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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端의 追憶 #124, ‘부남 노영구’ 에 대한 小考
노광공의 차남으로 신분을 세습(世襲)받아 겨우 27세의 어줍잖은 청년으로 세칭 동방교의 2대 교주가 된 노영구는 신사생 뱀띠이니 1941년생이다. 평소 자기 아비의 이단사이비 교주 행각에 대하여 적잖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당시의 대기자들은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노영구가 언제부터인가 '부남’이라는 호를 지어 사용하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부남’이라는 호는 사용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호가 지어 졌는지, 누가 지어주었는지 그 내력도 알 수가 없다. 박정희 대통령이 호를 하나 가지도록 고령박씨 문중에서 몇가지 호를 지어 올렸는데 ‘박정희’라는 이름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지 호는 무슨 호냐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는데 어줍잖은 노영구는 ‘부남’이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던 모양이다.
당시 노광공교주의 두 아들 노영도와 노영구는 사실상 노광공 창업교주와 사주목사, 사주장로의 눈 밖에 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 아들 노영도는 바람둥이요 작은 아들 노영구는 발음도 어눌하고 시원찮아 어줍짢은 청년에 불과했다. 오히려 아버지의 교주 행각에 반항심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각 대기처(천국을 가기위해 이 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 에 산재해 있는 연단선님들과 대기자(가족과 생이별하고 무단가출해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세칭 동방교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신도들을 통칭하는 동방교의 은어-隱語) 들에게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모르겠다고 도망가라고 회유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성령 받았다고 나서면서 교주의 아들이라는 후광을 업고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사주(四柱)목사인 정재덕 요나단목사는 쫓겨나게 되고, 양학식 베드로목사는 형무소를 나오면서 바로 잠적해 버렸고, 말께나 하고 억세고 다루기 힘든 중간간부들은 교묘한 방법을 동원한 2대교주 노영구와 새롭게 형성된 그 주변 인물들의 지략(?)으로 세칭 동방교를 떠나가게 된다.
(이단의 추억 # 59, 한창 시끄럽던 그때 중에서)
노광공의 장남 노영도는 경축생 소띠로 1937년생이 된다. 장남 노영도가 세칭 동방교의 교주 자리를 물려받지 못하고 왜 차남인 노영구가 물려 받게 되었을까... 현존 세칭 동방교의 신도들은 의문을 가져볼만 하다. 연구 과제로 삼아 한번 파들어 가보기 바란다. 후일 장남 노영도를 옹립하려는 나이많은 구성민들의 소식도 들려오기는 했지만...
창립교주 노광공이 1967년에 당뇨합병증으로 피골이 상접한채로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으니 노영구가 세칭 동방교의 2대 교주 자리를 꿰 차게 되었을때는 27세의 나이가 된다.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어줍잖은 청년 노영구, 어눌증이 있어 발음도 시원찮고 빈상이었던 그를 우리는 ‘아브넬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추종하고 있었다. 눈까풀에 뭐가 씌어도 여사 씌운 것이 아니었다.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의 세뇌가 그렇게 무서웠던 것이다.
2대교주가 된 차남 노영구는 내세울 만한 풍채도 아니고 생김새도 빈상에 가까운데다 눈꺼풀은 늘 껌뻑껌뻑 거렸다. 말을 할 때의 음성도 이상했고 발음 자체가 어눌한 눌변(語訥症-어눌증)이라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억센 세칭 동방교의 간부들을 다스리고 세칭 동방교 전체의 조직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행적이나 카리스마는 전혀 없었다. 대구에서 당시 줄만 서면 들어가는 모 대학을 다니긴 했는데 리포트를 쓸 줄 몰라서 대신 써 주었다고 세칭 동방교 목사인 누군가가 늘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단의 추억 # 12, 김인경 입다목사 중에서)
노영구의 기도자세는 좀 특이하다. 세칭 동방교에서 신도들의 기도하는 자세는 성화 속에 그려진 어린 사무엘의 기도 자세를 연상하면 된다. 양쪽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합장하여 가슴에 모으고 다소곳이 고개를 약간 숙이고 기도를 하는 그런 자세다. 그런데 2대교주 노영구는 좀 특이했다. 그는 무릎을 엉거주춤 세운 자세로 두 손을 합장하여 가슴에 모으고 고개를 숙이지 않고 머리를 반쯤 하늘로 향하여 눈은 감은 듯 만듯, 속눈썹을 달싹달싹하면서 입을 반쯤 벌리고 입술을 움직거리기도 하고 가끔은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는 모습이다. 위를 쳐다보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기도 하고 위에서 누군가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듯한 모습으로 옆에서 보면 꼭 무슨 신들린 모습이다. 그것이 성신이든 잡신이든 신이 들리지 않고서야, 그리고 그것이 이단이든 삼단이든 어찌 한 종교를 이끌어 갈 수 있으랴 싶기도 하다. 그가 보통 3-5분정도의 기도를 마치고 나면 꼭 무슨 지시를 받은 듯한 언행을 하곤 했었다.
(이단의 추억 # 25, 신생활이라는 것 중에서)
그것은 지금에 와서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대명천지 21세기 정보화 인터넷 시대에도 그들은 까막눈 당달봉사처럼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의 궤변에서 한치도 벗어날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지금은 옛날과는 다르고 그때는 지나간 일이라고 치부하면서 흑막을 가려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늘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검색만 해봐도 정보가 넘쳐나는데 말이다. 하기사 나이든 구성민들은 스마트폰이나 인터넷과는 담을 쌓고 사니 과거를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할아버지(교주 노광공)를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저 교단의 창시자 정도로만 알리고 구성민들 끼리만 창조주요 재림주라고 속닥거리고 있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그 ‘주’님이 노광공인 것을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고 있으니 가관중의 가관인 것이다. 잠복된 수많은 이야기들은 본 카페의 ‘이단의 추억’이나 멤버들의 기록, 댓글 증언들을 필독해 보시기 바란다.
대구에서 줄만 서면 누구나 들어가던 허접한 어느 대학, 그 대학에서 마저 리포트를 쓸 줄 몰라 누군가가 대신 써 주었다는 그 대학을 나오고 아비가 일구어놓은 동방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위도식하면서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어줍잖은 청년 노영구가 동방교의 교주에 등극(?)한때가 1967년, 겨우 스물일곱의 나이, 선교사라... 무엇을 선교했다는 것이었을까... 지금의 내 막내아들보다 한참이나 더 어린 스물일곱의 그를 우리는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다. 종교가 아편이라더니... 참 기가 막히는 미망의 시절이었다. 아브넬 노영구는 스스로도 민망스러웠던지 그는 언제부터인가 ‘선교사님’란 호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아브넬 노영구, 그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충성에 눈물겨워하는 손자 신도(성민)들이 살고 있는 곳, 한 인간을 신격화하고 말세를 협박하면서 허황된 내세의 영화를 다 줄 것처럼 유혹하여 수없이 긁어모은 이 땅의 재물이 부를 더욱 누적시켜 가는 곳, 그는 이곳 대한민국 안에서 사랑하는 손자(성민)들과 함께 동고동락함이 옳지 않았던가, 무엇이 두려워 그는 대한민국 실정법의 치외법권지역인 미국 땅으로 건너가 가족과 함께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안전한 곳에 몸을 숨기고 한국의 세칭 동방교 조직을 쥐락펴락 원격조종하면서 그 돈으로 낯선 땅에서 무슨짓을 해도 아는 이 없는 은둔의 삶을 영위했을까? 가히 의문이 아닐 수 없다.
(異端의 追憶 # 97, 어떤 추모사, 시(詩) 한 수를 접하는 단상(斷想) 중에서)
아브넬 노영구는 젊은 나이에 할아버지라는 호칭이 부담스러웠던지 언제부터인가 ‘선교사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고 미국으로 도피성 출국을 하여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한국의 세칭 동방교 조직을 움직이다가 그곳에서 파킨슨병에 발목잡혀 아까운 63세(만62세)의 단명(短命)으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 단명(短命)이라고 함은 환갑(還甲)의 수(壽)를 겨우 넘기고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들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여기에도 단명(短命)의 단(短)자에는 하늘천(天)자의 첫 획 위에 삐침을 둔다. 그리고 그 옆에 콩두(豆)자를 붙인다. 인간의 주제를 모르고 하늘의 뜻을 거스리는 자는 결코 이 땅위에 그 명(命)을 오래 두지 않는다는 뜻일까... 표의문자 한문의 뜻이 참으로 절묘하다. 그리고 그는 한줌의 재로 한국땅에 돌아오게 된다. 성민(신도)들의 죄 때문에‘이래 할아버지’(노광공)까지 잡아먹고 그것도 모자라 ‘아브넬 할아버지’(노영구)까지 잡아먹으려느냐고 성민(신도)들을 닦달하더니, 절망한 구성민들은 한줌의 재로 돌아온 노영구의 영정앞에 300배를 올렸으니 이것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현대판 몬도가네 이야기인지 예수교 장로회라는 간판을 붙여놓은 기독교의 이야기인지 할말이 없어진다. 그 이후 후계자를 명확히 세우지 못했던 세칭 동방교는 현재 구총회니 신총회니 불법연대니 하면서 서로 자기네가 이단의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우스꽝스러운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동방교의 연수원 출신 어느 신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노영구가 변화하던 2000년대 전 수도자 목회자 모여 집회를 했을것이고 뼛속 성민들은 지교에 모여 300배 이상씩 다 드린걸로 안다.
나의 동방교 추억은 근신 방비 특별함 등등 지금보면 망상에 사로잡히기 딱 좋고 실제 망상에 사로 잡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두손 모으고 눈감고 수많은 시간 마음으로 기도를 해도 기도를 했는지 망상에 사로잡혀 자기만족 자아도취에 빠졌는지..
노영구는 어떻게 2인자가 되었을까?
그를옆에서 간호하고 추종하던 2인자들 박사들 간부들은 정말로 노영구를 더 나아가 노광공을 믿었을까?
(본 카페의 글, 나의 청춘 동방교를 추억하며.. 3 중에서)
동방교... 좁은길.. 좁은길.. 동방교.. 분명 다른 이름인데 같은 곳이다. 좁은길은 성경에도 좁은문으로 들어가라고 하니 더 기독교적인 느낌이고 내가 어릴때도 좁은길 이라고만 했던거 같다. 좁은길이라고 적을땐 아직도 뭔가 더 느껴지는게 부르는 언어 자체에도 느낌이 많이 다르다. 그들은 그곳을 좁은길이라고 부른다. 연수원 부천 여우고개 삼거리 고가도로 쪽 한빛 수도원에 한달에 한번 수도자가 모이면 망상에 잡힌 사람 선교사님이 묵시록으로 나타났다는 사람, 가끔 신앙과 자기망상에 빠져 그런 일반인들 보기에 미친 사람들도 있었다. 종교적으로 영적으로 사가 틈타느니 등등 애기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냥 신자 말고 광신자 골수분자 수도자 성민들은 평범한 정상인은 아니리. 나도 정상은 아니였다 그런 나의 모든것을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이래 조부님이 계셨으니 더 빠질수 밖에.. 성복입고 성가1장 부르고 단체로 배례하고 노영구 3주기때인가는 엄청 크게했다 연수원에 전 수도자 목회자 한 200명 모였던거 같다 김동일(김박사)가 안수하고.. 그런 김박사도 쫒겨났으니..
(본 카페의 글, 나의 청춘 동방교를 추억하며.. 4 중에서)
나는 수많은 고민과 혹은 배도자로서 중상모략자로서 동방교의 수도자이자 목회자였던 전직 동방교(좁은길)의 성민으로서 글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저는 모태 동방교 입니다 부모님이 동방교를 믿었기 때문에 어려서 부터 교회를 나갔고 고등학생 아니, 수련생 입교후 2000년대 이후에야 동방교가 세상에서 공식 사이비로 인정 받는다는것을 알았습니다
2000년대 수 많은 젊은 청년부 들이 배도를 했지요. 안에서는 세상 사람과 연애를 못하게 했고 죄로 여겼으니깐요. 그래서 안에서는 아마 총회에서 대충 맞는사람 몇팀 불러놓고 너희 부부야 라고 하면 받아들이거나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점 찍어준 부부인데 인간적인 판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죠.
선교사님 아브넬 할아버지께서 하늘의 지시를 받아 맺어준 인연도 이혼을 하더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좁은길 두개로 나뉘어 졌는데 세계 선교회와 한국 총회로 나뉘어졌죠?.
서로 성령을 받았고 다른 쪽에 사탄이 씌었다고 말하더군요
4대(사주) 양학식 정재덕 등.. 갑자기 생각이 안나는데 남자 2 여자 2, 정재덕 목사님인가는 선교사님 약 타고 죽이려고 했는데 지금은 전선에 꿩인가 태어나고 환생해서 뱀으로 태어나고 300년 뒤에나 스님으로 태어난다고 하네요
(본 카페의 글, 믿지못할 이야기들, 나의 청춘 동방교를 추억하며... 중에서)
첫댓글 저는 이리교회에서 입교하여 안양교회, 서울 성린교회, 인천교회를 거쳐서 부산장로교회- 나중에 문현성안, 부산한빛교회로 개명-에서 2008 년까지 근 34년을 다니다가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단임을 깨닫고 나왔지요. 제 동기로는 김동길, 배경주, 채문태, 강병로 등의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동방교에 속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열이 받고 화가 납니다
녜, 그러셨군요.
늦게나마 이단임을 깨닫고 나왔으니 대단한 용기를 가졌습니다.
새로운 지평을 참되게 열어가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남아있는 동기들이 안타깝네요~