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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 잃은 하나님과 하나님 잃은 나>의 줄거리: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담 이후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잃어버린 자인데 굳이 따로 찾으실 필요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공생애 때 만나는 모든 사람이 다 예외 없이 잃은 사람일텐데 무엇 하러 찾으실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잃은 자가 참으로 희귀합니다.
나 잃은 하나님과 하나님 잃은 나
(누가복음 19장 1절~10절)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 잃은 하나님과 하나님 잃은 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나 잃은 하나님과 하나님 잃은 나’
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찾아’라는 표현이 특이합니다. 잃어버린 자를 굳이 찾아야 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담 이후의 세상 모든 사람은 잃어버린 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만나신 모든 사람들도 예외 없이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이처럼 잃어버린 자가 지천에 널리고 발에 차이는 것이 현실이셨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굳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엇인가를 찾는 이유는 지금 당장 보이지 않고 함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함께 있기를 바라고 만나기를 바라는 대상을 찾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셔서 만나는 모든 사람은 잃은 자이며 구원이 필요한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찾는다는 표현을 쓰시며 구원받는 대상을 한정시키고 계십니다. 찾아야 될 필요가 있고, 찾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대상으로 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방 땅에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선민의 나라 이스라엘에서 구원받을 대상을 찾으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선민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구원받았기에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찾으시겠다는 말씀은 더욱 아닙니다. 그랬다면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나 서기관이나 대제사장들을 향하여 혹독한 비판을 하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찾으신다는 것은 오히려 선민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선민들은 이미 구원받은 자들도 아니었고, 잃어버린 자로서 구원을 기다리는 자들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를 놓고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말씀은 당연하게 생각되지만 이 말씀을 하신 대상이 선민들임을 염두에 둘 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시 세리들은 ‘허가 낸 도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미움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도착하신 여리고는 상업이 굉장히 발달한 곳으로써 가이사랴와 가버나움과 함께 팔레스타인 지방의 3대 상업도시로 여겨지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여리고는 향신료의 집산지로 유명하였기에 로마 정부가 여리고로부터 거두어들이고자 하는 세금의 양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리들은 세금을 거두어 할당량을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를 자신들이 착복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세리들의 우두머리인 세리장은 이러한 세리들을 관리하면서 자기 몫을 취함으로써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로마에 바칠 세금을 거둬들였기에 유대인들에게는 동족의 고혈을 빠는 매국노이자 로마의 앞잡이로 원성을 사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삭개오가 바로 이 세리장입니다.
앞서 맹인을 고치시는 사건도 있었고 예수님의 소문으로 인하여 여리고는 떠들썩하였습니다. 삭개오 또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궁금하여 구경을 나왔는데 사람들이 많고 키가 작았기에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뽕나무라고도 불리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고자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면서 하필이면 삭개오를 부르십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삭개오를 부르셨는지 알 수 없고, 삭개오의 이름을 어떻게 아셨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렇게 일어났다고밖에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어떻게 아셨는가가 아니라 그 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이면 세리장의 집에 머무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여리고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악당이고 배반자였습니다. 신약성경을 통틀어 세리장이라는 표현은 이 사건에서만 등장합니다. 세리장이라는 직업 자체가 욕과 동일시되던 사회적 분위기였기에,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부르실만한 영적, 종교적 이유가 전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책을 보면 삭개오가 체면을 불구하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간 것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이유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무척 표면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작 불꽃놀이를 구경하기 위해 온갖 좋은 자리를 찾아다니는 걸 생각해보면 당시 주목의 대상이었던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가는 것쯤은 대단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삭개오를 부르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군중들 속에서 계속하여 잃어버린 자를 찾고 계셨습니다. 그 과정 중에 삭개오가 눈에 띄게 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구경하고자 했을 뿐 다가가려고 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필요를 요청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를 보시고 그토록 찾으시던 잃어버린 자임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집에 머무시기로 하시고 9절에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는 공개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엄청난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은 메시아로 기대하던 예수님께서 죄인인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조차 불만스럽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등장하여 이방민족을 무찌르고 다윗 왕국의 재현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였기에, 이방민족인 로마의 앞잡이였고 동족의 고혈을 빨아 부자가 된 세리장과 친분을 가지신다는 것은 결코 좋게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에 그치지 않으시고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모독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심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혈통상의 아브라함의 자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나 서기관이나 대제사장들은 혈통상의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이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생각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기셨던 자들은 바로 예수님이 찾으시던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잃어버린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삭개오가 지명된 것을 염두에 둔다면 잃어버린 자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유대식 이름으로써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생활은 이름과는 정반대였습니다만 유대식 이름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가 유대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세리장으로써 선민사회에서는 완전히 배제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삭개오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즉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려진 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다만 잃어버려진 자로서의 자아의식은 삭개오의 전유물은 아니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잃어버려진 자의 자아의식을 갖고 살아갑니다. 잃어버려진 자의 자아의식은 갖고 싶거나 가까이 있고 싶은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마음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은 건강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잃음이라는 개념을 통해 표현해보자면 건강한 상태로부터 잃어버려진 자의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돈이 많은 부자의 상태로부터 잃어버려진 자가 된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거나 소원한다는 것은 그만큼 거리가 떨어져있다는 것이고 멀리 버려진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잃어버려진 자로서의 자아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미 모든 인간이 나름의 대상으로부터 꿈꾸고 소원하고 있는 한 잃어버려진 자로 살아가고 있기에 무엇으로부터 잃어버려진 자가 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삭개오는 바로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려진 자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삭개오를 찾게 된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몰려왔던 인파들 또한 잃어버려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바랐던 메시아는 로마를 무찌르고 다윗 왕국을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들은 스스로를 다윗 왕국으로부터 잃어버려진 자로 여기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이 땅에서 찾고자 한 사람은 다윗 왕국에서 잃어버려진 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려진 자였습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동물원으로 소풍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잠깐 마실 것을 사러 갔다가 아이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잃어버려진 자가 된 것입니다. 엄마의 이름을 영희 씨라고 해보겠습니다. 동물원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지만 영희 씨의 잃어버린 아이는 단 한 명입니다. 혹시 자기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가 또 있을지라도 이 아이가 영희 씨의 아이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영희 씨는 오직 자신을 엄마로 여기는 자아의식을 가진 아이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부모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렸다고 여기는 자아의식을 가진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오신 곳은 바로 선민의 나라였습니다. 아담 이후에 모든 인류는 다 잃어버린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로 선택하신 자들이 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선민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상실감을 느끼시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삼위일체 안에서 충만한 가운데 거하시기에 상실감을 느끼실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사랑하기로 결정하신 사람이 하나님께로 오지 않으면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상실감을 느끼게끔 하는 존재가 선민입니다.
하나님께서 상실감을 느끼도록 선택하신 선민들은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선민들은 엄마 잃은 아이의 자아의식을 되찾을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아이를 잃은 엄마의 상실감과 엄마로부터 잃어버려졌다는 아이의 상실감이 맞아떨어질 때만 만남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이 당신을 사랑하기를 바라시며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에게 엄마의 이름을 물어보면 대답하듯이, 선민들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조차도 스스로를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려진 자로 여기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재현 될 다윗 왕국에서 장관 자리를 꿈꾸며 스스로를 장관 자리에서 잃어버려진 자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태평성대로부터 잃어버려진 자가 되어서 울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없어서 우는 아이를 찾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예수님을 선민의 나라로 보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잃고 우는 선민이 어디 있나 찾아보시니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여리고에 오셨을 때 삭개오를 발견하시게 됩니다. 삭개오는 매국노인 세리장으로써 유대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버림받았습니다. 그렇게 선민의식을 가질 수 없음으로부터 스스로를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려진 자가 되었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렸다고 우는 아이의 심정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찾고자 하신 잃어버려진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려진 자가 되었다고 여기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 많은 무리 중에서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죄인으로 여겨지던 삭개오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건강으로부터 잃어버려졌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으로부터 잃어버려졌다고 여겼을 것이고, 세속적 성공, 배우자의 사랑, 자녀의 형통 같은 것들로부터 잃어버려졌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삭개오를 보시고 동물원에서 잃어버린 아이를 마침내 찾은 엄마의 심정이 되셨습니다. 엄마가 찾는 아이는 엄마가 없어서 우는 아이입니다. 잃어버린 아이를 아무나 내 자식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려진 자가 되었음을 깨달을 때 그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찾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리고 땅에 오셔서 보실 때에는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사람이 삭개오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삭개오를 쳐다보시고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부르시듯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별세를 향해 가시는 과정에 이 사건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삭개오를 통해 예수님의 별세 사건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잃어서 울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자리 중에 가장 낮은 곳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낮은 곳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마치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있고 예수님이 아래 계셨던 것과 같습니다. 삭개오는 나무 위에서 부르심을 받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도 바로 이 위치입니다. 높아지고자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나 추종자들은 다윗 왕국의 재현이라는 높은 비전과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 높은 곳에 앉혀 놓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다윗 왕국을 이루실 분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삭개오를 부르실 때처럼 언제나 낮은 곳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잃어버려졌다고 여기는 대상은 항상 높은 곳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높은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도 높은 곳에서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가짐으로는 십자가를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삭개오와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려진 자로서의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려서 우는 아이의 마음이 될 수 없다면 예수님이 계신 낮은 곳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삭개오가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만날 때에 그 마음 또한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8절을 보면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까지 삭개오의 자존감의 유일한 근거는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돈을 쌓아놓고 그 위에 올라섰지만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늘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려졌다는 생각이 그치지 않았고, 동물원에서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우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자 그렇게 바라던 하나님을 찾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자존감의 근거였던 돈은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위치로 낮아지기 위하여 돈을 없애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응답하는 자들의 특징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아깝게 여겨서 쌓아두었던 세상 것들을 마음으로부터 없애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자들에게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가짐은 십자가라는 가장 낮은 곳에서 부르시는 예수님에 대해 응답할 수가 없습니다. 쥐꼬리만큼의 쌓아올림조차도 마음에서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이 계신 낮은 곳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높은 곳으로부터 버려졌다는 자아의식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려졌다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없음에 대해 울고 있는 삭개오 같은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만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찾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선택하셨기에 나를 잃었음에 대해 상실감을 느끼고 계십니다. 사랑하기로 결정하셨기에 잃었음에 대한 상실감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그 상실감에 대해서 아버지가 없이 우는 아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응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돈이 없다고 울고, 형통이 없다고 울고, 건강이 없다고 울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는 이유는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어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어떤 불만이 생길 때에 그 이유가 아버지가 계시지 않기 때문임을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해서 우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만은 돈이나 결혼이나 건강이나 형통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없는 것을 모든 불만의 이유로 삼는 자만이 주님이 찾으시는 잃은 자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에 대한 상실감을 느끼고 울며 찾는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기쁘게 예수님이 계신 가장 낮은 곳인 십자가를 향해 내려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삭개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을 부를 수 있도록 우리 입에 이름을 넣어주셨습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나님이 안 계심을 울면서 기다리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이 찾으시려는 잃어버려진 자가 됨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구원을 삭개오처럼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