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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진 목사 / 가마의 행렬 (아 3: 6-8)
하늘에 속한 믿음생활
요 약
성도는 지상에서도 하늘에 속한 삶을 누려야 한다. 하늘에 속한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높이 되신 그리스도 안이 나의 현 주소임을 확신해야 한다. 그리고 강한 기도 생활과 세속 이별과 내가 죽는 희생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연단의 은총으로 순종하게 하시고, 또한 가능하도록 강한 은사를 입혀 주사 이기게 하신다. 이것이 진정한 안식의 길이요 나의 안전함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설 명
1. 배 경
⇒ 술람미가 혼인하기 위해 솔로몬과 함께 가마를 타고
험한 여정을 거쳐 입궐하는 장면이다.
2. 적 용
(진단) 배우자로 인해 마음의 쉼이 없나요?
(해결) 남편 존경, 아내 사랑의 원칙을 지키십시오.
3. 하늘에 속한 삶을 위해
1) 복음에 기립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늘에 속한 자임(엡2:6, 골3:1-3)
이 사실을 믿고 견고히 서서 주장하고 감사하라(골2:6-7, 고전15:1-2).
2) 강한 영적생활
6절 "연기 기둥과도 같고"
성도들의 강한 기도를 상징한다(계8:3-4).
3) 희생적인 믿음
6절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향은 고통의 산물로서 세속 이별과 헌신적 신앙생활이 필요하다.
그러나 침대가마가 시사하듯 이것이 진정한 안식의 길이다(마11:28-30).
4) 연단의 은총
6절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신앙의 거친 여정인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5) 하나님의 특별은총
7-8절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이스라엘 용사 ‥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능력과 사랑과 근신을 입혀 주사 가능하게 하시며(딤후1:7)
이것이 진정으로 안전한 길이다.
원 문
6 미조트(그가 누구인가) 올라(올라오는)
민 함미드발(광야에서부터) 케티마로트(기둥과 같이)
아솬(연기의) 메쿠테레트 모르(몰약과) 우레보나(유향과)
밐콜 아베카트 로켈(장사하는 자의 모든 향기로운 것으로)
7 힌네 밀타토(보라, 그의 가마이다) 쉘리쉴로모(솔로몬의)
쉿쉼 깁보림(육십명의 강한 자들이)
사비브 라흐(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믹겝보레 이스라엘)
8 쿨람(그들 모두는) 아후제 헤레브(허리에 찼고)
멜룸메데 밀하마(전쟁에 익숙한 자들이다) 이쉬(각각)
하르보(그의 칼을 가지고) 알 예레코(그의 넓적다리에)
밒파아드(두려움에 대항하여) 발레로트(밤에)
스 토 리
예루살렘 사람들은
광야로부터 올라오고 있는
크고 화려한 가마의 행렬을 보았다.
행렬 앞의 향연은 마치 연기 기둥과도 같았고
뿌려진 고급 방향제는 향내를 많이 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두 개의 가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이 가마는 솔로몬 왕과 그의 신부인 술람미를 태운 가마였고
이스라엘의 용사 중에서 뽑고 또 뽑은
무술에 능숙한 용사 육십 인이 호위하고 있었으며
만일을 대비하기 위하여 각 사람마다
다리까지 늘어진 큰칼을 차고 있었다.
(강 해)
이 시간에는 "가마의 행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은 이제 술람미가 비로소 솔로몬과 혼인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에 입궐하는 장면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 사람들이 크고 화려한 가마의 행렬이 궁성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보고 감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가마 행렬인지 행렬 앞에서 지피는 향연은 마치 연기 기둥과도 같았고 그 가마에서 풍기는 향냄새는 성안까지 풍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마는 이스라엘의 용사 육십 인이 특별하게 호위하고 있었고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사람마다 허리에 큰칼을 차고 있었다는 줄거리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예루살렘 사람들이라는 제 3의 인물들을 통해서 이 광경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마의 행렬이 바로 천성을 향해 가는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 성도들의 행렬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은 산 위에 세워졌는데 이는 천상의 새 예루살렘의 예표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몸은 지상에 살지만 더 이상 지상에 머무르지 말고 천성을 향해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의 혼인행렬을 통해서 하늘에 속한 신앙생활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에 속한 신앙생활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강한 영적 생활이 그 특징입니다.
여기 6절에 "연기 기둥과도 같고" 했습니다.
그 당시 화려한 행렬 앞에서는 향을 태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는 연기 기둥이라 한 것은 술람미의 혼인 행렬에는 보다 많은 향을 태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연기의 수직 상승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이나 분향단에서 솟는 연기와 같은 모습입니다. 당시 성전에서 쓰는 향은 특별해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언제나 향의 연기가 수직으로 상승했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브티누스와 그 자손들은 대대로 향을 만들었는데 특별하여 언제나 수직으로 향연기둥을 이루며 타올랐다고 합니다. 이 비법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이유로 극비로 부쳐졌습니다. 이 가문과 함께 향을 제조했던 카트러스 가문은 주후 70년 로마가 이 향 조제법을 요구하자 가르쳐주지 않음으로 여자의 팔을 잘라버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만큼 그들은 죽도록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므로 수직 상승하는 향의 연기는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계8:3-4에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했습니다. 여기 기도가 향연과 함께 연기 기둥이 되어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기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향의 연기가 기둥을 이루었다는 것은 영적으로 천상에 속한 생활을 위해서는 기도를 중심한 강한 영적 생활이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마치 비행기가 하늘로 비상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소요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비행기가 충분히 비상하여 정상에 오르게 되면 그 때부터는 그렇게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심하면 추락하므로 일정한 에너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신앙도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기까지는 보다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몸을 바치고 마음을 바치고 힘을 바치고 시간을 바쳐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에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합니다(계12:2). 기도만이 아니라 찬양도 뜨겁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과거처럼 음악 실력만 있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찬양 사역자들은 성령의 깊은 은혜를 경험하고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와 말씀만이 아니라 찬양의 뜨거운 불길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찬양하다가 마음 문이 열리고 찬양하다가 회개가 터지고 찬양하다가 은사를 경험하고 찬양을 하다가 병 고침을 받고 찬양하다가 일군이 탄생됩니다. 이 뜨거운 불길이 치솟아야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한 영적생활로 성령의 불길이 연기 기둥과 같이 타오르시기를 바랍니다.
2. 천상에 속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희생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시 6절에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그랬습니다.
여기 몰약과 유향을 위시하여 온갖 향품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혼인 행렬이 지극히 화려함을 나타냅니다.
이와 같이 치장은 그 만큼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귀한 존재요 또한 이 행사가 국가적인 대 행사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향들은 대개가 희생의 상징입니다. 대부분의 향들은 진액을 짜거나 가루로 부수거나 뜨거움 속에서 만들어지는 고통의 산물입니다. 성경에서 향은 대개 희생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천상에 속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필요합니다.
여러 학자들은 몰약은 죽음을, 유향은 기도를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대개 향품은 희생과 관계가 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향품 역시 주를 위해 살아가는 여러 희생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이지만 어머니로서 성숙하면 희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처녀와 어머니와는 심리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상을 사는 성도가 지상에 대한 모든 정을 끊고 천상의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이란 대단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히11:24-25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애굽 왕궁의 부귀영화와 권세 그리고 자기를 아들 삼은 양어머니의 정에 대한 유혹이 컸음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픔을 참고 결단했습니다. 나무가 감각이 있다면 곁가지를 칠 때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곁가지를 쳐주어야 쓸 재목으로 크듯 세속을 과감히 끊어야 합니다. 롯의 처와 같이 세상을 사랑하거나 아합의 시대와 같이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겨도 안됩니다. 그리고 몸을 과도히 아껴서도 안됩니다. 희생 없이는 신랑 예수를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안일함을 깨뜨리고 열심히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3. 지상 탈출을 위해 하나님의 연단의 은총이 있습니다.
6절에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그랬습니다.
여기 거친 들은 술람미가 오고 있는 노정 중에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의 험준하고 거친 들판을 가리킵니다. 어떤 학자들은 평민 출신 술람미가 솔로몬과 결혼하기까지 겪었던 과거의 숱한 어려움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Keil and Delitzsch, 강병도). 영적으로 거친 들은 천성을 향한 신앙의 거친 여정 그러니까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발붙일 만큼의 기업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저 영원한 본향의 기업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저 천성을 향하라는 하나님의 이 싸인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관찰해 보면 성도들 중에 어려운 문제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원망합니다. 요셉도 처음에는 형들이 악해서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형들을 여러 차례 시험해 본 결과 그가 당한 어려움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된 것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알고 받는 연단과 모르고 받는 연단과는 결과에 있어서 천지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만나거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약1:5). 그러나 이 거친 들이 있었기에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오는"의 원문의 뜻은 '올라오는'입니다. 이미 성도는 영적으로 하늘에 속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마음까지도 하늘에 속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왕이 술람미를 데려오기 위해 보낸 가마인데 이 연은 원문에 ( '미타')로 문이 있어 들어가 다리를 뻗고 쉴 수 있는 신부의 침상가마(암6:4)를 가리킵니다. 이 가마는 다리를 뻗거나 누워서 쉴 수도 있는 구조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고통을 위해서가 아니라 쉬도록 하심입니다. 이 쉼은 우리가 천성을 향해 가는 믿음 즉 주님의 멍에를 매면 맬수록 더 풍성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속한 신앙생활을 위해서 수고와 희생을 하지만 결국은 이것이 진정한 안식과 능력과 복락과 영광을 누리는 길입니다.
4.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은총이 따릅니다.
7-8절에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인이 옹위하였는데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했습니다. 본문은 이 가마의 호위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왕의 호위대가 호위함은 술람미를 왕적 수준으로 호위함을 의미합니다.
먼저 이 호위대의 국적이 나타납니다.
여기 이스라엘 용사라고 했습니다. 여기 호위병의 국적을 굳이 언급함은 당시 이스라엘 용사란 일당백의 뛰어난 용사를 가리켰습니다. 삼하23:8-39을 보면 이스라엘의 용사들은 혼자서 적군 800인을 죽인 요셉밧세벳이나 수백 명의 블레셋 군대를 쳐부순 엘르아살, 혼자서 녹두나무 밭에서 블레셋 군대의 한 떼를 진멸시키던 삼마, 기타 37인의 용사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본문의 60용사가 그러한 용사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당하지 못하는 강력한 전사들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용사란 충성된 용사들이었습니다. 삼하23:13-17을 보면 다윗이 블레셋 군대에
포위되어 목이 갈하여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의 물을 원할 때 이스라엘의 용사 셋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블레셋 군대를 충돌하여 뚫고 물을 길러 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다윗은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뉘우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렸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용사는 강하고 충성스러웠습니다. 이는 영에 속한 사람을 떠나지 않고 도우시는 능력과 승리가 되신 성령의 특별은총을 암시합니다(롬8:1).
다음에는 호위병의 수효가 나타납니다.
그 수효는 육십인데 학자들 중에는 육백 명의 왕의 호위병 중에서 십 분지 일을 뽑은 노련한 병사들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삼상27:2, 30:9, Delitzsch). 그러니까 그들은 이스라엘의 장정 중에서 뽑히고 뽑히며 또 뽑힌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60은 사람의 수 6과 모든 구비 수 10을 곱한 수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한 호위였습니다. 이처럼 신령한 측면에서 볼 때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어떤 누구도 넘어뜨릴 수 없는 특별하고 강한 은혜가 임합니다.
다음에는 호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호위의 능력은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즉 칼잡이로서 전문적인 검객을 뜻합니다.
그리고 호위의 방법은
칼을 허리에 차고 둘러싸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허리'는 넓적다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호위병들이 찬칼은 넓적다리까지 내려오는 긴칼임을 암시합니다. 이는 본격적인 전투태세가 갖추어 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옹위했다는 것은 둘러쌌다는 뜻으로 호위의 철저함과 호위를 위해 목숨을 거는 육탄호위를 의미합니다. 신령한 측면에서 이 옹위함은 심적으로도 든든한 임재적인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칼을
호위는 곧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이 나타나서 보호하시는 보호입니다(벧전1:5, 행20:32).
다음에 호위의 이유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밤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술람미의 고향인 북부 팔레스틴에서 예루살렘까지 오려면 광야를 거치지 않으면 안되며 거리는 약 100km이므로 하루만에 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두려움'( '파하드')은 눈앞에 나타난 두려움보다는 심리적으로 느끼는 두려움을 의미하는데 즉 술람미가 심리적인 안정을 가질 만큼의 대단한 호위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측면에서도 앞서 언급한 대로 이 보호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등의 임재적 현상으로 성도에게 지극한 안정의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올라가는 믿음의 생활을 할 때는 얼마나 평안하고 든든함이 임하는지 모릅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곧 나의 평안을 주노라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 하셨던 예수님의 그 평안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안의 그 진리가 이제는 실재적인 경험으로 느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이토록 철저한 호위를 언급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부가 그 만큼 귀중한 존재라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뿐 아니라 왕은 직접 가마를 대동하고 술람미를 데려왔습니다(24:1-67, 마25:1-13, 아3:6, 아2:10, 13). 그러므로 이 결혼행렬은 왕의 권위로 움직이는 영광스런 행렬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 예우란 엊그제 산골에 있던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큰 차이였습니다. 이것은 지상 수준일 때보다 천상 수준일 때 하나님의 대하시는 수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지상에 빠졌을 때는 악의 세력들이 우리를 정복했었습니다. 그러나 천상으로 올라가면 그리스도의 왕권으로 보호되는 특별은총이
임합니다. 그래서 어떤 악의 세력도 성도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차원에서 이 호위는 체험되어지는 현상으로 설명한다면 놀랍도록 철저한 근신의 자세 발생과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과 말씀으로 입혀주시는 임재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딤후1:7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오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했습니다. 그런데 신령한 세계가 신기한 것은 이 보호가 외부적일 뿐 아니라 입혀져서 스스로가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내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술람미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두려움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왕과 같이 담대해집니다. 다 이겨지는 능력이 옵니다. 용사들의 칼보다 강한 말씀이 나를 붙듭니다. 시험을 경계하는 근신이 있습니다. 놀라운 충성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행복한 사랑의 감정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침대가마의 술람미처럼 편안한 안식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보호가 외부적일 뿐 아니라 성도 스스로가 알 수 있게 경험되어진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실입니다(요일4:13).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나약한 것은 아직 지상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속히 지상의 미련을 버리고 천상에 속한 성도들이 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강한 영적 생활을 시작하십시오.
<결론>
이 세상에는 죄악과 눈물뿐입니다. 그래도 죄악된 세상에 머무르겠습니까? 우리의 육체는 아직 지상을 살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늘에 속한 삶이어야 합니다. 더 이상 헛된 것에 속지 말고 속히 깨달으십시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여호와를 앙망하십시다. 그러기 위해 기도의 향을 더 피우고 세속과 관계를 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몸을 아끼지 마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특별 은총 속에 모두 천상에 속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