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독립
시드니 코리아타운
2025. 6. 1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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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캔버라에서 일해봐도 될까?” 졸업을 앞두고 직장을 알아보던 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시드니가 아닌 다른 도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딸의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딸은 대학에서 커머스와 디자인을 전공했다. 성적도 괜찮은 편이었고, 학업 중에도 전공에 맞는 파트타임 일을 하고 있었기에 풀타임 직장을 쉽게 구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시드니가 아닌 다른 도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딸의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시드니에서 직장 구하는 것이 힘들어서 그러는지 물어봤지만 그건 아니라고 했다. 걱정은 되었지만, 자기 생각과 의지가 확실하였기에 남편과 나는 딸의 결정을 지지하기로 했다.
“엄마, 캔버라가 시드니에서 3시간 정도 거리밖에 안돼. 친구들도 번갈아 가면서 오기로 했고, 나도 주말에 자주 올 게요. 엄마 아빠도 바람 쐬고 싶을 때마다 내려와서 같이 지내요”
곰살궂게 너스레 떠는 딸을 보며 그저 웃음만 나왔다. 그나마 먼 외국이 아닌 호주 안의 도시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부터 캔버라는 내게 새로운 의미가 되었다. 지도를 펼쳐 도시 안을 살펴보기도 하고 텔레비전에서 캔버라 관련 뉴스가 나오면 귀를 쫑긋 세웠다.
캔버라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한국에서 친척들이 방문했을 때 몇 번 가봤다. 캔버라는 호주 수도보다는 관광지라는 이미지가 더 많은 도시였다. 딸이 이사와 정착을 위해 캔버라에 대해 여기저기서 정보를 수집했다. 딸은 일찍부터 친구들을 통해 같이 살 룸메이트도 알아보고 집을 구하는 것도 구체적으로 움직였다. 딸이 혼자서도 준비를 잘하는 것을 보고 정작 딸에게 필요한 건 부모보다는 친구들의 관심과 그들 만의 응집력으로 뭉친 정보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 수 있었다. 학업을 위해 캔버라에서 온 대학 친구들도 꽤 있었고 친구들의 고향으로 휴가를 떠나 여러 곳을 탐색했다. 딸의 독립이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드디어 떠날 날이 되었다.
딸이 이삿짐을 싸기 시작하면서 나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넌 혼자서 방 2개를 쓰는데도 그 동안 정리도 안하고, 도대체 이 짐들이 어디서 이렇게 나온 거니?” “엄마, 구석 구석에 박혀 있는 걸 꺼내다 보니 이렇게 많네. 걱정하지 마, 앞으로는 가끔 치워주는 엄마도 없으니까 잘 치우고 살게요. 앞으로 엄마 잔소리 받아줄 사람이 없으니 이제 우리 엄마 심심하겠네” 늘 그렇듯이 잔소리도 살가운 웃음으로 넘기고, 짐을 싣고 캔버라로 떠났다.
이사 후 방에 남겨진 딸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일어났다. 작년 9월부터 예정된 일이라 마음의 동요는 없을 거로 생각했다. 딱히 슬픈 것도 아닌데, 허전하고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흔히들 성인 된 자녀들이 집을 떠나 독립을 하면 부모들, 특히 엄마들은 ‘빈 둥지 증후군’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 증후군은 새끼 새가 자라 둥지를 떠난 후 빈 둥지에 어미 새만 남은 것처럼 자녀가 독립한 후 양육자가 느끼는 공허함과 슬픔을 뜻한다고 한다. 6년전에 먼저 독립을 한 아들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그 때는 딸이 아직 우리의 그늘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차츰 적응이 되겠지만, 두 자녀가 빠져 나간 자리는 몹시 쓸쓸했다.
자녀를 잘 양육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부족한 부모였다. 이민자로 살아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과 깊은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사춘기의 고민을 홀로 삭이면서 아파했던 일을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후회와 미안함으로 밤을 지새며 울기도 했다. 그저 잘 자라서 자기의 길을 잘 걸어간다고 대견하다고만 생각했다. 아이들은 부모가 밤낮으로 일하며 힘들게 사는 모습에 차마 사춘기의 혼란함을 표현할 수 없었다고, 부모에게 실망을 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부모들만 이민자로서 이방인의 삶을 숨 가쁘게 버티고 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녀들도 부모 못지 않게 힘들다. 두 가지의 언어와 문화, 정체성의 성장통을 겪으며 안간 힘으로 살아야 했다. 그 때는 왜 몰랐을까. 아이들도 살아 내기 힘들고 삶이 버겁다는 것을 말이다.
지난주에 영상 통화를 하는 중에 “엄마, 지난 목요일에는 집에 와서 우울한 기분이 들었어. 엄마 밥도 그립고, 친한 친구들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좀 다운됐어요. 근데 걱정마요. 지금은 괜찮으니까.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뭐. 직장 사람들도 친절하고 같이 사는 Sonya 와도 대화가 잘 통해서 친해졌어요” 우울해 졌다는 딸의 말을 듣고 가슴 한 쪽에 아릿한 느낌이 들었다. 독립을 해서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부모는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과 마음이 쏠리는 것은 모든 부모의 숙명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은 캔버라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일을 하다 보면 인간 관계의 폭도 넓어지고, 이미 형성된 사회성이 더 구체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예측 불허의 인생 길에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숭고함을 부여하며 사랑하는 딸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젠 우리 걱정하지 말고 두 분이 하고 싶었던 일 많이 하고 재밌게 지내세요” 아이들은 전화할 때마다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성인 자녀의 인격적, 경제적인 독립이 부모 역할인데 그 역할을 잘 마쳤다고 스스로 위로해본다. 지금까지는 자녀가 부모의 동력이었다면 이젠 그 동력을 자녀로부터의 독립을 즐기며 사는 시간으로 채우면 된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었지?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찾아가는 여정은 행복할 것 같다. 꿈을 찾아가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으니까.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할 때 많은 제약이 없어서 이 또한 얼마나 다행인가. 아이들 독립이 던진 의미가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날마다 시드니의 날씨를 확인하면서, 아들이 있는 뉴욕의 날씨도 함께 확인했는데 이젠, 딸이 있는 캔버라의 날씨까지 날씨 앱에 포함시켰다. 아이들이 늘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바람이 부는 날이든, 비가 오는 날이든 인생의 험한 길 도중이라도 아빠 엄마의 집은 늘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을 말이다. 딸의 새로운 인생의 길이 따뜻했으면 좋겠다.
임을옥 (문학동인캥거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