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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희 목사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은 바로 고난 주간입니다.
사순절 중에서도 특별히 거룩한 주간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성주간(Holy Week)이라고도 합니다. 기독교사의 유명한 아타나시우스 감독은 이 기간을 ‘거룩한 유월절 주간’(Holy Paschal Week)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잡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심과 부활 등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인간구원의 역사가 클라이맥스에 달하는 가장 극적인 주간이라고 표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벳바게와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3킬로미터입니다.
예수님은 이 곳에 오셨을 때에 제자 두 사람을 보내어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데리고 오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나귀의 안장 대신 자기들의 겉옷을 깔았습니다.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겉옷을 길가에 폈습니다.
그리고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이 노래를 그리스도교 최초의 찬미라고 스탠리라는 분은 말했습니다. 길가의 사람들은 어느새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와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며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했습니다. 종려나무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악마를 대적하는 상징물로서 축복의 나무입니다. 요한계시록 7:9에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종려나무는 구원을 노래하는 나무였습니다. 제자들이 “호산나”를 외칠 때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찬양하지 말고 조용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들은 예수님은 제자들이 노래를 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만일 사람들이 찬양하지 못하면 돌들이라도 찬양할 것입니다. 찬양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사야 58:1에는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성들의 허물과 죄를 크게 고하라는 말입니다. 백성들에게 크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크게 외치지 않으면 외쳐야 하는 자들이 자신의 책임을 다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돌들이 소리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백성의 허물과 죄를 알려주는 역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하십니다.
왜 돌들이 소리를 질러야 합니까?
돌들이 소리를 지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첫째, 그리스도는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찬양의 대상이란 뜻입니다.
제자들이 조용하면 돌들이 찬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찬양의 대상이란 뜻입니다. 옛날 전쟁에 나갔던 장군이 승전한 다음 입성할 때에 개선하는 모습니다. 나팔소리가 우렁차고, 군중이 있고, 축하가 있습니다. 장군의 입성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런 기쁜 개선에 노래가 없을 수 없습니다. 개선장군은 찬양 없이 입성하지 않습니다. 장군이 입성하는데 찬양하지 않는 것은 모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개선장군이 아니더라도 그렇습니다.
요즘에도 대통령이 취임식을 할 때에 모두가 일어나 박수하며 대통령의 입장을 기뻐하고 축하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오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실 때에는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하며 천사의 찬양과 더불어 오셨습니다.
후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와 함께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늘 찬양과 함께 합니다.
처음에는 천사들의 합창이었지만 두 번째 오실 때에는 천사들의 관악과 함께 오십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랍비를 존경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존경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찬양하고 존경하는 선지자보다 나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보려고 몰려온 사람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더냐?”고 물으십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나 좋은 옷 입은 사람이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선지자 보다 나은 자입니다. 그들이 마음으로 가장 존경하고 찬양해야 할 대상이 예수님이십니다.
요한계시록에는 구원함을 받은 자들이 노래를 부릅니다. 이 노래는 구원받은 자밖에 모르는 노래입니다.
요한계시록 14:3에는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합니다.
또한 15:3에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고 합니다.
구원함을 받을 자들은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구원의 감격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성에 호산나를 부르며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에서 천사들이 찬양합니까?
하나님께서 찬양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성가에도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찬양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찬양하지 못하면 돌들이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가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이 우렁차야 합니다. 찬양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주님은 찬양을 통하여 기뻐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입성은 모든 사람이 찬양할만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수난 기사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전체의 3분의 1이 수난과 부활의 기사입니다.
마가복음에는 5분의 3이 수난과 부활의 기사입니다.
누가복음에는 4분의 1이 수난과 부활의 기사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중요한 생애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핵심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수난 때문에 모든 생애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수난 때문에 모든 생애가 빛이 났습니다. 수난과 부활이 그리스도 사건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예수님의 입성을 어느 개선장군의 입성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한번으로 영원히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승리의 입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너무나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창세 이전의 계획입니다. 이 사건이 없으면 모든 사건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구원의 계획이 성취된 사건이 입성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일을 해결하신 사건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한 사건입니까?
예수님의 입성을 바라보던 제자들과 군중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무쪼록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이 말의 기원은 시편 118:25의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말입니다.
구원의 사건을 위해 입성하시기에 구원을 외쳐야 했습니다.
그들은 구원하러 입성하시는 예수님께 “구원하소서”를 외쳤습니다.
제자들과 군중들의 외침은 정확하고 필요한 외침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외쳐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구원해 달라는 호산나의 찬양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구원해 주소서”라는 우리의 소리가 주님께 들려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를 가던 제자들은 바람이 심하게 불어 풍랑이 일어 물이 배에 들어오자 구원해 달라고 소리쳤습니다(마 8:25). 이 때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물위를 걸어가다가 바다에 빠졌을 때에 구원해달라고 소리칩니다(마 14:30).
이 때 예수님은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의 손을 잡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구원하소서”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안타깝게 간수하는 사람들의 소원을 한번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호산나”를 많이 외쳐야 합니다.
구원해달라고 해야 합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께 자꾸 매달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지 않고,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이 필요치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알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예수님께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믿지 않는 그들은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며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들의 소리를 거부했을 것입니다.
마귀의 세계에는 찬미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찬양을 막는 것은 마귀의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예수님을 찬양하는 일을 막는 것은 마귀의 일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잠시 목회할 때에 교회 옆에 어느 미국 할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교회 옆에 살면서 교회를 얼마나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지 교회에 수시로 항의하고 불평을 하였습니다. 주일이면 교회에서 찬송 소리가 들리면 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자기 집의 큰 스테레오 라디오를 가지고 담장 위에 교회 쪽으로 돌려놓고 음악을 크게 틀어 놓기도 하였습니다. 교회 옆에 살면서 하나님의 덕을 보지 못하고 찬송이 싫고 예배가 싫으면 저주받은 것입니다. 마귀의 마음 때문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대신 사탄을 찬양하게 합니다. 요즘 흔히 말하는 뉴 에이지 음악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음을 찬양하고 사람이 서로 때리고 죽이게 하는 부추기는 것이 이런 노래의 가사에는 나타납니다. 여러분, 바리새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시지요? 바리새인이란 말은 분리자란 뜻입니다. 이들은 문자 그대로 분리자들입니다. 이간질의 전문가들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이간질하는 자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이름대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산나의 입성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찬양한 만한 큰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간질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놀라운 사건 가운데서도 이간질할 것만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영혼이 이미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셋째, 자연도 하나님을 찬양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신 이유는 영광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영광을 받으십니까?
찬양할 때 가장 큰 영광이 됩니다.
시편 19:1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찬양합니다. 여러분, 돌이 찬양하는 것 보셨습니까? 저는 봤습니다. 시냇가에 가면 돌이 찬양합니다.
서양 속담에는 “흐르는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냇가에 있는 돌이 노래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돌을 통하여도 찬양을 받으시고 계십니다.
돌들도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의 입성을 기뻐하고 찬양할 것입니다.
돌들도 아는 그리스도 사람이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이사야는 1:3에서 이렇게 통탄합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돌보다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돌보다 더 돌머리가 있습니다. 돌부처보다 더 무뚝뚝한 사람이 있습니다. 돌도 하는 찬양을 예수님께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괴테의 시에는 “앉은뱅이 꽃의 노래”라는 시가 있습니다. 들에 핀 한 떨기 조그마한 앉은뱅이 꽃이 양의 젖을 짜는 순박하고 아름다운 시골처녀의 발에 짓밟혀서 그만 시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꽃은 그것을 조금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악하고 추한 손에 의해 무참하게 꺾이지 않고 맑고 깨끗한 처녀에게 밟혔기 때문에 꽃으로 태어났던 보람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미물도 자신의 처지에서 영광 돌리며 찬양할 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돌은 성경에서 비유적으로 사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돌입니다.
다니엘 2:23에는 느부갓네살 왕이 보았던 신상의 환상 가운데 “뜨인 돌”이 나타나 신상을 다 부셨습니
다.
이 뜨인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21:42에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고 합니다.
이 돌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전서 2:4에는 “사람에게는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산 돌입니다.
돌이신 예수님을 사람이 아닌 돌이 찬양합니다.
제자들은 호산나 찬양했습니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찬양입니다.
승천 후 그들은 열정적으로 전파하였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목숨을 내어놓고 전파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을 전하다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파하지 말라는 유대인 공회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고 합니다.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목숨과 바꿀 용기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기도해달라(골 4:3)고 부탁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담대하게 전파되어 나갔습니다.
우리 나라의 처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의 초대 목사님 가운데 최봉석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예수를 믿고 얼마나 열심히 “예수천당”을 전했는지 모릅니다.
이 분은 어디엘 가든지 예수천당만을 열심히 외쳤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평양거리에서 전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이 “나 신학생이요”라고 하니 “신학생도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잡혀갔습니다. 가서 고문을 받는데 매를 때릴 때마다 “예수천당”을 외쳤습니다. 때리는 일본 순사가 왜 시끄럽게 자꾸 소리를 치느냐고 하니 자기 속에 예수가 있어서 건드리면 자동적으로 “예수”가 튀어나온다고 했다고 합니다.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소리를 가진 것입니다.
결론
어떤 사람이 노랫소리가 유달리 아름다운 카나리아를 한 마리 갖고 있었습니다. 여름에 새를 집에 가두는 것은 너무 한다 싶어 그는 바깥 나무 사이에 새장을 갖다 두었습니다. 많은 참새들이 그 새장에 끌려 그 나무에 자주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놀랐으나 카나리아는 곧 깃 달린 동료들과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름이 다 끝날 즈음에는 자기 노래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참새들의 단조로운 소리만을 낼 수 있게 되어버렸습니다. 잘못된 환경 속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자기의 가장 좋은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이란 환경에서 사순절도 망각하고, 고난주간도 별 느낌 없이 맞이하고, 세상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번 한 주간만은 세상 보다 예수님께, 일보다 십자가에 눈을 고정하고 삽시다. 세상에 살면서 아름다운 노래를 잊어버리고, 짜증스런 소리에, 상처 주는 말에 더 익숙하게 살던 우리가 다시 노래를 되찾고, 찬양을 되찾고, 십자가를 되찾고 한 주간의 삶을 찬양으로 삽시다. 우리가 잠잠하면 돌들이 노래할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노래하는 즐거움을 돌들에게 빼앗기지 말고 호산나를 찬양하면서 사는 고난주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