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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 3-6장(열두 소예언서)
한강성당 2층 대성전에서 6월 25일 수요일 저녁 7시에 시작한 아모스의 이야기 그 두 번째 강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알려주신 아모스는 남유다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스라엘에 가서 일을 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북한으로 가서 예언자 일을 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사제나 예언자들은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또는 고대 사회에서 교육받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왕궁에서 왕족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모스는 양 떼를 치는 사람으로 예언자로 훈련받은 이가 아니었어요. 상류층도 왕족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제나 예언자의 혈통도 아니었습니다.
양치기라고 소개하는 아모스에 쓰인 히브리 말 텍스트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쓰여있어요.
따라서 아모스는 단지 양을 치는 소작농이 아니라, 자신의 양 떼를 갖고 있는 조금은 부유한 농부가 아니었을까? 하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아모스서에 나오는 여러 가지 예언들이 굉장히 문학적으로 세련되어 있습니다.(운율들도 잘 맞추어져 표현되어 있습니다)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모스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신약에서도 우리에게는 네 복음서가 있습니다.
평이하면서도 초등학교 수준의 화법을 구사하는 복음서는 마르코입니다.
반면에 루카는 "어? 이 사람만 대학졸업한 것 같아!"라는 고급스러운 문장이 나옵니다.
옛날에 주석학자들은 "음,.... 마르코는 조금 교육을 받지 못했고, 루카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의 학자들은 "아니야! 아니야!! 루카는 자신의 독자들을 향해서 썼고, 마르코는 그 복음서를 선포할 독자층들이 고급스러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아니라서 그들에게 맞추어 써서 그런 거야."
신부님이 초등학생 미사에서 어른들 미사와 비슷한 내용으로 강론을 하실 수 없듯이..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마르코가 쓰다 보니 우리에게 고급스러운 그리스어가 아닌 언어가 나왔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모스의 문체로 가면,
굉장히 문학적으로 짜임새 있고 교육을 받은 이의 문장이라 느낄 수 있습니다.
아모스의 시대는?
북이스라엘은 예로보암 2세의 시대이고 남유다는 우찌야의 시대였습니다. 당시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 굉장히 풍요롭고 안정된 나라가 강했던 시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에 그들을 압박하던 강대국들이 자신의 문제들이 힘겨워 주변국을 괴롭힐 수 없었습니다.
눌려서 살았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기가 살아난 시기였어요.
예로보암 2세의 북이스라엘과 우찌야 시기의 남유다 모두 영토도 늘어나고 사람들의 삶도 풍요로워집니다.
그런데? 문제죠......
나라가 잘살게 되었는데 백성들은 힘들어요. 대한민국은 잘 살게 됐는데... 한반도에 사람이 살게 된 이래로 요즘이 가장 풍요롭다고 해요.
하지만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아요.
행복지수와 제일 관련 있는 지수가 무엇일까요? 사회학자들은 평등지수라고 해요.
사회적으로 평등하지 않은 거겠죠.
수치로 표현할 수 없겠지만 우리나라 역시 잘 사는 분들은 더 잘살고 어려우신 분들은 그 가난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상황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신부님이 더욱 염려되는 것은, 누군가의 운명이 어떤 부모를 만나는 것으로 너무 쉽게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옛날에는 조금 어려운 부모님 밑에서 살았더라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다 보면 볕뜰날이 있단다~~ 하는 노래도 있었고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었는데,
요즘은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한 그 사람 인생의 전체적인 무언가가 정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신다고 하셨어요.
작년에 서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80%가 '나는 내 실력으로 서울대학교에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부모의 뒷받침으로 누군가의 도움으로 왔지. 실제로 중학교, 고등학교 때 나보다 더 똑똑한 애들 많았다.'하고 생각한대요.
어떻게 보면 서울대학생들은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인데, 마음속으로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들이 행복할까요? 그리고 그 콤플렉스를 올바로 극복하지 못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안에서 일정한 역할이 주어졌을 때 자신의 역할을 잘할 수 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은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고...
비단 한 대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적인 문제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도 당시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더 심했던 것 같아요.
잘 사는 이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부와 권력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착취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 착취의 내용은 아모스 1-2장에서 우리가 보았습니다.
가난했던 사람들은 결국 자신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땅에 머무르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노예로 팔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토라에도 내가 알고 있는 먼 친척이라도 노예 상황이 되면 친척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노예 상태에서 구원해 주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구원하다"라는 말이 쓰이는 가장 원초적인 경우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나의 피붙이 중에서 누군가가 노예로 팔려가면은 그 사람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힘든 사람들은 너무나 힘들어지고 잘 사는 사람들은 너무 잘 사는 세상.
대한민국의 일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는 넘고 4만 달러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라고 할 때 4인 가족의 경우에 12만 달러로 요즘의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했을 때 1억 6천~7천 정도가 될 거예요.
당시 신부님 본당 사목을 하실 때 교우분들 중에서 일 년에 그 정도에 수입이 되시는 가정이 거의 없으셨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국민 소득은 3만 달러가 넘어가는데..... 한강 성당은 조금 다르실 수 있겠죠.
우리가 숫자상으로 풍요로워졌다고 하는데 통계가 주는 환상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중산층 이하의 분들은 IMF때 보다 더 힘드신 것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들이 어떻게 하면 삶의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 아모스가 갖고 있는 그 문제를 우리 한국 천주교, 그리스도인들도 또한 당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제의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렇게 풍요로웠는데 하느님에게는 충실했느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세운 북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성소, 아모스 시대가 예로보암 2세라고 했을 때.
솔로몬이 죽고 나서 북이스라엘을 독립하여 시작한 사람은 예로보암 1세였습니다. 그 예로보암 1세는 독립시키자마자 단과 베텔에 성소를 만들고, "우리가 믿는 상을 가져다 두자." 하면서 그 성소에 금송아지 상을 가져다 두었다는 것을 열왕기에서 읽게 됩니다.
그 성소 안에서 가나안 종교, 이방 종교가 혼합된 제의적인 혼합주의가 일어나면서 야훼에 대한 순수함을 잃어갔습니다.
그때 북이스라엘의 모습이 아모스가 살았던 시대적인 배경입니다.
아모스 1-2장에서 아모스는 주변의 민족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면서 "어... 그들은 이러 식으로 하느님을 화나게 했어. 그들은 벌을 받을 거야." 하고 말했습니다.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민족들 나쁜 민족들이니까 하느님이 그들을 벌주나 보네." 하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보니 똑같은 잣대로 아니 더 심한 잣대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이야기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모스 예언자가 갖고 있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가끔씩,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희들은 하느님과 너희가 계약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너희에게 특별히 잘해 줄 거라 생각하는데 아니야! 하느님에게는 보편적인 원칙이 있고 하느님을 알고 있었던 너희가 그것을 어겼다는 것은 더 나쁜 것이야. 다른 민족들은 잘못은 했지만 모르고 그랬어. 그들이 이 정도의 벌을 받는다면, 너희는 알고도 그렇게 했으니 더 큰 벌을 받아야 해. 더 무서운 심판이 너희에게 내릴 거야."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세례 받지 않는 게 좋았을까?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아!!.'
초대 교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세례를 안 받은 사람들의 기록이 나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이지만 초대 교회에서는 세례 받으면서 모든 죄가 사해지니 그 세례를 죽기 직전에 받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세례 받고 모든 죄가 사해지고 그리고 바로 하늘나라로 가겠다는 생각???? 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하느님을 알아가는 과정 안에서 그 아모스가 이야기하는 딜레마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세상에서 하늘나라에 가기에 가장 불리한 조건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네... 신부님들은 정말......
옛날 옛날에 한 분이 돌아가셨대요.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본당 신부님을 만나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자신도 반가워하셨지만 그 본당 신부님을 너무너무 반가워하시니 서운한 마음이 들었어요.
"하느님, 지상에서도 신부님들만 좋아하시더니 하늘나라에서도 그러시는 거예요?"
하느님이 대답하셨어요. "아니야. 요즘에 신부들이 거의 여기에 못 와. 그래서 반가워서 그런 거야."
신부님은 걱정이 태산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희에게 웃음과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용기를 주시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체험한 만큼 우리에게 부탁하신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아라!
아모스의 문제도 그와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아모스 1-2장이 마무리되고....
아모스 3장을 시작합니다.
아모스 3장, 4장, 5장, 6장은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해 이야기합니다. 3~6장은 오직 하느님, 예언자, 이스라엘 이 세 관계 안에서 우리가 전체적인 내용을 보게 됩니다. 모든 문학작품에서 문단 나누기를 하듯이 아모 3~6장을
3,4장과 5,6장으로 나눕니다.
3,1 "이스라엘 자손들아, 주님이 너희
를 두고, 이집트 땅에서 내가 데리고
올라온 씨족 전체를 두고 한 이 말을
들어라.
[신부님의 번역]
3,1 이스라엘 자손들아, 나 야훼가 너희를
두고, 이집트 땅에서 내가 데리고
올라온 씨족 전체를 두고 한 이 말을
들어라.
3,2 나는 이 땅의 모든 씨족 가운데에서
너희만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지은 너희를
나는 벌하리라."
여기에서 강조하신 동사가 등장합니다 "알았다" 하느님은 나를 알고 나는 하느님을 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알았다"는 말은 "믿는다"와 동의어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믿음의 단계는?
1 단계 : 보다와 듣다
2 단계 : 알다와 믿다
1 단계는 보고 듣지만 2 단계를 알아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답답함을 느끼면서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습니다.
"너희는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한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안다고 하면 나도 너희를 안다고 할 것이고, 너희가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너희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같은 믿음의 차원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이 알고 있다! 그러면 그것은 하느님이 믿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믿으셨을까요? 이스라엘이 토라에 충실할 것을!! 믿고 기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모든 죄를 지은 너희를 나는 벌하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라는 표현이 3장과 4장에 집중적으로 등장합니다.
3,2 나는 이 땅의 모든 씨족 가운데에서
너희만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지은 너희를
나는 벌하리라."
반면에 5-6장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5-6장에서는 이스라엘 집안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내용은 비슷합니다.
5,1 "이스라엘 집안아, 이 말을 들어
라,
내가 너희를 두고 부르는 이 애가를.
애가(哀歌) : 슬퍼서 부르는 노래
5,2 처녀 이스라엘이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구나.
제 땅에 내던져졌어도
일으켜 줄 사람 하나 없구나.
처녀 : 어린 소녀로 이해
신부님이 한 달 전쯤에 혼배로 한강 성당 근처에 오셨다가 길에서 쓰러진 분을 보셨는데, 많은 분들이 함께 모여서 도와주시는 모습을 보고 '살만한 세상이다.' 하고 느끼셨다고 합니다.
3-4장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한 내용
5-6장에서는 이스라엘 집안을 향한 내용
3-4장은 야훼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두려운 경고, 심판의 말씀
5-6장은 이스라엘 집안을 향해서 누가 말하는가? 가 애매합니다. 5,1절을 읽으면서 소수의 학자들은 이곳에서 애가를 부르는 주체를 하느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예언자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아모스를 공부하시는 신학자들은
3-4장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해서 하시는 경고와 심판의 말씀
5-6장은 예언자가 이스라엘 집안을 향해 부르는 애가로 분류합니다.
3-4장은 야훼와 예언자, 고발, 재앙, 영광송으로 이름을 붙이셨는데요. 텍스트를 살펴봅니다.
3장에서는 의문표가 계속해서 보이고 나열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말에서 수사적 의문문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무언가 화자가 강한 의도를 담았다는 뜻입니다.
3,3 두 사람이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같이 갈 수 있겠느냐?
두 사람(두 존재) : 하느님과 예언자는 서로 소통하였고 그들은 함께 간다.
3,4 먹이가 없는데도
사자가 숲 속에서 으르렁 거리겠느냐?
잡은 것이 없는데도
힘센 사자가 굴속에서 소리를 지르겠
느냐?
3,5 미끼가 없는데도
새가 땅에 있는 그물을 내려앉겠느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는데
땅에서 그물이 튀어 오르겠느냐?
그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의미로 예언자가 이렇게 예언을 하는 데에는 원인이 있다. "내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아무런 추동력 없이 이런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하느님이라는 원인이 있다."
3,6 성읍 안에서 뿔 나팔이 울리면
사람들이 떨지 않느냐?
성읍에 재앙이 일어나면
주님께서 내리신 것이 아니냐?
3,7 정녕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시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하느님께서 무슨 일인가를 하실 때에는 그전에 항상 예언자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예고하신다.
3,8 사자가 포효하는데
누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
예언자는 자신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우리식의 표현으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야기하시는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내가 어떻게 그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구약의 언어로 표현하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내가 어떻게 그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아모스는 이 부분에서 어떻게 하다가 양 떼를 돌보는 자신이 고향인 유다를 떠나 이스라엘에 와서 이렇게 예언을 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에 관해서 예언하는 것을 북이스라엘의 사제들과 상류층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은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아모스! 너희 집에 가서 사람들 점이나 봐줘!!"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아모스가 예언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3,9 '너희는 사마리아의 산들 위에 모여
그 안에서 일어나는 큰 혼란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폭행을 보아라.'
사회적인 불의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힘 있는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에게, 많이 배운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진 사람들이 못 가진 이들에게 행하는 모습으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입니다.
반면에 14절에서는
3,14 내가 이스라엘의 죄를
벌하는 날
베텔의 제단들도 벌하리니
제단의 뿔들이 꺾여
땅에 떨어지리라.
북이스라엘은 두 개의 성소가 있었습니다. 단은 우리나라 한반도 지도로 생각한다면 압록강과 두만강 근처, 베텔은 개성정도의 위치일 것입니다. 따라서 단보다는 베텔이 중심이 됩니다.
3,9절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예언적 비판이라면 3,14절은 제의적인 관점에서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장으로 넘어가면서 베텔에 관한 비판이 이어집니다.
4,4 "너희는 베텔로 오너라. 그리고 죄를
지어라.
길갈로 오너라. 그리고 더욱더 죄를 지어
라.
아침에 너희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셋째 날에 너희의 십일조를 바쳐라.
4,5 누른 든 빵을 감사 예물로 살라 바치
고
큰 소리로 자원 예물을 살라 바치고
큰 소리로 자원 예물을 공포하여라.
조금은 심한 표현으로 : "너희 그 따위로 해봐라!"의 어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런 것들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
니냐?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지도를 살펴봅니다.
금송아지인데 왜 까맣게 되었는지 모르시겠다고 하셨어요. 단과 베텔 그리고 길갈이 보입니다.
모세가 죽고 나서 여호수아가 예리코, 길갈을 지나서 전체적으로 땅을 정복하는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넘어오는 첫 번째 경로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굉장히 많은 도시들이 집중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 제단이 있던 곳은 베텔, 단, 길갈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심판이 나옵니다.
5,6 "나도 너희의 모든 성읍에 끼닛거리
를 없애고
너희의 모든 동네에 먹을거리가 모자
라게 하였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
았다. 주님의 말씀이다.
[신부님의 번역]
나도 너희의 모든 성읍에서 끼닛거리
를 없애고
너희의 모든 먹을 거리가 모자라게
하겠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걸
미래의 이야기인데 왜 하였다?로 하셨을까요? 동사가 과거형처럼 쓰였지만 미래 시제인 경우가 있다.
심리적으로 그 상황에 대해 확신했을 때 : 브라질 축구 대표팀 VS 한강 축구팀이 나란히 경기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서.... 누군가가 이야기합니다. "졌다."
졌다는 완료형으로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쓸 수 있는데 심리적으로 질 것을 확신해서 "질 것이다." 하지 않고 "졌다."하고 표현하였습니다.
완료형이 쓰였을 때도 내가 심리적으로 확신할 때는 미래형으로 쓸 수 있다.
4,6 나는 또 수확을 석 달 남겨 놓은 채
너희에게 비를 내리지 않겠다.
어떤 성읍에는 비를 내려 주고
어떤 성읍에는 비를 내려 주지 않겠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걸
주님의 말씀이다.
4,7 나는 마름병과 깜부깃병으로 너희를
치고
너희 정원과 포도밭을 황폐하게 하겠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걸
주님의 말씀이다.
4,10 나는 너희에게 이집트의 흑사병을 보내
고
말들은 잡혀가게 하겠다.
그런데도 너희는 돌아오지 않을 걸
주님의 말씀이다.
4,11 나 하느님이 너희를 뒤엎어 버리니
너희가 불 속에서 끄집어낸 나무토막처럼
될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걸
주님의 말씀이다.
쭈욱 읽고 나서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집트에서 재앙이 열 가지 있었는데 파라오가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성경에서는 목이 뻣뻣한 파라오, 그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굽히지 않는 파라오의 모습으로 이 내용과 비슷합니다.
4,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하리니
이스라엘아, 너의 하느님을 맞이할 준
비를 하여라.
이제부터 이 재앙이 시작된다는 통보입니다.
그리고 뒤따르는 영광송입니다.
이렇게 무서운 말씀이 나오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나서 항상 영광송으로 마무리합니다.
신부님도 강의를 마무리하시고 하느님께 영광을 받으시라는 의미의 영광송으로 마치십니다.
영광송
4,13 보라, 산을 빚으시고 바람을 창조하신
분
당신의 뜻을 사람에게 알려 주시는 분
아침 노을을 어둠으로 만드시는 분
땅의 높은 곳을 밟고 가시는 분
그 이름 주 만군의 하느님이시다.
당신의 뜻을 사람에게 알려 주시는 분 : 아모스 예언서에서 조금은 특이한 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 꼭 예언자를 통해서 미리 말씀하신다는 앞선 내용의 말씀이 삽입된 부분
땅의 높은 곳 : 아모스 예언서가 북이스라엘을 향해서 쓰여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즉시, 북이스라엘의 높은 곳에 지어진 도시인 사마리아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 이름 주 만군의 하느님이시다 : [야훼 / 쩌바옽의 엘로힘 / 그의 이름]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동사는 없고 명사만 쓰여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야훼, 야훼는 누구인가? 쩌바옽의 엘로힘이다. 만군의 엘로힘이 그의 이름이다.(3-4장이 마무리됩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애가
5,1 "이스라엘 집안아, 이 말을 들어
라,
내가 너희를 두고 부르는 이 애가를.
5,2 처녀 이스라엘이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구나.
제 땅에 내던져졌어도
일으켜 줄 사람 하나 없구나.
5,3 ㅡ 정녕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
신다.ㅡ
이스라엘 집안에서
천 명이 출정하던 성읍은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출정하던 성읍은
열 명만 남으리라."
왜 일으켜 줄 사람이 없는지가 5,3에서 설명되어집니다. 이스라엘 집안에서 천 명이 출정하던~
그리고 어떤 신적 요청이 뒤따르는데, 그 부분을 기억하실 필요가 있어서 네모 칸으로!!
신적 요청의 필요성
5,4 정녕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집안에 이 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살리라. 5,5 너희는 베텔을 찾지 말고 길갈로 가지 마라. 브에르 세바로 건너가지도 마라. 길갈은 반드시 포로로 잡혀가고 베텔은 폐허가 되리라. 5,6 너희는 주님을 찾아라. 그러면 살리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불처럼 들이쳐 요셉 집안을 삼켜 버리리니 베텔에는 그 불을 끌 자 없으리라. |
위의 지도를 보고 베텔과 길갈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브에르 세바
유다 지파들에게 성전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베텔, 길갈, 브에르 세바가 중요한 성소였습니다.
베텔에서 브에르 세바로 가는 일종의 순례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대교구에서 있는 서울 순례길~
예루살렘의 성전이 지어지기 이전에 고대의 순례길이었던 것 같아요.
흥미로운 것은 단, 베텔, 브에르 세바가 어떤 축이 됩니다. 구약의 역사서를 보게 되면 이스라엘의 영토전체를 말하면서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라는 말을 우리식으로 하면 "백두에서 한라까지..."
이런 표현이 좀 자주 등장합니다.
판관 20,1
그리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두 나섰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길앗 땅에서도 온 공동체가 일제히 미츠파로 주님 앞에 모여들었다.
1사무 3,20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주님이 믿음직한 예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사무 3,10
아브네르가 부하 스무 명과 함께 헤브론으로 다윗을 찾아가자, 다윗은 아브네르와 그 부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아브네르]
2사무 17,11
그러므로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 백성을 바다의 모래처럼 많이 불러 모으신 다음, 임금님께서 친히 전투에 나가십시오. [후사이]
2사무 24,2
그리하여 임금은 자기가 데리고 있는 군대의 장수 요압에게 말하였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시오. 내가 백성의 수를 알고자 하오."
2사무 24,15
그리하여 주님께서 그날 아침부터 정해진 날까지 이스라엘에 흑사병을 내리시니,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 백성 가운데에서 칠만 명이 죽었다.
1열왕 5,5
솔로몬이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유다와 이스라엘에서는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마음 놓고 살았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좀전에 우리가 본 것은 신명기계 역사서입니다.
오경의 마지막 책은 신명기인데, 그 이후에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 상권, 사무엘 하권, 열왕기 상권, 열왕기 하권을 신명기와 동일한 신학과 동일한 문체를 사용하였다고 해서 신명기계 역사서라고 합니다.(그 안에서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라는 표현이 등장)
반면에 신명기계 역사서와 다른 역사서가 있습니다. 역대기 상권, 역대기 하권
역대기 상·하권에서는 브에르세바에서 단에 이르기까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1역대 21,2
그리하여 다윗은 요압과 군대의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자, 브에르 세바에서 단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여, 그들의 수를 알 수 있도록 나에게 보고하시오."
2역대 30,5
임금은 브에르 세바에서 단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에,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기리는 파스타 축제를 예루살렘으로 와서 지낼 것을 선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에는 율법에 쓰인 대로 파스카 축제를 지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반면에 역대기계 역사서에는 브에르 세바에서 단까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이 문제로 신부님이 칠 년 동안 고민을 하셨는데 아직까지는 모르시겠다고.... 따라서 이것은 분명히 의도적인 것이고 왜 방향을 바꿨을까? 하고 아직 진행형으로~~
아모스서에서도 단과 브에르 세바를 묶어 놓은 말씀이 등장합니다. 지금은 3~6장을 다루고 있으므로 다음 시간에 배우게 될 아모 8,14
사마리아의 죄악을 두고 맹세하는 자들,
"단아, 살아 계신 너의 신을 두고 맹세한다."
"브에르 세바로 가는 길을 두고 맹세한다." 하는 자들은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따라서 아모스서는 예루살렘 이전에 있었던 옛 성소들이 혼합주의적인 종교형태로 행해지는 것을 보고 분노한 것. 단이건 베텔이건 브에르 세바이던.
앞선 내용에서는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살리라."라는 말씀이 나왔는데 이 부분을 지리적으로 이해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도 아니고 베텔도 아니고 브에르 세바도 아니면 어디가 남죠? 예루살렘으로 오라는 말인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뜻이 아니라는 것이 첫 번째 요청과 두 번째 요청에서 발견됩니다.
두번 째 요청
5,14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는 나를 찾으시라는 말씀에서 단이나 베텔, 브에르 세바가 아닌 예루살렘으로 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러한 잡신들이나 섬기는 성소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제물이나 바치면서 내적의 위안을 받으려 할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너희가 선을 찾는 것이다!! 너희들이 옳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고 말씀하시며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정을 세워라.
어쩌면 주 만군의 하느님이
요셉의 남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도
모른다.
(이 부분에서 성문이 중요합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비판하는 것은 장소적으로 보면?
1 왕궁 : 정치적인 부분에서 중요한 위치
2 성소 : 제단이 있는 곳으로 베텔, 단으로 제의적인 부분에서 중요한 위치
3 성문 : 성문은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주인들이 일꾼들을 찾기도 하고, 정보교환도 일어나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이스라엘 남자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성문에 갑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을 보듯이, 그곳에서 어제의 일과 오늘의 중요한 정보를 얻고 옵니다.
재판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고발할 일이 생기면 경찰서에 가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문으로 갑니다. 따라서 성문에 판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최종적인 판결권은 임금에게 있습니다.
성문으로 간다는 말은, 곧 재판하러 간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성문에서 공정을 세워라 = 올바로 재판을 하여라(옳고 그름을 가려주어라)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너희의 죄를 경감해 주실 수도 있고,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고발에 대한 부분이 나옵니다.
6,12
아! 너희 공정을 쓴흰쑥으로 만들고 정의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는 자들아!
쓴흰쑥 : 쑥인데 식용으로 먹을 수 없고 쓰고 하얀? 쑥뜸에 주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사람들만 먹는 음식 중에서 깻잎과 고사리가 있다고 합니다. 특히나 쑥 같은 종류는 쓴맛이 강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레미야, 바룩, 애가 이 세 책은 하나로 묶을 수 있는데 이 세 책에서 쓴흰쑥에 대해서 나옵니다. 주로 쓴흰쑥을 먹인다는 것은 벌을 준다는 의미
예레 9,14
이제 내가 이 백성에게 쓴흰쑥을 먹이고 독이 든 물을 마시게 하겠다.
예레 23,15
이제 내가 그들에게 쓴흰쑥을 먹이고 독이 든 물을 마시게 하리라.
애가 3,15
그분께서 나를 쓴나물로 배불리시고 쓴흰쑥 물을 마시게 하셨네.
애가 3,19-20
내 고통과 내 불안을 생각함은 쓴흰쑥과 독초와 같은데도
내 영혼은 생각을 거듭하며 안에서 녹아 내리네.
인간의 가장 고통스럽고 비탄에 젖은 마음을 표현할 때 은유로 등장하는 쓴흰쑥입니다.
영광송
5,8 묘성과 오리온 자리를 만드신 분
암흑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밤처럼 어둡게 하시는 분
바닷물을 불러올리시어
땅 위에 쏟으시는 분
그 이름 주님이시다.
5,9 그분께서는 강한 자 위로 파멸이 번뜩
이게 하시고
그 파멸이 요새를 덮치게 하신다.
묘성 : 하늘에 별자리 중에서 황소자리 별자리 근처에 별들이 뭉쳐져 있는데, 주로 겨울에 밤 9-12시 무렵에 동남쪽 하늘에서 볼 수 있습니다.(이촌동에서는 보기가 어렵다고 하셨어요)
일곱 개가 잘 보이다고 해서 우리나라는 묘성, 미국에서는 seven sisters라고 합니다.
욥기에서도 묘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보는 하늘 천체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의미
욥 9,9 큰곰자리와 오리온자리, 묘성과 남녘의 별자리들을 만드신 분.
경고
아모 5,10
그들은 성문에서 올바로 시비를 가
리는 이를 미워하고
바른말 하는 이를 역겨워한다.
따라서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공정한 재판에 대한 사람들의 갈증은 전 세계적으로 동일한 것 같아요.
미국에서도 가장 AI가 필요한 직업이 무엇이냐고 설문조사를 했는데 1위가 판사였어요. 우리나라도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많이 떨어져서 사법제도가 자본주의와 결합되다 보니, 얼마나 비싼 변호사, 로펌을 쓰느냐에 따라 재판의 결과가 바뀌는 것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오해도 마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5,11
너희가 힘없는 이를 짓밟고
도조를 거두어 가니
너희가 다듬은 돌로 집을 지어도
그 안에서 살지 못하고
포도밭을 탐스럽게 가꾸어도
거기에서 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5,12
정녕 나는 너희의 죄가 얼마나 많고
너희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
너희는 의인을 괴롭히고 뇌물을 받으며
빈곤한 이들을 성문에서 밀쳐 내었다.
5,13
그러므로 신중한 이는 이러한 때에 입
을 다문다.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침묵한다는 현상을 예언자는 고발하고 있습니다.
5,16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 만군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
신다.
"광장마다 곡소리가 터져 나오고
거리마다 '아이고, 아이고!' 하리라.
사람들은 농부들을 불러 통곡하게 하고
곡꾼들을 불러 곡하게 하리라
5,17
포도밭마다 곡소리가 터져 나오리니
내가 너희 가운데를 지나갈 것이기 때문
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5장을 시작하면서, 이스라엘 집안을 향한 애가로 표현하였습니다.
그 애가를 표현하는 것이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가 크게 날 것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잠깐!
히브리어를 배웁니다.
'아이고 아이고' : 히브리어로 '호호'
우리가 장례식장에 가게 돼서 '호호'한다면???? 우리에게는 웃음소리인데 히브리어에서는 곡소리입니다.
5~6장이 예언자가 이스라엘 집안을 향해 부르는 애가인데, 그 5~6장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을 때 첫 번째 부분입니다.
: 이스라엘 집안의 애가로 시작해서 '호호'로 끝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둘째 부분과 셋째 부분은 첫 번째 부분의 밑받침처럼 두 개가 평행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그 둘째 부분의 시작은?
주님의 날
5,18 불행하여라,
주님의 날을 갈망하는 자들!
주님의 날이 너희에게 무슨 득이 되느
냐?
그날은 어둠일 뿐 결코 빛이 아니다.
아이고, 아이고가 '호호' 였어요.
불행하여라가 히브리어로 호이예요. 누구를 저주하는 말입니다.
신부님이 로마에서 성서 연구소에서 학생신부로 계실 때, 대부분이 사제와 수도자들이셨는데 서로 연구하다가 기분이 언짢으실 때도 있으셨는데 그때에 학생신부님들이나 수녀님들이 "호이"라고 이야기하셨다고 합니다. '불행하여라.' 상대방에게.....ㅎㅎㅎ
그렇게 하면서 웃으셨다고 합니다.
히브리어에서 '호호'가 '호이'로 연결되는~
그렇다면 세 번째 부분의 시작도? 불행하여라 ; 호이!로 시작합니다.
5,18절은 주님의 날이 어둠일 뿐 빛이 아니다고 이야기합니다.
5,19 사자를 피해 도망치다가
곰을 만나고
집 안으로 피해 들어가
손으로 벽을 짚었다가
뱀에게 물리는 것과 같으리라.
5,20 주님의 날은 어둠일 뿐 빛이 아니지
않으냐?
불빛이라고는 전혀 없이 캄캄할 뿐이다.
너희는 주님의 날이 환하게 빛이 켜지고 하느님이 너희에게 좋은 것을 주실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다!!
주님의 날은 공정의 날입니다. 그 공정의 날에 너희들은 심판만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주님의 날에 대한 이스라엘의 기대를 뒤엎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5,21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5,23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하여도
받지 않고
살진 짐승들을 바치는 너희의 그 친교
제물도 거들떠보지 않으리라.
5,24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의 수금 소리도 나는 듣지 못하겠다.
;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제사를 역겨워하십니다. 왜냐면, 그들의 삶은 하느님 백성 같지 않은 삶을 살면서 그 제물들이 하느님께 기쁨이 되겠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대부분의 신앙생활의 모습도 그와 같지 않은지 반성해 봅니다.
그러면서 아모스서에서 가장 중요한 5,24절을 우리가 만나게 됩니다.
5,24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 물처럼 흐른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강물처럼 흐르게 한다는 것은, 그것이 정말로 풍요로운 것입니다. 세상의 공정함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면 몇 년 전에 대한민국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하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지는 않았겠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정의롭지 않은 것 같다, 뭐가 문제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모스서는 사회 정의뿐만 아니라 교회가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 구절이 인용되지 않는 경우는 보신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5,25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광야에서
지낸 사십 년 동안
나에게 희생 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친
적이 있느냐?
; 조금은 냉소적이고 수사적인 질문입니다
5,26 너희는 스스로 만든
너희 임금 사쿳 상과
너희 별 신 케완 상을 짊어지고 가리라.
사쿳 ; 히브리어 본문이서는 '시쿳'
케완 ;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키윤'
어느 지명 같기도 하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잡신들의 이름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케완과 사쿳과 같은 일반적인 모음을 쓰지 지 않고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키윤과 시쿳이라고 하였는가? 그와 같은 모음이 하느님께서 역겹게 여기시는 히브리어의 모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유희적인 표현으로 자음을 두고 모음으로만 표현하는 방식으로 (ㅜㅜ,ㅠㅠ....)
5,27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다마스쿠스 너머로 유배를 보내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 이름 만군의 하느님이시다.
그 이름 만군의 하느님이시다 : [ 야훼 / 쩌바옽의 엘로힘 / 그의 이름]으로 하느님에 대한 찬미를 덧붙이면서 둘째 부분이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5~6장의 셋째 부분
6,1 불행하여라(호이),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으뜸가는 나라의 귀족들!
그들에게 이스라엘 집안이 의지하러 가
는구나.
5장의 불행하여라는 제의적인 문제를 다루었다면, 6장의 불행하여라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6,2 너희는 칼네로 건너가서 살펴보아라.
거기에서 큰 하맛으로 갔다가
필리스티아인들의 성읍 갓으로 내려가
보아라.
너희가 그 왕국들보다 더 나으냐?
너희의 영토가 그들의 영토보다 더 넓으냐?
칼네 : 메소포타미아 지역(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에 있는 지명)
하맛 : 다마스쿠스보다 조금 더 북쪽에 위치한 도시
갓 : 필리스티아에 있는 도시
칼네, 하맛, 갓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세 도시가 한때 매우 번성했던 도시였다가 나중에 망해버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6,3 너희가 재앙의 날은 밀어내려 하면서
도 폭정은 끌어당기는구나.
6,4~ 6,6은 이스라엘 상류층의 사치스러운 모습들과 함께 백성을 착취하는 내용이 열거됩니다.
6,7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
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
나고 말리라.
비스듬히 : 누워있는 모습에서 로마시대에 영화를 보면 식탁에 먹지않고 비스듬히 누워서 음식을 먹다가 계속해서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서 토하고 다시 먹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대인의 식사 방식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에도 다빈치의 그림에서처럼 의자에 앉아계신 것이 아니라 바닥에 비스듬히 누워서 제자들과 함께 비스듬히 누워서 마지막 만찬을 하셨을 겁니다. 아마도^^ (하늘나라에 가서 여쭈어 보니 예수님이 "그냥 의자에 앉아서 먹었어."하고 말씀하실 수도 있어요.)
6,8 주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걸고 맹세
하셨다.
주 만군의 하느님의 말씀이다.
"나는 야곱의 자만을 역겨워하고
그 성채를 싫어한다.
나는 성읍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넘겨
버리리라."
6,9 한 집에 열 사람밖에 남지 않는다 하여도 그들마저 죽을 것이다.
6,10 죽은 이를 불사르려고 온 친척이 그 집에서 시체를 꺼내 가면서, 그 집 가장 안쪽에 있는 사람에게 "또 있느냐?"하고 물으면, 그는 "없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그 친척이 "쉿! 주님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 집 안쪽에 있는 사람에게 "또" 하고 물으면 아무도 없다 하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자면,
그는 "아무도" 하고 대답할 것이다. 아무도 없다하고 말하기 전에 누군가가 끊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쉿! 주님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 하고 말할 것이다라고 나오는데, 히브리말로 야훼라는 이름과 "아무도 없다"할 때 '없다'라는 단어가 비슷하게 발음됩니다.
탈출 3,14 나는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있다, 없다'라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표현과 음운적으로 비슷해요.
그는 아무도 없다고 대답하려 하는데~ 쉿! 주님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돼! 비슷한 이름을 불러서는 안 돼!! 그만큼 하느님의 심판이 두려운 것입니다.
6,11 보라, 주님께서 명령하신다.
그분께서 큰 집을 박살 내시고
작은 집을 조각내시리라.
6,12 말이 바위 위를 달릴 수 있느냐?
소를 부려 바다를 갈 수 있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공정을 독으로,
정의의 열매를 쓴흰쑥으로 만들어
버렸다.
; 냉소적인 수사적인 표현, 그리고 독과 쑥이 묶여서 나옵니다.
6,13 너희는 로 드바르에서 기뻐하며, "우
리가 우리 힘만으로 카르나임을 차지하지
않았으냐?" 하는구나.
로 드바르 ; 지명이기도 한데 의미적으로는 "nothing"으로 지명처럼 이야기하였지만 아모스는 "너희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기뻐하며 우리가 우리 힘만으로 카르나임을 차지하지 않았느냐? 하고 말하는데 '카르나임"도 지명입니다. 그 뜻은 "한 쌍의 뿔"입니다. 그 한 쌍의 뿔은 단과 베텔의 금송아지가 지닌 두 뿔일 수 있습니다.
즉 "너희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기뻐하며 우리가 뿔 달린 그 우상을 차지하지 않았느냐?"하고 자랑스로워한다고 말합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허상과 허영을 냉소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6,14 이스라엘 집안아
주 만군의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지금 너희를 거슬러 한 민족을
일으킨다
그들은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마른내까지
너희를 억누르리라.
하맛 ; 다마스쿠스보다 더 북쪽에 위치
아라바 마른내 ; 남유다 보다 훨씬 더 남쪽에 있는 계곡
하맛과 아라바 마른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을 이야기할 때는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인데 그것보다 훨씬 넓은 영역을 표현하기 위해서 쓰였습니다.
앞서 이야기해 주신 아모스서 1~2장에 내용보다 더 심도있고 강하게 표현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모스 3-6장에선 이스라엘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에 빠져서 하느님을 멀리하게 되는 병든 사회의 모습을 보면서 예언자는 다시 한번 야훼에게 돌아오라고 하느님께 원하시는 공정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간곡하게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아모스서를 읽으면서 많은 성찰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지난 시간 1~2장에 이어 오늘은 3~6장을 다음 시간에는 7~9장을 강의해 주시기로 하셨어요.
영광송으로 마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감사합니다 🙏💓
첫댓글 아멘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