽에 통증을 느끼시고 있대요…….” 하지만 그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자기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려는 의도를 알아채고 아이의 말을 끊었다. “남의 간에 네가 왜 신경을 써? 내가 아플 때도 그렇게 안 하면서. 그런 예기 말고 오늘 오전에 어디에 있었는지 말해봐.” “푸르몽과 함께 푸앵카레 대로에 가서 간밤에 불탄 집을 구경했어요.” “그러니까 하루 종일 바깥에 있었다는 예기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물론 숙제를 다 해놨으니까 목요일*을 그렇게 놀면서 보냈겠지?” 아버지는 짐짓 다정한 목소리로 이 마지막 말을 했다. 그 목소리에 다른 식구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숙제요?” 뤼시앵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네 숙제.” “공부는 어제 학교에서 돌아온 뒤에 했어요.” “어제 저녁에 공부를 했느냐고 묻는 게 아니라, 내일 가져갈 숙제를 다 했느냐고 묻고 있는 거야.” 식구들은 저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져간다는 것을 느끼고 할 수만 있다면 나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쯤 되면 누가 어떤 식으로 나서든 사태를 악화시키고 난폭한 가장의 화를 돋울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뤼시앵의 두 누나는 모르는 척하는 게 상책이라고 여겼는지 공연히 딴청을 피우고 있었고, 어머니는 괴로운 장면을 너무 가까이에서 지켜보기가 싫어서 찬장 쪽으로 가버렸다. 한편 자코탱씨는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이었지만 문화훈장에 관한 소식을 묻어둘까 말까하고 아직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쥘리 고모는 측은지심에 이끌려 잠자코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너도 참 딱하다, 노상 애를 그렇게 들볶아대니 말이야, 어제 저녁에 공부했다고 하지 않니, 얘도 놀 땐 놀아야지.” 자코탱 씨는 기분이 상하여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 아들 내가 교육시키는데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마세요. 나는 이 얘의 아버지로서 할 도리를 하는 거고 내 방식대로 이 아이를 가르치고 싶으니까요. 얘들이 제멋대로 구는 것을 다 받아주고 싶으시면, 고모님이 자식을 낳거든 그때 가서 마음껏 하시라고요.” 일흔 세 살의 쥘리 고모는 자기보고 자식을 낳으라고 하는 건 자기를 비꼬는 것임을 알아채고는 감정이 상하여 주방에서 나가버렸다. 뤼시앵은 안쓰러워하는 눈길로 할머니의 뒷모습을 좇았다. 할머니는 어둠침침한 옆방으로 들어가 더듬거리며 전등 스위치를 찾은 다음 방문을 닫았다. 그러자 자코탱 씨는 다른 식구들을 증인으로 삼아 노인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만큼 자기가 심한 말을 하지는 않았다고 발뺌하면서, 노인이 오히려 자기를 무례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다고 투덜거렸다. 그의 아내도 식탁을 치우기 시작한 딸들도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긴장된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을지도 모른다. 아내와 딸들의 침묵은 그에겐 또 하나의 모욕이었다. 그는 다시 뤼시앵을 닦달했다. “왜 아직 대답이 없지? 숙제를 한 거야, 안 한 거야?” 뤼시앵은 꾸물거려봐야 전혀 득이 될 게 없음을 깨닫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국어 숙제를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눈에 고마워하는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들 녀석을 다그친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왜 안 했는지 말해보겠니?” 뤼시앵은 자기도 모르겠다는 뜻으로, 그리고 마치 질문이 너무 엉뚱해서 놀랍다는 듯이 어깨를 추켜올렸다. 아버지는 아이를 노려보면서 중얼거렸다. “이 녀석 혼이 좀 나야겠구먼.” 아버지는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숙제를 하지 않고도 전혀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아들이 얼마나 뻔뻔한 녀석인가를 생각하면서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그의 말이 연설조가 되면서 목소리가 격앙되기 시작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러다가 아예 버릇이 되겠구나. 선생님이 내일 까지 해오라고 국어 숙제를 내주신 게 지난 금요일이야. 그러니까 너에게는 숙제를 할 시간이 일주일이나 있었는데도 너는 시간을 내지 않았어. 만일 내가 얘기를 꺼내지 않았으면 너는 숙제를 하지 않은 채로 학교에 갔을 거야. 숙제를 안 한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나쁜 건 네가 빈둥빈둥 돌아다니면서 휴일을 보냈다는 거야. 그것도 누구하고 돌아다녔지? 피숑, 푸르몽, 샤퓌조 같은 얘들이야. 모두 반에서 꼴찌만 하는 열등생들이지, 너처럼 ㄱ오부하고는 담 쌓은 얘들이란 말이야. 유유상종이라더니 너희들이 바로 그 꼴이구나. 물론 베뤼샤를 같은 아이하고 노는 건 생각조차 안 해보았을 거야. 너는 모범생하고 노는 걸 수치스럽게 여길 떼니까 말이지. 하긴 네가 배뤼샤르와 놀고 싶어 해도 그 얘가 놀아주지 않을 거야. 내가 보기에 그 얘는 노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빈둥거리며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아. 그 얘가 그러거나 말거나 너하곤 상관없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네가 놀 때 베뤼샤르는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 예는 항상 우등생이 되는 거야. 지난주에 나온 성적만 보더라도 그 얘는 너보다 산등이나 앞섰어. 나는 그 얘 아버지랑 하루 종일 같은 사무실에 있어. 그는 나보다 능력이 한참 떨어지는 사람인데, 그의 아들이 내 아들보다 공부를 잘 한다는데 내 기분이 좋겠니? 걔 아버지는 부지런하다고 할 수는 있어도 능력은 형편없는 사람이야.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도무지 자기 나름대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지. 그 사람 자신이 그 점을 잘 알고 있어. 우리가 이런저런 화제를 놓고 토론을 벌일 때면 그는 내 앞에서 기를 못 펴지. 그러다가도 자기 아들 얘기만 나오면 기고만장해져. 자기 아들이 반에서 늘 일등만 한다 이거지.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내 체면은 엉망이 되고 말아. 나는 자식 복이 없어서 베뤼샤르 같은 아들을 두지 못했거든. 국어에서도 일등, 산수에서도 일등, 게다가 상이란 상은 다 차지하는 그런 아들을 말이야. 뤼시앵, 그 냅킨꽂이 좀 가만히 둘 수 없겠니? 내 말을 그렇게 건성으로 듣는 건 참을 수가 없구나. 내 말을 듣고 있기나 하는 거니? 꼭 따귀를 맞아야 정신 차리겠니? 그래야만 내가 네 얘비라는 걸 알겠느냐고. 이 게으름뱅이, 불한당, 멍청이 같은 녀석아! 그래 일주일 전에 내준 숙제를 아직도 안 했단 말이냐? 네가 조금이라도 인정이 있는 녀석이라면, 아니면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생각할 줄 아는 녀석이라면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을 게다. 아니야, 뤼시앵, 넌 나를 생각하는 얘가 아니야. 네가 그런 얘였다면 벌써 숙제를 해 놓았을 거야. 내가 얼마나 힘들게 일을 하는지, 우리 가족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얼마나 많이 걱정하고 불안해하는지 넌 몰라. 내가 일을 그만둘 나이가 되면 나를 먹여 살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남을 믿느니 자기 자신을 믿는 게 낫지. 나는 아무리 돈이 필요해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 본 적이 없고, 아무리 처지가 궁해도 이웃 사람에게 손을 빌리러 간 적이 없어. 내 부모 형제들의 도움을 받은 적도 없지. 네 할아버지는 내가 공부하도록 해주지 않으셨어. 네 나이 때에 나는 벌써 남의 밑에서 일을 배우고 있었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말 마소처럼 일을 했어. 겨울에는 동상이 걸렸고, 여름에는 땀에 전 셔츠가 등에 달라붙곤 했지. 그런데, 넌 편하게 놀고먹을 수 있어. 너무 착한 애비를 만난 덕이지. 하지만 이런 게 언제까지나 지속 되는 건 아니야, 원 세상에, 일주일 전에 내준 국어 숙제를 아직 안 하다니. 게으름뱅이, 너절한 녀석! 계속 그런 식으로 해봐, 꼴찌는 언제나 네 차지가 될 테니. 그런데도 나는 조금 전에 너희 모두를 데리고 이번 수요일에 빅토르 위고의<성주>를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올 때만 해도 이런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어. 내가 집에 없으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될 게 뻔해. 얘가 숙제를 했는지 안 했는지 챙기는 사람도 없을 거고 집안 꼴이 온통 개판이 될 거야. 그리고 이건 딴 얘기다만, 드디어 그날이 왔어…….” 아버지는 잠시 뜸을 들였다. 쑥스러움과 겸허함이 뒤섞인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 그는 살며시 눈길을 낮추었다. “내가 문화훈장 수훈자로 추천되었음을 알게 되는 날 말이야. 그래, 오늘이 바로 그날이야.” 그는 방금 자기가 한 말에 대한 식구들의 반응을 잠시 살폈다. 그러나 싫은 소리를 한참 늘어놓은 뒤끝인지라 그의 말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은 것 같았다. 식구들은 모두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장황한 훈시의 여담으로만 들었을 뿐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아내만이 남편이 지방 음악협회에서 무보수로 회계일 을 맡아온 공로를 내세워 두 해 전부터 포상을 기대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라 남편의 입에서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문화훈장이라는 말의 울림이 이상하게도 귀에 설지 않았고, 명예 음악가의 모자를 쓴 차림으로 야자나무의 우듬지에 말 타듯 걸터앉은 남편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남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에 대한 걱정이 고개를 들면서 그녀는 마침내 자기가 상상한 그 시적인 장면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입을 열어 조심스럽게 자기의 기쁨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때가 너무 늦었다. 자코탱 씨는 이미 식구들의 데면데면함에 기분이 씁쓸해질 대로 씁쓸해진 터라, 그들의 침묵 때문에 생긴 모욕감이 아내의 말 한마디로 누그러지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처럼 서둘러 그녀의 말을 막았다. 고통에 찬 냉소를 흘리며 그가 말했다. “이야기 계속하자. 그러니까 내 말은 일주일이나 시간이 있었는데도 네가 국어 숙제를 안 했다는 거다. 그래, 너에겐 일주일이나 시간이 있었어. 생각해 봐, 배뤼샤르도 너처럼 했겠니? 난 그 에라면 일주일이나 엿새나 닷새가 지나도록 기다리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해. 사흘이나 이틀도 기다리지 않았을 거야. 베뤼샤르 같은 애는 바로 그 다음날 숙제를 해치웠을 게 뻔해. 그런데, 그 숙제가 뭔지 말해보겠니?” 뤼시앵은 아버지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다가 대답을 못 하고 어물쩍거렸다. 그러자 대답을 재우치는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 목소리는 세 개의 방문을 지나 쥘리 할머니의 방에까지 다다랐다. 할머니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려고 얼굴을 찡그리며 잠옷 바람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대체 무엇 때문에 이 얘를 닦달하는 거야? 내가 좀 알아야 갰다.” 일이 고약하게 꼬이느라고 그랬는지, 자코탱 씨는 그 순간에 문화훈장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는 대개 ㅈ머잖은 말로 자기감정을 표현하곤 했다. 그런데 혼자 사는 게 안됐다 싶어 자기 집에 받아들인 노인이 곧 문화훈장을 받을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지껄여대는 그 말투가 그에게는 일종의 도발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노인이라도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상소리를 들어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지랖이 넓기도 하군요, 왜 자꾸 나서고 그래요? 꼭 험한 소리를 들어야 직성이 풀리시겠어요? 좋아요, 못 할 것도 없지요. 에이 xx(똥)." 할머니는 조카가 자기에게 욕을 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주방에 비명 소리가 일고 주전자와 받침접시와 약병 따위를 달그닥대는 소리가 뒤섞이며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뤼시앵의 어머니와 누나들은 할머니 주위를 분주히 오가며 동정과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녀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자코탱 씨의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그녀들은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지만, 어쩌다 그에게 얼굴을 돌릴 때면 눈길이 곱지 않았다. 그는 죄책감을 느끼고 노인을 측은하게 여기면서 자기가 너무 심한 말을 함부로 내뱉었음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그는 용서를 빌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의 식구들이 너무나 따가운 눈총을 보내는 바람에 도리어 그의 오기가 덧나고 말았다. 식구들이 노인을 침실로 옮기고 있는 동안에 그가 쩌렁쩌렁한 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네 국어 숙제가 뭐지?” “작문 이예요. ‘잰 놈 뜬 놈만 못하다’라는 속담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꾸물거리고 있니? 내가 보기엔 금방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뤼시앵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아이의 얼굴에는 망설이는 빛이 역력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공책 가져다가 내가 보는 앞에서 해라. 내가 숙제 끝내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 뤼시앵은 주방 한구석에 팽개쳐놓은 책가방을 가져와서 연습장을 꺼낸 다음 쓰지 않은 면을 펼치고 강단에 ‘잰 놈 뜬 놈만 못하다.’ 라고 썼다. 아무리 시간을 끌려고 해도 제목 하나를 쓰는 데에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제목을 다 쓰고 나자 아이는 팬 대를 빨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써놓은 속담을 적의에 찬 표정으로 고집스럽게 바라보았다. “영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 네 마음대로 해. 난 하나도 급할 게 없으니까. 기다려야 한다면 밤새도록 기다려라.” 아닌 게 아니라 아버지는 편하게 기다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뤼시앵은 눈을 들어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너무나 태평스러운 표정이었다. 꼼짝없이 밤을 새워야 할 판이었다. 아이는 속담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려고 애썼다. ‘잰 놈 뜬 놈만 못하다.’ 아이가 보기에 그것은 아무런 설명이나 예증이 필요 없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라 퐁텐의 우화 <토끼와 거북>가 생각났다. 어릴 때부터 싫증이 날 정도로 들어온 얘기였다. 한편 뤼시앵의 누나들은 쥘리 할머니를 자리에 누인 뒤에 설거지한 그릇을 찬장에 정돈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아무리 조심을 해도 덜거덕대는 소리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코탱 씨는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마치 딸들이 일부러 그릇 부딪치는 소리를 내서 뤼시앵에게 농땡이를 부릴 좋은 구실을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어머니가 개수대 위에 떨어뜨린 쇠 냄비가 타일 바닥에서 다시 튀어 오르며 내는 소리였다. 자코탱 씨의 고함이 다시 터져 나왔다. “조심해야지, 거 되게 짜증나게 하네. 이런 시장바닥 같은 곳에서 얘가 어떻게 공부를 하겠어? 이 얘를 방해하려면 다들 나가라고. 설거지는 끝났으니 가서들 자란 말이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자들은 주방을 나갔다. 뤼시앵은 아버지의 포로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잠을 자기는 영 글러버린 듯했다. 속담 하나에 매달려 죽을 고생을 하며 밤을 꼬박 새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면서 숙제가 잘도 되겠다. 바보 같은 짓 그만하고, 자 어서 해!”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그의 말투에는 아들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조금 배어 있었다. 조금 전에 자기가 불러일으킨 소동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던 터라, 아들에게라도 너그러운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기의 그릇된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덜고 싶었던 거였다. 뤼시앵은 아버지 말투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고 더욱 큰 소리로 서럽게 울었다. 눈물 한 방울이 연습장의 속담이 쓰인 자리 옆에 떨어졌다. 아버지는 마음이 짠해서 의자를 끌면서 식탁 주위를 돌아 아이 곁에 와서 앉았다. “자, 눈물 닦고 이제 그만 울어. 너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니까 내가 너를 나무랄 때엔 그게 다 널 위한 거리고 생각할 줄 알아야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너는 ‘아버지가 옳았어 라고 말하게 될 거다. 엄해야 할 때 엄할 줄 아는 아버지만큼 아이에게 득이 되는 건 없는 법이다. 바로 메뤼샤르 아버지가 이제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그 사람은 습관적으로 자기 아들에게 매질을 하는 모양이더라. 따귀를 때린다든가 발길질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죽 채찍이나 쇠 힘줄 채찍으로 때리기까지 한다는구나. 그럼으로써 좋은 결과를 얻고 있지. 그는 자기 아들이 올바로 자라날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 하지만 아이를 때린다는 건 나로선 못할 짓이야. 어쩌다 이렇게 너를 꾸짖을 때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어느 부모에게나 자식을 가르치는 자기들 나름의 방식이 있기 마련이지. 내가 베뤼샤르 아버지에게 했던 말이 바로 그거야. 나는 아이가 말아들을 수 있도록 잘 타이르는 편이 훨씬 났다고 생각해.” 아버지가 그렇게 좋은 말로 달래자 뤼시앵이 울음을 그쳤다. 아버지는 자기가 너무 물렁하게 군 게 아닌가 해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남자 대 남자로 하는 이야기다만, 넌 이런 나를 유약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뤼시앵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마음이 놓인 자코탱 씨는 온화한 눈길로 연습장에 적힌 속담과 걱정에 싸인 아들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는 별로 애를 쓰지 않고도 자기의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 싶어 상냥하게 말했다. “내가 팔짱 끼고 그냥 보고만 있으면 새벽 네 시가 돼도 못 끝내겠는걸, 자, 같이 해보자. ‘잰 놈 뜬 놈만 못하다’라는 속담을 설명해야 한다 이거지? 음, 잰 놈 뜬 놈만 못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코탱 씨는 이 숙제가 아주 쉬운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 쉬워서 코웃음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막상 숙제에 대한 책임을 떠맡고 보니, 이게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걱정 어린 얼굴을 하고 속담을 여러 번 되읽었다. “이건 하나의 속담이야.” “네, 그래요.” 뤼시앵은 그렇게 맞장구를 치고 든든한 마음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들이 철석같이 자기를 믿고 있는 기색을 보이자 자코탱 씨는 오히려 마음이 불안해졌다. 이 숙제에 아버지로서의 채면이 걸려 있다는 생각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숙제를 내주실 때 선생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더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의 줄거리를 간추릴 생각은 하지 마라. 너희들 스스로 예를 찾아보아라 하고 말 이예요.” “그래, 맞아. <토끼와 거북이>는 훌륭한 예지. 그 생각을 미처 못 했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예로 들지 말라고 하신걸요.” “ 그 이야기는 써먹지 말라 이거지. 그래, 물론 그래야지, 하지만 그렇게 가장 적절한 예를 활용하지 못하게 하면…….” 자코탱 씨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좋은 생각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하다못해 허두를 뗄 문장이라도 생각이 났으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상상력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걱정과 원망이 섞인 눈으로 속담이 적힌 연습장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뤼시앵의 눈에 어려 있던 것과 똑같은 갑갑함의 기색이 그의 눈에도 조금씩 어리어 가고 있었다. 이윽고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바로 그날 아침에 읽은 신문기사 제목인 ‘군비 경쟁’을 소재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가자는 생각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술술 풀려나갔다. ‘어떤 나라에서는 기관총과 대포와 탱크와 전투기를 만들면서 오래 전부터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 반면에 그 이웃 나라에서는 전쟁 준비를 게을리 한다. 그러다가 전쟁이 발발한다.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이웃 나라는 뒤떨어진 것을 만회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때를 놓친 뒤에 서두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정말이지 아주 좋은 점수를 받을 만한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잠시 환해졌던 자코탱 씨의 얼굴이 대번에 다시 어두워졌다. 자기의 정치적 신념에 비추어 차마 군비 확대를 정당화하는 그런 편향된 예를 선택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거였다. 그는 너무나 정직해서 자기의 소신을 저버릴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렵게 생각해낸 그 소재를 버린다는 건 어쨌든 아까운 일이었다. 군비에 대한 그의 정치적 견해는 확고부동한 것이었지만, 자기가 군비 확대를 도모하는 반동적인 정당의 지지자가 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정당의 지지자였다면 군비 경쟁이라는 소재를 양심에 전혀 거리끼지 않고 마음껏 다룰 수 있었을 거였다. 그는 문화훈장을 떠올리며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갑갑하기만 했다. 뤼시앵은 느긋하게 이 숙고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속담을 설명해야 하는 불안에서 풀려 난 것으로 판단하고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침묵이 너무 오래 계속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진 아이는 여러 차례 늘어지게 하품을 해댔다. 소재를 찾는 데에 골몰하여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던 아버지는 아이의 하품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것을 자기에 대한 질책으로 받아들였다. 속은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군비 경쟁이라는 소재가 그를 성가시게 했다. 그 소재가 문제의 속담과 딱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러다 보니 그것을 잊어버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생각이 더 났다. 그는 이따금 걱정 어린 눈길로 아들을 흘깃거렸다.
그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자기의 무능함을 솔직하게 고백하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다른 소재 하나가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강박관념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던 군비 경쟁에 대한 생각을 밀어내고 마침내 새로운 생각이 들어선 거였다. 이 두 번째 소재 역시 경쟁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치적 신념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팀의 조정 선수들이 경기를 앞두고 준비를 하는데, 한 팀은 꾸준하게 체계적으로 훈련을 하고 다른 팀은 그저 건성으로 시간만 보낸다는 식의 스포츠 경쟁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아, 이렇게 써봐라.” 반쯤 잠이 들었던 뤼시앵은 화들짝 놀라며 펜대를 잡았다. “맙소사, 너 자고 있었냐?” “아, 아니에요,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속담을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하지만 전혀 떠오르는 게 없었어요.” 아버지는 너그럽게 빙긋 웃어 보이더니, 시선을 한 곳에 붙박고 아이가 받아쓸 수 있도록 천천히 부르기 시작했다. “여름 햇살이 찬란한 일요일 오후, 쉼표 찍고, 마른 강을 바라보노라면 초록빛의 예쁜 물건들에 우리의 눈길이 멎는다. 물결치는 대로 가만가만 흔들리는 저 기다란 것들은 대체 무엇일까? 멀리서 보면 마치 그 물건들에 긴 팔이 달린 듯하다. 하지만 팔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다름 아닌 노이고 초록빛 물건들은 두 척의 경기용 보트이다.” 뤼시앵은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들고 조금 겁먹은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에는 아들의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경쟁관계에 있는 두 팀을 소개하는 대목으로 매끄럽게 넘어갈 수 있게 해줄 문장을 다듬는 데에 너무 골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입을 조금 벌리고 눈을 반쯤 감은 채 자기가 보았던 조정 선수들의 모습을 떠올려 상상의 팀을 만들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아들의 펜대 쪽으로 손을 더듬더듬 내밀었다. “이리 줘, 내가 직접 쓸게. 받아쓰게 하는 것 보다 그게 더 쉽겠어. “ 그는 흥분된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화려한 필치였다. 생각과 말이 술술 풀려나오고, 서정성 넘치는 표현들이 앞 다투어 튀어 나왔다. 그는 꽃이 만발한 매혹적인 땅을 가진 영주처럼 부자가 된 생각이 들었다. 뤼시앵은 아버지가 신들린 듯 놀려대는 펜을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식탁위에서 잠이 들었다. 11시가 되자 자코탱 씨는 아들을 깨우며 공책을 내밀었다. “자아, 이제 이것을 찬찬히 베끼도록 해라. 네가 다 베기면 내가 다시 읽어볼게. 구두점 찍는 거 특히 조심하고.” “너무 늦었는데,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냐, 아냐, 쇠뿔도 단 김에 빼랬다고. 어, 속담이 또 튀어나오네.” 자코탱 씨는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구미가 동한 사람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 이 속담을 풀이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간만 여유 있게 주면 가뿐하게 해낼 수 있을 거야. 대단히 멋진 주제야. 이런 주제가 주어진다면 열두 페이지라도 쓸 자신이 있다. 너도 속담이 무슨 뜻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예? 뭐 말이에요?” “‘쇠뿔도 단 김에 빼야 한다. 라는 속담의 뜻을 알고 있느냐고 물은 게다. “ 뤼시앵은 시달릴 대로 시달린 나머지 하마터면 베껴 쓰는 것에 대해서조차 의욕을 잃을 뻔했다. 아이는 마음을 다잡고 아주 상냥하게 대답 했다. “예, 아빠,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아빠가 해주신 이 숙제를 베껴야 해요.” “그래, 어서 베껴라.” 그렇게 말하는 자코탱 씨의 어조에는 머리를 별로 쓰지 않아도 되는 부차적인 활동에 대한 경멸이 드러나 있었다. 일주일 후, 선생님은 숙제에 점수를 매겨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여러분이 해온 숙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해요. 20점 만점에 13점을 받은 베뤼샤르와 가까스로 10점을 넘은 대여섯 사람을 빼고는 숙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요.” 선생님은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를 설명한 다음, 빨간 잉크로 평가 내용이 기록된 과제물 더미에서 세 학생의 것을 골라 평을 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것은 베뤼샤르가 낸 과제물이었다. 선생님은 그것에 대해 몇 마디 칭찬의 말을 하였다. 세 번째는 뤼시앵의 것이었다. “뤼시앵, 네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네가 이런 글을 썼을까 하고 놀랐다. 그동안 내게 보여준 것과는 전혀 딴판인 그 글투가 너무나 불쾌해서 주저 없이 너에게 3점을 주었다. 주제 전개가 빈약하다고 내가 너를 나무란 적이 종종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과 정반대되는 잘못에 빠졌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너는 여섯 쪽을 채우기 위해서 줄곧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했더구나. 하지만 그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건 어색하게 멋을 부린 그 글투이다. 너는 문장을 그런 식으로 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런 글은 오히려 읽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기가 십상이지. 선생님은 뤼시앵의 숙제에 대해서 한참 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잘못된 글쓰기의 본보기로 다른 아이들에게 제시했다. 선생님은 특히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대목을 몇 군대 골라 큰 소리로 읽었다. 아이들 사이에 비웃음이 번지고 키득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숫제 깔깔거리면서 야유를 보내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뤼시앵은 낯빛이 아주 창백해졌다. 자존심이 상한 것은 물론이고 효심에도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뤼시앵은 자기를 반 친구들의 놀림감으로 만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비록 열등생이기는 했지만 게으름을 피우거나 무엇을 모른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웃음거리가 되어본 적은 없었다. 국어 숙제가 되었건 수학 숙제가 되었건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분수를 지키고 학생의 본분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했다는 떳떳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눈이 벌게진 채로 아버지의 글을 베끼던 그날 밤에도 자기의 과제물이 이런 대접을 받게 되리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그 다음날 머리가 맑아졌을 때는 그 숙제를 낼까 말까하고 망설이기까지 했다. 그 동안 반 아이들의 과제물에 대해 선생님이 어떤 평가를 내렸는가를 생각해 볼 때 자기 과제물에는 뭔가 그릇되고 어울리지 않는 점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는 잘못을 범하지 않으리라는 본능적인 믿음이 되살아나면서 그것을 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온 뒤에도 뤼시앵은 아버지를 턱없이 믿었던 자기의 행동을 되새기며 속을 끓였다. 웃음거리가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거의 종교적인 신앙에 가깝게 아버지에 대한 믿음에 이끌렸던 것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후회가 되었다. 아버지는 속담을 풀이한다면서 어쩌자고 그렇게 쓸데없는 얘기를 썼을까? 일껏 숙제를 대신해주고 20점 만점에 3점 밖에 못 받는 수모를 당한 데에는 확실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정이 이쯤 되었으니 속담을 풀이하겠다는 생각을 다시는 안 할 것이다. 게다가 베뤼샤르는 13점을 받았으니, 아버지의 체면이 정말 우습게 되었다. 식구들이 모두 식탁에 둘러앉았다. 자코탱 씨는 쾌활해 보였다. 평소답지 않게 상냥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조금 들떠 보일 만큼 기분이 좋아서인지 말에도 눈길에도 생기가 넘쳤다. 아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입이 근질거리고 아들도 그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당장 질문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느긋함도 보였다. 식사의 분위기는 어느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가장의 쾌활함은 식구들을 편안하게 해주기는커녕 더 거북하게 만들었다. 아내와 딸들은 가장의 기분에 맞추어 명랑한 어조로 말을 하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편 쥘리 고모는 시무룩한 태도를 보이고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음으로써 그의 유쾌한 기분이 식구들 눈에 얼마나 엉뚱해 보이는가를 강조하려 하였다. 자코탱 씨는 그것을 눈치 채고 이내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불쑥 이렇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속담은 어떻게 됐니?” 그의 목소리에는 초조보다는 불안에 더 가까운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 순간 뤼시앵은 자기가 아버지에게 슬픔을 안겨줄 수도 있다고 느끼며, 대등한 인격체로 자유롭게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가엾은 아버지는 가장인 자기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랬는데 아들의 숙제를 도와주겠다고 나섬으로써 가장은 언제나 옳다는 원칙을 무너뜨릴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을 자초한 셈이었다. 이 전제적인 가장은 식구들 앞에서 체면을 잃게 될 것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심마저 잃게 될 판국이었다. 그건 아버지에게 추락이나 다름없는 상황일 거였다. 아버지를 벼르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쥘리 할머니의 면전에서 뤼시앵의 말 한마디는 비극을 야기할 수도 있었다. 그 비극은 이미 엄청난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아버지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염려하는 뤼시앵의 마음에 너그러운 연민의 정이 가득 찼다. “너 마음을 딴 데에 팔고 있구나? 달나라에 가 있니? 내가 한 숙제를 선생님이 돌려주셨느냐고 묻고 있지 않니?” “아빠가 하신 숙제요? 예, 돌려주셨어요.” “그래 몇 점 받았니?” “13점이요.” “괜찮은데, 그럼 베뤼샤르는?” “13점이요.” “그럼 가장 높은 점수는?” “13점이요.”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쥘리 고모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마치 고소한 꼴을 못 봐서 실망했냐는 듯이 의기양양한 눈길을 보냈다. 뤼시앵은 눈을 내리깔고 기쁨으로 가슴이 뭉클해져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코탱 씨는 아들의 어깨를 툭 치며 상냥하게 말했다. “어떠냐. 얘야. 어떤 과제에 착수할 때는 먼저 그 과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단다. 과제를 잘 이해했다면 이미 그것의 4분의 3 이상을 한 거나 다름없지. 내가 네 머릿속에 꼭 넣어주고 싶은 게 바로 그거란다. 잘 될 거야. 그것을 위해 필요하다면 시간을 얼마든지 낼 생각이다. 그리고 앞으로 너의 국어 숙제는 언제나 우리 둘이서 같이 하도록 하자.”
* 책을 메모하다가 이 책에 마음이 동해서 그만 소설 내용 전체를 베끼는 우를 범했다. 출판사에는 미안한 일이다.
칠 십리 장화
제르멘 뷔주는 독신녀 라리송의 아파트를 떠났다. 그녀의 따가운 눈길을 받으며 두 시간에 걸친 ‘대청소’를 막 끝내고 나오는 길이었다. 시각은 오후 네 시, 이틀 전부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서 12월의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제르멘 뷔주의 외투는 추위를 제대로 막아 주지 못했다. 모사와 면사로 짠 얇은 천의 외투인데, 이젠 너무 낡아서 그저 외투의 명색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삭풍이 마치 석쇠를 통과하듯 이 외투를 뚫고 들어왔다. 그 겨울바람은 외투만큼이나 얇고 실체가 없는 제르멘의 몸마저도 뚫고 지나가는 듯했다. 제르멘은 가냘픈 허깨비였다. 작고 좁다란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그녀는 마치 자기 삶에 영향력을 적게 행사해야만 살아갈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난과 겸손을 운명의 자비로 알고 사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거리에 나가면 남자들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여자들도 거의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상인들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았고 그녀를 부리는 사람들만이 그녀를 아는 사람들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학교 앞,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오르는 커다란 돌계단 아래에 공부에서 해방된 아이들이 와글거리며 아직도 빽빽하게 무리를 짓고 있었다. 제르멘은 폴 페발 거리의 모퉁이에 지켜 서서 눈길로 아들 앙투안을 찾았다.
앙투안은 폴 페발 거리의 다른 쪽 끝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어머니를 지켜보았고, 가슴이 옥죄이는 것을 느끼며 자기가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숨겨주고 있던 아이들 속에서 “엄마한테 가야 하지 않을까?”하고 큰소리로 혼잣말을 하기까지 했다. 그 말을 들은 프리울라가 대꾸했다. “네 마음대로 해. 꽁무니를 빼고 싶으면 언제든지 빼라고. 우리 동아리에서 빠지면 되는 거지, 뭐.”
대장인 프리울라는 대단한 녀석이었다. 앙투안보다 크지는 않았지만 다부지고 힘이 좋았으면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놈이었다. 한번은 남자 어른에게 욕을 한 적도 있었다.
목적지 근처에 다다르자 앙투안과 바랑캥은 걸음을 늦추었다. 동아리는 아코디언처럼 오므라들었다.
여섯 아이들이 목적지로 삼은 곳은 어떤 고물상이었다. 아이들은 그 가게에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차례차례 멈춰 섰다.
‘우리 가게에서는 부자들에게만 외상을 줍니다는 광고문도 눈에 띄었다. 여섯 아이들의 관심은 오로지 진열창 안의 한 물건에만 쏠려 있었다. 그것은 한 켤레의 장화였다. 다른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표찰이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그냥 ‘칠십 리 장화’라고만 씌어 있었다.
밖에서 본 대로라면 가게 주인은 아주 자그마한 노인이었다.
제르멘은 난로에 불을 붙인 다음 기름을 아끼기 위해 심지를 낮춰놓고 앙투안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관리실에 내려가 보니 경관 한 명이 그녀를 기다리며 관리인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제르멘은 경관을 보자 앙투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앙투안 뷔주의 어머님이신가요? “ “네.” “아드님에게 사고가 생겼어요. 그리 심각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아드님이 다른 애들과 함께 배관 공사 구덩이에 떨어졌다는군요.”
병원에 다다라서 앙투안을 찾으니 대기실로 들어가게 했다.
제르멘 뷔주는 앙투안의 침대 머리맡에 혼자 있었고, 어느 누구의 소식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들의 삶에는 삼촌도 사촌도 친구도 없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문병 올 일가친척 하나 없는 그들은 다른 가족들의 수다에 주눅이 들어서 첫날의 그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을 다시는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더 뜸을 들이다가 프리울라는 마침내 모든 것을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은 어머니께 장화 얘기를 했어. 그걸 나에게 사주시겠대. 집에 돌아가면 그걸 갖게 될 거야.” 앙투안은 그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장화는 이제 공동의 보물이 아니었다. 남에게 박탈감을 주지 않고 누구나 꿈을 길어 올릴 수 있었던 모두의 우물이 아니라 한 사람만의 재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갖게 되면 너에게도 빌려줄게.”
“죄송한데요, 저는 물건 사러 온 사람이에요. “ 그녀가 큰맘을 먹고 그렇게 다시 말을 걸자, 노인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손님이군!”
“저기 진열창에 있는 장화의 가격을 알고 싶어서 왔는데요.” “삼천 프랑입니다.” 가게 주인은 체스 판에서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삼천 프랑이라구요? 아니, 어떻게 되신 거 아니예요?” “그래요, 나 미쳤소.”
깁스를 풀고 처음으로 바깥에 나온 앙투안은 다리 놀림이 어색해서 조심조심하며 걸었다.
제르멘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노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랑캥이 말한 커다란 새가 있을 뿐이었다. 학이나 두루미처럼 다리가 긴 그 새는 기다란 목 한가운데에 하양 넥타이가 매여 있고 한쪽 날개에는 외알박이 안경이 검은 리본에 묶여 있어서 더더욱 눈길을 끌었다. 노인은 제르멘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한껏 목청을 높여서 그녀에게 말했다. “공주님, 이렇게 옛 친구를 잊지 않고 뜻밖의 기쁨을 베풀어주시니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노인은 그 말이 낳은 효과를 가늠하려고 새를 슬쩍 바라보고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참 이상한 일이네요. 얼마 전 부터 이 장화를 사려는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졌으니 말이오. “ “얼마예요?” “삼천 프랑 내시오.” 노인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손님이 놀라거나 말거나 전혀 관심이 없다는 투였다. 노인은 갑자기 펄쩍 뛰더니 새를 바라보면서 화가 치민 목소리로 외쳤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자네도 동의하지 못 하겠다 이거지? 이 장화를 삼천 프랑에 파는 건 너무 심하다고? 자아, 그럼 자네가 가격을 말해봐. 거북해할 거 없다고. 오늘은 외알박이 안경까지 꼈으니까 무엇이든 자네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노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제르멘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말 들으셨죠? 내 장화가 겨우 이십오 프랑 짜리 밖에 안 되는 모양이군요. 할 수 없지! 좋아요 이십오 프랑에 가져가요. 이제 나는 이 가게에서 주인이고 뭐고 아무것도 아닌 셈이오. 저 친구가 이 가게의 주인인 셈 치자고요. 자, 가져가시오, 아주머니.” 노인은 진열창에서 장화를 꺼내오더니 신문지에 싸서 제르멘에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새에게 말했다. “한심한 친구 같으니, 자네 때문에 이천구백칠십오 프랑을 손해 봤어.” 제르멘은 그 말에 마음이 불편해져서 지갑을 열다 말고 노인에게 말했다. “너무 밑지고 파시는 것은 원치 않아요.” “괜찮아요, 내버려둬요. 내가 저놈을 혼내줄 거요. 아주 샘이 많고 못된 놈이오. 내가 단칼에 저놈을 죽여 버릴 거요.” 제르멘은 돈을 받으려고 내민 노인의 손이 분노 때문에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았다. 노인은 동전을 받아들고 몸을 돌리더니 새의 머리를 향해 획 던져버렸다.
앙투안은 장화를 보자 행복감에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날 밤 어머니가 잠이 들자, 아이는 소리 없이 일어나 옷을 입고 칠십 리 장화를 신었다.
아이는 한 번의 도약으로 파리 교외에 다다랐다. 두 번째 도약으로 센느 에 마른 지역에 이르렀다. 그렇게 십 분을 가자 지구의 반대편이 나왔다. 아이는 광활한 초원에서 걸음을 멈춘 다음, 아침 햇살을 한 아름 따서 ‘성모마리아의 실’로 묶었다. 앙투안은 지붕 밑 방을 쉽사리 다시 찾아내어 살그머니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이는 찬란한 아침햇살 다발을 어머니의 작은 침대에 올려놓았다. 그 빛이 어머니의 잠든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피곤이 덜어지리라고 생각했다.
천국에 간 집달리
프랑스의 한 자그마한 도시에 말리코른이라는 집달 리가 살고 있었다. 집달리의 일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슬픔을 주기 십상이었지만, 그는 자기 직무를 너무나 꼼꼼하고 성실하게 수행했다. 설령 자기 자신의 동산을 압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그 일을 주저 없이 해낼 사람이었다.
어느 날 밤, 말리코른은 아내 곁에 누워서 잠을 자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1심 재판을 맡은 성 베드로 앞에 출두하게 되었다. 성 베드로가 냉랭하게 그를 맞았다. “말리코른, 직업이 집달리로군, 천국에는 집달 리가 별로 없지.” “그건 상관없습니다. 동료들과 같이 있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으니까요.”
천사들 한 무리가 물이 가득 담겨 있는 듯한 커다란 통 하나를 날라 왔다. 성 베드로는 통 안을 살펴보면서 비웃음을 흘렸다. “보아 하니, 자네 적지 않은 환상을 갖고 있구먼. 스스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그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기야 저로서는 양심에 찔리는 짓을 그리 많이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는 가증스런 죄인이고 죄악의 그릇이며 더러운 쓰레기입니다. 그렇지만 남에게 단 한 푼도 손해를 보게 한 적이 없고 꼬박꼬박 미사에 참석했으며 모두가 만족하도록 집달리의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 커다란 통을 보거라. 네가 세상을 떠나올 때 하늘에 같이 올라온 통이다. 이 속에 뭐가 들어 있을 거리고 생각하지?” “전혀 짐작이 안 가는데요.” “그렇겠지, 이 통에는 네가 절망에 빠뜨린 홀어미와 그 자녀들의 눈물이 가득 들어있다.” 집달리는 통의 씁쓸한 내용물을 보고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대꾸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한 홀어미라도 내야 할 돈을 내지 못할 때는 동산을 압류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고 보면 눈물도 나고 이도 갈릴 겁니다. 그러니 이 통이 눈물로 가득 찼다 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지요. 그건 제 일이 다행히도 잘 돌아갔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덕분에 저는 실업을 면했지요.” 성 베드로는 남의 불행을 아랑곳하지 않는 그 파렴치한 태도에 화가 나서 천사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지옥으로 보내! 이 자에게 호된 불 맛을 보여주고 그 덴 자리가 영원히 아물지 않도록 매일 두 번씩 홀어미들의 눈물을 뿌리도록 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사들이 달려들었다. 말리코른은 매우 단호한 몸짓으로 천사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잠깐만요, 저는 이 불공정한 심판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상소를 하겠어요.”
천둥소리가 울리더니 하나님이 구름을 타고 심판 정에 들어섰다. 하나님 역시 집달리들에 대해서 그다지 호의를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말리코른을 심문하는 하나님의 퉁명스러운 태도에서 그걸 알 수 있었다.
하나님도 난처해하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집달 리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히브리어로 성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네가 경솔하게 군 탓에 우리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물론 이 집달리는 마땅히 지옥에 가야할 비열한 녀석이다. 하지만 너는 이 자가 흘리게 한 눈물을 모두 이 자의 탓으로 돌리는 잘못을 범했다. 게다가 너는 이 자의 직업적인 자긍심에 심한 상처를 주었다. 우리는 그 점에 대해서 이 자에게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내가 이 자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이 자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만인에게 혼란을 주는 모순된 심판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 성 베드로는 시무룩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만일 그 혼자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집달리의 운명은 벌써 결정되었을 터였다. 하나님은 성 베드로의 침울한 기분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리코른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는 못된 놈이다. 하지만 성 베드로의 실수가 너를 살렸다. 지옥에 가는 것을 모면한 너를 다시 지옥에 떨어뜨리지는 않겠다. 그렇다고 네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너를 다시 땅으로 내려 보내겠다. 계속 집달리로 살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선행을 쌓도록 노력하거나. 나아, 가서 네게 허락된 이 유예를 유익하게 활용하도록 해라.”
그 이튿날 말리코른은 아내 곁에서 깨어났다.
집달리는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말했다. “이봐요, 부리숑, 당신 월급을 오십 프랑 올려주겠소.”
그는 붙박이장에서 새 공책 하나를 꺼내 첫 쪽을 펼친 다음 수직선을 하나 그어 면을 두 단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왼쪽 단의 머리에 둥굴둥굴한 글씨로 ‘악행’ 이라고 쓰고 그 맞은편에는 ‘선행’ 이라고 썼다.
스스로에 대해 공정성을 지키려는 그런 엄격한 마음가짐으로 그는 그날 아침나절에 행한 일들을 돌이켜보았다. 왼쪽 단에 들어갈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그는 오른쪽 단의 선행 란에 이렇게 써넣었다. ‘나의 서기로 일하는 부리숑 영감은 월급을 더 받을 자격이 없지만. 나 스스로 매달 50프랑씩 더 주기로 했다. ‘
말리코른은 아홉 시경에 최고의 고객인 조르주랭 씨의 방문을 받았다. 고르주랭 씨는 시내에 마흔두 채의 건물을 가지고 있는 거부인데, 자기 세입자들 중에 집세를 잘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서 집달리에게 일을 자주 맡겨야 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 그가 말리코른을 보러 온 것은 집세가 2기분, 곧 여섯 달치나 밀려 있는 어떤 궁색한 가정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소. 준다준다 하며 차일피일한 게 벌써 육 개월이나 되었소. 이제 결판을 냅시다.” 말리크론은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 불량한 세입자를 두둔하려고 애썼다.
“내 건물에 세 들어 사는 가구가 어디 하나둘이요? 자그마치 151가구나 돼요. 만일 내가 착하다는 소문이 돌면 나는 아마 내가 받을 집세의 반밖에 거둬들이지 못하게 될 거요. “
“그야 물론이지요. 어쨌든 조은 결과가 나오는 쪽으로 조치를 취해야겠지요. 하지만 소문에 대해서라면 마음을 놓으셔도 될 겁니다. 나도 사람 꽤나 만나고 다니는 사람인데, 당신이 착하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들은 적이 없으니까요.” “그거 참 다행이군요.”
말리코른은 고르주랭을 문까지 배웅하고 나서 곧장 주방으로 갔다. 그러더니 어이없어하는 아내의 면전에서 가정부에게 말했다. “멜라니, 당신 월급을 오십 프랑 올려주겠소.” 그는 감사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자기 공책의 ‘선행’칸에 이렇게 썼다. ‘멜라니는 칠칠치 못한 가정부지만, 나는 자발적으로 그녀의 월급을 50프랑 올려주었다.’
더 이상 월급을 올려줄 사람이 없게 되자, 그는 도시의 빈민가로 가서 몇몇 가정을 방문했다. 그가 집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사람들은 두려움이 담긴 곱지 않은 눈길로 서먹서먹하게 그를 맞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서둘러 그들을 안심시키고는 오십 프랑짜리 지폐를 놓고 나왔다.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그가 나가고 나면 대개 돈을 호주머니에 챙겨 넣으면서 이렇게 투덜거리곤 했다. “도둑놈 같은 늙은이, 우리가 거지인줄 아나? 지가 적선하는 돈이 다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 대가로 얻어진 것인지도 모르고.”
말은 그렇게 해도 정작 그들의 태도에는 말리코른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토록 많은 선행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말리코른이 선거에 입후보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항간에 나돌았다.
그의 인심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선을 베푸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그 도시의 여성 단체와 본당의 주임신부, 여러 상조회, 소방대원 친목회, 동창회, 영향력 있는 인물이 회장으로 있는 종교 단체나 비종교 단체 등을 위해서도 기부를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는 넉 달 만에 자기 재산의 십분의 일을 지출하긴 했지만 그의 명성은 공고하게 확립되었다.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다시 불러주실 날을 기다렸다.
알뜰한 살림꾼인 그의 아내는 그 모든 선행에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무슨 속셈으로 남편이 돈을 그렇게 펑펑 쓰는지를 ㅈ미작하고 있던 터라 어느 날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천국에 당신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 내 자리를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쓰지 않는군요. 그러고 보면 당신 참 이기적인 사람이에요.”
그는 아내에게 천국에 가는 데에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돈을 써도 좋다고 인심을 썼다. 아내는 화를 내면서 그 관대한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천만다행이라고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집달리는 자기의 선행을 계속 기록해 나갔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자, 공책 여섯 권이 선행의 기록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는 수시로 서랍에서 그 공책들을 꺼내어 들고 흐뭇한 마음으로 무게를 가늠해보곤 했다.
말리코른은 천국에 갈 것을 예감하면서 그 든든한 증거물을 지닌 채 하나님의 법정에 출두할 날을 상상해보곤 했다.
몸매가 날씬한 여인이 그를 맞아들였다. 아주 앳되어 보이지만 고단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두세 살쯤 된 아기가 그녀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있었다. 아기는 물기가 촉촉한 눈으로 방문객을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을 보자 말리코른의 마음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이 단박에 스러졌다.
그는 여인의 안내를 받아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갖춰놓은 가구라고는 가죽 띠를 댄 싸구려 침대, 흰 목재로 된 작은 식탁과 의자 두 개, 창문 앞에 놓인 낡은 재봉틀이 전부였다. 그런 궁색한 살림살이는 이미 다른 곳에서 보았던 것과 전혀 다를 게 없었지만, 말리코른은 생전 처음으로 가난한 사람의 집에서 스스로 주눅이 드는 것을 느꼈다. 통상 그의 자선 방문은 아주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선 채로 간단한 질문을 몇 마디하고 판에 박은 격려의 말을 늘어놓은 다음, 돈을 주고 바로 나오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가 왜 왔는지를 잘 모르겠다 싶었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것에도 더 이상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널을 뛰었고 입술에서는 말이 맴을 돌았다. 자기 직업이 집달리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자 재봉질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기가 민망했다.
그때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팡이 같은 것으로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였다. 여인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옆방으로 건너가더니 두 방 사이의 유리문을 닫았다. “그래, 어쩔 거요?” 거드름이 잔뜩 밴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말리코론은 그것이 조르주랭의 목소리임을 알아챘다. “그래, 오늘은 돼는 거요?”
다른 때 같으면 말리코른은 압류의 전문가로서 조르주랭의 태도에 감탄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집세를 받아내는 게 여간 험한 일이 아닌데 그 일을 그토록 극성스럽게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날 말리코른은 자기 품에 안겨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는 아기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조르주랭의 고함이 다시 들려왔다. “자아, 돈을 내놔! 어서 달란 말이야! 못 주겠다면 집 안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내가 찾아내고 말 거야.”
그를 본 조루주랭이 소리쳤다. “이런! 그렇잖아도 늑대 얘기를 하려던 참인데, 여기 늑대가 숲에서 나오셨군.” 집달 리가 명령조로 말했다. “꺼져!” 조루주랭은 어안이 벙벙하여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꺼지란 말이야!” “보아 하니, 당신 제 정신이 아니구먼. 나 집주인이야. 당신이 누구 덕분에 먹고 사는데 이래?”
“집주인이면 다야? 이 더러운 자식아! 너 같이 더러운 집주인들은 없애버려야 해. 집주인들을 타도하자! 집주인들을 타도하자!” 조루주랭은 말리코른이 정말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서 권총을 빼어들고 그를 겨누었다. 총성과 함께 말리코른은 작은 층계참에 널브러졌다. 쇠 대야와 마포 조각 옆의 그 자리에서 그는 뻣뻣한 시체로 변해버렸다.
말리코른이 마지막 심판을 받으러 성 베드로 앞에 출두한 것은 마침 하나님이 법정에 들렸을 때였다. 하나님이 말리코른을 보며 말했다. “아, 우리의 집달 리가 다시 왔군. 그래, 그동안 어떻게 처신했지?” 성 베드로가 말했다. “이번엔 이 사람의 운명이 금방 결정될 것 같습니다.” “어디 그의 선행을 좀 볼까?” “보고 자시고 할 게 없습니다. 선행이라고는 딱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면서 성 베드로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집달리를 바라보았다. 집달리는 자기 공책에 기록된 모든 선행을 들어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성 베드로는 그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요, 선행이라곤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선행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집달리면서도 ‘집주인들을 타도하자! 고 외쳤으니까요.” 그 말에 하나님이 중얼거리셨다. “그것 참 멋지군. 정말 멋있어.” “ 이 사람은 집주인의 잔혹함에 맞서 어떤 가난한 여자를 지켜주려다가 그 말을 두 번 외치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집달리의 놀라운 선행에 감탄하여 그를 축하하는 뜻으로 천사들에게 류트와 비올라와 오브에와 플라지올에토를 연주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다음 불우한 사람들과 부랑자, 거지,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해 마련된 하늘의 문을 활짝 열게 했다. 그리하여 집달리는 머리에 동그란 빛줄기를 받으며 아름다운 선율에 이끌려 천국 안으로 들어갔다. ■
[Review]
프랑스 문단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짧은 이야기의 거장'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독자의 사랑을 받은 저자는 백여 편의 글을 남겼다. 그의 글은 대부분 현실 세계에서 경험할 수 없는 상황으로 독자를 이끌기 때문에 동화책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내용의 전개가 결코 가볍지 않은 시대적 삶의 문제와 교묘하게 접목되어 있기에 독자의 공감을 일으킨다. 이 책에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외에 네 편의 글이 실려 있으며 대부분 영화 또는 텔레비전 드라마로 소개된 작품들이다.
등기청 말단 직원으로 일하는 사내가 어느 날 자신에게 '벽을 열린 문처럼 통과'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음을 체험하게 되면서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이야기다. 나이 사십에 독신자 숙소에 살면서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그는 이십 년간 한 자리에서 일해 왔기에 나름대로 업무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 그런데 상사가 바뀌면서 그가 요구하는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여 미움을 받고 곤욕을 당한다. 그러자 그는 자신에게 있는 신비한 능력으로 상사를 골탕 먹이고 정신병원으로 실려 가게 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사내는 은행의 금고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세상을 농락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다가 결국엔 신비한 능력을 과용한 탓에 벽 속에 갇히고 말았다.
“뒤티유윌은 그 신비의 칸막이와 벽돌을 통과하면서 여느 때와는 다르게 허리와 어깨에 무엇이 스치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담 속으로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분명히 어떤 저항이 있음을 느꼈다. 마치 어떤 물질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유체 같던 그 물질은 반죽처럼 끈적거리기 시작하더니 그가 힘을 쓸 때마다 점점 더 딱딱해졌다. 마침내 온 몸이 두꺼운 담 벽 속에 들어갔을 때, 그는 자기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생존시간 카드>는 당국이 열심히 일하는 자들의 권익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일거리가 없어서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에게 일하는 정도에 따라 생존권을 박탈한다는 내용이다. 어떤 이는 한 달의 절반 또는 일주일만 살게 하고 나머지 시간은 휴면(죽음처럼 세상에서 아예 사라지도록)에 들어가게 하였다.
“자정 일 분 전에 로캉통은 아내의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일러둘 말을 하고 있었다.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그녀는 남편의 손이 자기 손에서 녹아 없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 곁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텅 빈 파자마와 긴 베게 위에 놓인 틀니뿐이었다.”<생존 시간 카드>
어쨌거나 대혼란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주어진 시간에 밀린 일들을 하기 위해 바빠졌다, 어떤 이들은 할당된 생존카드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을 만큼 빈곤한 삶 때문에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를 팔아서 가족을 부양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카드를 사고파는 암거래 시장이 크게 형성되자 당국은 제도의 실패를 인정하고 법령을 취소한다는 황당한 이야기다. <속담>은 사회적으로 약하고 힘이 없는 가장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곳은 가정뿐이었다. 그는 가정의 위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가족들을 윽박지르고, 시시콜콜 간섭하며 마음대로 통제하려고 들지만 결국 그 모습은 불쌍하고 가련한 것뿐이다. 오후 식탁에서 벌어지는 짧은 순간에 가족들의 표정과 태도 등을 통해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대목이 주목된다.
“그는 식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을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먼저 아내에게 눈길이 멎었다. 그녀의 초라한 모습과 그늘진 표정은 동료들 보기에 창피하다는 느낌을 주곤 한다. 다음으로 그는 쥘리 고모에게 눈길을 돌렸다. 나이가 많다는 것과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을 내세우며 집안에 눌러앉은 이 노인 때문에 칠년 동안 적지 않은 돈이 들었다. 노인이 죽고 나서 물려받을 재산보다 많은 돈이 들어갔을 게 틀림없다. 그 다음에는 두 딸아이다. 맏이는 열여덟 살이고 둘째는 열일곱 살이다. 둘 다 가게점원으로 한 달에 고작 500프랑을 버는 주제에 옷은 공주처럼 입으며 팔찌시계를 차고 금으로 된 핀 장식을 옷에 꽂는 등 분에 넘치는 치장을 한다. 어쩌면 그렇게 씀씀이가 헤플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속담>
마침내, 아버지의 감정은 공부도 못하는 데다 노는 데만 정신이 팔린 열네 살짜리 아들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한 주일이 지나도록 숙제를 하지 않은 아들을 닦달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벌어지는 미묘한 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네 국어 숙제가 뭐지?” “작문 이예요. ‘잰 놈 뜬 놈만 못하다’라는 속담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꾸물거리고 있니? 내가 보기엔 금방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뤼시앵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아이의 얼굴에는 망설이는 빛이 역력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공책 가져다가 내가 보는 앞에서 해라. 내가 숙제 끝내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 <속담>
결국, 아들은 아버지가 써준 답안을 베껴가지고 가서 제출했다. 그리고 선생님으로부터 여러 학생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글의 내용이 너답지 못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것이었고, 대부분 내용이 주제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어색하게 멋을 부렸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뤼시앵의 숙제에 대해서 한참 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잘못된 글쓰기의 본보기로 다른 아이들에게 제시했다. 선생님은 특히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대목을 몇 군대 골라 큰 소리로 읽었다. 아이들 사이에 비웃음이 번지고 키득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숫제 깔깔거리면서 야유를 보내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뤼시앵은 낯빛이 아주 창백해졌다. 자존심이 상한 것은 물론이고 효심에도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속담>
아들은 자기를 반 친구들의 놀림감으로 만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비록 열등생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웃음거리가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권위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녁 식탁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써 준 글이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궁금해서 물었지만, 아들은 차마 가족들 앞에서 아버지의 체면이 무너지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그렇고, 속담은 어떻게 됐니?” 그의 목소리에는 초조보다는 불안에 더 가까운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 순간 뤼시앵은 자기가 아버지에게 슬픔을 안겨줄 수도 있다고 느끼며, 대등한 인격체로 자유롭게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가엾은 아버지는 가장인 자기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랬는데 아들의 숙제를 도와주겠다고 나섬으로써 가장은 언제나 옳다는 원칙을 무너뜨릴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을 자초한 셈이었다. 이 전제적인 가장은 식구들 앞에서 체면을 잃게 될 것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심마저 잃게 될 판국이었다. 그건 아버지에게 추락이나 다름없는 상황일 거였다. <속담>
아들은 자신이 받은 3점, 꼴찌 점수를 그대로 말하지 않고 최고 점수, 13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아버지를 벼르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쥘리 할머니의 면전에서 뤼시앵의 말 한마디는 비극을 야기할 수도 있었다. 그 비극은 이미 엄청난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아버지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염려하는 뤼시앵의 마음에 너그러운 연민의 정이 가득 찼다. “너 마음을 딴 데에 팔고 있구나? 달나라에 가 있니? 내가 한 숙제를 선생님이 돌려주셨느냐고 묻고 있지 않니?” “아빠가 하신 숙제요? 예, 돌려주셨어요.” “그래 몇 점 받았니?” “13점이요.” “괜찮은데, 그럼 베뤼샤르는?” “13점이요.” “그럼 가장 높은 점수는?” “13점이요.”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쥘리 고모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마치 고소한 꼴을 못 봐서 실망했냐는 듯이 의기양양한 눈길을 보냈다. <속담>
아들과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나 잘 표현한 글이다. 때로는 불안하고 고소하다가 또 연민의 정이 가득 넘치게 하는 글 속에는 긴 여운이 담겨있다.
<칠 십 리 장화> ‘제르멘 뷔주’라는 가난한 여인과 그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로 저자는 그들을 “가난과 겸손을 운명의 자비로 알고 산다.”고 표현했다. 아들과 단둘이 서로 의지하는 모자간의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서 저자는 신기만 하면 단번에 칠 십 리를 갈 수 있다는 장화를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 시킨다.
장화 주인이 부르는 삼천 프랑이나 되는 터무니없는 가격에 부잣집 아이들마저도 포기한 그 장화를 엄마의 간절한 소망이 뜻밖에 행운을 불러왔고, 아이는 단돈 이십오 프랑으로 신비의 장화를 얻게 되었다. 아이는 그 장화를 신고 기쁨에 겨워 단숨에 지구의 반대편까지 날아갔다. 그곳에서 찬란한 아침 햇살 한 다발을 성모마리아의 실로 묶어 집으로 가져와 피곤하게 잠든 엄마의 침대 맡에 놓아두었다.
<천국에 간 집달리> 가난한 자들의 주거지를 박탈하는 집달리가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썩 좋은 느낌을 주는 직업은 아니었다. 그가 자기 일을 꼼꼼하고 성실하게 수행하면 할수록 더 인색하게 굴었다는 표현밖에는 돌아오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죽임을 당하여 천국에 올라가서 심판을 받게 되었는데, 천사들이 물이 가득 들어있는 커다란 통을 들고 왔다. 심판관 베드로가 냉랭하게 그를 맞으며 이 물통은 그동안 자네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흘린 눈물이라고 말하며 그를 지옥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은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죄 밖에는 없는데 억울하다며 하나님께 항소했다. 하나님은 그의 항소를 받아들이고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며 가서 선행을 쌓은 후에 오라는 판결을 내렸다.
세상으로 돌아온 그는 사람들에게 의무적으로 적선을 베풀고 그것을 공책에 기록해나갔다. 하지만 사람들은 갑자기 달라진 그의 모습을 쉽게 진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 년이 지난 후 어느 날 그는 집주인이 약한 세입자에게 윽박지르는 모습에 울분을 느끼고 그를 비난하다가 그의 총에 맞아 죽었다. 다시 천국의 심판대에 선 그는 그동안 했던 모든 선행 중 단 하나의 선행, 가난한 자를 변론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마르셀 에메는 병약한 몸으로 유럽 전쟁의 암울한 시기에 성장하고 글을 썼다. 세 살 때 어머니가 죽고 외가에 얹혀살며 의과대학에 등록하였으나 학업에 전념하지 못하고 이십 대 초반을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며 보냈다. 그 후 글쓰기에 전념하여 1929년에 발표된<허기진 자들의 식탁 > 것으로 르노도 상을 수상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의 글에는 삶의 애환과 그것을 뛰어넘는 통쾌한 반전이 있다. 독자들은 짧은 이야기들을 남의 이야기처럼 서로 주고받으며 즐거워하지만, 실상은 자신 속에 막혀있는 삶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맛본다. 우연한 기회에 ‘에메’의 글에 접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조금 황당하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의 글은 갈수록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할 수만 있다면 그가 썼다는 단편 78편과 콩트 18편 모두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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