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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닉네임 ‘지옥을 나서다’님이 인터넷에 게재한 중국 여자교도소 수감기를 옮긴 것입니다.
지금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아직도 얼떨떨하다. 나는 5년이란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다 막 출소했기 때문이다. 죄인이 되기 전엔 나도 나름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해외 유학까지 다녀와 2000년까지 한 증권사에서 일했었다. 나름 내세울만한 성과도 거뒀고 이른 나이에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순간의 실수로 인해 경제사범으로 수감되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지난 날의 잘못을 다시 후회하고자가 아니다. (잘못의 대가는 교도소에서의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충분히 치렀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교도소가 어떤 곳인지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 진상을 알리고 싶어서이다. 많은 사람들은 감옥 수감자들이 상당히 악질적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또한 tv나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감옥의 모습과도 다르다. 교도소에는 두 부류가 존재한다. 관리하는 자, 즉 교도관과 관리되는 자, 즉 수감자이다. 이 대립하는 두 군상 속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는 중국의 현재 수감제도 및 교도소 관리제도, 그리고 교도관들 본인의 자질이 과연 수감자들을 교화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교도소란 곳이 착한 사람은 나쁘게 만들고, 나쁜 사람은 더 나쁘게 만드는 곳이라는 점이다. 이 부분은 수감자뿐 아니라 교도관들도 인정한다.
여자 교도소의 일상 여자 교도소의 모든 수감자들은 일을 해야 한다. 신참들은 기존 수감자에게 주어진 할당량의 60% 선에서 시작한다. 내가 가장 처음 했던 일은 스웨터짜기였다. 고등교육까지 받은 나로서는 우스운 일이었지만 내부에서는 이처럼 단순한 일에도 상당히 엄격하다. 할당량은 밤을 새워서라도 반드시 채워야 한다. 신참은 이틀에 한 벌, 고참은 하루에 한 벌을 만들어내야 한다. 처음에는 고참들의 속도를 보고 세계 최고의 뜨개질 고수들이 여기 다 모여있다고 놀랐으나, 신참들도 3개월만 지나면 모두 똑같이 된다. 그 밖에 단추 달기, 수 놓기, 재봉틀 등 단순한 일들이 있다. 식사시간은 30분이며 젓가락 사용은 금지된다. 신문지라도 깔고 깔끔하게 먹는 이들도 있으나 대부분은 과중한 할당량과 짧은 시간으로 그런 것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다. 최대한 빨리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다시 일하기에 바쁘다. 교도소 내에선 공구 관리가 상당히 엄격하다. 공구가 바로 너의 생명이다, 사람이 있으면 공구도 있어야 하고, 사람이 없어도 공구는 있어야 한다고 가르칠 정도. 이토록 열을 올리는 까닭은 수감자 자살 방지 때문이다. 자살률이 높진 않지만, 성공률이 낮을 뿐 자살을 마음먹는 사람이나 자살 시도까지 드물진 않다. 내가 복역 중엔 딱 한 명이 자살에 성공했었는데, 그가 속해있던 대대의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이 모두 전출되었고, 그 대대 전체의 노동 생산량까지 절반으로 깎여 그 해 수감자들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수감자들은 노동 할당량을 초과달성하는 만큼 감형받을 수 있는데, 한 사람의 자살로 인해 모든 것이 날아간 셈이다.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수감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밤에는 공구를 남김없이 수거해간다. 뜨개질의 경우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아 밤새도록 바늘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들은 할당량이 밀려있지 않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감형받기 위해 어둠 속에서 한 시간이라도 더 스웨터를 짠다.
2년째부터는 재봉틀을 다루었다. 내가 만든 것 중엔 속옷, 침구, 구두에다 국내 유명브랜드의 제품까지 있다.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꼬박 일하고, 씻는데 2시간 가량이 소요된다. 마음대로 화장실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감자 전체가 집단으로 줄을 서서 이용하기 때문에 꼬박 2시간이나 걸린다. 이렇게 두 시가 넘어 돌아가고 나면 새벽 세 시에나 잠을 이룰 수 있다. 다음날은 아침 6시 기상이다. 교도소 내 교도관은 의외로 많지 않다. 소대장 1명이 30- 40명 수감자를 관리한다. 소대장은 자신을 도와 수감자를 관리할 관리급 수감자를 규율, 생산, 생활, 학습 등 분야별로 4명씩 둔다. 관리급은 대부분 경제사범에게 맡겨진다. 단, 노동 관리만은 경제범 대신 주로 절도범이 맡는다. 여자 교도소이지만 남자 교도관도 있다. 단지 수감구역에 들어오거나 여성 수감자와 사적으로 접촉할 수 없다. 전달 사항이 있는 경우엔 대화실에서 따로 이야기를 나눈다. 내가 있던 교도소는 대도시에 있어서 그런지 교도관이 수감자를 구타한 적은 없었으나, 시골에서는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수감자들은 일은 해도 보수는 못 받는다. 수감자들의 노동으로 만들어 낸 경제적 가치는 고스란히 교도소의 몫으로 돌아간다. 대신 교도관은 수감자의 평소 생활과 생산 실적 등을 점수화해 A부터 E까지 등급을 매긴다. 수감자들에게 이 등급은 생명과도 같기 때문에 다들 고통과 피로, 모욕도 참으며 점수따기에 목을 맨다. 이렇게 연말까지 120점을 채운 수감자만이 법원에 감형 신청을 할 수 있다. 다들 이 실낱 같은 희망만을 바라보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다 버리고 스스로를 일하는 기계로 만든다. 하루라도 더 일찍 신선한 공기와 따사로운 햇빛을 느끼고 싶어서. 수감자들 중 모두가 부러워하는 사람이 바로 단기 수감자이다. 이들은 기껏 3년 정도 머무르며, 구치소에서 보내는 시간도 길어야 1년이다. 단기 수감자들에겐 감형 제도도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눈에 불을 켜고 일할 필요도 없다. 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마는 식이라 다른 수감자들만 죽어난다. 교도소 규율도 무시하지만 교도관들은 본 척 만 척 한다. 어차피 곧 나갈 사람인데다 괜히 원한을 샀다가 나중에 보복을 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 실제로 ‘출소한 후 당신 가족을 가만 두지 않겠다’며 교도관을 협박한 복역자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이들은 교도소에서 요양을 하는 거나 다름없다. 사회란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차별과 고통이 있으면 그 곳이 바로 사회다. 교도소 내의 한 대대, 중대, 소대도 하나의 크고 작은 사회인 것이다. 단지 일반 사회보다 우아한 구석이 없을 뿐이다. 교도소 내에서 이성을 만나거나 성욕을 해결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다. 내가 있던 교도소는 가족과 하룻밤을 보내게 해주는 제도는 있지도 않았다. 대신 장기복역수 중 형기를 절반 이상 마치고 수감생활이 상당히 모범적인 감형자에 한해 가족 방문을 할 수 있었다. 이 제도도 몇 년 전에 새로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짧게는 3일, 길게는 5일까지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이 외에 외부인이나 이성을 만날 기회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교도소 내 동성애 문제는 의외로 드물다. 애초에 동성애자가 드물뿐더러 동성애 행각을 들키면 또 그에 대한 대가가 따르기 때문. 물론 레즈비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병이 생기면 진료는 무료로 받는다. 교도소에 의무실이 있어 일반적인 잔병은 이곳에서 진료받는다. 진료는 일주일에 한 번 가능하며, 의무범에게 신청하면 의무범이 다시 교도관에게 보고해 허락을 받는 식이다. 감기 같은 잔병은 대기 순번에서 밀려나 허가를 받는 데만 일주일이 걸린다. 대부분 수감자들은 웬만하면 진료를 받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하루종일 줄을 서 기다리고, 돌아올 때도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돌아오는 등 시간 낭비가 크기 때문이다. 치료도 약 처방이 전부다. 또한 교도관의 싸늘한 거절이 뻔해 아파도 참는 사람들이 많다. 수감자의 모든 행동은 반드시 교도관의 허락을 거쳐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보고를 한다. 심지어 화장실에 가거나, 앉거나 서는 일까지도 허락을 거친다. 복도를 걷다가 교도관을 마주치면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가 교도관이 지나간 후 다시 움직일 수 있다. 사람의 행동을 하나하나 구속하는 규정들이 상당히 많아 출소 후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교도소 측에서도 출소를 앞둔 수감자의 사회 적응을 위해 3개월 전부터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준다. 이 때부터는 교도관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할당량도 줄어든다. Tv를 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출소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오히려 불안해진다. 이토록 오랜 시간 비록 힘들고 고달팠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생활에 이미 마비되어버린 자신, 영원히 어제의 반복이었던 오늘, 생각할 시간도, 필요도 없었던 나날이 계속되다 갑자기 시간이 많아지면 혼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워진다.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가족과 친구들은 무슨 면목으로 대할까? 사회로 돌아가서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 출소를 앞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출소 당일, 이름이 호명되고 짐을 싼다. 교도소의 모든 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축하를 받으며 문을 나섰다. 출소 전 교도관이 나의 소지품을 하나하나 꼼꼼히 검사한다. 주로 다른 재소자의 연락처나 쪽지 등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짧은 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진다. 소지품 검사 후 옷을 모두 벗고 신체검사를 받는다. 교도소의 철문을 나서기 전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교도소를 출소할 땐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들 하지만 나는 그런 미신을 믿는 부류는 아니다. 첫 번째 철문을 나서기 전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5년이란 청춘의 세월을 보낸 곳, 나에게 죽고 싶을 정도의 치욕을 안겨주고, 또 나를 성장시킨 곳……. 이제 영원히 이별할 때다. 문을 나선 나는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 문 밖에 너무나 사랑하는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에.
에필로그 수많은 사람들에 섞여 거리를 걷고 있는 나의 모습엔 이제 교도소의 그림자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안에 감춰진 깊은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다. 어쩌면 시간이 흘러갈수록, 묻으려 애쓸수록 더 깊어질지도 모르는 상처가….. 바삐 걷고 있는 한낮의 군중들이 보인다. 천진난만한 아이들, 인자한 어르신들, 손을 잡고 사이좋게 걸어가는 커플들…….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내가 교도소에 있었을 때 가장 존경하였던 한 교도관의 말로 글을 맺으려 한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만을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