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배解配
김혜천
오늘같이 바다 우는 날이면
잠복기를 벗어난 기억이 속곳을 풀어 헤친다
정약전丁若銓은
검은 섬 깊숙한 곳에 초가를 짓고
하얗게 육탈된 모래 위에 물고기 배를 따
대양을 헤엄치던 죄상을 낱낱히 밝혔다
너는 무엇으로 배를 불려 고래가 되었느냐
너는 어찌하여 두 개 좆을 함부로 굴려 홍어가 되었느냐
너는 누구의 등을 처 새우가 되었느냐
무너져 내린 아수라장(을) 모른다 도피하지 않은 죄
죽어가는 아이를 안은 어미의 신끼로 폐허를 복원한 죄
화인맞은 피부는 감각이 없다는 걸 모른 죄
칠흑의 유배지 십오 년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불쑥거리는 대서사
이제, 놓아주어라
네가 바닥을 박차고 올라 내지른 외마디는
네가 모래에 이긴 핏물은 한 송이 푸른 꽃이 되었다
항구를 떠나는 빈 배
(대양을 향하는) 해배의 깃발이 펄럭 인다
열차는 떠나고
역무원도 없는 한 겨울 역사
방향 잃은 바람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넌 채로
행간에 몰입하는 사이
설국 행 열차는 섰다가 떠나고
허기진 길고양이 한 마리
울먹이는 레일을 따라 달린다
아하
살아오면서 아차 하는 사이
놓쳐버린 삶이 여기 또 있구나
차표는 4할이 잘려 나가고
생은 6할이 잘려 나갔구나
두어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어둑살 짙은 역사 주변
저항하듯, 환하게 불 밝힌 편의점
컵라면에 물 부어 놓은 간이 탁자에
면발처럼 풀어지는 詩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