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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וַיֵּלֶךְ 바옐레크" : 토라포션 알리야(Aliyah) in 5781
신29:10-30:20(To), 사61:10-63:9(Haft), 롬1:10-22(Brit), 호1-14,욜1-3,암1-4,옵1(Ne), 시138-145(Ke)
샤밭 예배
우리가 예쉬 리 콜, 나에게 콜이 있다가 무엇인지 안다면, 에서는 예쉬 리 라브, 겁나게 많다, 부자라고 이야기한다. 지원이 같으면 얼른 에서를 쫓아갈텐데, 예쉬 리 라브, 돈 겁나게 많다? 그런데 야곱이 쫓아가지 않는다. 콧방귀도 안 뀐다. 예쉬 리 콜, 나는 콜을 가지고 있다.
ישׁ 예쉬 : 있다, 현존한다
현존을 이야기할 때 예쉬라고 한다. 주님이 이 현존에 있어서 콜, 나에게 현존하는 것이 뭐냐? 내가 지금 현존한다, 존재한다, 라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 존재하는 것이냐는 것이다. 우리는 류지원이라는 모양이 현존한다고 생각을 한다.
얼마 전에 평화가 태어났다. 얼마나 놀라운지 모른다. 평화는 지금까지 애를 낳은 엄마 중에 가장 늦게 젖이 나온 케이스이다. 보통 그러면 울고 난리가 나고, 살이 빠지는데, 얘는 어찌나 평화스러운지, 이틀 넘게 굶은 애 같지가 않은 것이다. 48시간이 넘게 엄마 젖이 안 나오는데도, 얼마나 평화스러운지 모른다. 오늘 젖이 나왔다고 한다. 평화가 이 땅에 왔다고 하는 것은 현존하는 것이다. 그 몸뚱아리가 있으면 현존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현존은 오로지 כל 콜이 현존한다. 이 한 개인을 현존이라고 하지 않는다. 전체가 항상 현존한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깨우치고 각성해야 한다. 사람이 깨우침이 없고, 각성이 없으면, 짐승같이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과연 누구냐라고 하는 것을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살아야 한다. 나는 누구로 살아야 하는가? 에서가 예쉬 리 라브, 겁나게 많다, 번성했다, 돈 겁나게 많다, 지금으로 따지면 세일 산 일대가 다 에서 것이었으니, 진짜 부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에 야곱이 꿈쩍을 안 했다. 야곱이 살아온 인생은 단순히 이 땅에서 무엇을 많이 가지기 위해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물질을 얼마나 누리느냐, 여기에 있지 않고, 어떤 인간이 되느냐에 있었다. 삶의 목적, 하루하루 숨쉬는 목적이, 이 땅에서 무엇을 가지느냐? 그래서 물질의 가치를 두는, 자기는 뭔지 모르고,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그저 욕망의 덩어리인 것이다. 자기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도, 되어야 할 목적도 모르고, 물질에만 가치를 두고, 내가 무슨 일을 행했는가, 어떤 지위에 올랐는가, 어떤 권력을 잡았는가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에서의 삶일 것이다.
야곱은 그러지 않았다. 야곱은 인간으로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 내가 도대체 누구인가? 에서는 자기의 현존을 물질에 두었다. 자기의 재산에 두었다. 자기가 소유한 것에 두었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의 현존을 자기의 소유에 두지 않았다. 야곱은 자기의 현존을 콜에 두었다.
콜을 뒤집으면 לך 레크가 된다. 콜은 어떻게 얻냐면, 레크로 얻는다. 바옐레크, 레크 레카. 토라의 시작은 아브라함에 의해서 시작된다. 아브라함은 인류에게 인생을 알려주었다. 너희들이 라브, 많은 재산을 얻으려고 사느냐? 그것이 아니다. 너희들의 정체성이 무엇이냐? 레크 레카이다. 너에게로 가라. 너에게로 끊임없이 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여러분들의 출세가 목적도 아니고, 여러분들의 재산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Ministry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해서 잘 사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에게로 가는 것이 목적이다.
콜 = 하욤
베트 -------------------> 타브
레크 레카, 그런데 여기서의 카가 단수형이다. 너에게로 가라. 시작이 되었고, 끝이 온다. 이 전체가 너이다. 이것을 콜이라고 한다. 이 부분부분들이 모여서 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야곱은 예쉬 리 콜이 있다. 내 현존은 이 전체를 가는 우주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 전체의 우주를 지배하는 그 능력을 하나님의 손이라고 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리고 그 손(י)이 나타나는(ו), 그 공간(ם)을 יום 욤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전체를 하욤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욤에 산다고 하는 것은 현존을 산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욤에서 살면, 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살게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티슈리월에 왔다. 티슈리월은 에프라임의 달이다. 에프라임은 열매 때문에 고생을 한다. 열매가 에프라임의 가장 핵심이다. 신의 열매이다. 신의 열매를 아주 풍성하게 맺는 것이 에프라임의 데스티니인 것이다.
우리는 이 달에 에프라임으로 말미암아, 또 새로운 시작을 할 수가 있다. 이 하욤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작을 하는 힘이다.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에프라임의 힘이 없으면, 새로운 시작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달 자체는 우리로 하여금 또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한다. 우리의 삶은 레벨로 구성되어있다. 그래서 한 레벨을 시작해서, 이 레벨의 중간 끝쯤에 오면 우리는 자기 스스로 전문가가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 자기 스스로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마지막 때쯤 오면, 우리는 여기서 머무르려고 한다. 자기가 얻은 자기 관념, 자기 생각, 자기 진리라고 한다. 이것을 가지고, 여기에 머무르려고 한다. 여기서 자기가 지위를 가지고, 자기 생각이 맞다고 칼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를 만나도, 나도 살아봤으니까, 내 경험이 얻은 것을 가지고, 그것을 자기 관념, 사상으로 삼아서, 그래서 이 레벨에 속한 것들 속에서 자기가 지위를 가지려고 한다. 우리는 이것을 꼰대라고 한다고 했다. 꼰대는 절대로 뭐가 변하면 안된다. 자기가 얻은 관념을 사용하려면, 세상이 변해서도 안된다. 세상이 변하면 큰일난다. 세상은 안 변해야 한다. 그래서 꼰대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물질이다. 물질은 한번 규정하면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의자라고 규정하면 그대로 있다. 내가 규정한 대로 그대로 있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구들, 내가 규정한대로 그대로 있다. 한번 탁자면 탁자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 우주 전체, 콜이란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 샤나 토바라고 하는 것은, 좋은 변화이다. 샤나 토바라는 것은, 1년 동안 꼰대짓하지 말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끊임없이 높아지라는 소리이다. 여기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자기 관념, 생각, 진리를 버려야 한다. 이것을 넘어가게 하는 힘을 에프라임이라고 한다.
אפרים 에프라임이 가지고 있는 힘은 굉장히 놀라운 것으로서, 에프라임의 히브리어 글자는 라메드이다. 라메드는 히브리어 글자 중 가장 높이 솟은 것이다. 그래서 위의 세계에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그리고 페라고 하면, 입구, 구멍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위의 세계에 접속해서, 구멍으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에프라임이다.
사실 이 위로 올라가려면, 자기 관념, 자기 생각, 진리를 버려야 하는데, 다음 단계에 대해서는 너무 아는게 없다. 그래서 올라갈 수가 없다. 이것을 어떻게 얻은 것인데, 이것을 버리고, 전혀 다시 0 상태가 되냐는 것이다. 또 다시 쫄따구가 되냐는 것이다. 우리 정원이가 가양대교에서 새벽 6시까지 놀면서, 해장국 먹고, 목마르니까 한잔 더 하고,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렇게 하면서 얻은 생각, 진리, 이런 것들을 버리고, 다시 여기에 오니까 완전 꼬드바리다.
이 새로운 출발이란 쉽지가 않다. 새로운 출발을 하려면 라메드가 필요하다. 올라간다고 할 때, 이미 위의 세계에 모든 것들이 예비되어있고, 준비되어있다는 믿음 속에, 위의 세계의 것을 터치하는 것이 필요하다. 위의 세계의 것을 터치하면, 이것을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Touch the sky이다. 위의 세계의 것을 어떻게 터치하느냐? 내가 이 땅에서 얻은 나의 생각과 진리로는 절대로 터치할 수 없다. 내가 맞다, 틀리다, 나의 판단, 선악에 대한 시비를 가리는 논쟁, 이런 논리, 형이하학적인 논리를 가지고는 절대로 위의 세계를 터치할 수 없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점핑, 새로운 출발, 시작을 못한다. 그러면 위의 세계를 터치하는 그 힘은 무엇이냐? 그것을 십자가의 노래라고 한다.
תשׁרי 티슈리라는 것은 슈르, 노래이다. 사람이 이 땅에서 자기 관점, 자기 중심, 이것은 다 아주 낮은 단계의 시비를 가리는 것 밖에는 할 줄 모른다. 네가 맞네, 내가 맞네, 이것 밖에는 할 줄 모른다. 그러면 사람이 이 땅에서 자기가 만들어놓은 자기 관념이 아닌, 이게 생기기도 전에 있었던 세계의 것을 내리는 것을 노래라고 한다. 이 티슈리월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노래를 주시게되길 축복한다.
그래서 이 티슈리월은 노래하는 달이고, 노래는 שׁור 슈르, 담장, 벽이란 뜻이 있다. 사람은 다 벽에 의해서 분리되어있다. 그런데, 노래는 이 벽을 넘는다. 요셉에게 있는 예언이 이 벽을 넘는 것이다. 요셉은 정말 놀라운 주님에 대한 프로토 타입이다
창49: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요셉에 대한 예언은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특별히 에프라임에 대한 예언이다.
בֵּן פֹּרָת 벤 포레트 : 열매의 아들
나는 포도나무요 너는 가지라고 할 때, 주님이 이것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요셉은 열매의 아들이다. 샘 곁의 벤 포레트인데, 그 뒤에 굉장히 특이한 말이 나온다
בָּנֹות צָעֲדָה עֲלֵי־שֽוּר 브노트 짜아다 알레이-슈르
브노트 : 딸들 = 가지로 번역
슈르 : 담장
바트, 딸이란, 베트 -> 타브까지 가는 것인데, 이 사이에는 수많은 담들이 있다. 벽이 있다. 그래서 그 뒤를 볼 수가 없다. 다음이 뭔지 모른다. 여러분들이 세대와 세대를 거쳐서 가지만, 여러분들의 세계, 여러분들이 겪어야 할 것들 너머를 볼 수가 없다. 이 벽 때문에 말이다. 이름은 반석, 지원인데, 하나님은 널 끊임없이 서포트하시고, 지원하시는 분이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 세상에 저렇게 돈 많은 금수저도 많은데, 난 왜 이렇게 돈 없는 년으로 만드셨어요? 차라리 만들지나 말던지. 그러면 또 설명을 해준다. 알겠다고 해도, 그 다음주에 나는 왜 돈이 없는거에요? 하나님이 너를 지원하시고, 서포트하신다. 반석이는 왜 돈이 없는거에요? 반석이 돌 밖에 더 있는가? 반석이 10월이면 쿠웨이트 가는거에요? 벽이 있어서 안 보인다. 벽이 있어서 지금 하나님이 너에게 모든 것을 주셨듯이, 앞으로도 계속 주실 것이다. 그런데 그 앞이 벽이 있어서 안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맨날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때 많이 가지고 있어야지, 자기가 금수저여야지, 그래야 그 벽 너머에 있는 불안한 상황, 무엇이 올지 모르는, 내가 가난하게 될지도 모르고, 굶어죽을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해소가 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과정은 다 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만약에 이 벽을 넘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된다. 내가 여기서 생존 방법을 터득했다? 끊임없이 나는 없다고 징징거려야 뭐라도 하나 생긴다. 우물 안 개구리이다. 우물 안 개구리에겐 대해를 논할 수 없다고 한다. 한철을 사는 곤충에게는 한 해를 이야기해줄 수 없다고 한다.
제가 토라에서 계속 콜, 전체를 이야기하고, 그게 메시아이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런데 그 하나님과 그 메시아와 너희가 하나이고, 너희가 콜이고, 현존이라면, 그리스도가 유일하게 현존이시다. 내가 현존한다면, 내가 그리스도이고, 지금, 하욤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것이고,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아무리 이 하욤을 이야기해도 알 수가 없다. 하루살이이기 때문이다. 이 벽 안에 갇혀서 자기가 거기서 얻은 생존방법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에프라임, 티슈리월을 통해서 그 담장을 넘는 딸들이라고 한다. 베트부터 타브까지 가는 딸들이 여기를 넘는다. 이 담장을 넘는 것을 노래를 한다고 한다. 노래라고 하는 것은, 논리가 있는게 아니다. 노래는 씨이다. 노래는 이 세상의 개념을 쓰는게 아니다. 노래는 이 전체에 접속을 해서, 무엇인가 그 전체 속에 있는 것, 콜 속에 있는 것을 내리는 것이다. 노래는 소리로 한다.
קול 콜 : 소리
소리가 어디서 나는 것일까? 내가 소리를 내는 것인가? 내 욕망의 소리는 소리가 아니다. 이 티슈리월에 시작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티슈리월은 노래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에프라임은 다 페로 시작한다. 페는 다 구멍이다. 인간은 구멍으로 되어있다. 인간에게는 아홉개의 구멍이 있다고 한다. 이 구멍을 통해서 인간은 보고, 듣고, 맛 보고, 냄새 맡고, 싸고, 하면서 인간의 삶이 나온다. 그런데 인간의 삶 속에서, 모든 인간이 감정을 표현하고, 인간이 자기 소리를 낸다. 그래서 이 우주에는 바람이 부는데, 이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고, 이렇게 바람이 불자, 노아의 방주 때 물이 빠진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끊임없이 바람이 불게 하신다. 그러면 각자에게 있는 구멍에서 소리를 낸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감정을 그렇게해서 내는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한 바람이 불어온다. 유행, 이런 것은 다 바람의 편인데, 바람이 불면 사람마다 내는 소리가 다 다르다. 우리도 어떤 사람에게 바람을 집어넣으면, 어떤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막 화를 낸다. 어떤 사람은 좋아한다. 이것을 노래라고 한다. 각 사람은 각 사람의 노래를 한다. 모든 사람의 노래는 다 다르다. 그래서 이 구멍에 의해서 각 사람은 노래를 한다. 그 노래, 그 소리는 어디서 오느냐? 왜 각 사람은 다른 소리를 내냐는 것이다. 내가 이 땅에서 얻은 것을 가지고 그 소리를 내지 않는다. 내가 내는 소리는, 이미 전체 중에서 결정되어있다. 나는 전체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표현하는 아주 고유한 한 부품이다. 나만이 소리를 낸다.
너희들이 내 소리를 준행한다. 내 소리를 따른다. 내 소리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다 그것이다. 사실 하나님 전체가 소리이시다. 이 베트에서 타브까지 전체가 소리이다. 그래서 우주, 하욤은 그 전체가 소리이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다라고 하는데, 다바르라고 하면 소리의 다바르를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말씀이라고 했을 때, 소리의 다바르를 이야기한다. 그것을 문자로 썼다고 하는 것은, 소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이지, 문자가 더 높지 않다. 소리가 더 높다. 하나님은 전체가 소리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드러나냐면,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그 소리를 맡겼다.
여러분들은 하나하나는 하나님의 피리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서 나는 소리는, 하나님이게 되어있다. 그 소리를 다 합치면, 하나의 노래가 되는데, 이 노래 전체가 하나님이다. 그래서 24 장로들이 노래하는 것이고, 노래 자체가 그냥 하나님이다. 그 전체가 말이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아마 찬양팀들은 잘 알텐데, 누군가 하나가 다른 소리를 낸다. 그건 정말 큰일난다. 이번에 우리 수완이가 You raise me up을 부르면서 정말 고 목사님이 너무너무 감동하고, 조쉬 그로반보다도 더 노래를 잘 부른다고 칭찬을 하셨다. 정말 감동하시고 있다가 갑자기 감동이 싹 사라지는 순간이 있었다. walk인데 work라고 한 것이다. 평범한 우리는 못 알아듣는데, 폭풍 가운데 걸어야 하는데, 폭풍 가운데서 일하시는. 그 소리가 딱 박히니까, 아버지가 어마어마한 감동 가운데 있다가, 아따 저 녀석 하신 것이다.
여러분들은 전체 하나님의 노래 가운데 하나를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꼰대는 그런거 별로 상관 안 한다. 내가 누군지를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이 땅에서 뭐하던, 뭘 먹고 살 것인지, 잘 먹고 잘 살 것인지에만 관심이 있다. 내게 고유한 구멍의 크기가 있는데, 그것에 따라서 내가 내는 소리는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유일한 소리이다.
그것을 페라고 한다. 5782년에 80에 해당하는 것을 페라고 한다. 우리는 나만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있다. 불평하고 불만하는 것은, 이 하욤, 우주의 소리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쉬 리 콜이 아니라, 나는 관현악단의 한 부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에서 단독자로, 내 소리를 내겠다는 소리이다. 단독자로 내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소리를 내겠다는 것이다.
사람이 진실한 자기가 드러날 때는 바로 이 때이다. 티슈리월에 우리는 내가 진짜 아담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티슈리월에 나는 예쉬 리 콜 하면서 노래를 하게 되어있다. 내가 맞느냐, 네가 맞느냐 시비를 가리는 것, 선악을 따지고, 논쟁하고, 논증하려고 하는 것은 선악의 지식나무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노래라고 하는 것은 스토리랑 비슷하다.
우리 정원이가 오늘 아침에 노래를 했다. 바옐레크 토라포션 말씀을 전하면서, 일이 너무 힘들고, 똥을 푸러 가자고 했는데, 그만큼 힘든 일인 줄 알았지, 진짜 똥을 푸러 가는 일인 줄 상상을 못했다고 한다. 똥통 속의 모터를 고치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나한테 왜 이렇게 힘든 일을 시키느냐? 내 인생은 왜 그러냐? 정원이는 그것으로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았다. 고 아버지는 나한테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것이냐? 최 장로님은 왜 그러시는 것이냐? 그러지 않고, 이것을 스토리로 만들어서 내 속에 나는 아버지의 갈망을 이루어드리고자 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내 욕망을 쫓고 있었다. 라고 하면서 이것을 스토리로 우리에게 이야기했을 때, 우리 모두는 울었다. 거기서 누구누구의 잘잘못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최 장로님은 왜 이렇게 힘든 일을 시키느냐?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고, 아무도 정원이편을 들거나, 고 목사님 편을 들거나 하지 않았다.
어떻게 교회에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할 수 있느냐? 정원이가 만약에 그것으로 이 교회는 사랑이 없고, 나를 부려먹기만한다, 이렇게 논증을 했다면, 그것도 선악의 지식나무에 의해서 또 맞는 소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원이의 삶은 담에 갇혀서, 노래하지 못하고, 거기서 끝나버렸을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 한 철을 사는 짐승이 되어서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래를 한다.
우리는 누구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스토리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지원이가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한다. 저는 왜 그래요? 왜 그렇게 생겨먹었어요? 왜 이렇게 자꾸 아버지가 가르쳐주는대로 이 문제를 자꾸 들고 나오고, 이렇게 생겨먹었냐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이게 어리석은 질문인 것 같지만, 나를 찾아가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것은 어디서 배운 질문도 아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이고, 나는 왜 그러는 것이냐?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냐면, 너는 르우벤이라 그렇다고 했다. 감각을 가지고, 물질을 가지고, 부정적인 영역을 형성해서 거기서 긍정으로 넘어간다. 모든 사람들은 어둠에서 빛이 나는데, 너에게 있어 어둠이란,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영역이다. 그래서 너는 유난히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의해서 어둠을 형성한다. 거기에 집착하고, 좋아하고, 그게 커진 다음에 빛으로 나가게 된다. 우리 지원이는 정말 위대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가족을 돌볼 수 있는, 이 세상의 물질, 돈, 감각을 사용해서, 영적인 하나님의 가족을 돌볼 수 있는 위대한 자가 될 것이다. 그 Destiny 때문에 너에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것을 스토리라고 한다.
못난 것. 내 제자가 되어서, 이 ㅁㅊㄴ아. 이런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즉각적, 감각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관념을 빌려다가, 이런건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야, 물질을 사랑하는자야, 성도답지가 않아, 제자답지가 않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관념을 빌려다가, 물질주의자, 황금만능주의자, 돈을 사랑하는 자, 주의를 갖다가 판에 박은듯이 찍어내는 것은 누구나 한다. 감각만 있으면 다 한다. 그런데 우리는 노래를 해야한다. 이 노래를 가르치기가 어려운 것이다.
만약에 우리 속의 에프라임이 노래를 배우기를 실패한다면, 우리는 큰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 이 담을 넘는 노래를 우리 속의 에프라임이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완전히 꼰대가 되어서, 우물 안의 열매가 최고의 열매인 줄 알고, 그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그 구멍에서 Ego, 단독자의 그 괴물같은 이상한 소리만을 낸다. 도저히 그 전체 관현악단에서 끼워줄 수 없는 괴상망측한 소리를 낸다. Ego의 숨결로 내는 그 소리는 우리의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다. 우리는 이 티슈리월에 반드시 노래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그래서 에프라임은 모양대로 역사하면 특별히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Ego의 구멍을 많이 만든다. 거의 자기 질문 속에서, 자기 소리를 내는데 빠져들어가기가 쉽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자기 질문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 조차도 자기 중심적으로 하기가 되게 쉽다. 그래서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옳을까? 그 사람은 내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 이런 자기 중심적인 생각 속에서 나오는, 사랑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무엇인가 상처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강해지고, 자기 중심이 되는 그런 소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티슈리월에 자기 중심에서 나와서, 그 두려움에서 나와서, 주님의 소리 가운데로 뛰어들어야 한다.
신31
22 그러므로 모세가 그 날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쳤더라
모세는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처음에 모든 인간의 길은 똑같다. 다 악한 경향성으로 출발한다. 어려서부터 악한 경향성, 야짜르 라아로 출발한다. 그래서 모세는 악한 경향성, 이기적으로 살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21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생각하는 바란, 야짜르 라아이다. 그런 경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기울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악한 경향성으로, 이기적으로, 우선 살아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22 그러므로 모세가 그 날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쳤더라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친다. 노래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바옐레크에서 여러분들이 배울 것은 노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노래는 누가 배울 수 있느냐? 누가 할 수 있느냐? 토라에 613번째의 마지막 계명은, 노래를 쓰는 것이다. 이 노래를 배우는 것이다. 노래를 써서, 배우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다 모세와 같이 노래를 쓸 줄 알아야 한다. 노래를 쓰는 것은 하늘이 제일 기뻐하는 것이다. 나의 편견, 관념, 생각 속에 갇혀있지 않고, 내 중심이 되어서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단독자가 되어서 왜 나한테 이랬냐, 저랬냐를 하지 않고, 그런 사람은 절대 노래를 쓸 수 없다. 그것은 노래가 아니다. 누가 나한테 겁나게 잘해줬더니, 나한테 잘해준 저 사람은 최고의 사람? 나한테 잘해줬으니까. 이런건 노래가 아니라, 구역질나는 소리이다. 그런건 스토리도 아니다. 나는 저 사람이 미워. 왜? 나한테 못하니까? 무시했으니까? 이건 노래가 아니라, 그 소리들은 다 짜증, 아우라, 화, 소리지름, JR, 이런 것으로 표현된다. 노래를 쓸 줄 알아야 한다. 왜? 여기에 Connect 되어야 한다. 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שׁר 슈르 : 관찰
이 전체 가운데서의 하나로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나한테 잘했냐, 못했냐가 아니라, 전체 가운데 한 파트로 오는 것을, 내 삶에 도움이 되고자가 아니라, 전체 가운데서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으로 왔음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관찰하지 못하고, 매일 나한테 어떻게 했냐, 내가 원하는 것을 해줬냐, 안 해줬냐를 보기 때문에, 노래라는 것은 자기 중심을 떠나서, 관찰할 수 있는 사람, 나를 벗어나서, 나에게서 나와서, 지구에서 나와서 지구를 관찰하는 사람이 노래를 쓰는 것이다.
모세는 이 노래를 써서, 오늘 그 날, 그날을 베하욤이라고 한다. 하욤 속에서 노래를 쓸 수 있다. 어느 노래도 내 안경으로 쳐다보는 것이 아니고, 내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욤 속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노래를 쓸 수 있다. 그 사람을 향한 노래를 쓸 수 있다. 하욤 속에서 수완이를 바라본다면, 수완이를 향한 노래를 부를 수가 있다. 저 아름다운 아들에 대한 노래를 부를 수 있다. 하욤 속에서 성민이를 바라본다면, 노래를 부를 수 있다. 헬스장 끊어놓고도 세번밖에 안 가는?? 이것은 노래라고 하지 않는다. 하욤 속에서, 전체 속에서, 노래를 할 수가 있다.
아쉘은 존재를 다루기 때문에, 디테일하고, 구체적인 것을 따지면 존재를 다룰 수 없다. 그래서 디테일하고, 구체적인 것에는 약하다. 존재를 위해서라면, 과감하게 구체적인 것을 다 버린다. 그런데 우리 여진이는 그렇지 않다. 디테일한 것을 따진다. 아주 구체적인 것을 상승시켜서, 전체를 이롭게 한다. 이게 단 지파의 특징이다. 구체적인 것, 부분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만들어서, 전체를 이롭게 한다. 여진이가 성민이를 사랑하는 방법은, 아주 부분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최고의 단계로 이끌어올려서, 성민이를 최고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여진이가 성민이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여진이는 항상, 최고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헬스장 끊어놓고 세 번 밖에 안 가는 허접한 인간이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최고의 단계로 이끌기 위해서 지적하고, 총을 쏘고, 부분 부분을 가장 최고의 단계로 올리는 것이다.
만약에 성민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여진이의 행동을 전체 속에서 단의 관점, 데스티니를 가지고 태어났고, 우리 몸 안에서 부분부분을 이끌면서, 전체를 이끄는 데스티니를 가지고 태어난 것을 모른다고 한다면, 성민이는 절대 여진이를 노래 할 수가 없다. 나의 부분을 그렇게 교정하고 이끄는 여진이의 손길을 뿌리치고, 나를 그런 놈으로, 무슨 소리만 하면 아쉘은 그래 난 그런 놈이야, 쓸모없는 놈이야, 가서 죽어버릴래, 거의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나타났다. 말씀준비하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나 그런 놈이래요. 하는 것이다. 쓰레기 좀 갖다 버려달라고 해도, 그걸 가지고 난 쓰레기도 안 버려주는 놈이야. 이웃집 남자같지 않지? 그래 이웃집 남자랑 살아라. 이게 아쉘이다.
아쉘은 모든 것을 전체, 존재로 가져간다. 하나의 실수를 이야기했는데, 그것을 전체로 가져간다. 왜냐하면 전체에 대한 부르심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하욤 안에서 바라보게 된다면, 노래할 수가 있다. 그래서 제가 여진이를 노래하고, 단은 그래서 그런 것이야. 성민이를 노래하니까, 그렇게 죽을듯이 하더니, 둘이 또 헤헤 거리면서 쏘카 빌려서 놀러갔다. 이 노래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우리가 이기적일 때, 자기 중심적일 때, 절대 노래를 할 수가 없다. 하욤, 전체 안에 있지 않으면, 여기에 접속되지 않으면 절대 노래를 할 수가 없다. 괴상한 소리만 내는 것이다. 얘가 나한테 그렇게 했다는둥, 도저히 시시비비는 가려질 수 없다.
오늘 첫 티슈리월, 5782년 첫 샤밭에 주님이 가르치시는 노래가, 여러분들의 노래가 되시길 축복한다. 여러분들 평생에, 영원토록 노래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한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게 아니라, 하욤 속에서 노래를 쓰고 배우는, 노래를 불러주는 아름다운 여러분 되시길 축복한다.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노래를 불러줄 수 있고, 그 노래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수많은 재앙 속에서 살아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살아난다
* 기도
노래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란다. 이 땅에서 조그마한 지식 가지고 늘 맨날 판단하고, 정죄하고, 시시비비 가리느라 좋고, 나쁨 가리느라, 그런 소리를 내면, 진이 빠져 죽는다고 한다. 그 종말이 정말 끔찍하게 된다. 그런 자들은 바깥 어두운데서 이를 가는 소리밖에 내지 못하게 된다. 노래하는 자가 되시기 바란다. 여러분들에게 있는 그 구멍으로 아름다운 소리가 나온다. 하나님의 소리가 나온다. 그 노래하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늘 하욤 안에서 노래를 쓰고, 노래를 가르치는 자들이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 내 사랑하는 사람을 노래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 사랑하는 지체들을 노래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들을 노래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교회 안에 시와 찬미의 소리가 가득하게 되길 기도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노래 중의 노래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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