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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회 코헬렛 1장-12장
1. 코헬렛이란?
오늘날 코헬렛으로 불렸던 모두 12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작은 책은 본래 히브리 경전에 있어서는 코헬렛이란 명칭으로 전해졌다. 코헬렛이란 원래 ‘소집하다’, ‘모이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카할 동사의 여성 단수 분사로서 비록 그 뜻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집회’, ‘회중’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구약성서 안에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형성된 단어를 에즈라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에즈 2,55에 나타나는 하소페레트(서기관 직무)를 들 수 있다. 따라서 코헬렛이란 단어는 공동체 안의 특정한 직무, 또는 그 직무를 맡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라 하겠다.
전통적으로 볼 때 히브리 경전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이 책의 이름은 에클레시아스테스(‘회중’, ‘공동체의 구성원’)로, 라틴어로 번역한 예로니모 성인에 의해서는 콘치오나또르(‘연사’, Concionator)로 옮겨졌으며, 후에 루터는 ‘설교자’(Prediger)로 번역하였다. 여기서부터 ‘설교자’, ‘전도자’라는 의미가 부각되어 동양권에서도 한자로 ‘코헬렛’(傳道書)라 불리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저자인 코헬렛이 설교나 전도를 하는 대목은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본래 공동체 안의 특정한 직무를 가리켰던 코헬렛이 그 직무를 맡았던 스승에 대해 제자들이 부르던 호칭이 되었고, 마침내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한 현인의 이름이 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이 책의 명칭은 히브리 경전의 서명인 코헬렛을 한글로 번역하지 않고 음역하여 그대로 “코헬렛”이라 부르는 것이 옳으며,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성서학계에서도 폭넓게 인정되고 있다. 또한 책의 저자 역시 본문이 전하는 것처럼 “코헬렛”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이 책은 히브리 경전에서 성문서에 속해 있으며, 유대교의 ‘축제 두루마리 다섯 개’(룻기, 아가, 코헬렛, 애가, 에스테르기) 중 하나로 초막절 축제 때 낭독되었다. 가을 추수를 끝내고 벌이는 초막절 축제 때, 유대인들은 이 책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 풍요로운 수확에 감사하면서 하느님을 떠나서는 결코 풍요의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없으며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고가 헛되다는 것을 되새겼다.
2. 저자와 저술시대
전통적으로 이 책의 저자는 1,1의 내용인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의 말”에 따라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두 번째 임금이 되었던 ‘솔로몬’으로 여겨졌다.(1,12 참조) 그러나 책에서 사용되는 히브리어는 언어학적으로 볼 때 후대에 쓰여졌던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사상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지혜사상의 핵심 내용인 현세적 인과응보에 대한 비평적 관점이 강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배시대(기원전 587-538년) 보다 훨씬 후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하겠다. 반면 기원전 180년경 쓰여진 집회서의 저자는 이미 이 책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책의 저술시기는 솔로몬의 통치시대(기원전 975-933년)가 아니라 훨씬 후대인 기원전 3세기 경인 것으로 추정된다.
저자의 신원에 관해서는 책의 끝 부분에 첨가되어 있는 발문(12,9-14)이 비교적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본문에서는 저자가 1인칭의 화자(話者)로 나타나는 반면, 이 부분에서는 3인칭으로 불리어지고 있는데, 내용적으로 보면 제자(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는 스승에 대한 진술을 담고 있다. 특히 12,9은 “코헬렛은 현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백성에게 슬기를 가르쳤으며, 검토하고 연구하여 수많은 잠언들을 지어내었다. 코헬렛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말을 찾으려 노력하였고, 진리의 말을 올바르게 기록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는 기원전 3세기 경 예루살렘에서 활동했던 한 현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책의 최종 편집자는 왜 저자를 이스라엘 왕국의 임금인 솔로몬이라고 제시했을까? 이 점은 이스라엘 지혜문학의 문학적 서술방식에 의거해 이해될 수 있다. 즉 이스라엘 지혜사상의 대표적인 인물인 솔로몬의 권위를 내세워 이 책의 가르침을 전개시켜 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구약성경의 잠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실제에 있어 구약성경의 잠언은 기원전 10세기에서 4세기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 동안 여러 현자들에 의해 쓰여진 다양한 교훈과 가르침들이 수록된 하나의 선집(選集)이지만 그 서두에 “이스라엘 임금,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코헬렛”은 제자(들)에 의해 스승의 가르침들이 수집되고 최종 편집되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3. 중심 주제들
흔히 코헬렛을 생각하면 첫 부분인 “허무로다, 허무! - 코헬렛이 말한다 -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1,2)란 대목을 떠올린다. 왜냐하면 맺음말(12,8) 부분에서도 반복되는 세상과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저자의 토로가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새겨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코헬렛은 염세주의 내지 비관주의의 내용을 전해준다는 선입견을 갖게 한다.
그러나 최근의 코헬렛에 대한 활발한 연구 결과 이 책에 담겨있는 긍정적인 가르침, 즉 ‘인생의 참된 기쁨’이란 메시지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실상 여기에는 ‘허무’, ‘하느님’, ‘지혜’, ‘기쁨’과 같은 본질적인 주제들이 이스라엘의 전통 신앙과 전통적 지혜사상과는 달리 인생과 세상사를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숙고하는 저자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1) 인생의 허무함
코헬렛은 먼저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외치며, 인생의 무상함을 토로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의 인간 삶의 현실에 대한 냉철하고도 객관적인 성찰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 “나는 태양 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살펴보았는데 보라, 이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 잡는 일이다.”(1,14) 코헬렛은 자기 반성적인 부분(1,12-2,26)에서 술, 안락한 생활 환경, 많은 재물, 여러 즐거움의 수단들을 통해 쾌락을 체험해 보았지만 결국 그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모든 수고와 결실들 역시 그에게 지속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는 허무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허무함은 결국 의인이나 악인이나, 지혜로운 이나 우둔한 이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맞이해야 할 운명인 ‘죽음’으로 귀결되고 있다. : “모두가 한 곳으로 가는 것. 모두가 흙으로 이루어졌고 모두가 흙으로 되돌아간다.”(3,20; 참조 2,16; 9,1-6.; 12,1-7)
나아가 코헬렛은 그가 만나는 세상사의 불가해성을 직시하고 있다. 이 세상의 일들이 일정한 질서나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에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그러한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삶 역시 결국 허무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코헬렛이 토로하고 있는 인생의 허무성과 세상사의 불가해성은 근원적으로 그의 고유한 하느님 사상에 기인하고 있다.
2) 하느님관(觀)
코헬렛이 가졌던 하느님관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구체적인 구원 체험을 통하여 고백해왔던 전통적인 신앙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 하느님은 하늘 위에 존재하시는 분으로(5,1),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코헬렛은 하느님을 일반 호칭인 엘로힘에 정관사를 붙여 ‘신(神)’으로 표기한다. 이처럼 그는 하느님을 신앙적 관점이 아니라 인간적 이성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에게 있어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 삶의 모든 것을 주재하시지만 인간의 이해력으로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그런 분이시다.(3,1; 8,17)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께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가질 수 없게 되며, 이는 곧 인간 자신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신뢰의 상실을 초래하므로, 결국 모든 것이 ‘허무’로 귀결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코헬렛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 자체는 굳건히 견지하고 있다. 그의 믿음은 창조신앙으로부터 출발한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은(12,1)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셨고(3,11), 인간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신 분이시다.(5,17; 8,15; 9,9)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을 경외해야 하며(3,14; 5,6; 7,18) 그분께서 부여해주시는 행복을(8,15; 9,7; 11,9) 집착함 없이 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코헬렛이 가졌던 신앙의 핵심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겠다.
3) 지혜 사상
코헬렛은 이스라엘 지혜사상의 큰 흐름에 있어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사상가이다. 그는 앞서 욥기(기원전 6-4세기경)의 저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전통적인 지혜사상의 핵심 내용들, 예를 들어 ‘인과응보의 원칙’(4,1-3; 7,15- 8,5-11), ‘지혜를 소유함’ 등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면서 지혜의 가치를 비판적으로 재조명하여 그 한계성을 밝히고 지혜의 의미를 새롭게 정리하여 젊은이들에게 가르친 현자(賢者)였다.
코헬렛은 “지혜가 많으면 걱정도 많고, 지식을 늘리면 근심도 늘기 때문”(1,18)이라는 역설적 언급을 통해 지혜를 가진 자만이 성공적인 인생을 위한 기술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지혜사상의 가르침을 논박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습득한 지식이 인생의 성공이나 안전성을 확고하게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우매함보다는 지혜가 더 쓸모 있음(2,13)은 분명하지만, 많은 지혜를 습득했을 때 자신이 인생을 좌우할 수 있다는 인간 중심주의적인 사고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코헬렛은 참된 지혜란 언제나 자유롭게 행동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만 달려 있는 까닭에 현자는 자신의 지혜에 얽매여서는 안 되며 하느님께서 오늘 나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코헬렛이 제시하고 있는 가르침은 인간은 인간의 자리에 머물러야 하며,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최상의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코헬렛은 ‘하느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이란 이스라엘 지혜사상의 근본 원리에 대해 올바른 해석을 명확하게 한 현자라 하겠다. 나아가 그는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참으로 ‘좋은가’를 추구하고 있다.
4) 삶의 참된 기쁨
오늘날 많은 성서학자들은 코헬렛이 ‘마음의 순수한 기쁨’을 선포하며, ‘하느님 안에서의 기쁨을 노래한’ 현자였음을 새롭게 밝혀내었다. 인간이 누리는 ‘기쁨’은 다름 아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당신의 대답이며,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 코헬렛의 참된 메시지라는 것이다.
코헬렛이 찾은 일차적인 기쁨은 자신이 수행한 노고의 몫으로 주어지는 즐거움이었다.(2,10) 이것은 인간이 애써 수고한 보답으로 얻어진 내적 기쁨으로서 인간의 위업과 노고 자체와는 구분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쁨의 보다 근원적인 원천은 하느님께 있음을 코헬렛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인간에게 ‘지혜’와 ‘지식’과 ‘즐거움’을 내리시고 행복을 느끼게 하신다는 것이다.(2,24-26)
이러한 기쁨의 두 가지 차원, 즉 인간적 차원과 신학적 차원이 함께 언급되면서 이제 인간이 누리는 참된 기쁨은 바로 ‘하느님의 선물’임이 제시되고 있다. : “인간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 즐기며 행복을 마련하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음을 나는 알았다. 또 모든 인간이 자기의 온갖 노고 속에 먹고 마시며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 나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영원히 지속됨을 알았다.”(3,12-14) 이러한 코헬렛의 관점은 다시 한번 더 5,17-19에서 반복되며 강조되고 있다.(9,7-10 참조)
코헬렛이 제시하는 기쁨은 쾌락주의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인간이 그의 삶 안에서 누리는 참된 기쁨을 신학적으로 해석하여 ‘하느님의 선물’이라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가르침을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분명 하느님은 존재하고 계시며, 인간 삶 안에 활동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주고 있다. 또한 모든 것을 제 때에 이루시는 하느님 안에서 인생의 참된 기쁨을 누리라는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코헬 1,1-3 덧없음의 허무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의 말이다“(1). 코헬 1,1에서 저자는 자신을 다윗의 아들이며 예루살렘의 왕이라 밝히고 있으며, 1장 12절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이라 밝히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였던 솔로몬왕의 후손들은 유다만을 통치하였으므로, 이는 솔로몬왕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되었고, 따라서 유대교와 초기 그리스도교,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코헬렛의 저자를 솔로몬왕으로 여겼다. 그러나 현대 학계에서는, 새로운 저서에 유명한 현자의 이름을 붙여 저서에 무게를 싣는 당시의 풍습을 코헬렛의 저자가 사용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현대 학계의 시각으로는 코헬렛의 저자는 예루살렘 성전의 근처에 거주하던 지식인이며 저술 시기는 기원전 250년경이라 추정하고 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2). 직역하면 “허무들의 허무로다!”로서 ‘허무’의 최상급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다. “허무”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헤벨’ 즉 본디 ‘바람, 입김, 실바람’을 뜻하는데, 추상적으로 ‘허무, 허망, 무상, 덧없음, 헛됨’의 의미를 지닌다. ‘우상’을 가리키는 중요한 말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 이 낱말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73번 사용되는데 코헬렛에만 38번 나온다. 이 책의 중심 주제라 할 수 있는 이 말은 책의 시작 부분만이 아니라 “맺음말”의 첫머리에서도(12,8) 되풀이된다.
그는 헛되다는 말을 계속한다.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다. 다시말해 이 ‘헛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하벨’인데 원문에는 ‘불다’는 뜻이 있다. 아담이 카인을 낳고 흥분하여 ‘얻었다’는 뜻의 이름을 지었지만 그는 기대했던 뱀의 머리를 깰 자(창세 3:15)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후 얻은 둘째아들은 ‘헛되다’는 의미의 아벨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어떤 성경 해석자는 이 하벨 또는 아벨이라는 말을 어린 아이가 불어서 만드는 비눗방울 같은 공기방울로 비유했다. 이 세상의 모든 허영, 재물, 죄의 즐거움, 정욕, 쾌락 등은 다 비눗방울처럼, 무지개처럼 처음에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이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허무한 것이 돼 버린다는 뜻이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3)에서 “태양 아래에서”라는 말은 코헬렛 특유의 표현으로(29번)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마리, 페니키아, 그리스 등에서 발견된다. 이 표현으로 코헬렛은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은 이 세상, 또는 인생을 나타낸다. 자신의 인생이 덧없음을 체험한 인간은 변함없이 존재하는 세상일에 속수무책이다.
코헬 1,4-11 끝없이 반복되는 시작
처음에는 1,4-7에서 우주적인 틀 안에서 인간을 바라 본다. ‘한 세대가 가도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4). 인간의 세대는 계속 이어진다. 성경은 이 사실을 피할 수 없이 반복되고 모든 인류에게 해당함을 역설한다. 여기에서 개인이나 인격은 고려되지 않는다. 문제로 삼는 것은 인류이다. 세대는 지나간다. 영원히 굳건하고 흔들림 없이 시간과 공간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땅 뿐이다.
땅에 대해 말한 다음 코헬렛은 태양과 바람을 묘사하고 마지막으로 강을 묘사한다. 이렇게 저자가 그리스 우주론의 네 요소(흙, 불, 공기, 물)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흥미롭다. 태양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 밤 동안에는 서둘러 세상의 반대쪽 끝으로 가서, 거기에서 다시 떠오른다(5). 한편 바람은 남쪽에서 출발해야 북쪽으로 향하여 끝없이 돌고 돈다(6). 인간인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것과 똑같다.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결코 가득 차는 일이 없고, 강들은 계속해서 바다로 물을 가져간다(7). 여기에서 바다는 사해를 연상할 수 있다. 달리 흘러 나가는 곳이 없는 새해는 요르단 강이 많은 물을 계속 흘려보내지만 결코 차는 일이 없는 현상에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바다가 변하지 않으니, 그 끝없는 활동은 아무런 결싣이 없는 것이다.
코헬렛은 세상을 창조주에 대해 말하는 하느님의 작품으로 또는 사람에게 맡겨진 영역으로 보지 않는다. 세상은 오히려 인간의 모상이다. 태양처럼 인간은 숨차게 계속 달려간다. 바람처럼 인간은 무질서하게 돌아다닌다. 강처럼 사람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는 데 몰두하지만 이렇다 할 결과는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언제다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둘째 단계 1,8-11에서 코헬렛은 명시적으로 사람을 다룬다. 8절의 첫부분은 히브리어 단어 ‘드바림’의 뜻을 ‘말들’로 보는지 ‘만물들’로 보는지에 따라 두 가지로 번역된다. 문맥의 흐름에서 ‘말하다’ ‘보다’ ‘듣다’라는 오감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실상 태양과 바람과 강이 끝없이 도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고된 일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달리는데 지친다.
그러나 코헬렛이 세상에서 깨닫는 것은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8ㄴ). 눈은 결코 충분히 본 일이 없고 귀는 만족할 만큼 들은 일이 없다. 태양이나 바람과 마찬가지로, 눈도 찾아 돌아다니고 귀도 끊임없이 새로운 말을 찾아 다니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9-11절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차이를 없애 버리는 끊임없는 반복을 다시 명시적으로 말한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9). 끝없는 반복되는 순환이다.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10). 여기서 “새로운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컵을 깨뜨린 사람이 물을 마시면서 새것, 즉 다른 것을 가져와야 하고, 긴 글을 쓰는 사람은 계속 새 종이에 써야 한다. 여기에서 ‘새롭다’는 것은 같은 종류의 다른 한 개로서 같은 효과를 자져오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새롭다는 것은 진정한 새로움, 이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코헬렛은 ‘새롭다’라는 말은 이러한 진정한 새로움으로 이해된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고 말함으로써 코헬렛은 예언자들과 시편 저자들과 대립되는가? 예언자들은 주님께서 새로운 일을 하시리라 선포하였다(이사 43,19). “새 하늘과 새 땅”(이사 65,17), “새 계약”(예레 31,31), “새 마음, 새 영”(에제 11,9)을 예고했다. 시편 저자들은 주님께서 행하시는 구원행위를 기념하기 위해 “새 노래”를 불렀다(시편 33,3;40,4). 실상 코헬렛은 그와 다른 것을 말한다. 그의 관점은 다르다. 그는 주님과 당신 백성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 발전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행동에 머무른다. 지혜와 어리석음, 정직함과 불의, 사랑과 미움, 생명과 죽음 등은 그의 시대나 우리 시대에나 언제나 인간들 가운데 있다. 코헬렛은 계시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현인으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 가지 이의를 제기한다. 이것은 순전한 가설이지만, 그가 관찰한 사실이고 그는 그 해석을 비판한다.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새로운 것이라고, 전에 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모든 이가 흥분한다. 그러나 코헬렛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그것은 이미 전에 있었던 일이고, 우리 이전 세대에서 이미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이다(1,10ㄴ).
코헬렛은 인간 역사 안에서 새로움이란 찾아볼 수 없다는 자신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망각이 그것을 새롭게 보이게 할 뿐’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옛날 일을 기억하지 않듯 장차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그 일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한가지다”(11). 순환하고 반복하는 역사가 인간의 망각 때문에 새롭게 느껴질 뿐이라는 말이다. 망각의 삶을 사는 인간에게 옛 사람의 일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더 나은 모습이나 새로움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며, 어떤 노력도 옛 사람의 일보다 더 나을 수 없다는 것이다.
코헬 2,12-26 실망스러운 결과인 지혜와 어리석음
1장의 앞의 내용에 계속 연속되는 부분으로서, 헛됨의 사례들을 나열하고 있다. 코헬렛은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온갖 쾌락을 즐겨보았고 술로 흥을 돋워보기도 했으며 큰 사업을 일으켜 그 누구보다 더한 부귀를 누려보았다(1~11절). 하지만 그런 것들이 허무한 마음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또한,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지혜를 소유한 자신도 우매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허무했다(12~17절). 그래서 얻은 결론이 바로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분 안에서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만족이 있다는 사실이었다(24~25절).
“12 임금의 뒤를 잇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으리오? 선왕이 이미 이룩한 것밖에는! 지혜와 우둔과 우매를 돌이켜 보았을 때 13 나는 어둠보다는 빛이 더 쓸모 있듯 우매함보다는 지혜가 더 쓸모 있음을 보았다”(12-13).
코헬렛은 지혜와 어리석음을 대립시킨다. 지혜로운 행위와 어리석은 행위의 결과를 생각해 보면 지혜가 어리석음보다는 낫다(12-13절).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죽음이라는 공통된 운명에 처하게 되며 사람들에게 잊혀진다(14-16절). 이러한 괴로운 인식은 코헬렛을 절망의 낭떠러지로 몰아간다. 이에 코헬렛은 “그래서 나는 삶을 싫어하게 되었다. 태양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이 좋지 않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이기 때문이다.”(17절) 하고 외친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위협이 태양 아래 있는 모든 것을 싫게 만든다. 사람이 지혜를 다 써서 영원한 행복을 얻고자 했는데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신의 일과 노고의 결실, 자신의 재산을 모두 지혜로운 사람일지 어리석은 사람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자신이 많은 수고를 해서 획득한 것이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의 손에 그저 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남는 것은 절망뿐이다(18-20절). 이러한 사실에서 인간 실존의 허무와 의문점이 분명히 드러나며 앞에서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이 주어진다. “임금의 뒤를 잇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으리오? 선왕이 이미 이룩한 것밖에는!”(12절) 이 질문은 자기가 남겨 준 유산, 곧 이스라엘의 평화, 번영, 행복을 자신의 아들이 파멸시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솔로몬의 경우를 암시한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남는 것은 근심과 걱정뿐이다(21-23절).
이에 코헬렛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제시한다. 인간은 노고 속에서 매일의 삶에 기쁨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코헬렛이 거듭 주장하는 이 말은 단순히 향락을 일삼으라는 권고가 아니라, 자신의 노고 속에 인생을 즐기는 일 역시 인간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며, 이것 역시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만족할 줄 알라는 말이다(24-25절; 참조: 3,12-13).
“24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 이 또한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것임을 나는 보았다. 25 그분을 떠나서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으랴? 26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인간에게 지혜와 지식과 즐거움을 내리시고 죄인에게는 모으고 쌓는 일을 주시어 결국 당신 마음에 드는 이에게 넘기도록 하신다. 이 또한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이다”(24-26).
당신의 선물을 누구에게 주실지는 하느님의 계획에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유함 역시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질 수 있으니 이 또한 허무이고 바람 잡는 일이다.
코헬 3,1-8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1). 3장은 코헬렛에서 가장 시적인 표현을 담고 있다. 자연현상의 진행 과정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듯(1,3-11 참조), 인간의 생명도 시간이라는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이 체험하는 모든 것,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는 ‘제때’가 있다. 모든 행동에 때가 있고 모든 사건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상은 코헬렛 이전에 이미 알려져 있던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스라엘의 지혜의 스승들 역시 이집트의 현인들처럼 시간의 문제에 대하여 깊이 고찰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때’ ‘시간’의 의미는 그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 말로 ‘카이로스’, 꼭 인간이 행동해야 하는 ‘올바른 때’(제때)를 가리킨다. 모든 행동이 아무 때나 가치가 있고 아무 때나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선택한 순간(때)에 성공이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리하고 깊이 생각하여 행동하는 사람은 올바른 때를 찾을 줄 안다고 믿었던 현인들의 확신을 코헬렛에 의해 무너진다. 코헬렛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안다. 출생과 죽음도 제때가 있어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리고 사는 동안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도 아무런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 심고 뽑는 농부도 자신이 하는 일의 성공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없다(2절). 싸움과 평화가 숙명적으로 인간을 덮치지만 인간이 마음대로 싸움을 막거나 평화를 이룰 수도 없다. 더구나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 곧 사랑과 미움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다(8절)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2). 첫 부분을 “태어날 때”라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된다. 첫 번째 번역에서는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것이 되지만,태어나는 아기에게도 사실 마찬가지다. 그 아기가 스스로 결정한 것은 전혀 없다. 태어나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에게 부과된다. 스토아 학자들은 자살을 권고했지만,여기서 자살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지 않으며,코헬렛은 정해진 때가 되기 전에 죽는 것이야말로 악인의 운명임을 알고 있다. 모든 인간의 삶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위치한다. 이 두 끝은 누구에게나 규칙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얼마나 큰 대조인가!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2). 인간이 자신의 존재 안에서 체험하는 그것을,그는 또한 실천하기도 한다. 어떤 날은 심고,다른 날은 뿌리를 뽑는다. 특히 식물의 뿌리를 뽑는 것이 원수라면 이들은 서로 반대되는 행위이다. 흔히 두 가지 행위가 모두 필요하지만,각각 정확한 맥락에 있어야 한다.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심지는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악의로 하는 행위가 아니라면,뿌리를 뽑거나 나무를 베는 경우에도 일정한 규칙을 존중해야 한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3). 사람은 자신과 동류인 사람을 죽이며,반면 다른 이는 그를 고친다. 얼마나 비극적인 대조인가! 어떤 이에게는 생명을 잃게 하고,다른 이에게는 생명을 준다. 철저히 서로 다른 맥락에서,같은 사람이나 인간 집단이 두 가지 행위를 모두 할 수도 있다. 첫 번째 행위는 사악하다. 두 번째 행위는 위안을 가져다준다.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3). 이전에 건설된 것을 부수고 아마도 언젠가는 부수어질 것을 짓는다. 모순된 행위의 순환을 인간은 지금도 시작하며,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무너뜨린다. 이들은 같은 장소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두 가지 행위다. 여러 해의 간격을 두고서 말이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4). 삶은 슬픔과 기쁨으로 이루어져 있고,이들은 꼭 서로 뒤이어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서로 교체되며 나타난다. 길고 짧은 순간들,대개는 우리가 구하고 찾지 않은 순간들이다. 이들이 우리 삶을 엮어 가지만,우리가 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어렵다. 상황은 우리에게 때로는 수고를 때로는 즐거움을 갖게 하고,이들은 모두 때로는 조용하게 때로는 더 요란스럽게 지나간다.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5). 이 구절의 표현은 더 길게 전개되는데,이로써 처음 나오는 대립 쌍 일곱 개의 끝맺음을 표시하는 것일 수 있다. 여기에서 정확한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인가?
두 구절에서 모두 “돌”이 첨가된 것이라면 던지는 것과 모으는 것,흩는 것과 쌓는 것은 인간의 다양한 행위를,더 정확히 말하면 그 변화무쌍함을 잘 표현해 준다. 주어진 상황 때문에 오늘 나는 내던지게 된다. 내일 다시 상황 때문에 내가 그것을 모으게 될 지라도 말이다.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5). 연인들 사이의 입맞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남자들 사이에서도 애정과 화목의 표시로 이루어지는 포옹을 뜻한다(창세 48,10 참조). 어떤 상황에서는 껴안는 것이 필요하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삼가는 것이 예의다. 합쳐지고 멀어지는 것,우리 삶에서 흔히 있는 상황이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6). 이 두 행위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서는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무엇을 찾아 소유하는 일도 생기지만,소유하던 것을 잃거나 재산 전체를 잃어버리는 일도 생긴다. 첫 번째 행위는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지만 두 번째 행위는 우리의 부주의함이나 소홀함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다.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6). 이것은 물건 자체와 그 가치에 달려 있지만, 특히 어떤 것을 간직하도록 하거나 떨쳐버리도록 하는 구체적 상황에 달려 있다. 각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결정해야한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7). 이제는 옷에 대해 말한다. 옷은 낡는다. 버리기도 하지만 새것을 마련하고 바꿀 생각도 해야 한다. 고대에는 주로 여인들이 했던 활동이다. 여기에서 가정에서도 무너뜨리고 다시 짓는 피할 수 없는 순환을 보게 된다. 헌 옷은 낡아 가는데,그것이 한때는 새 옷이었다. 새로 꿰맨 옷도 다시 낡고 구멍이 나게 될 것이다. 피할 수가 없다.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7). 현인들은 적절한 때,즉 사람들이 귀 기울일 가능성이 있을 때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았다. 상황을 분석해야만 적절하게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침묵하는 편이 낫다. 그러나 침묵은 할 말이 전혀 없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자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8). 흔히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 상황에 따라 좌우된다. 그리고 상황은 변한다. 싫어하던 것을 사랑하게 되거나,전에는 꺼리던 사람을 사랑하게 되기도 한다. 반대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코헬렛은 ‘미워하다’라는 동사를 예컨대 자신의 일이나 삶 자제를 싫어한다는 표현에서처럼(2,17-19) 어떤 사물이나 활동에 대해서만 사용한다. 돈과 사치를 좋아한다는 것도 같은 차원에 속한다. 코헬렛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해 말하고 ‘미움-사랑’이라는 대립 쌍을 목적어 없이 사용했다. 결국 코헬렛은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것에 대해 한 번도 말하지 않는다. 이 대립 쌍을 바로 다음에 나오는 구절에 비추어 해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8). 사람들은 삶 전제를 때로는 전쟁 속에서 때로는 평화 속에서 보낸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상황 때문에 전쟁을 해야 할 때 가 있고,충돌보다 평화를 선택해야 할 때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전쟁과 평화라는 두 가지 사실은 인간 공동체의 삶 전체에 관련된다.
인간은 상황의 주인이 아니다. “때”라는 말을 상황의 맥락이 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면,인간의 행위는 한 끝에서 다른 한 끝까지 사빙으로 뒤흔들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코헬 3,9-14 코헬렛의 숙고
그렇다면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9) 이것이 코헬렛이 제기하는 이의이다.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10). 코헬렛은 3,2-8에 언급된 모든 행위를 살펴보았다. “때”의 문제,이 다양한 행위를 이루어지게 하는 상황 문제가 그를 괴롭힌다. 그가 볼 때 문제는 이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제 때에 좋고 적절하고 적합하게 모든 것을 만드셨다. 인간의 마음속에,즉 그들의 이해력과 식별력 안에 시간에 대한 감각을 즉 현재의 순간을 넘어 시작부터 종말까지의 시간을 포괄하는 감각을 심어 주셨다. 그렇지만 인간은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이 3,11을 풀어 쓴 내용이다.
코헬렛의 문제는 바로 “때”다. 하느님만이 상황을 지배하시고,그분의 행위는 완전하게 적절하다. 코헬렛은 이것을 확신한다. 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시간의 지속을 통찰할 수 있게 해 주셨음도 확신한다. 그 통찰이 인간에게,연속되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인데,인간은 그의 삶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행위 전체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더 평온한 마음으로,우리도 섭리가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출발점에서 그 섭리가 우리에게 어떤 길을 가게 할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어떤 상황에서 적절하게 수행한 그 행위가 실제로 어떤 유익을 줄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하느님의 행위가 지속되는 시간 전체에서 그 행위의 의미와 위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것을 아시지만 인간은 알지 못한다. 제 “때”에 이루어진 3,2-8의 상반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내가 그 유용성을 알 수 없고 내 삶 전체를 위하여 그것이 어떤 유익을 주는지 알 수 없다면,그 행위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이러한 어둠 속에서 코헬렛에게 확실한 것은 오직 두 가지다. 첫째는(3,12-13)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단순한 기쁨들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12 인간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 즐기며 행복을 마련하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음을 나는 알았다. 13 모든 인간이 자기의 온갖 노고로 먹고 마시며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12-13). 먹고 마시는 것,자신의 일을 즐기는 것, 우리 삶에서 적절하게 행동하도록 노력하는 것,이것이 우리에게 형이상학적인 번민을 극복하게 해 준다. 코헬렛의 두 번째 확신은(3,14)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예컨대 인간을 어떤 식으로 행동하게 하는 상황은 모두 하느님만이 지배하시는 전체 시간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의미에 어느 것도 더하거나 덜할 수 없다. 인간의 몫은 오직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뿐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경외하게 하신다! “나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영원히 지속됨을 알았다. 거기에 더 보탤 것도 없고 거기에서 더 뺄 것도 없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니 그분을 경외할 수밖에”(14). 여기에서 ‘하느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애정이 가득한 존경이나 공경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두려움을,하느님의 신비 암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생각해야 한다. 코헬렛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지평 안에 들어오신다는 것을,하느님의 행위가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행위가 제때에 적절하다는 것,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미약하게 생각할 수 있을 뿐인 시간을 지배하신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코헬렛이 믿는 하느님은 - 그렇다. 그는 그 하느님을 믿는다 - 인간에게는 신비로운 분이시다. 섭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 섭리를 신뢰하고 섭리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 일이라고 말할 때,우리는 코헬렛보다 앞으로 더 나아간다. 코헬렛은 그런 신뢰나 내맡김에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그에게 더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신비였다.
코헬 4,17-5,6 하느님 앞에 올바른 자세
코헬렛은 4장을 시작하면서 태양 아래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의 의문점, 인간의 무력함, 위협을 받는 인간의 실존을 보면서도 이 세상에서의 하느님 현존과 그분의 활동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시다. 인간이 체험하는 모든 좋은 것, 곧 부, 행복, 성공, 지혜 등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온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분을 공경해야 한다.
코헬렛은 4,17-5,6에서 종교 생활의 관습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한다. 제사(4,17), 기도(5,1-2), 서원(5,3-4) 거짓된 변명(5,5-6)에 대한 주제로 말을 한다.
1) 제물(4,17)
“하느님의 집으로 갈 때 네 발걸음을 조심하여라. 말씀을 들으러 다가가는 것이 어리석은 자들이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낫다. 그들은 악을 저지르면서도 알지 못한다”(17). 하느님의 집으로 갈 때 네 발결음을 조심하여라" 네가 성전으로 가고 있음을,하느님 앞으로 가고 있음을 분명하게 의식해야 한다. “말씀을 들으러 다가가는 것이 어리석은 자들이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낫다. 그들은 악을 저지르면서도 알지 못한다" 코헬렛에게 성소에 올라가는 사람의 기본 자세는 들음,복종, 순종이어야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희생 제물을 바치기 위하여 성소에 올라가는 어리석은 성급함보다 낫다. 겸손하게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 성전에 가는 것은 그 분의 집으로 가는 것이므로 - 그분의 은혜나 용서를 얻기 위하여,또 그분을 찬미하기 위하여 선물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주님께 순종하는 것은 제의(祭儀) 행위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제의 행위 만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그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이 본문을 잘 해석한다면,코헬렛에게 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실상 여기에서 현인은 사무엘이 했던 말을 풀이하고 있다.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습니다"(1사무 15,22).
2)기도(5,1-2)
“하느님 앞에서 말씀을 드리려 네 입으로 서두르지 말고 네 마음은 덤비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 위에 있으니 너의 말은 모름지 적어야 한다. 일이 많으면 꿈을 꾸게 되고 말이 많으면 어리석은 소리가 나온다"(1-2). 코헬렛은 이미 무엇보다 먼저 들을 것을 권고했다. 주님께 말씀을 드릴 때에 성급하게 하지 말고,기도나 찬미를 발설하기 전에 시간을 갖고 살피라는 것이다. 직접 주님께 말씀을 드리려 하기보다 주님께 귀를 기울여라.
“하느님께서는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 위에 있으니" 코헬렛이 제시하는 권고의 동기는,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헤아릴 수 없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은 초월적이시기에,인간이 지상에 있는 하느님의 집에 갔을 때라도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웃에게 말하듯이 하느님께 말씀드려서는 안 된다. 코헬렛은 다시 한 번 하느님의 가까이 계심을 말하지 않고,오히려 몇몇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존경과 신중함이 요구되는 하느님과의 거리를 말한다.
“너의 말은 모름지기 적어야 한다" 고대 이집트의 《아니의 지혜》는 기도하는 이에게 성전 안에서 소리치지 말고 자기 마음 안에서 은밀하게 기도할 것을 권고했다. 하느님은 그렇게 기도해도 잘 들으신다는 것이다. 벤 시라는 “기도할 때 말을 되풀이하지 마라"(집회 7,14)고 권고할 것이며,예수님께서는 더 명시적으로 말씀하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마태 6,7). 그 때에 예수님께서 당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주님의 기도는 분별 있고 핵심에 머무는 그리스도교 기도의 모범이다. 코헬렛은 격언을 인용하며 끝맺는다. “일이 많으면 꿈을 꾸게 되고 말이 많으면 어리석은 소리가 나온다" 자제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께 흥분한 사람의 꿈같은 헛소리를 하게 된다. 기도하기 전에 자신의 격정을 가라앉히고,하느님께 어떤 청원이나 찬미를 드려야 할지 식별해야 할 것이다.
3)서원(5,3-4)
“네가 하느님께 서원을 하면 지체하지 말고 그것을 채워라. 하느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들을 좋아하지 않으시니 네가 서원한 바를 채워라. 서원을 하고 채우지 않는 것보다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네가 하느님께 서원을 하면 지체하지 말고 그것을 채워라”(3-4).
코헬렛이 이렇게 권고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서원을 이행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데 있다.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말했다. “자기 짐승 가운데 수컷이 있어서,그것을 바치기로 맹세하고서는,주님께 흠 있는 것을 바치며 속이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말라 1,14). 또한 벤 시라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서원을 제때에 채우기를 망설이지 말고 죽기까지 그 이행을 미루지 마라. 서원을 하기 전에 자신을 준비시켜 주님을 떠보는 인간처럼 되지 마라“(집회 18,22-23).
코헬렛은 여기에 일반적 성격의 고찰을 덧붙인다. ‘서원을 하고 채우지 않는 것보다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5,4). 여기에서도 스승은 식별과 신중함을 우선한다. 신명 23,23도 같은 의미로 말한다. “아예 서원을 하지 않으면 죄가 될 일도 없다" 서원을 채우지 않으면 죄가 되기 때문이다.
4)거짓 변명(5.5-6)
“너의 입으로 네 몸을 죄짓게 하지 말고 하느님의 사자 앞에서 그것이 실수였다고 말하지 마라. 네 말 때문에 하느님께서 진노하시어 네 손이 이룬 바를 파멸시키셔야 되겠느냐? 정녕 꿈이 많은 곳에 허무가 있고 말도 많다. 그러니 너는 하느님을 경외하여라”(5-6). 실상,실수로 인한 죄는 어떤 사람이 의도 없이 깨닫지 못하고 어떤 종류의 것이든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범하는 것이다. 실수를 범한 사람은 양이나 염소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며 속죄 예식을 거행함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었다(레위 4,27-35; 민수 15,27-29 참조). 그런데 서원이 지켜지지 않았을 경우에,그 서원을 했던 사람은 실수였다고 선언함으로써 그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변명하기 위한 거짓말이다.
“네 말 때문에 하느님께서 진노하시어 네 손이 이룬 바를 파멸시키셔야 되겠느냐?" 하느님은 초월적이시면서도,보고 들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인간이 행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것을 보시고 그의 말을 들으시며,죄인을 누구라도 별하시고 서원을 채우지 않은 이와 변명을 위하여 거짓말을 하는 이를 치신다.
코헬렛은 여기서 다른 격언 하나를 덧붙인다. “정녕 꿈이 많은 곳에 허무가 있고 말도 많다" 이 격언은 5,2의 격언에 연결되지만 저자는 여기에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 잘 알 수 없다. 어떻든 코헬렛은 “그러니 너는 하느님을 경외하여라” 하고 끝맺는다. 하느님을 속여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그분께는 숨길 수 없으며,그분께서는 당신 계명을 존중하지 않고 당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벌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편이 낫다
코헬렛이 중시하고 가르치는 신앙은 온건하고 진정한 신앙이다. 신앙인에게는 본질을 찾고 충실할 것이 권고된다. 하느님께서는 계시를 통해서 당신 백성의 구성원 각자에게 해야 할 바를 알려 주셨다. 그러므로 각자는 듣고 순종할 것이다. 하느님은 모두가 찾아갈 수 있는 거처에 사시면서도 우리를 초월하신다. 또한 그분은 천상 거처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아신다.
따라서 헛된 꿈을 꾸거나 부질없는 일을 찾는 것,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하느님의 분노를 유발한다. 그래서 “하느님을 경외하여라.”(5,6) 하는 권고가 따르는 것이다. 코헬렛이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거듭 강조하는 데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코헬렛의 이해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시편과 지혜문학에서 구약 성경의 경건한 이들이 취해야 할 기본 자세인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신뢰심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코헬렛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넘을 수 없는 간격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경건한 행동으로도 이 간격을 건널 수 없다는 것이 코헬렛의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원과 기도, 제사를 자제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5장 7-8절은 가난한 사람이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불의를 언급한다. 여기서 코헬렛은 분명히 당대의 국가 구조, 곧 페르시아-그리스 사이의 잘 조직된 국가 구조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렇게 잘 조직되고 운영되는 국가에서도 인권이 철저히 보호될 수 없었으며 권력의 남용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힘없는 이들은 종종 권력을 쥔 부패 관리들의 희생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코헬 5,9-19 재물과 그 위험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큰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수확으로 만족하지 못하니 이 또한 허무이다. 재산이 많으면 그것을 먹어 치우는 자들도 많다.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것밖에 그 주인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9).
재산에 대한 끝없는 소유욕은 사회적 불공평의 원인이며 개인에게는 불행이다. 돈에 얽매인 사람은 결코 만족하는 일이 없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다른 사람들에게서 요구를 받게 된다. 반면에 적은 수입으로도 만족할 줄 아는 평범한 사람은 적어도 잠을 편하게 잘 수 있다. 그러나 부자는 재산에 대한 걱정 때문에 편할 날이 없다(9-11절). 코헬렛은 부자가 재산을 잃는 것을 심한 병에 걸리는 것과 같은 불행으로 본다. 경제 사정의 악화로 자신의 사업이 갑자기 기울어 자식에게 아무런 유산을 남겨 주지 못하고 자신은 거지처럼 빈털터리가 될 수 있다(12-13절). “어머니 배에서 나온 것처럼 그렇게 알몸으로 되돌아간다”(14). 14절은 인생의 종말을 암시한다. 사람이 죽을 때에는 결국 자신이 애써 얻은 것을 모두 남겨 두어야만 한다. 자신이 한 일은 모두 쓸데없이 되어 버리고 인생에 기쁨이라고는 전혀 없다(15-16절).
그러면 재산을 통해서는 행복을 전혀 얻을 수 없는 것인가? 재산에 대한 비관적인 고찰 뒤에 코헬렛은 그래도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어떤 긍정적인 것을 본다. 곧, 하느님께서 주신 짧은 기간 동안에 자그마한 행복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즐기라는 것이다(17-19절).
코헬 6,1-12 행복을 위협하는 죽음
“1 태양 아래에서 내가 본 불행이 있는데 그것이 인간을 무겁게 짓누른다. 2 하느님께서 부와 재물과 영화를 베푸시어 원하는 대로 아쉬움 없이 가진 사람이 있는데 하느님께서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니 다른 사람이 그것을 누리게 된다. 이는 허무요 고통스런 아픔이다”(1-2).
애써 일하여 획득한 재산, 보물, 명예 등 모든 것을 자신이 마음껏 누려 보지도 못하고 남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여기서 코헬렛은 하느님에게 받은 복을 병과 죽음 때문에 일게 되는 불행을 말한다(1-2절). 이 불행 앞에서는 이스라엘인들에게 큰 자랑거리인 수많은 후손도 위로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신세가 낙태된 아기의 신세보다 못하다. 낙태된 아기들은 아예 인간의 불행한 신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생이 길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결국 그 끝은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죽음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3-6절).
7절 이하에서 코헬렛은 이미 다른 곳에서 언급한 묵상을 되풀이한다. 곧, 사람의 욕망은 한이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지혜로운 이라 해도 어리석은 자보다 나은 점이 없다(2,13-16 침저). 존경과 명성을 좇아 봐야 결국 바람 잡듯, 헛된 일이다(7-9절). 인간의 운명은 하느님에 의해 정해져 있다. 사람은 무엇이 자신의 행복이며 죽은 다음에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10-12절).
코헬 7,10-14 불행도 하느님에게서 온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째서 옛날이 지금보다 좋았는가?”(10절)하고 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사람은 인간의 운명이 어느 시대에서나 다 같은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1,9) 지나간 좋은 세월은 단지 회상 속에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지나간 세월이라 해서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은 없다. 지혜로운 사람이 재산까지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안전하다(11-12절). 이렇게 코헬렛은 지혜와 재산을 같은 위치에 둠으로써 지혜를 재산보다 우위에 두었던 전통적인 지혜의 가르침과는 상반된 면을 보게 한다. 그러나 지혜도 재산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행복한 날들이나 불행한 날들이나 모두 하느님에 의해 정해졌다. 지혜는 사람이 이 둘을 모두 침착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것을 바꿀 수 없음을 알고 행복한 날도, 불행한 날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그분께서 구부리신 것을 누가 똑바로 할 수 있으랴?”(13절)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인간은 알지 못한다.”(14절) 이 사실은 인간에게 오히려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 때문에 인간은 한정된 행복이나마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그 행복을 주신 동안이라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코헬렛은 행복이 죽음 때문에 위협받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코헬렛은 이 사실을 단순한 허무로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간이 경외해야 하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잊지 않는다.
코헬 7,15-22 중용의 자세
“내 허무한 생애 중에 나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의롭지만 죽어 가는 의인이 있고 사악하지만 오래 사는 악인이 있다”(15).
착한 사람은 하느님에게 상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지상에서의 인과응보 또는 상선벌악에 관한 유배 이후의 가르침은 구체적인 생활 체험과는 반대된다. 나쁜 사람이 복되게 사는 반면에 착한 사람이 고통과 환난 속에 시달리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코헬렛 외에 욥기도 진지하게 하느님의 이러한 정의에 관해 물음을 던진다. 코헬렛은 전통적인 인과응보의 가르침이 맞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개인이 하는 행위에 따라 그에 부합하는 결과가 따르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오래 사는 것이 일반적으로 착한 사람에 대한 보상으로 여겨짐에도 착한 사람이 일찍 죽고 나쁜 사람이 오래 산다. 그래서 코헬렛은 “너무 의롭게 되지 말고 지나치게 지혜로이 행동하지 말라.”고 권고하는 동시에 “너무 악하게 되지 말고 바보가 되지 마라”고 충언한다. 너무 악하게 살면 ‘시간이 되기 전에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16-17절).
물론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동에 맞는 상이나 벌을 내리실 수 있다. 하지만 “죄를 짓지 않고 선만을 행하는 의로운 인간이란 이 세상에 없다”(20절). 그래서 코헬렛은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모두 하느님 앞에 스스로 자만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분노를 자초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은 기억하고 다른 사람이나 종들의 잘못은 못 들은 체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온갖 이야기에 네 마음을 두지 마라. 그러지 않으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게 되리라. 너도 다른 이들을 여러 번 저주했음을 너 자신이 알고 있다”(21-22).
코헬 8,10-17 채워지지 않는 정의
“10 나는 또 악인들이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성소에 들락거리다 떠나가고 성읍 사람들은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것을 잊어버린다. 이 또한 허무이다. 11 악한 행동에 대한 판결이 곧바로 집행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아들들의 마음은 악을 저지를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10-11).
코헬렛은 다시 전통적인 가르침에 반하여 착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나쁜 사람이 복되게 사는 문제에 직면하다. 여기에 전통적인 지혜의 가르침을 아무런 잡을 제시 하지 못한다. 나쁜 일을 해도 당장 벌 받지 않기 때문에 나쁜 사람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악을 행할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다(10-11절). 그들은 잘못되어야 마땅하지만 오래도록 잘살기만 한다. 코헬렛은 상과 벌은 행한 일에 따라 주어져야 한다고 확신한다(12-13절). “악인이 백 번 악을 저지르고서도 오래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그분 앞에서 경외심을 가지므로 잘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12). 그는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믿기 때문이다(3,17 참조). 그러나 이러한 믿음으로 실생활의 체험이 숨겨지지는 않는다(14절).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현재의 기쁨을 즐기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이다(15절). 인간은 지혜에 대한 탐구로 밤낮 수고해 봐야 같은 결과밖에 얻지 못한다. 곧, 인간은 이 세상에서 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혜롭다는 사람이 반대의 주장을 편다면 그것은 교만일 뿐이다(16-17절). “나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과 관련하여 태양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인간은 파악할 수 없음을 보았다. 인간은 찾으려 애를 쓰지만 파악하지 못한다. 지혜로운 이가 설사 안다고 주장하더라도 실제로는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17).
코헬 9,7-10 기쁘게 삶, 즐거운 부부, 근면
“7그러니 너는 기뻐하며 빵을 먹고 기분 좋게 술을 마셔라. 하느님께서는 이미 네가 하는 일을 좋아하신다. 8 네 옷은 항상 깨끗하고 네 머리에는 향유가 모자라지 않게 하여라”(7-8). 그리스도인들의 정상적인 생활은 슬프고 우울하거나 금욕주의적이지 않다. 코헬렛은 반복해서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인생의 축복이라고 말한다(코헬 2,24; 3,13; 5,18; 8,15). 사도 바오로는 1티모 4,3-4에서 “그들은 혼인을 금지하고, 또 믿어서 진리를 알게 된 이들이 감사히 받아 먹도록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어떤 음식들을 끊으라고 요구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다 좋은 것으로, 감사히 받기만 하면 거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콜로 2,20-23에서는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의식주의나 몸을 괴롭게 하는 금욕주의가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육신의 죄성을 따르는 것을 금하는 성화(聖化)의 방법도 아니라고 말하였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이 세상의 정령들에게서 벗어났으면서도, 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규정에 얽매여, “손대지 마라, 맛보지 마라, 만지지 마라.” 합니까? 그 모든 것은 쓰고 나면 없어져 버리는 것들에 대한 규정으로, 인간의 법규와 가르침에 따른 것들일 뿐입니다. 그런 것들은 자발적인 신심과 겸손과 육신의 고행을 내세워 지혜로운 것처럼 들리지만, 육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데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콜로 2,20-23).
하느님의 백성은 기쁨으로 음식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마시고 옷을 항상 깨끗하게 빨아 입고 머리에 향기름을 바를 수 있다. 구약의 하느님의 백성들은 추수 때에 기쁨의 잔치를 했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 안에서 기쁘고 즐겁게, 밝고 활달하게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그의 하는 일들을 기쁘게 받으셨기 때문이다. 특히 신약하느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하느님 자녀의 특권을 얻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바오로는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하였다(필리 4,4).
“태양 아래에서 너의 허무한 모든 날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네 허무한 인생의 모든 날에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인생을 즐겨라. 이것이 네 인생과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너의 노고에 대한 몫이다”(9).
허무하고 수고로운 세상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은 즐거이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에 더하여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사는 것이다. 물론, 부부가 인격적으로 서로 사랑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잠언 12,4는, “훌륭한 아내는 남편의 면류관이지만 수치스러운 여자는 남편 뼈의 염증과 같다”고 말했다. 부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잠언은 “네 샘터가 복을 받도록 하고 네 젊은 시절의 아내를 두고 즐거워하여라. 그 여자는 너의 사랑스러운 암사슴, 우아한 영양 너는 언제나 그의 가슴에서 흡족해하고 늘 그 사랑에 흠뻑 취하여라”고 교훈하였다(5,18-19).
“네가 힘껏 해야 할 바로서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나 하여라. 네가 가야 하는 저승에는 일도 계산도 지식도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10).
하느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에게 “땅을 다스려라”고 명령하셨고(창세 1,28)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들을 거기에 두시고 그것을 다스리며 가꾸고 경작하게 하셨다(창세 2,15). 일과 노동은 사람의 창조 때부터 사람에게 명하신 하느님의 뜻이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 계명을 주실 때에도 ‘엿새 동안 힘써 너희의 모든 일을 행하고 제7일에 쉬라’고 말씀하셨다(탈출 20,9-10). 그러므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힘써 일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며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이 일하지 않고 게으른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일이다. 잠언 6,6-11은 게으른 자가 개미에게 가서 지혜를 배울 것과 게으름이 가난의 원인임을 말하며 근면을 교훈한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요 건강하다는 표이며 내가 무엇인가에 쓸모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람이 죽어 무덤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지혜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지금 살아 있을 때 게으르지 말고 힘써 일해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교인들에게 각자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명했고, 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교훈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1테살 4,11).
하느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소망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을 슬프고 우울하게 살지 말고, 기쁘고 즐겁게, 밝고 활달하게 살아야 한다. 결혼한 자는 즐겁고 복된 부부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허무하고 수고로운 이 세상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좋은 축복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힘을 다해 일을 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우리의 할 일들에 부지런하고 충실하되, 특히 선한 일에 힘을 쓰도록 해야 한다.
코헬 10,4-20 일상생활의 지혜
“군주가 네게 화를 내어도 자리를 뜨지 마라. 침착함은 큰 잘못도 막을 수 있다”(4). 이 대목에 들어 있는 잠언들은 지혜의 가치와 함께 그 한계를 보여 주는 생활 규범들이다. 임금이나 윗사람이 화를 내면 아랫사람은 조용하고 침착하게 반응을 보여야 한다. 이 충고는 관리들을 위한 지혜이다(4절). 통치자가 실수를 하면 어리석은 자들을 높은 자리에 앉히는 폐단이 생긴다. 여기서 코헬렛은 당시 만연되어 있던 정실 정치를 염두에 두고 있다(5-7절).
일상생활에서 지혜가 무슨 이익이 있는가? 지혜가 사람을 불행에서 보호해 주는가? 코헬렛은 아주 일상적인 일 몇 가지를 예로 든다(8-11절). “구덩이를 파는 자는 자신도 거기에 빠질 수 있고 담을 허무는 자는 뱀에게 물릴 수 있다. 돌을 부수는 자는 그 돌에 다칠 수 있고 나무를 쪼개는 자는 그 나무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8-9). 이러한 일들은 모두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돌과 장착이 그것들을 다루는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 교육을 받고 일을 배운 사람은 아무래도 유리한 점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고를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인간은 날마다 불행을 당할 위험 속에 있다. 지혜도 근면도 인산을 이 위험에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지 못한다.
이렇게 지혜가 상대적으로 무력하다 해서 어리석음이 낫다는 말은 아니다. 지혜로운 이는 자신의 말로써 존경을 받지만 어리석은 자는 쓸데없이 지껄여 화를 자초한다. 앞날의 일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더더욱 어리석다. 왜냐하면 인간은 앞일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12-15절).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사지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신을 삼켜 버린다”(12).
이어서 나오는 잠엄들은 잘 알려진 내용들을 담고 있다(16-20절). 자기 신하들을 마음대로 다스릴 줄 모르는 무능한 바보를 임금으로 섬기는 백성은 불행하다. 반면에 나라를 속속들이 지혜롭게 다스리는 정치가의 백성은 행복하다. “16 어린아이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고관들이 아침부터 잔치를 벌이는 나라너는 불행하다. 17 귀족이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고관들이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힘을 얻기 위해서 제때에 음식을 먹는 나라 너는 행복하다”(16-17). 아침부터 잔치를 벌리는 임금의 식탁은 경박함과 사치의 표시이다. 17절에서 ‘귀족’이라는 말은 ‘자유인’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 자유인은 혈통이 아니라 임금으로서의 윤리적 자질을 말하는 것이다.
18-19절에서 게으름을 단죄하는 지혜의 가르침들은 그 내용이 일치한다. 게으른 자의 집이 망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탓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윗사람에 대한 비판을 조심스럽게 한다.
코헬 11,7-10 젊은 시절
“정녕 빛은 달콤한 것, 태양을 봄은 눈에 즐겁다. 그렇다, 사람이 많은 햇수를 살게 되어도 그 모든 세월 동안 즐겨야 한다. 그러나 어둠의 날이 많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앞으로 오는 모든 것은 허무일 뿐”(7-8). 이 절들은 12,7까지 이르는 단락 전체를 도입한다. 흔히 그렇듯이 코헬렛은 그가 관찰한 것에서 출발한다. 태양 가득한 날에 사랑스런 그 빛의 감미로움을 즐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특히 여름이 오래 지속되는 성경의 땅에서 말이다. 넘치는 태양빛에 찬란한 맑은 하늘. 단순하고 즉각적인 행복. 살아 있는 사람만이 빛을 본다. 저승은 그늘과 어둠뿐이기 때문이다. 아침이 밝고 해가 떠오를 때 인간은 일하러 나가, 하루가 저물고 별이 뜰 때까지 일을 계속한다(시편 104,22-23 참조).
그러나 코헬렛은 한 가지 권고를 덧붙인다. 삶이 오래 계속된다면 즐거워하고 삶의 모든 날에 행복을 누릴 것이다. 대낮의 빛 아래에서 일을 펼쳐갈 것이다. 그런데 – 이것이 두 번째 권고이다 – 행복한 과거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노년의 미래를, 겨울처럼 끝없는 어둠이 계속될 노년을 생생하게 기억하라는 것이다. 코헬렛은 젊은 시절과 장년기의 빛에 점점 더 어두워지는 인간 노년의 어두움을, 그의 노쇠를 대조시킨다. 그러고 나서 일반적 성격의 이 두 가지 권고, 곧 즐기라는 것과 기억하라는 것을 하나씩 차례로 되풀이하면서 단락 전체를 엮어 간다. “즐겨라…”(11,9), “그러나 기억하여라…”(12,1ㄱ).
그뿐 아니라, 저자가 인간의 미래라는 주제에 대해 말하는 이 도입 구절들을 끝맺는 허무라는 주제는(11,8ㄴ) 11,10ㄴ에서 다시 젊음에 적용될 것이고, 또다시 코헬렛의 말 전체의 결론 역학을 끝맺는 12,8에서 나타날 것이다. 인간의 삶은 전성기나 연로했을 때나 모두가 허무이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9). 이제는 직접 젊은이에게 첫 번째 권고를 말한다. ‘즐겨라.’ 코헬렛은 그에게 자신의 젊음을 즐기고 거기에서 행복을 찾으라고 초대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젊은이에게 자기 마음의 성향을 따르라고 격려한다. 이는 자신의 식별을 따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의 눈길을 끌고 매혹시키는 것을 따르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 표현을 젊은 시절에 잠에서 깨어나는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분명 그것은 배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젊은 시절이 그러한 기쁨을 많이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곧 그의 손을 벗어날 것이다.
조금 더 나가면(11,10ㄱ) 권고는 부정적 형태를 취한다. 즐겨야 한다면, 기뻐해야 한다면, 슬픔과 고통이 우리의 아름다운 영혼을 침입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자신의 살갗 안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젊음의 특징인 생명의 림프액을 누리며, 때가 되기도 전에 거기서 깨어나지 말아야 한다.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10).
그러나 긍정적 권고인 “즐겨라”와 부정적 권고인 “근심을 떨쳐 버리고…” 사이에, 9절 끝에 한 가지 경고가 붙어 있다.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어떤 이들은 이러한 대조에 당황했다. 그들은 이 구절의 끝 부분이 코헬렛의 사상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보아 이를 어떤 분별 있는 사람이 가한 수정의 흔적으로 여겼다. 그런 결론에 이르러야 할까? 종말론적인 마지막 심판을 생각하지 않고서도, 코헬렛이 하느님께서 인간의 행실을 판단하신다는 전통적인 가르침을 언급한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코헬렛에게 그 심판은 인간의 삶에서 내려지는 심판일 것이다. 우리의 행동이 우리를 따라다닌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이러한 생각과 멀지 않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의 중심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언급된 것은 둘째 부분에서 코헬렛이 노년에 대한 그의 묘사를 창조주에 대한 언급과(12,1ㄱ) 하느님에 대한 언급(12,7ㄱ) 사이에 자리하게 하는 데에서도 반향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구절들은 친저성을 부인하기 어려운 본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첫 번째 부분은 인간 삶의 한 단계인 젊음도 허무일 뿐이라는 선언으로 끝난다(11,10ㄴ).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젊음도 지나가는 것이다.
코헬 12,1-14 늙음과 죽음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이런 시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네가 말할 때가 오기 전에.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1-2).
코헬렛은 늙음과 죽음에 대한 장엄한 시로 자신의 글을 끝맺는다. 인간은 늙어서가 아니라, 젊을 때에 자신의 인생과 그 인생이 주는 기쁨이 모두 하느님 덕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1절). 2-5절은 “불행의 날들”에 부닥치게 될 끔찍한 일들을 묘사하고 있다. 비가 오고 구름이 몰려오는 날은 희망이 없는 노년기를 상징한다(2절). 이어지는 구절들은 노년기의 재앙을 파괴된 집에 비유하여 묘사한다. 수문장들은 힘이 없어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 역시 등이 굽게 된다. 바깥이 어둡기 때문에 여인들의 눈은 흐려져 있다. 문들은 닫히고 새들의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는다(3-4절). 고르지 않은 길을 걷는 것도 위험해진다. 자연현상에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법이지만 인간에게는 늙음 다음에 새로운 시작이 없다. 인간은 늙으면 영원한 집(무덤)으로 가야만 하며 곡을 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채울 것이다(5절).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6).
이 절은 숱하게 논의되는데, 여기서 제시한 해석은 이 절에 두 가지 표상이 들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은줄에 달려 금빛을 내는 등잔과, 우물 아래로 내려가 물을 가득 채워 올라오는 도르래와 물동이다. 이 두 표상은 빛과 물이 생명의 상징임을 상기시킨다. 등잔의 줄이 끊어지면, 물동이가 깨지면, 빛도 물도 없다. 끊어짐과 깨어짐은 인간의 죽음을 뜻한다. 이것은 마지막 구절에서 분명하게 언급된다.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12,7). 인간은 노년기의 점진적인 노쇠를 넘어, 죽음이라는 깨어짐으로 인하여 그의 지상 삶을 마감한다. 육신은 땅으로 가고 하느님은 인간에게 빌려 주셨던 숨을 거두어 가신다.
죽을 때에 인간의 숨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진술로 이 단락을 끝맺음으로써, 코헬렛은 모순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실상 3,19-21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인간의 아들들의 운명이나 짐승의 운명이나 매한가지다. 짐승이 죽는 것처럼 인간도 죽으며 모두 같은 목숨을 지녔다. 인간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 모든 것이 허무이기 때문이다. 모두 한곳으로 가는 것. 모두 흙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흙으로 되돌아간다. 인간의 아들들의 목숨이 위로 올라가는지 짐승의 목숨이 땅 아래로 내려가는지 누가 알리오?” 코헬렛은, 지상에서 불의가 판을 치고 있으니(3,16) 인간들은 서로 짐승과 같다고 말한 후에(3,18) 이 질문을 던졌다. 3,21에서 코헬렛의 질문은 냉소적인 역설이었다. 인간들이 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볼 때, 인간의 숨도 짐승의 숨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게 된다. 인간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은 악의뿐이다. 이것이 인간들의 관계에 대한 코헬렛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여기 12,7에서는 인간이 죽음으로 여정을 마치게 되는 노년을 생각하도록 젊은이들에게 권고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코헬렛의 관점은 인간학적이고, 성경 전통에 따라 인간이 죽을 때에 철저한 찢어짐의 체험을 한다고, 인간의 육신은 땅으로 돌아가고 그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에게서 받은(창세 2,7 참조) 숨은 자기 원천인 하느님께로 돌아간다고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코헬렛의 마지막 부분에서 희망의 빛이 비치기 시작한다고 믿는다. 죽음의 그림자가 인간의 마지막 운명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기대감이 싹트는 것이다. 코헬렛의 맺음말은 자신의 체험들을 종합함으로써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8).
코헬렛의 편집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수집하여 정리하고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들어 보자.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13-14).
결론
우리는 코헬렛에서 중요한 몇 단락만을 살펴보았지만, 이 책은 우리에게 생각할 점을 많이 던져 준다. 코헬렛은 인간의 수많은 주장과 착각을 깨끗이 몰아낸다! 그의 현실주의는 암울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코헬렛을 제쳐 두어야 할 것인가? 성경은 그 책이 잊히게 두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인생의 신비와 삶의 어려움을 기억하게 한다. 인간에 대한 수많은 이론 앞에서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지혜에도 한계가 있다. 특히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이해하려 할 때에는 그럴 수밖에 없다.
코헬렛은 성경의 지혜에서 필수적이었던 한 단계를 특징지었다. 욥기에서처럼 여기에서 지혜는 정화의 순간을 겪는다. 언젠가는 성경의 계시가 신앙인들에게 죽음이 인간 삶의 마지막 말은 아님을 발견하게 할 날이 올 것이다. 내세의 삶에 대한 믿음은 의인들에게, 코헬렛의 괴로운 현실주의을 배제하지 않고 그 모든 어둠을 받아들이면서도 코헬렛이 아직 지니지 않았던 그 희망에 대한 희망으로 그것을 초월하는 빛과 위로를 가져다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