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1-8
상처, 이렇게 치유하세요 / 이규왕 목사
독일에 아주 똑똑하고 총명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어느 날 자기의 사랑하는 어머니와 다른 남자가 정을 통하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자기 어머니와 정을 통하는 남자는 바로 독일인이 아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그 소년의 아버지는 가정을 버리고 떠나 버렸습니다. 가정이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너무나 큰 상처를 받은 소년은 언제나 유대인을 향한 미움과 복수심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족 이외의 것에서 안식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한 소년의 이 같은 아픈 상처와 그치지 않는 복수심으로 온 세상은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소년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그 소년의 이름은 바로 그 유명한 독일의 히틀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상처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어렸을 때 유대인에게 상처를 받은 한 소년이 자라서 유대인을 600만명이나 학살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유대인 남자와 정을 통하는 것을 보고 또 그것으로 인하여 아버지가 가정을 버리고 떠난 마음의 상처 때문에 히틀러는 훗날 그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상처가 주어졌을 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엄청난 고통을 주는 원인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상처를 통해서 오히려 위대한 삶을 사는 하나님의 축복의기회를 삼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통과 아픈 상처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고 눈물과 한숨이 있는 법입니다.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누가 이 상처가 많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상처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1. 먼저 상처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가 상처를 당하고 로뎀나무 아래서 누워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렇게 당당했던 엘리야, 그렇게 의기양양했던 그가 이세벨이라는 여자의 말 한마디에 너무나 큰 상처를 받고 브엘세바 남단까지 도망을 가 거기서 죽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서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사명자의 길을 걷게 하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 속에서 상처에 대한 몇 가지 교훈을 얻고 상처를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사람이 상처를 받으면 관점이나 가치관이 삐딱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상처가 잘못되면 반드시 영적 침체를 낳습니다. 그리고 이 영적 침체는 이상하게 사람을 삐딱하게 만듭니다.
저 로뎀나무 밑에 누워있는 엘리야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삐딱한 모습입니까? 그 능력있는 선지자, 그 용기 백배한 선지자가 지금은 죽기를 구하고 있어요.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단 말입니다.
엘리야가 어떤 사람입니까?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싸워서 이겼던 사람입니다. 기도해서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렸던 사람이고 저 기손 시내까지 가서 450명의 선지자들을 죽여 버렸던 사람입니다. 정말 전무후무한 기적의 사람,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그가 이세벨이라는 왕후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저 브엘세바 남단까지 도망을 와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로뎀나무 밑에 누워 "하나님! 나 죽여주세요. 나 죽고 싶어요."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땡깡을 놓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를 당하고 사람이 삐딱해질 수 있습니다. 가치관이 잘못되고 극단적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이 정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꾸 못나져요.
2) 하나님은 절대로 상처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언제나 은혜 주시길 원하신 분입니다. 결코 우리에게 고통이나 상처를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상처를 어디서 받습니까? 대부분 각종 사고와 사건을 통해서, 혹은 질병을 통해서 받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크게 상처를 받는 것은 아마도 인간관계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이 우리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줍니다. 부모나 배우자가 상처를 줍니다. 또 자녀나 친구 등 다른 사람들 때문에, 교회로 말하면 동역자 때문에 상처를 받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면 왜 상처를 받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죄인이 아니면 상처를 안 받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남이 무심코 한 말에 상처를 받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말에, 상처 안 받아도 되는 일에도 상처를 쉽게 받습니다 본문의 엘리야도 아무 것도 아닌 것에 괜히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엘리야도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누가 상처를 주지 않는데도 스스로 상처를 받습니다. 왜 그런줄 아세요? 죄 때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상처를 잘 받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로 상처를 주시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3) 상처가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잘 극복하면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은 큰 병이 생겨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상처를 감지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 고통을 느끼게 되는데 그때는 이미 늦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주로 암에 걸릴 때 그렇습니다. 암이 무서운 이유는 병에 대한 고통이 전혀 없다가 말기가 되어서야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치료하기에는 너무 늦어서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암이 초기부터 고통을 느껴진다면 절대로 무서운 병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상처는 큰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벌써 상처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더 이상 상황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처도 안 당하고 안 느끼던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 날 사람이 딴 사람이 되어 버리면 그것은 저주입니다.
시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하고 상처 당하기 전에는 내 마음대로 살았는데 상처 당하고 고난 당하고 나서부터 주의 말씀을 지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119:71 에서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고통과 상처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삶을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를 당하게 되자 "아! 사람은 의지할게 못되는구나. 하나님만 의지해야 되겠구나." 하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가까이 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 부르짖게 된다면 이 상처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엘리야가 그대로 있었으면 하늘 높은 줄 몰랐을 것임. 그러나 상처 때문에 제 2의 사역을 겸손히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시적 성공 후나 잘 나갈 때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교훈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잘 나갈 때는 내가 누구인 줄 모읍니다. 내가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지요.
그러나 큰 고통을 당하거나 마음의 상처를 받아 보세요.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주제파악을 하며 겸손+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영적으로 더 성숙한 성도가 됩니다.
따라서 상처가 비록 즐겁고 기쁜 선물은 아니지만 그것을 잘 극복하기만 하면 그것이 내게 큰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며 진리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치유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 먼저 인간적인 방법들을 시도합니다. 하나님께 은밀하게 나와 기도하는 것 보다 자꾸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가서 자기의 억울함과 상처를 꺼내놓고 하소연 합니다.
그렇다고해서 상처가 치유됩니까? 잘못하면 공연히 내가 오해를 받거나 실없는 사람으로 소문이 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 치유는 오직 하나님의 방법을 좇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아가고 하나님에게서 치유를 받아야 하며 사람을 찾아가거들랑 아무나 찾지 말고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야 합니다.
2.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상처를 어떻게 성경적으로 극복해야 합니까?
왕상 19장을 중심으로해서 그 방법을 살펴봅시다.
1) 다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19: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는 상처받고 절망하여 브엘세바 남단 광야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로뎀나무 밑에서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기가막힌 신세였습니다. "내 꼴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나" 생각하니 너무나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아무리 엘리야가 도망을 갔고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 할지라도 그는 먼저 하나님을 찾고 다시 만났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생떼를 썼습니다. 오기를 부렸습니다. 이제 죽고 싶다고 말이지요. 제발 내 생명을 취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는 그래도 하나님을 다시 찾았고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다시 만나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았던 것입니다. "주님! 나 죽고 싶어요. 너무나 괴로워서 이렇게 도망 왔어요." 바로 이것이 상처치유의 제 1단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주셔서 먹이우고 마시우고 상처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아무리 상처가 커도 하나님을 찾으세요.
하나님을 다시 만나세요. 그리고 우리의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으세요. 눈물로 고백해 보세요. "하나님! 나 죽고 싶어요. 나 살고 싶지 않아요. 나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나님 앞에는 아무리 내 속심정을 털어놓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상처의 보따리를 다 받아 주시고 엿장수처럼 우리에게 다시 기쁨, 평안, 행복, 새힘으로 바꾸어 주시거든요. 그리고 우리의 모든 비밀을 철저히 지켜 주시거든요.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다시 만나 우리의 솔직한 감정을 아뢰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엘리야가 하나님께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으니까 하나님은 엘리야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긍휼히 여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천사를 보내어서 엘리야의 피곤한 육체를 어루만지게 하고 떡과 물을 먹여 주셨습니다.
19:5-7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천사가 이렇게 하니까 엘리야는 하나님의 모든 사랑을 받았습니다.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 싫어요. 그래도 죽을 거예요."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사의 모든 서비스를 수용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하나님의 종을 천사로 보내서 우리를 위로+사랑을 베품. 그러면 속으로 "어머! 천사가 오셨군요." 하면서 못이긴 체하고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상처가 치유됩니다.
3) 변명하지 말고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이 상처를 받으면 자꾸 도피심리가 생깁니다. 자꾸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도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19: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굴속에 숨어있는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아야! 너 왜 여기 있어?" 지금이 어느 때인데 너 왜 여기 있어? 이러고 있어도 되는거야? 할 일이 많은 이때에 왜 이렇게 있어? 그러자 엘리야가 이렇게 대답하지요.
19: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
엘리야는 자기 혼자 의로운 줄 알았습니다. 자기 혼자서만 하나님께 충성한 줄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지나친 자기 연민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렇게 변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엘리야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더니 스스로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크고 두려운 임재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연민에 빠져 지나치게 변명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4) 새로운 사명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일으키신 다음에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제 2의 사명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지요. 주께서 일으켜 주신 후 새로운 사명을 주시면 우리도 다시 그 길을 가야 합니다.
5) 용서받은 만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께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의 허물과 실수와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자에 대해서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을 계속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면 나는 계속해서 그 미움과 상처의 종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용서하면 스스로 상처가 치유될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여유있는 사람이 됩니다. 믿음의 거인+영적으로 가장 부요한 사람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