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시편 외 9편 / 장성호
이방인시편
- 사랑은 & Dance Macabre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가로등 오렌지불빛이 숲 속에 스며든다
키 큰 메타세쿼이아 나무 주위에서
서성이던 한 이방인
젊은 시절의 회한에 잠겨있다
하는 일마다 망하고
사랑과 이별을 밥 먹듯이 하던 지난 시절
늘그막에 홀로 되어 손수레 끌었다
이제 잠시손수레 손잡이 내려놓고
밤하늘의 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큰 별 하나가 그에게 묻는다
지금 원하는 게 무엇인지요
그는 긴 침묵 속에 잠기더니
핏기 없고 부르튼 입술 달싹거리며 답한다
삶의 뒤안길에서 정말 다시 한 번
매혹적인 사랑을 하고 싶어요
그 이후로 그는 숲 속에서 보이지않는다
저기가로등 유리갓에 밤새 뛰어들던 불나방들
새까맣게 죽어있다
숲 속에 이미배가 부르는 노래
‛사랑은 & Dance Macabre’ 끝없이 들려온다
이방인시편
- Before the Dawn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찬바람이 몰아치던 지난밤
고대하던 그 사람이 당도했다
그는 눈썹까지 허옇게 세었다
누런 얼굴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그녀의 가슴
촉촉이 젖어왔다
일 년에 네댓 번 만남 고대하며
한 평생 모질게 살아왔다
그 기다림은 천년의 시간 같았다
그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올 때는 내내
그녀 곁에 있을 줄 알았다
이른 아침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들렸다
그 사람은 먼 길 떠날 채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밤마다 잠꼬대했다
아침이 와 그 사람을 데려가지 마세요
제발 모든 걸 가져가지 마세요
숲 속에 동이트기 전 눈발이 잦아진다
황토 바닥에 내린 흰 눈이 점점 녹아내리고 있다
주다스 프러스트가 부르는 노래
‘Before the Dawn’ 선율이 그녀의 가슴을 적신다
이방인시편
- 콜레라 시대의사랑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떡갈나무 아래 나무 벤치위에
나이든 연인이 서로 몸을 포갠 채
두 손을 붙잡고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그가 그녀에게 말한다
어렸을 때 난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지요
당신의 숨결마다
당신이 내딛는 발걸음마다
당신이 내뱉는 말마다
당신이 웃고 있을 때마다
난 당신을 지켜보며 기다렸지요
당신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을 때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당신이 나의 전부라는 걸 당신은 몰랐을 거예요
숲 속 불면의 밤마다
당신과 함께 있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도 당신의
얼굴만 떠올렸어요
난 당신에게 사랑의 맹세가 담긴 편지를 바람에 실려 보냈지요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가난한 청년 플로렌티노가
부유한 상인의 딸 페르미나와 함께 하기 위하여 53년 7개월 11일 밤
과 낮을 기다려온 것처럼 말이에요
그는 그녀에게 묻는다 혼자 있고 싶나요
그녀는 그에게 말한다 그랬더라면 이제까지 당신의 이야기를 듣지
도 않았겠지요
저기 도토리 향내 나는 나무 벤치 위에 벌레 먹은 떡갈나무 잎 두
장 서로 포개져 하나가 되어있다
숲 속에는 샤키라가 부르는 노래 ‘콜레라 시대의 사랑’ OST 끝없이
흐른다
이방인시편
- Yesterday when I was young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한창때200미터트랙
질주 본능으로 달렸던 머리허연 그 사람
더 이상 작은 돌 하나 올려놓을 공간 없는
돌탑에서 서성이고 있다
젊었을 때 돌 하나 올려놓지 못한 게 그의 눈에 밟힌다
푸른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처럼 회한이 밀려온다
경주마처럼 살아온 지난날
그의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때 조련사 덕분에 그의 심장과 다리가 남보다 튼튼했다
운이 많이 따랐지만 기수 덕분에 우승도 여러 번 했다
수많은 관중의 환호와 박수 갈채에 가슴이 뛰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밤에는 황제의 혀처럼 향락에 길들여갔다
어느 날 트랙을 달리다 힘에 부쳐 넘어져
마구간에 있는 신세가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쓸쓸히 무대에서 사라졌다
엉덩이 푹 꺼지고 다리절뚝이는 저기 말 한 마리
돌탑 주위를 맴돌고 있다
멀리 서로이클락이 부르는 노래
‘Yesterday when I was young’
가슴 시리게 울려 퍼진다
이방인시편
- To Treno Fevgi Stis Okto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메조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의노래
‘To Treno Fevgi Stis Okto’
가슴 시리게 울려 퍼진다
하얀 숲 속 모퉁이가로등 아래 목이긴 여인
낯선 이방인과의 깊은 회상에 잠겨있다
꽃향기 날린 그때
그는 그녀 곁에 다가와 떨리는 목소리로 함께 샹송을 불렀다
햇살 좋은 그때
그는 그녀 곁에 기대어 옛이야기를 나눴다
안개 자욱하게 낀 그때
그는 그녀 곁에 엎드려 입맞춤했다
산들바람 분 그때
그는 그녀 곁에 잠들어 그녀의 꿈을 꾸었다
드디어 첫눈 내린 그때
그녀는 그가 오기만을 고대하며하얀 밤 지새웠다
가로등까지 불빛을 던지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고요한 가슴을 건드렸던 지난 시간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시린 추억이 그녀 가슴에 스며든다
하얀 숲 속 모퉁이가로등 아래 목이긴 나무 벤치
그 위에 무심하게 눈이 쌓여만 간다
이방인시편
- 녹턴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달빛 아래 옷깃을 여민 한 이방인이 나무 벤치에 기대어 서있다
가파른 절벽 위 걷는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뜬다
여윈 뺨 위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파르르 떠는 그녀의 입술
그의 가슴 속에 뜨겁게 떠오른다
가슴이막 뛴다
숨이 점점 막힌다
슬픈 그녀의 얼굴
그의 가슴속에 선명하게 그려지다가
이내 희미하게 사라진다
눈물이 또 난다
달빛도 점점 희미해진다
숲 속에 초연하게 핀 연보랏빛 쑥부쟁이꽃잎이 흩날린다
이은미가 애타게 부르는 노래‘녹턴’
선율에 그의 목이 점점 멘다
내 사랑 그대
이제 나를 떠나간다
이방인시편
-안나 카레리나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한여름 밤 오렌지불빛 아래
한 여인이 뜨거운 길바닥에 뛰어들었다
달리는 기차처럼 건장한 사내들이 지나갔다
그녀는 성호를 긋고 그들의 발바닥 밑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의 몸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졌다
그녀의 주변 친구들이 말을 전했다
그녀는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다른 한 남자를 사랑했어요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지내왔어요
최근 백 년 만에 무더위에도 매일 찾아와
사랑을 속삭였던 그 사람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녀에 대한 사랑이 찬밥처럼 식은 것으로 생각했나 봐요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안나처럼
스스로 몸을 던진 것 같아요
이 소식을 들은 그 사람은 형벌을 받은 사람처럼
거의 폐인이 되었지요
길모퉁이황금색 들꽃 군락에서
눈에 띄게 목이긴 금불초가 있던 자리가 텅비어있다
숲 속에는 원수 갚는 일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는
탄식하는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방인시편
- 유리알 유희
서초 고속도로변오솔길
숲속 키 큰 나무 사이 얼굴이 검붉은 한 이방인
고해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는 바람 소리와 새소리 들으며 고요 속에 잠겨있었다
건너편 오솔길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웃음소리를 그리워했다
그는 기우제 드리는 기우사처럼 제 목숨 내놓을 테니
단 한 번만이라도 소원 들어 달라며 기원했다
흰 눈이 내리고 또 눈이 녹아 오솔길에는 살얼음이 꼈다
마침내 그의 가슴 속에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그럴수록 그의 온몸은 찢기고 파헤쳐져 맨살이 드러났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유리알 유희’의주인공 유리알 유희명인
요제프 크네히트가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이렇게 말했을것이다
카스탈리엔 영재같은 그대여
소란스러움이 그대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할지라도
불멸의 명랑성 잃지 마시오
언젠가 다시 새살이 돋고
고전음악처럼 초인적인 고요가 깃들게 될것이오
숲속 키 큰 나무 사이 검붉은 낙엽이 파헤쳐진 길 없는 길에
새롭게 낙엽들이 하나씩하나씩 채워지고 있다
이방인시편
-애련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숲 속 하늘 위에 떠다니는 흰 구름 바라보며
홀로 고독에 빠진 여인
이미 배가 부르는 노래‘애련’의 노랫말이 들려오자
가슴속 깊이 한 맺힌 응어리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온다
온몸에 풋풋한 생기가 돌던 그 시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함께 말을 섞으며
그녀를 포근하게 안아주던 그 몸짓
숲 속에 날이 추워지고 어두워지자
그 사람과의 살가운 추억의시간이 자꾸 떠올라
그녀는 목이 멘다
그녀의 구멍 난 가슴은 어떤 것으로도 메울 수 없을 것 같다
그 사람이 끊임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고
그녀는 상상한다
스쳐지나간 모든 시간들
사랑의 그림자 되어내 곁에 끝없이 머물게 해 주오
스쳐지나간 모든 추억들
슬픔의 그림자 되어내 곁에 끝없이 머물게 해 주오
숲 속에 찬바람 불어오자
잎사귀다 떨어진 떡갈나무
오지 않는 그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이방인시편
- 롤리타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푸른 하늘에 떠다니는 흰 구름처럼
정처 없이 떠도는 한 이방인
길을 걷다가 봉긋한 복숭아 볼살의 한 소녀와 우연히 마주친다
햇살이 비치면 아몬드처럼 생긴 눈은 조개 무늬처럼 빛난다
속눈썹은 나비날개처럼 파르르 떨린다
롤리팝을 입에 문 채 입술엔 립스틱이 번져있다
그녀는 길에 땋은 머리에 나이는 13살 키는 145㎝ 몸무게는 35㎏
손에는 늘 분홍색 잡지가 들려있다
그는 환상 속에서 그녀와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이야기꽃을 피운다
찬바람이부는 날이 오자마자 복숭앗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는 복숭아 볼살을 찾아 길을 헤맨다
그 어느 날 숲 속에서 어린 새들과 나무들과 풀들이 만들어내는
오묘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에 들려온다
그 거룩하고 신비로운 화음 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더 이상 없다는
것에
그는 절망한다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의 험버트 험버트가 이 광경을 보았더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영혼이여, 롤-리-타
저기 목백일홍 마지막 꽃잎
바람에 날리고 있다
그 곁을 지나는 한 이방인의 성긴 흰머리위에
분홍색 나비 한 마리 앉아 있다
■ 시작노트 -----------
오솔길은 물리적으로 폭이 좁은 호젓한 것이다. 그러나 의미론적으로는 익명의 존재자들이 걸어가는 대지의 띠다. 길은 공간에 대한 경이로움의은유다. 길 한 토막 한 토막 그 자체에하나의의미가 있어 우리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길 위의 사람은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의 망 위에얹혀있는 동물이다. 길의세계에는 인간의희노애락애오욕의감정이 녹아 있으며 길은 지속적이며언제나 변한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우리에게 걸음을 멈추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이방인 시편을 통해서 존재자들의 고통과 슬픔을 은유적으로 노래한다. 이 시편들은 서초 고속도로변 이방인들에게 바치는 글이다. 길의 세계는 상대적인 관점에서어머니의세계다. 여성성의세계다.
반면에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는 두 지점을 목적론적으로 연결해 준다는 의미밖에 없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공간이란 그저 이동의 한 장애요, 시간 손실에 불과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정말 가슴 아픈 현실이다.
오솔길에 들어서면 신비한 자연의 소리들이 쉼 없이 들려온다. 수많은, 색다르고 차이 나는 존재들이 한데 어울러져 내는 오묘한 화음이다.마치 수많은 차이나는 물방울들이만들어내는 단 하나의바다와 같다.
시인 루이 아르공은 말했다. ‘남자는 여자의 미래다’ 그렇다. 인공지능및 소프트웨어 발전 등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다가갈수록 사회는 더기술적이고 더 차가워지고 더 전자기계적이고 금속성으로 변한다. 그래서 감성적인 열기를 필요로 한다. 이 열기는 오직 여성성만이 제공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여성성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괴테는 말했다. ‘영원한 여성성이저높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는구나’.
ㅡ『우리詩』2018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