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
무장 독립 투쟁 (1920년대) | 3·1운동이후 만주· 연해주 지역에서 무장 투쟁 활동이 활발히 진행 됨 → 국내의 식민통치기관 공격,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 전개 |
봉오동 전투 | 봉오동 전투(1920.6) :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 독립군 편성 이후 첫 승리
홍범도가 이끌던 의병부대가(삼수, 갑산) 3·1운동 이후 가장 먼저 재기(再起)하여 북간도의 왕청현 봉오동에 대한독립군이라는 이름으로 거듭 태어남 → 대한독립군이 일제의 식민통치기관(헌병 초소)을 공격하자, 일본군이 봉오동으로 공격해 옴 → 골짜기로 유인하여 일본군 1개 대대 병력 가운데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 명을 부상당하게 만듦 → 독립군의 사기 크게 진작됨 |
청산리 대첩 | * 청산리 대첩(1920.10) :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 독립군의 전투 가운데 가장 큰 승리 * 일제는 간도 침략의 구실을 만들고, 더 나아가 간도에서 활약하고 있던 독립군을 완전히 제거할 목적으로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공격케 함(훈춘 사건) → 그리고 이를 한국인에게 뒤집어씌우고는, 이것을 구실로 간도 및 만주 지역에 2만 여명의 병력을 투입함 → 일본군의 포위 압박으로 퇴로를 열지 못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은(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회군 등)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함 → 일본군 1200 여 명을 사살하고, 2,000여 명을 부상시킴
* 승리 요인 - 지형을 이용한 효과적인 작전 - 목숨을 아끼지 않은 투지 - 거주 동포들의 협조
* 의의 ① 항일 독립 전쟁 중 최대의 승리 ② 독립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심어 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