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미제라블
2012년 12.19
박근혜 vs 문재인 대통령 선거일.
출구조사 발표가 이루어지는 저녁 6시를 피해 부러 영화관을 찾았다. 당시 가장 많은 개봉관을 확보한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을 고른 데 별다른 정치적 이유는 없었다.
그저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왔을 때 이미 나온 출구조사 결과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게, 온갖 긴장감으로 오직 6시 발표만을 바라보는 상황보다 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8시쯤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근소한 차이로 박근혜 대표가 앞섰다는 출구조사를 확인했다.
그날의 승리는 내게 최소 5년 간 안정적인 국정을 담보하고, 내 생업에 충실할 수 있다는 든든한 보장이었으므로 매우 안도했고, 감격했다.
하지만 대학로 영화관을 빠져나오는 동안, 들썩거리는 보통때 영화관의 분위기와 달리 나를 압도했던 기묘한 침묵은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다.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의 지나치리만큼 차분한 반응이 염려스러웠던 것은 우리가 불과 몇 분 전까지 ‘자,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하고 외치는 레미제라블 영화의 한 장면을 끓는 가슴으로 함께 본 사이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의 기운을 영화로 이해한 나는 관람하는 내내 분명 코제트가 사랑하는 마리우스가 된 것 같은 착각으로 영화를 봤으나 박근혜가 앞선다는 출구결과 직후 가라앉은 거리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내가 마리우스가 아니라 실은 경멸당하는 자베르 경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이질감을 함께 느꼈다.
*
그 해 연말, 송년회에 굳이 참석한 이유는 늘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떠벌리며 나를 ‘계몽’하려 들었던 대학동기동창들이 이번 결과를 ‘국민의 부름’으로 순순히 받아들이는 걸 두눈으로 직접 보겠다는 심산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우리가 십 수년을 지근거리에서 위로하고 추억을 나눈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박근혜에 대한 지지여부가 아무런 주저 없이 상대를 쓰레기 취급해도 되는 일이며 누구도 십 수년 우정을 깨뜨리는 그 거친 칼질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예상치 못한 상처가 됐다. 결사체와 침묵의 지지자를 자처하는 구성에 내가 낄 자리는 없었다.
당시 나의 해결책은 한때는 전부였던 내 교우관계를 스스로 끊는 것이었다. '선거'라는 대리전에서 승자의 위치를 점함으로써 입장 차의 상당부분을 ‘대의’로 수긍시킬 수 있을 거라는 내 생각이 틀렸기 때문이다. 난 설득이나 변호를 포기하고 내 인생으로 침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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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탄핵이란 초유의 사태에 직면했다.
공들여 만든 박근혜의 머리를 꼬챙이를 꽃고 행진하는 사람들과 그 머리를 발로 뻥뻥 차는 천진한 아이들의 사진으로 그날의 폭력과 불의가 ‘민중의 외침’으로 포장되는 걸 지켜봤다.
그날로 멀어진 친구와 선배들은 온 가족을 대동하고 촛불 혁명의 일원이 되어 부패한 기득권을 심판하는 ‘마리우스’들이 되었다. 완고한 그 아버지들은 거짓의 추문으로 뒤덮인 언론공세에 굴복했고 결국 ‘너희가 옳았다’며 30대 자식 편을 들어 함께 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다.
촛불 광화문에 민중의 노래가 울리는 동안 나는 대통령 당선일에 본 영화 레미제라블과 그 기묘한 침묵의 상관관계를 떠올렸다.
그들이 마리우스로 앞서가는 동안, 나는 되다 만 자베르 역할을 던져버리고 쫓기는 장발장이 되어 저만치 물러서 움츠려들었다.
모든 관계는 격렬하게 전복되었다.
2019.10.3.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왔을 때 레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탄핵 정국 이후 이 사달을 예언한 것만 같아 항상 나를 주눅들게 했던 혁명의 노래.
내가 봉기한 민중의 편이 아니었으므로, 노래가 울려퍼지는 것이 곧 적폐로 규정당한 나를 향한 진격의 선언같아 항상 가슴을 철렁하게 했던 그 노래.
몇 십배로 부풀인 연인원을 앞세워 정의를 독점했던 순간을 대변했던 그 노래가 우리 진영의 가사로 개사되어 시청을 울리는 것을 가만히 서서 들었다.
‘정신차려라. 이제 니가 각성한 개인이고, 니가 이 거짓을 바로잡고 자유를 되찾아야할 주체야’라며 내 멱살을 잡아끌어 바로세우는 느낌이 들었다면 에반가?
방구석에서 날 움츠러들게 했던, 우릴 겨냥했던 민중의 노래가 문조국에 분노하는 편의 노래가 된 것을 보며 두려움이 사라지는 기분이 든 이유는 그렇게 우리가 그들의 전유물 하나를 빼앗았기 때문일거다.
처음으로 1면을 장식한 대규모 보수단체 집회 사진에 흥분하면서도, 우려했던대로 자한당이 집회에 모인 시민의 열망을 슈킹하는 걸 눈뜨고 지켜봤으며, 여전히 용기보다 두려움이 앞서고, 나대신 구라빨 센 누군가 나서주길 ‘응원’하는 나약한 목소리들을 하루 종일 지켜보다 글을 쓴다.
술도 좀 취했고.
이제 시작이고, 첫 술에 배부르지 않으므로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마음을 다잡기로 한다.
박대통령의 쾌유를 빌며.
국가정상화의 노력이 국민개개인에게 전가되었음에 많은 이들이 눈뜨고 동참해주길 바랄 뿐이다.
Alexander Wang (페이스북)
민중의 노래
https://youtu.be/FLSNnrzXnI4





첫댓글 자랑스러운 올바른 대한민국의 국민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