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
東湖(동호)
東湖春水碧於藍(동호춘수벽어람)
白鳥分明見兩三(백조분명견양삼)
柔櫓一聲飛去盡(유노일성비거진)
夕陽山色滿空潭(석양산색만공담)
정초부<鄭樵夫>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더 푸르고
백조의 두 세마리 분명하게 보이것만
노젓는 소리에 새들은 다 날아가고
노을진 산빛만 텅 빈 호수에 가득하네
칠언절구(七言絶句) 이 시(詩)는 나무꾼 머슴 정초부(鄭樵夫)의 평기식(平起式) 시(詩)다. 시제(詩題)는 동호(東湖)이고 압운(押韻)은 하평성(下平聲) 담통(覃統) 운족(韻族) 삼(三), 담(潭) 운(韻)으로 작시(作詩)했다. 단원(壇垣) 김홍도(金弘道)가 정초부(鄭樵夫)의 東湖(동호) 시(詩)를 인용(引用) 화제(畫題)로 삼아 그린 도강도(渡江圖) 그림이 동호범주(東湖泛舟)로 알려져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초부(鄭樵夫)의 주인(主人)은 문벌가문(文閥家門) 양반가(兩班家) 여춘영(呂春永)인데, 노복(老僕)이지만 어릴 때는 스승으로 어른이 되어서는 친구같이 지내면서 시(詩)에서는 오로지 내 초부뿐이라<少師而壯友於詩惟我樵>고 한양 사대부(士大夫)들에게 알려 칭찬을 했다고 한다. 정초부(鄭樵夫)는 평생을 양평 양수리 부근 월계(月溪)라는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정초부(鄭樵夫)의 시는 서정성(敍情性)이 풍부(豐富)하고 회화적(繪畵的)인 특징이 있어도 당대 유명한 김홍도가 그의 시를 화제(畫題)로 삼을 정도이고. 장안에 사대부들도 그를 만나려고 왔다가 산에 나무하러 간 관계로 만나지 못하고 갔다는 일화도 많다.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지낸 김상묵(金尙默)과는 신분의 벽도 뛰어넘어 친분(親分)을 쌓고 사귀었다고 한다. 노복(奴僕) 출신(出身)이지만 시재(詩才)가 능하다고 하니, 호기심(好奇心)에 장난삼아 그와 시 짓기를 겨루어 보려고 하기때문에 그런 양반들을 과객(過客)이라는 시로 응대(應對)를 했다는 것이다. 과객(過客) 시를 보면 이렇다. 강가에 있는 나무꾼 집일뿐 과객을 맞는 여관은 아니라오, 내 성명을 알고 싶다면 광릉에 가서 꽃 에게나 물어보시오.<江上樵夫屋 元非逆旅家 欲知我名姓 歸問廣陵花> 과객(過客) 시(詩)는 오언절구(五言絶句) 측기식(仄起式) 시(詩)다. 압운(押韻)은 하평성(下平聲) 마통(痲統) 운족(韻族) 중에 가(家), 화(花)로 한 운통(韻統)으로 작시(作詩)를 했다.
노비(奴婢) 출신(出身) 초부(樵夫)가 어떻게 글을 읽혔고 작시(作詩)법을 배웠는지 연구 대상이다. 양반 상놈 신분제가 분명한 조선에서 어깨 넘어로 어떻게 평측(平仄) 사성(四聲)인 성운학(聲韻學)까지 공부를 해서 압운에 맞춰 작시(作詩)까지 하였는지 시어(詩語)를 보면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나무꾼 시인이다. 정초부(鄭樵夫)는 43세 때 양인(良人)으로 면천(免賤)이 되어서 76세까지 가난하게 나무꾼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의 천재적(天才的) 시인(詩人)으로서 재능(才能)은 당대 문인들에 의해서 높이 추앙되고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4대 시인 중에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정초부가 지은 동호(東胡) 시(詩)는 조선후기(朝鮮後期) 서정시(敍情詩)의 백미(白眉)로 꼽는다. 조선 정조 때 노비(奴婢) 출신(出身)인 정초부(鄭樵夫)가 남긴 시는 90수(首)가 초부유고(樵夫遺稿)가 고려대 도서관 소장본 다산시령(茶山詩令) 안에 필사본(筆寫本) 형태로 수록이 되어있다고 한다. 시제(詩題) 노초부(老樵夫) 시(詩)를 보면 면천(免賤)이 되고 나서 나무꾼으로서 가난한 생계를 이어가는 생활고가 시어(詩語)에 농축(濃縮)이 되어있다. 시인의 남은 생애는 늙은 나무꾼 신세, 지게 위에 쏟아지는 가을빛은 쓸쓸하기만 한데, 동풍이 장안 대로에 이 몸을 떠다밀어, 새벽녘에 동대문 제 이교를 걸어가노라. <翰墨餘生老採樵 滿肩秋色動蕭蕭 東風吹送長安路 曉踏靑門第二橋> 전날 산에 가서 나무를 해와서 새벽녘에 동대문으로 팔러 가는데 무건운 지게 짐을 바람이 불어 밀어주니 동대문 두 번째 다리를 새벽 별빛 아래 걸어간다는 늙은 나무꾼으로서 일상을 읊고 있다. 노초부(老樵夫) 시(詩)도 칠언절구(七言絶句) 측기식(仄起式) 시(詩)다, 압운(押韻)은 하평성(下平聲) 소통(蕭統) 운목(韻目) 중에 초(樵) 소(蕭) 교(橋) 한 운족(韻族)으로 놀랍게도 정확하게 작시(作詩)를 했다.
정초부(鄭樵夫)의 노년 생활고를 읊은 시는 구구절절(句句節節)이 애처롭다. 환곡(還穀)을 구걸하면 걸조(乞糶) 시(詩)를 보면 더욱 애절하다. 재능 살 줄 사람 찾지 못하여 76평생(平生)을 굶주리고 살았네, 산새들은 옛날부터 산 사람 얼굴 알고 있건만 관아의 호적에는 아예 늙은이 이름이 빠졌네, 큰 창고에 쌓인 쌀 한 톨도 나눠 갖기 어려워라, 강가 누각에 홀로 올라가 보니 저녁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네, 한밤중에 다락에 오른 것은 달빛 구경하러 오는 것 아니고, 아침 세끼 곡기 끊는 것은 신선 되려는 것도 아니네,<無人活白壁 七十六年飢 山禽舊識山人面 郡藉今無野老名 一粒難分太倉粟 江樓獨倚暮烟生 半夜登樓 非玩月 三朝壁穀 未成仙> 삼조(三朝)를 곡기를 끊었다는 것은, 신선 되려고 굶는 것이 아니고 양식이 없어서 굶었다는 뜻이다. 정초부(鄭樵夫)가 노복(老僕)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생활고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터인데 말이다. 노비(奴婢) 면천(免賤) 시켜준 여춘영(呂春永) 주인이 정초부(鄭樵夫)를 묻고 쓴 제초부문(祭樵夫文)이 못내 아쉬워 한 시(詩)다, 정초부 땅에 묻고 오는 길에 읊다, 저승에서도 나무 하는가? 낙엽은 텅 빈 물가에 떨어지는구나! 삼한 땅에 명문가가 많으니, 내세에는 부디 그런 집에 태어나시게나<祭樵夫文 黃爐亦樵否 霜葉雨空汀 三韓多氏族 來世托寧馨> 노복(老僕)의 빈궁(貧窮)한 생활을 돕지 못한 주인으로서 다음 생에는 꼭 명문가(名門家)에 태어나서 타고난 시재(詩才)로 마음껏 잘살려 보라고 부탁한 제문이다. 그나마 양반주인 잘 만난 덕으로 궁색한 노비 나무꾼이지만 면천이 되고 생활은 곤고 하지만, 서정(抒情) 시어(詩語)로 곤고한 노비의 생활을 하면서 명시(名詩)를 남겼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이 든다. 오늘은 조선 시대 반상제도(班常制度) 신분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나무꾼 노비로서 평생을 굶주리며 산 정초부(鄭樵夫)의 시(詩)의 운통(韻統) 운목(韻目)을 찾아보았다. 조선 최고 화가 단원 김홍도도 정초부 동호 시가 너무 좋아 화제로 삼았다고 한다. 여여법당 화옹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